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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은잔 테스트 (창 44: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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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잔 테스트 (창 44:1-34)

* 생명을 건 마지막 연설

얼마전 어느 일간 신문에 "500만을 울린 마지막 강의"라는 토막기사가 실렸습니다. 미국 카네기 멜런대학교 랜디 포시(47세, 컴퓨터공학) 교수의 이야기였습니다. 의사로부터 말기 췌장암이란 판정을 받고 얼마남지 않은 짤막한 시간을 보내며 정성을 다한 그의 마지막 강의 동영상이 인터넷을 통해 퍼져 500만 명이 눈물로 시청을 한 겁니다.(2007년 9월)

랜디 포시 교수는 자신의 피를 찍어 글을 써 내려가듯 자신의 제자들에게 자신이 살아온 삶의 철학과 인생의 원리를 토해내고 있었습니다.
·물고기가 물을 따라 살 듯이 자신의 꿈을 따라 인생을 즐기며 사십시요.
·꿈이 절망의 벽에 부딪혀도 꿈을 포기하지 마세요.
·가장 좋은 순금은 쓰레기층을 지나 밑바닥에 있습니다. 쌓인 쓰레기를 치우는 일을 힘들어하지 마세요.
·주변의 사람들과 공동체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고 감사를 적극적으로 표현하십시요.
·준비된 사람에게 꿈은 그 기회를 제공합니다.

그는 강의 말미에서 "나는 나의 이 마지막 강의의 청중 가운데 사랑하는 아내 제이 포시 그리고 사랑하는 자녀들 - 다섯 살 딜런, 두 살 로건, 이제 갓 태어나 아비의 얼굴을 모르고 자라갈 한 살 클로에를 포함시키고 싶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의 강의는 재치가 넘쳤지만 보는 이들은 눈시울을 붉히며 강의를 듣곤 합니다.

오늘 본문 창세기 44장에 생명을 건 또다른 감동적인 한 연설이 나옵니다. 사랑하는 동생 베냐민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걸고 토해내었던 유다의 변론입니다.

I. 야곱의 내려놓음

오늘의 본문은 그 유명한 은잔테스트 사건입니다. 그래서 설교 제목은 「은잔 테스트」입니다.

사우나실 옷장문을 열면 "맡기시지 않은 물건은 책임지지 않습니다."하는 안내문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맡기지 않은 것은 책임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주인 삼은 모든 것" 내려놓으면 하나님이 맡아 해결해 주십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 바로 앞장에서 야곱의 "내려놓음"으로 대단히 어려웠던 상황이 급반전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무엇을 내려놓았습니까? 너무나 소중하여 가슴에 품고 살고 싶었던 막내 베냐민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은 것입니다.

야곱에게 있어서 베냐민은 어떤 존재입니까? 야곱이 먼저 얻은 아내는 레아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라헬을 본 부인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만을 사랑했습니다. 12아들 가운데 사랑하는 아내 라헬에게서 얻은 아들은 둘. 요셉과 베냐민이었습니다. 그런데 라헬이 베냐민을 낳다가 죽습니다. 요셉이 형님들을 만나러 갔다가 짐승에게 찢겨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베냐민 하나입니다. 사랑하는 아내 라헬에게 쏟고 싶었던 사랑, 요셉에게 집중되었던 사랑이 모아 모아져 베냐민에게 흐르고 있었습니다. 베냐민은 막내였지만 실제적인 상속자였습니다. 베냐민은 야곱 자신의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흉년이 들어 양식을 구하러 애굽에 갔다 돌아온 10형제들이 이번엔 막내 베냐민을 데리고 가야 애굽의 총리도 만날 수 있고 양식도 구해 올 수 있다고 합니다. 야곱은 딜렘마에 빠졌습니다. 베냐민을 붙들고 있자니 식솔들이 모두 굶어 죽게 생겼습니다. 식솔들을 생각하고 양식을 사오자니 사지에 베냐민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딜렘마에 빠진 야곱이 유다의 설득을 듣고 결단을 내립니다. 창세기 43장 14절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 사람으로 너희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돌려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지금까지는 내려놓치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내려놓으니 전능하신 하나님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결단합니다.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내려놓았습니다.

