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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참 선지자인가? 거짓 선지자인가? (렘 14: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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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14:13~14

진심이 담긴 편지

요즈음 뉴스에서 따뜻한 이야기를 들은 지가 꽤 오래 된 것 같습니다. 세상에는 온통 아프고 힘든 이야기만 넘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엊그저께 라디오에서 보기 드믄 따뜻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지난 26일 서울지방지법 판사실에 편지 한 장이 도착했습니다. 서툰 글 솜씨와 비뚤비뚤한 글씨체, 틀려서 몇 번이고 지우고 고친 자국이 남은 이 넉 장짜리 편지에는 초등학교 4학년생인 김 모 양이 써 보낸 사연이 적혀있었습니다. 김 양은 이 편지에 불법 PC게임 도박장을 운영한 혐의로 기소된 아빠를 한 번만 용서해 달라는 간곡한 호소를 담아 보낸 것입니다. 김양은 "작년에 아빠와 엄마가 이혼한 뒤 아빠는 엄마를 대신해 밥과 빨래를 해줬다"며 "엄마를 꼭 데리고 오겠다던 아빠는 요즘 술을 마시고 눈물만 흘리고 있다"고 썼습니다. 김양은 또 "아빠가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지키겠다"며 "2학년 때 온가족이 놀러갔던 놀이동산에 다시 갈 수 있게 해 달라"고 간곡히 부탁했습니다. 이 편지를 받은 법원은 김양의 마음에 감동해 아버지 김 모 씨에게 실형을 선고하지 않고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 사회봉사 160시간을 선고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듣고 곧바로 이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해마다 연말만 되면 제 앞으로 수많은 편지와 공문들이 옵니다. 요즘도 연말이 다가오니 제 방에 가보면 날마다 산더미 같이 많은 우편물들이 배달되어 쌓여 있는데 대부분 자기네 교회나 단체를 도와달라는 호소가 들어있는 편지입니다. 그런데 그 편지들을 다 읽어볼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이 오기도 하지만 한 번 마음먹고 읽어봐도 솔직히 실망할 때가 많습니다. 너무도 의례적이고 상투적인 호소가 대부분이고, 때로는 나름대로 간곡한 호소를 담았지만 이 호소가 진실한 것인지 아닌 지 잘 구분이 안 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제 마음이 오염되어서 그럴까요? 어쩐지 진실성이 부족해 보이는 그 수많은 편지들을 보면서 저는 이 어린 김 양이 쓴 편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됩니다.

같은 편지인데 왜 이렇게 느낌이 다를까요? 사실 판사님 앞으로도 얼마나 많은 선처를 호소하는 편지가 배달되겠습니까만 왜 판사님은 유독 이 어린 소녀의 편지에 감동을 받고 아버지를 선처하게 된 것일까요? 왜 이 소식을 듣는 사람들은 "왜 판사가 공평하지 못 하게 편지 한 장 받았다고 선처해 주냐?"며 시비 거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을까요? 왜 저나 모든 사람들이 이 소식을 듣고 마음이 찡해지는 것일까요? 거기에는 진실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소박하고 서툴지만 아빠를 사랑하는 한 소녀의 진심이 담겨있는 사연이었기에 모두의 마음을 움직인 것입니다. 반면 저나 판사님이 받는 그 수많은 편지는 세련되고 논리적으로 쓰여 있지만 어쩐지 진심과 진실은 담겨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감동이 안 되고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것이지요.

이렇게 진심을 담은 메시지와 진심을 담지 못한 메시지는 정말 다릅니다. 진심을 담은 메시지는 비록 서툴고 듣는 사람 귀에 조금 불편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변화시키는 힘과 능력이 있습니다. 반면 진심을 담지 못한 메시지는 비록 듣기 좋을지라도, 멋지고 세련되게 포장되었다 할지라도 그 안에 진심이 없기 때문에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거나 변화시킬 능력이 전혀 없습니다. 아무리 겉으로 멋있고 좋은 말처럼 들린다 해도 그것은 거짓을 담은 거짓 메시지입니다.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

신학교 시절, <설교학>이라는 과목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말 그대로 어떻게 하면 설교를 잘 할까, 어떻게 하면 바르게 설교할까 가르치는 것이 설교학이라는 과목입니다만 설교학을 가르친 교수님은 수업 시간에 출석을 참 특이하게 불렀습니다. 보통 다른 교수님들은 매 시간 학생들 전체 출석을 부르는데 이 분은 한 사람 당 한 학기에 딱 한 번만 출석을 부릅니다. 그런데 그 출석을 언제 부를지 모릅니다. 주님 언제 오실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항상 깨어있어야 하듯, 그 교수님이 내 이름 언제 부를지 모르기 때문에 한 학기 내내 긴장하고 성실하게 출석을 해야 했던 것입니다.

또 한 가지 특이한 것은 그 교수님이 출석을 부르는 방법입니다. 한 학기에 딱 한 번만 내 이름을 부릅니다. 예고 없이 갑자기 말입니다. 그러면 그 학생은 자리에서 일어나고 교수님은 미리 알려준 성경 구절 세 개 가운데 한 개를 외우라고 시킵니다. 그 때 학생이 그 구절을 안 틀리고 잘 외워야 한 학기 동안 출석한 것으로 인정되는 것입니다. 만약 출석을 했어도 그 구절을 못 외우거나 틀리면 결석으로 간주되니 참 특이한 출석방법 아닙니까? 덕분에 저를 비롯한 모든 학생들은 한 학기 내내 긴장한 채, 세 개의 성경구절을 달달 외워서 수업에 출석해야만 했습니다.

오늘 이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그 특이한 교수님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그 교수님이 외우라고 했던 세 개의 성경구절 때문입니다.

첫 구절은 바로 오늘 본문인 예레미야 14:14, 즉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선지자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 예언을 하도다 나는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고 그들에게 명령하거나 이르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이 거짓 계시와 점술과 헛된 것과 자기 마음의 거짓으로 너희에게 예언하는도다"라는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 구절은 예레미야 23:16~17 말씀으로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에게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말라 그들은 너희에게 헛된 것을 가르치나니 그들이 말한 묵시는 자기 마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라 항상 그들이 나를 멸시하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평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며 또 자기 마음이 완악한 대로 행하는 모든 사람에게 이르기를 재앙이 너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였느니라"입니다.

세 번째 구절은 에스겔 13:19 말씀으로, "너희가 두어 움큼 보리와 두어 조각 떡을 위하여 나를 내 백성 가운데에서 욕되게 하여 거짓말을 곧이 듣는 내 백성에게 너희가 거짓말을 지어내어 죽지 아니할 영혼을 죽이고 살지 못할 영혼을 살리는도다"입니다.

저는 그 때 왜 교수님이 이 구절들을 외우게 했는지, 특히 설교학 시간에 외우게 한 이유가 뭔지 잘 몰랐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 목회를 하면서 비로소 그 깊은 뜻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바로 목회자로서, 설교자로서 제가 늘 자신에게 물어야 하는 질문이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참 선지자인가, 거짓 선지자인가?"입니다. 설교학 교수님이 이 구절들을 외우게 한 까닭은 저희가 설교기술만 좋은 설교자가 되지 말고, 겉으로만 멋들어진 설교, 세련된 말씀을 전하는 목사가 되지 말고 정말 참 선지자, 참 목사가 되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 뜻을 생각하며 저는 오늘 저 자신의 설교관과 물질관을 돌아봅니다. "나는 과연 참 선지자인가? 거짓 선지자인가?" 저는 목사요 설교자로 이 말씀의 뜻을 생각해 봅니다. 나는 설교를 '잘' 하기 이전에 설교를 '바로' 하는 목사인지, 나는 하나님의 뜻을 빙자해 실은 내 생각과 주장을 내세우는 설교자인지, 또 두어 웅큼 보리와 두어 조각 떡을 위해, 몇 푼의 물질과 이익을 위해 내 양심을 팔고 사람들 귀에 듣기 편하고 좋은 말만 전하는 목사인지 말입니다. 또한 목사인 저뿐 아니라 이 시간 말씀을 듣는 여러분은 설교를 듣는 청중이요 또한 나가서 말씀 전하는 복음 전파자로서 이런 생각을 해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복음과 말씀전파에 힘이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겉으로 드러나는 우리의 말솜씨나 겉으로 드러나는 우리의 모습이 아니라 내 말에 진심이 있어야 하고 내 모습 속에 진실이 들어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3:5 말씀처럼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가 아닌지 말입니다.

거짓 예언의 특징

그렇다면 오늘 본문과 앞서 소개한 다른 두 본문에 나타난 거짓 예언자들의 특징은 무엇인가 함께 살펴봅시다. 먼저 예레미야 14장 13~14절을 읽습니다. 여러분에게 외우라는 소리는 안 할 테니 성경을 펴서 한 번 찾아보는 일은 하시기 바랍니다.