이 야곱의 내려놓음으로 사건의 위대한 반전이 일어납니다. 12형제가 한 자리에서 만나게 됩니다. 요셉과 베냐민 두 형제의 감격적인 만남을 가져옵니다. 하나님의 섭리, 역사가 아름답게 펼쳐집니다. 아브라함이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내려놓을 때에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 준비하시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삭개오가 재물을 예수님께 내려놓자 그는 진정으로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야곱의 내려놓음으로 출애굽의 전초전 입애국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7년 흉년 가운데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 속에서 소중한 가족들이 만나 복된 삶을 살아가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II. 은잔 테스트

애굽에 들어간 베냐민을 포함한 11형제는 총리가 된 요셉의 집에서 행복한 식사와 큰 파티를 즐기게 되지요. 물론 아직 요셉이 자기의 신분을 밝히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파티가 끝난 다음날 아침 형들에게 벌어진 마지막 시험 소위 말하는 「은잔 테스트」사건이 있었습니다. 길을 떠나는 11형제의 자루마다 양식을 가득 가득 담았습니다. 가져온 돈을 받지 않고 모두 자루에 넣어 되돌려 주었습니다. 이에 더하여 요셉은 베냐민의 자루에 은잔을 몰래 넣게 합니다. 베냐민을 도둑으로 몰아서 곤경에 빠뜨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가 하는 테스트입니다. 요셉의 은잔 시험이 너무 잔인하다고 느껴지십니까? 아무런 의미도 이유없이 그 형들을 괴롭히고 싶어 저지른 일이라고 생각되어지십니까? No. 20년간 쌓아왔던 잘못된 관계의 마지막 매듭을 풀고 싶은 요셉의 사랑의 전략이었습니다. 기대에 찬 소망의 전략이었습니다.

요셉이 복받치는 울음을 참고 울고 싶을 땐 옆방에 들어가 울고 나올지언정 자신을 아직 밝히지 않고 이런 테스트를 시도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여기 12형제는 하나님의 구원공동체였습니다. 선민 이스라엘을 세워가야 할 거룩한 씨앗이었습니다. 당시 구약의 유일한 교회였습니다. 하나님의 가족이었습니다. 여기엔 진정한 용서와 화해가 필요했습니다. 요셉이 형들을 진정으로 신뢰할 수 있어야 했던 게지요.

왜 하필 베냐민을 곤경에 빠뜨리는 시험을 내었어야 할까요? 20년 세월 형들이 아직도 변화되지 않았다면 자루에서 은잔이 나온 베냐민을 윽박치르고 책망했겠지요. 그리고 궁지에 몰린 베냐민 혼자 남겨두고 줄행랑을 쳤을 것입니다. 이 테스트 하나로 이 형들이 진정으로 변화된 것인가? 아버지에 대한 저들의 생각이 무엇인가? 자신을 죽이려 했던 그 옛날의 사건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또다른 자신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는 베냐민을 저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한꺼번에 모든 것을 파악할 수 있는 기가막힌 테스트였습니다.

III. 요셉이 은잔으로 과연 점을 쳤을까?

이 사건에 성경적인 난제 하나가 있습니다.

베냐민의 자루에 숨겨진 이 은잔이 5절 "점치는데 쓰는 것"이라고 했고 15절에서는 요셉이 직접 "나 같은 사람이 점을 잘 치는 줄을 너희는 알지 못하였느나?"고 합니다. 그렇다면 요셉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애굽 풍습에 물들어 점이나치고 살았단 말인가? 의구심을 갖게 됩니다.

당시 애굽의 마술사들이 은잔으로 점치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은잔에 물을 붓고 그 물의 움직임에 따라 점괘를 말하기도 하고,
은잔에 물을 붓고 그 물에 금은보석을 떨어뜨려 관찰하기도 하고,
은잔에 물을 붓고 그 위에 올리브 기름을 띄워 기름 모양을 관찰하기도 했지요.
고대에 어느나라든지 이런 미신적 풍습이 있었습니다.

우리 할머니는 아침에 일어나 세수하시고 나면 화투장으로 하루 일과를 묵상하곤 하셨습니다. 이것 저것을 맞추다가 2월 매조가 맞아 떨어지면 님이 오시려나보다. 4월 흑사리가 맞아 떨어지면 오늘 나가야 되겠다. 국수 대접 받겠다야. 12월 비가 맞아 떨어지면 배가 오시려나 했습니다. 어린 내가 봐도 하나도 맞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매일 아침 할머니는 화투로 아침 큐티를 하곤 하셨지요.