13 이에 내가 말하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시옵소서 선지자들이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칼을 보지 아니하겠고 기근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이곳에서 너희에게 확실한 평강을 주리라 하나이다 14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선지자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 예언을 하도다 나는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고 그들에게 명령하거나 이르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이 거짓 계시와 점술과 헛된 것과 자기 마음의 거짓으로 너희에게 예언하는도다

여기 나타나는 거짓 선지자들의 첫 번째 특징은 "절대 너희에게 심판이나 고난이 임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예언한다는 점입니다. 13절에 보면 "너희가 칼을 보지 않을 것이고 기근도 이르지 않을 것이다." 즉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죄 때문에 심판을 하겠다고 말씀하시는데도 이 거짓 선지자들은 그런 일 절대 없다고 예언합니다. 왜요? 그런 예언을 사람들이 싫어하니까요.

따라서 14절에 나온 것처럼 이들 거짓 선지자들의 두 번째 특징은 하나님의 뜻과 다른 내용의 예언을 한다는 점입니다. 즉 하나님이 말씀하셔도 사람들이 이런 예언은 싫어하겠다 싶으면 예언 안 합니다. 대표적인 예가 앞 절에 나온 하나님의 심판선언에도 불구하고 절대 그런 일 없다고 예언하는 내용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이 말씀하지도 않은 것을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거짓으로 꾸며 예언한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하셨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이런 예언을 하면 사람들이 좋아할까, 싫어할까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하나님이 말씀하셔도 사람들이 싫어하겠다 싶으면 안 전하거나, 그런 일 없다고 전하고, 심지어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예언이다 싶으면 하나님이 하지도 않은 말씀을 꾸며 전한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가 아니라 사람들의 눈치를 보고, 사람들 입맛에만 맞는 말을 전하는 선지자들, 그래서 이 선지자들은 명백히 거짓 선지자인 것입니다.

그래서 두 번째 본문인 예레미야 23:16(찾읍시다)에서는 이 거짓 선지자들이 헛된 것을 가르치고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이 아니라 자기 마음에서 나온 생각을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라고 꾸며 전한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래서 17절에 이 거짓 선지자들의 입에서는 항상 "평안하다, 잘 될 거다, 복 받을 것이다"만 나오고 절대 재앙이나 심판 따위는 없다는 예언만 나온다는 것입니다.

17 항상 그들이 나를 멸시하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평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며 또 자기 마음이 완악한 대로 행하는 모든 사람에게 이르기를 재앙이 너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였느니라(렘 23:17)

이제 마지막 본문인 에스겔 13장 19절을 찾습니다.

너희가 두어 움큼 보리와 두어 조각 떡을 위하여 나를 내 백성 가운데에서 욕되게 하여 거짓말을 곧이 듣는 내 백성에게 너희가 거짓말을 지어내어 죽지 아니할 영혼을 죽이고 살지 못할 영혼을 살리는도다

여기에 거짓 선지자들의 세 번째 특징이 나옵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두어 웅큼 보리와 두어 조각 떡을 위하여, 즉 자신의 생계와 물질적 이익을 위해 거짓 예언을 해서 죽지 않을 영혼도 죽이고 살지 못할 영혼은 살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몇 푼 집어주는 사람에게는 무조건 "복 받는다, 평안 할 것이다, 잘 될 것이다."라며 복만 선포하니 그런 소리를 듣는 사람은 자기가 죄인인 줄도 모르고 영원한 심판을 당하게 됩니다. 나에게 아무 것도 집어주지 못 하는 사람에게는 무조건 심판 받는다고, 저주 받으라고 예언하여 살 사람을 죽이게 됩니다.

자. 이제 정리합니다. 거짓 선지자는 어떤 사람들입니까?

첫째, 언제나 무조건적인 평화와 복만 선언합니다. 무조건 복 받는다니 얼마나 좋습니까?

둘째, 같은 이야기지만 사람의 눈치를 보고 사람들 입맛에 맞는 편하고 좋은 말만 선언합니다. 반면 무조건 깎아 내릴 때도 있습니다. 우리에게 불안감을 조성하려고 협박하듯 저주나 화를 선언하기도 하고 때로 자기를 드러내려고 근거 없이 기존 교회나 목회자를 비방하고 깎아 내리기도 합니다.

셋째, 물질관이 잘못된 사람들입니다. 한 마디로 돈을 밝힙니다. 복채를 주어야 점 쳐준다는 점쟁이와 다를 바 없이 헌금을 해야 예언해 준다든가 적지 않은 헌금을 강요합니다. 헌금해야 복 받는다고, 심지어 하나님의 뜻인데 안 하면 큰 문제 생긴다는 말도 서슴지 않습니다.

넷째, 교회 중심적인 사고방식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모든 선교단체, 기도원, 어떤 종교단체도 모두 주님의 몸인 교회를 돕는 입장이어야 합니다. 이 교회 중심성을 벗어나서 기존 교회를 비판하고 목회자를 비판하면서 성도들로 하여금 교회에서 점점 멀어지게 하는 경우라면 정말 위험합니다. 이들은 기존 교회에서 만족을 못 느끼거나 소외되었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집중적으로 접근합니다. 자기네 단체나 기도원에 오면 뭔가 기존 교회와 다른 특별한 별미가 있다고, 우리만의 은혜가 있다며 성도들을 미혹해서 점점 교회에서 떠나가게 만듭니다. 이렇게 되면 벌써 거짓 단체가 되는 것입니다.

다섯째, 결론적으로 하나님이 주신 메시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빙자한 '사람의 말'을 합니다. 저는 설교자로서 이런 고민을 합니다. 솔직히 설교 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빙자해 내 말을 하고 싶은 유혹이 많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는데 설교 시간에 누가 감히 아니라고 하겠으며 누가 대놓고 반대하겠습니까? 그래서 이런 유혹을 적지 않게 받습니다. 또 사람들이 싫어하거나 귀에 거슬릴 만한 설교는 절대 안 하고 반드시 사람들 듣기 좋고 그럴듯한 설교만 하고 싶은 유혹도 적지 않습니다. 그러면 제 인기도 올라가고 자연 떡이나 보리 가져다주는 사람도 생기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이런 유혹들이 들 때마다 저는 제가 왜 목사가 되었나, 왜 주의 종이 되고 왜 설교자가 되었는가를 생각합니다. 그리고 힘들지만 유혹이 너무 크지만 그 유혹들을 이겨내곤 합니다.

오늘 성도들도 내 입맛에 맞는 듣기 좋은 말씀만 골라 들으려는 자세를 버려야 합니다. 내가 바른 길로 가면 당연히 나에게 복과 평안이 임합니다. 그러나 내가 잘못된 길로 가면 반드시 심판과 고난이 임하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자기는 지금 잘못된 길로 가면서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에도 귀를 막는다면 우리는 영원히 돌이킬 수 없는 심판에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또한 내가 아무리 힘들어진다 해도, 손해를 본다 해도 하나님의 말씀을 결코 가감하거나 말씀 전하는 사명을 회피하면 안 됩니다. 어떤 분들은 전도하면 너무 쑥스럽다고 합니다. 하지만 쑥스럽다고 살아야 할 그 생명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복음 전하는 일은 절대명령입니다. 타협하거나 피할 일이 아닙니다. 반드시 해야 합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전해야 합니다. 생명 살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건전한 영적 문화

항간에 제가 기도원을 싫어한다는 소문이 나있다고 합니다. "우리 목사님은 기도원 가는 것 싫어한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안 가는 분도 있고 쉬쉬 하며 몰래 기도원이나 집회에 가는 분도 있답니다. 그런데 천만에 말씀입니다. 저도 기도원 다니며 은혜 받은 사람이요 지금도 가끔 기도원에 가서 은혜 받는데 어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성도들을 영적으로 바로 지도해야 할 목회자로서 책임이 있기 때문에 오늘 설명을 합니다. 건전한 기도원이 있고 그렇지 못한 기도원이 있습니다. 건전한 설교자나 강사가 있고 건전하지 못한 분들도 있습니다. 건전한 영적 문화가 있고 불건전한 영적 문화가 분명히 있습니다. 이것을 구분하지 못하면 잘못된 영적 가르침에 미혹되어 정말 영원히 돌이킬 수 없는 길로 빠지기에 너무도 위험합니다.

마지막 때가 점점 가까워 오면서 이 땅에 은혜를 빙자하고 능력을 빙자하는 거짓 주의 종들이 얼마나 많이 나타나는지 모릅니다. 수많은 이단 사이비와 또한 문제 있는 기도원이나 그런 사람들이 너무 많아 성도들을 끊임없이 미혹합니다. 그런데 너무도 순진하게 이런 미혹의 영에 빠져서 영적으로 자신을 망치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이런 미혹에 안 빠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첫째로는 앞서 말한 성경적 기준들을 명심하십시오.