성경은 여러 곳에서 요셉이 하나님을 잊지 않고 있었음을 증언해 주고 있었습니다. 바로의 꿈을 해석할 때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셨고 하나님이 하시고 계시며 하나님이 하실 것"이라고 대답합니다.(41:16) 요셉은 형들 앞에서 "나는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선언합니다.(42:18) 바로 조차도 요셉은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이라고. 심지어 요셉 집안에 있는 청지기들조차 하나님을 증언(43:23)하는 걸 보면 오히려 애굽의 풍습에 물들어 살았다기 보다는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간증하며 증거하며 복음을 전하며 살았다고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이 은잔은 간단한 것 같지만 요셉에게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물건인데 베냐민이 훔친 것이라는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 뿐입니다. 때문에 이것은 간단한 사건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한 말이지 요셉이 직접 점을 치며 살았다고 단언할 필요가 없습니다.

IV. 하나님이 우리 죄를 찾아 내셨다

요셉의 작전에 따라 베냐민의 자루에서 이처럼 귀중한 은잔이 나옵니다. 이때 11형제가 어떻게 말합니까? 우리는 적어도 남의 물건을 도둑질하지는 않습니다. 그런 일이 있으면 우리 모두 종이 되겠다고 큰소리 치다가 그들은 다시 요셉에게로 끌려갑니다. 바로 이때 아버지에게 목숨을 담보로 하고서라도 베냐민을 다시 데려오겠다고 설득하던 유다가 나섭니다. 유다가 한말이 16절부터 나오는데 이 말은 시작부터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은잔이 베냐민에게서 나왔다면 다른 10형제에겐 책임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위기 상황속에서 유다는 그 옛날 무죄한 요셉을 죽이려하고 장사꾼에게 팔았던 죄를 고백했습니다. 여기에 대단히 중요한 두 단어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우리"라는 단어와 "하나님이"라는 단어입니다.

이번에 베냐민을 비롯한 우리가 은잔을 훔친 것은 물론 아닙니다. 우리가 할말도 없습니다. 설명할 길도 없습니다. 정직을 보여줄 방법도 없다고 고백합니다. 하지만 베냐민의 일로 "우리가" 함께 책임을 지겠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함께 책임을 지겠다! 이 모습은 그 옛날 형들의 모습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종들의 죄를 찾아내셨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지금 그 옛날의 죄로 인해 자신들을 정죄하고 있다고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일이 이처럼 설명할 수 없도록 꼬이게 만든 것이 하나님이 하셨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더 이상 죄를 숨기거나 도망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동생 베냐민이 궁지에 빠졌는데 자신들만 도망가지 않겠다고 결의에 찬 각오를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때 요셉은 다시 한번 베냐민을 몰아 세웁니다. "너희 형제들이 다 종이 될 필요는 없다. 은잔이 나온 베냐민만 종이 될 것이다" 이쯤되면 유다에겐 변명거리가 생긴 것입니다. 아버지에게 돌아가서 우리가 최선을 다했는데 옹고집 총리에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모든 것은 다 했다고. 그러나 이 순간 오히려 유다의 감동적인 웅변이 계속되어집니다.

V. 위대한 유다의 웅변

얼마전까지만 해도 모든 것이 순탄하게만 보였습니다. 수레마다 양식을 가득가득 실었습니다. 가지고 왔던 돈은 돈대로 하사받았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11형제의 발걸음이 얼마나 가벼웠을까요? 동생 베냐민이 오길 잘 했다고 화기 애애한 웃음꽃이 만발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뭐가 어디서 잘못되었는지 훔치지도 않은 은잔이 베냐민의 자루에서 나와 모든 일이 뒤죽박죽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11형제는 청천벼랑으로 떨어지고 있는 느낌입니다. 이때 형제 공동체들이 정신적으로 병들고 건강하지 못했더라면 될대로 되라 포기했겠지요. 내일 곧장 사형을 당하는 일이 있더라도 우리가 무슨 잘못을 했냐고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을 것입니다. 아니면 요셉의 권위에 눌려져서 절망하고 낙망했을 것입니다.

이때 유다가 베냐민의 변호사로 나섭니다. 18절부터 마지막 34절까지 긴 연설은 구약 최고의 웅변으로 인정되는 본문입니다. 유다는 자신들이 스파이로 취급받은 사실, 시므온의 억울한 체로, 이번 은잔사건의 배후에 음모가 있음 등 상대방의 감정을 상하게 할만한 언급은 전혀 하지 않습니다. 듣는 이들의 마음을 울리고 가슴을 뜨겁게 하고도 남음이 있을 만큼 사실을 사실대로 차분하게 정리해 나갑니다. 힘이 느껴지는 어투로 변론을 이어갑니다. 자신들의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 아버지에게 있어서 베냐민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그리고 이번 사태에 대한 모든 책임은 자신이 지겠다는 결의를 보입니다.