즉 일방적인 평화와 복만 선언하느냐? 사람의 눈치를 보고 그들에게 편하고 좋은 말만 선언하느냐? 반대로 근거 없이 기존 교회나 목회자를 비방하고 깎아 내리는가? 물질, 즉 돈을 밝히는가? 노골적으로 헌금을 강요하거나 은연중에 강요하지는 않는지? 결론적으로 하나님이 주신 메시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빙자한 '사람의 말'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말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이런 기준을 말씀드려도 평신도인 여러분이 건전한지 아닌지 구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쉬운 방법은 먼저 그 기도원이나 선교단체가 소속이 어디냐, 건전한 교단 소속이냐? 목회자나 책임자가 건전한 신학을 공부하고 바른 신앙관을 가진 사람인가를 확인해야 하는데 방법은 주보나 인쇄물, 홈페이지를 참조하면 될 것입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확실한 방법은 담임목사나 교역자에게 묻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늘 어디 새로운 곳을 가게 되면 저에게 물으라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감시하거나 통제하기 위함이 아니라 오히려 건전한 영적 문화를 권하기 위함입니다. 저나 목회자들에게 물어보면 목사는 앞서 말한 대로 주보나 인쇄물, 홈페이지를 통해 알아봅니다. 또 주변 목회자나 이단 사이비 전문가들을 통해 알아봅니다. 가장 정확한 방법입니다. 그래서 건전하다, 문제없다고 하면 언제든지 가서 은혜 받으라고 할 것입니다. 이렇게만 하면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만 몰래 숨기듯 하면 오히려 문제 될 소지가 많습니다.

최근 신천지 이단이 한국 교회를 어지럽히는데 얼마 전 포항 모 개척교회도 9년 된 권사 한 분이 교인 전체를 반으로 쪼개서 신천지로 데리고 나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신천지 이단도 성도들에게 몰래 접근해 "참 은혜롭게 성경 가르치는 곳 있는데 나하고 한 번 가보자. 무료로 가르친단다. 그런데 절대 남에게 이야기하지 말고 특히 담임목사에게는 절대 비밀로 해라."고 미혹합니다. 거짓말도 '모략'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시켜 너무 잘 합니다. 목사를 속이고 성도들을 속입니다. 정말 정정당당하고 부끄러울 것이 없으면 왜 숨기고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뭔가 문제가 있으니 그러는 것 아니겠습니까? 구분해야 합니다. 이런 식으로 몰래 하고 숨어서 하고 음성화 되면 반드시 문제가 생깁니다. 저는 그래서 이런 건전한 영적 문화, 기도원 문화, 집회문화를 양성화시킬 것입니다. 좋은 은혜 받겠다는데 뭐가 부끄럽습니까? 하지만 교회 안에서 숨어서 건전하지 못한 문화를 만들어가는 분들에 대해서는 앞으로 대단히 단호하게 대응할 것입니다. 인간적인 정이나 관계에 앞서서 이들은 하나님의 교회를 분열시키고 깨는 일을 하기 때문에 목회자로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말씀 맺습니다. 오늘은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 참된 예언과 거짓 예언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다보니 설교가 조금 딱딱했습니다만 언젠가 분명히 필요한 말씀이라고 생각해서 담대하게 전했습니다. 제가 만약 여러분의 눈치만 보고 입맛에만 맞는 말씀 전하려 했다면 오늘 이런 설교 못합니다. 저도 사람 눈치 안 보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 있는 대로 바로 전하는 설교자 되겠습니다.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그리고 저는 여러분이 그런 말씀에 귀를 기울일 수 있도록 '들을 귀'를 갖게 해 달라고 기도할 것입니다. 은혜 받는 것을 가장 귀하게 여기고 찾되 건전하고 바른 은혜를 사모하도록 기도할 것입니다. 나아가 여러분이 어디에 가서든, 어떤 상황에서든,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딤후 4:2)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능력 있게, 바로 전하는 복음의 능력자 되도록 기도할 것입니다. 오늘날 점점 마지막 때가 다가오고 마귀가 우는 사자처럼 성도들을 삼키려고 하는 이때에 우리가 바른 신앙과 바른 영적 분위기, 바른 은혜로 서야만 신앙을 지킬 수 있습니다. 교회와 목회자들이 도리어 세상으로부터 비난과 손가락질을 받는 이 때 우리가 바른 말씀 위에 바로 서지 않으면 안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교회 성도들은 흔들리지 않는 바른 믿음 위에 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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