18절 시작부터 대단히 감동적입니다.
"유다가 그에게 가까이 가서 이르되 내 주여 원하건대 당신의 종에게 내 주의 귀에 한 말씀을 아뢰게 하소서 주의 종에게 노하지 마소서 주는 바로와 같으심이니이다" 유다는 총리 요셉 앞으로 조심스럽게 나아갑니다. 당신은 주님이요 나는 종입니다. 죽고 사는 것이 이제 당신 손에 달려있습니다. 죽어도 좋으니 주의 귀에 한 말씀만 아뢰게 해 주십시요. 주는 바로 만큼이나 권위가 있고 힘이 있는 분 아닙니까? 총리 요셉의 발을 꽁꽁 묶어두고 연설을 계속해 갑니다.

유다의 이 탄원은 본문을 읽기만 해도 가슴이 뭉클해 옵니다. 유다는 눈물어린 이 탄원에서 베냐민이 은잔을 훔치지 않았다고 변호하지 않았습니다. 한번만 봐 달라고 비굴하게 빌지도 않았습니다. 구차한 변명으로 총리의 심기를 어지럽히지도 않았습니다. 이 짤막한 변호의 시간을 얻어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들 앞에서 그리고 총리 요셉 앞에서 문제의 핵심이 무엇인가를 정확하게 간파하고 그 문제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중심에 있는 것을 솔직하고 담대히 숨기지 아니하고 거짓없이 토해내고 있는 것입니다.

늙어가는 아버지를 더 이상 아프게 할 수는 없습니다. 막내 베냐민이 내 아버지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모릅니다. 아버지 생명과 막내 베냐민은 그 생명이 하나로 묶여 있습니다. 우리는 총리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내 아버지에게 설득하고 또 설득해서 베냐민을 이곳으로 데려온 것 뿐입니다. 이제 흔쾌히 그 아이를 대신해서 내가 종이 되겠습니다. 그 아이가 죽어간다면 내가 죽을 것입니다. 그 아이가 종이 된다면 내가 종이 되겠습니다. 무거운 댓가를 지불해야 된다면 그 아이를 대신해서 내가 대신 댓가를 지불하겠습니다. 유다의 변론은 당당하고 위엄이 있었습니다. 장엄하고도 요셉의 마음을 울렸습니다.

이러한 유다의 모습은 어린 동생 요셉을 시기하여 죽이려하고 장사꾼에게 팔던 그 형들이 아니었습니다. 가족공동체를 너무나 소중히 여기는 변화된 모습이었습니다. 어린 동생 대신 자신이 죽겠다고 생명을 걸고 중보기도에 나섭니다. 요셉을 잃고 슬퍼하며 울던 아버지 야곱의 모습을 다시는 재현할 수 없다는 효심이 배어 있습니다. 이 유다의 웅변은 하늘을 울리고 땅을 울리고 요셉을 통곡하게 했던 웅변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바로 한 절만 앞으로 가 다음 장을 넘기고 나면 요셉은 복받쳐 오르는 눈물을 감당할 길이 없어서 애굽 사람들을 행하여 소리칩니다. 나가라! 그리고 대성통곡 방성대곡하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VI. 구약의 예수 - 대속적 고난

이 은잔 테스트를 통해 요셉이 얻고 싶었던 답이 무엇일까요? 얼마나 지혜롭게 대답하여 이 위기를 극복하나 보자고 이 모험을 시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팔려와 죽음의 고비를 넘어 넘어 오는 동안 그의 형들이 어떻게 변했나 궁금했습니다. 베냐민을 자기가 빠졌던 죽음의 구덩이에 빠뜨려놓고 그 형들이 과연 변화된 성품과 변화된 사랑, 변화된 가족애를 보여줄 수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구약의 유일한 교회였던 야곱가족 교회안에서 함께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인지 요셉 자신의 가족을 야곱교회에 등록시켜 함께 살아도 좋을만큼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인지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이 은잔 테스트에 대한 유다의 대답으로 말미암아 은잔 시험은 A+ 100점으로 통과됩니다.

32절 33절을 보십시요.
"주의 종이 내 아버지에게 아이를 담보하기를 내가 이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돌아오지 아니하면 영영히 아버지께 죄짐을 지리이다 하였사오니 이제 주의 종으로 그 아이를 대신하여 머물러 있어 내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그 아이는 그의 형제들과 함께 올려 보내소서"

이 변론의 마지막 말 "담보"라는 말과 "대신하여"라는 말 속에 신구약 성경에 엄청난 신학적 주제로 발전해 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히브리어 "에라본"으로 된 담보라는 이 말은 신약성서 사도바울 신학에서 "보증이 되사"란 말로 우리의 구원을 보증하시는 성령을 일컫는 말로 사용되어지고 있습니다. "대신하여"란 말은 영어 atonement 구속, 대속이란 뜻입니다. 예수께서 우리의 죄값을 치루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자유케 하셨다는 신학으로 발전합니다. 옛날 노예 시장에서 노예의 값을 대신 치루시고 그 노예를 자유케 하셨듯이 주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죄 값을 치루시고 자유케 하셨다는 사상입니다. atonement = at(전치사) + one(하나) + ment(어떤 상태) 죄지은 그 사람의 처한 상태에 내가 대신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그 사람이 죽어야 될 자리에 내가 대신 들어가 죽는 상황을 말하는 것입니다.

유다의 이 말은 예수께서 내 죄를 대신하여 형벌을 받았듯이. 유다 자신이 베냐민을 대신하여 대속적 고난을 감당하겠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본문 유다의 변론속에 성령님이 계십니다. 그안에 대속적인 사랑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가 가득 담겨 흘러 넘치고 있습 니다.

유다의 변론을 통하여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내 손을 붙들고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나를 변호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우리는 읽어낼 수 있습니다. 내가 형벌 받아 지옥으로 떨어지고 있을 때에 내 손을 붙들고 예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매달려 변호합니다. 하나님 이 아이를 대신하여 내가 죽었습니다. 이 아이의 모든 죄짐을 내가 짊어졌습니다. 주여 이 아이를 살려주십시오. 내가 저를 대신하여 죽지 않았습니까?

유다가 오실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 된 것은 이 사건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죄지은 형제들과 요셉 사이의 불화를 씻고 화해의 제물이 된 사건이 이 사건입니다. 모두들 두려워 떨고 있을 때 유다는 자신이 희생하여 자신이 죽어 베냐민을 살리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그것은 곧 죽었던 요셉의 마음을 살린 것이었습니다. 오랜 세월동안 갈기갈기 난도질되어 찢겨진 요셉의 마음을 꼬매고 치료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깨어진 가족의 화평을 살려내는 순간이 되었던 것이지요.

유다의 이 위대한 헌신이 구약교회를 세우는 거름이 되었습니다. 오늘의 교회도 희생할 줄 아는 유다들에 의해 세워지고 있습니다. 헌신의 멋을 아는 유다들에게 하나님은 왕적 권세를 주십니다. 자신을 드릴 줄 아는 유다들에게 다윗의 가문에게 주셨던 축복, 리더십의 권세를 오늘도 교회에서 허락해 주십니다. 비전 채플도 이런 멋쟁이 유다들에 의해 세워질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교회마다 이런 복받은 유다가 있길래 그 교회가 아름답게 세워져 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이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한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한국교회 조금더 작게 당신의 교회, 아니 당신의 공동체, 당신의 사랑하는 사람 누군가가 베냐민처럼 위기에 빠졌다면 당신은 유다가 될 수 있느냐?
당신의 생명을 걸고 하나님과 세상 앞에 그를 변호할 수 있느냐?
주여 내가 담보가 되고 대신 죽어서라도 몸된 교회를 살리고 싶습니다. 내 형제를 살리고 싶습니다. 주여 내가 죽어 한국교회가 살 수 있다면 제가 부흥의 제물이 되어 죽기를 원합니다.
유다가 요셉을 울렸듯이 하늘을 울리고 세상을 울릴 수 있느냐?
오늘 우리 시대 복음전도와 중보기도가 힘을 잃은 것은 유다처럼 담보신앙, 대속적 결단이 없기 때문이 아닐는지요?

은잔 테스트 그것은 야곱의 10 형제들에게 주어진 시험이 아닙니다. 이 땅에 살아가는 오고 오는 세대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던져진 시험문제였습니다. 우리 공동체 나 자신에게 주어진 문제였습니다. 우리 모두는 그 시험의 답안지를 들고 언젠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류영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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