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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행복에 이르는 길(8) : 장애물 7-교만↔겸손 (눅 18: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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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 이르는 길(8) : 장애물 7-교만↔겸손 (눅 18: 9-14)

<만악의 뿌리인 교만>
어거스틴이 쓴 최고의 걸작품 중에 하나는「삼위일체론」(399-421)입니다. 장장 20년 이상 걸려서 집필한 대작입니다. 젊어서 쓰기 시작해서 늙어서 완성했습니다. 사람들이 이 책에 얼마나 큰 기대를 걸었던지 완성도 채 되기 전에 미완의 원고를 훔쳐서 미리 출판하는 소동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어거스틴이 삼위일체론을 연구하는 과정에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해옵니다. 참으로 난해하기 짝이 없는 삼위일체의 신비를 어느 정도 이해했다고 자부한 어거스틴이 머리를 식히기 위해 바닷가를 거닐고 있었습니다. 그 때 한 소년이 나타나 모래 위에 조그만 구멍을 낸 뒤 계속해서 그 위에 바닷물을 퍼붓고 있었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한 어거스틴이 뭘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소년은 바닷물이 어느 정도 되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그런다고 대답했습니다.

어거스틴은 즉시 비웃었습니다. "너는 결코 바다를 그 구멍 속에 다  넣을 수 없단다. 바다가 얼마나 넓고 큰데!" 그러자 소년이 고개를 들어 어거스틴을 쳐다보며 말했습니다. "삼위일체에 관한 글을 쓰고 있는 당신도 마찬가지랍니다." 이 말을 한 뒤 그 소년은 사라졌습니다. 어거스틴은 즉각 겸손하라는 하나님의 뜻인 줄로 깨달았습니다. 자기가 아무리 삼위일체의 신비를 잘 이해했다고 할지라도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그래서 오직 어린아이와 같이 겸손한 자에게만 삼위일체의 신비는 드러난다고 했습니다.

대개 많이 배운 사람들이 못 배운 사람들보다 더 교만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식이 사람을 교만하게 만든다고 하지 않습니까? 권세 높은 사람이 힘없는 사람보다 더 교만할 수 있습니다. 조금만 힘이 있어도 쉽게 위세를 부릴 수 있는 것이 인간의 약점입니다. 부자가 가난한 사람보다 더 교만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공부 많이 하고 권세 높고 돈 많은 엘리트들이 많이 모인 교회는 목회하기가 쉽지 않겠지요. 다 교만 때문이지요. 모두 세상에서 한 가닥 하는 사람들만 모였으니 겸손해지기 어렵습니다. 목회자가 조그만 부족함이 있어도 용납을 잘 하지 않습니다. 회의 때마다 자기 주장이 강합니다. 남의 의견을 잘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만한 사람들이 많이 모인 교회는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속담도 있듯이 중구난방(衆口難防), 말이 많고 파당이 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공부 많이 하고 권세 높고 돈 많은 사람들이 다 교만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 분들 가운데에도 겸손한 분들이 많습니다. 공부 적게 하고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이 무조건 겸손하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그런 분들 가운데에도 교만한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누가 교만하냐 겸손하냐 하는 것은 겉모습만 가지고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외적인 것만 가지고 어떤 사람이 교만하다 겸손하다 함부로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행복에 이르는 일곱 번째 장애물은 교만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행복할 수 없습니다. 자기만 불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이웃도 불행하게 만듭니다. 교만은 모든 사람들의 마음 깊은 곳에 뿌리박고 있는 원죄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피조물인 주제에 하나님처럼 높아지고자 하는 교만 때문에 타락했습니다. 교만이 있으면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설 수 없습니다. 교만한 사람이 어떻게 말씀에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까? 항상 목사님의 설교를 판단하려고만 하지 그 내용이 귀에 들어올 리 만무합니다. 오늘 여러분이 설교에 은혜 받기를 원합니까? 겸손해야 합니다. 잠 3: 34절을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교만할 때 하나님의 은혜가 떠나갑니다. 겸손할 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합니다.

또한 교만한 사람이 이웃과의 관계가 좋을 리 없습니다. 자기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우월감이 교만이 아닙니까? 교만은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때로 내 생각이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데 나는 언제나 옳습니다. 다른 사람의 견해를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이야말로 교만이지요. 정치도 경제도 사회 문화가 다 마찬가지입니다. 나 없으면 안 된다는 교만이 문제입니다. 심지어 교회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흔히 빠지는 착각이 나 없으면 안 된다는 교만이 문제입니다. 나 없어도 세상은 잘 돌아갑니다. 교회도 잘 굴러가고 되려 부흥될 수 있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이웃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어렵습니다. 잠 18: 12절은 말씀합니다.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
이제 본문 말씀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로 유명한 말씀입니다. 이 비유야말로 어떻게 교만이 하나님과의 관계도 어렵게 하고 이웃과의 관계도 어렵게 하는가를 보여줍니다. 이 비유에는 두 사람이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바리새인과 세리입니다. 정반대 되는 유형의 사람들이지요. 바리새인들은 종교적으로 말해서 정통 엘리트 중에 엘리트입니다. '바리새', '보통 사람들과 구별된다'는 말이 보여주듯이 종교적으로 대단한 사람들입니다. 금식과 성경 연구와 십일조 생활에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들입니다. 최고의 종교인으로서 자타가 인정하는 사람들이지요!

반면에 세리는 죄인 중에 죄인입니다. 로마 정부의 앞잡이가 되어서 동족들의 혈세를 빨아먹고 사는 매국노입니다. 몸 파는 창기와 세리는 아예 이스라엘 민족의 공적으로서 낙인이 찍혀 있었습니다. 이런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는데 그 태도가 정반대입니다. 

① 의인의식으로 가득찬 바리새인
먼저 바리새인의 기도부터 살펴봅시다. 11-12절을 다같이 읽읍시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먼저 바리새인은 기도할 때 따로 떨어져 혼자 기도합니다. 저 죄인인 세리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이지요. 저렇게 더러운 사람과는 함께 기도할 수 없다는 교만으로 가득찬 것이지요. 까마귀 노는 곳에 백로가 갈 수 없다는 말이지요! 아주 도도하고 고고한 척 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기도의 내용을 한 번 보세요. 두 가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먼저 자기는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다는 표현을 두 번씩이나 쓰고 있습니다. 토색하는 자, 즉 남의 것을 빼앗는 자나 불의한 자나 간음하는 자와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자기는 저 세리와는 질적으로 다른 사람임을 강조합니다. 바리새인은 우월의식으로 똘똘 뭉쳐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바리새인은 자기가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며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친다는 사실을 부각시킵니다. 1년에 단 몇 차례라도 금식하는 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유대교 율법에 의하면 대속죄일에 딱 한 번 금식하는 것을 율법적인 요구사항으로 못박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원했던 바리새인들은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마다 금식했습니다. 바로 이 날은 예루살렘에 시장이 서는 날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모이는 날이었기 때문에 자기가 금식한다는 사실을 과시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날이었습니다. 그들은 금식할 때 얼굴을 일부러 창백하게 분가루를 바르고 흐트러진 복장을 했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얼굴이 파리하게 보여서 금식한 티를 보이려고 했던 것이지요. 
 
수입의 십일조를 바치는 일도 쉽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은 레위인들이 받을 몫으로서 소득의 십일조를 바쳤습니다(민 18: 21; 신 14: 22). 그러나 바리새인들의 경우 반드시 바치지 않아도 좋을 소득, 즉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엄격하게 계산해서 바쳤습니다. 아마 비유 속에 나오는 이 바리새인은 실제로도 그렇게 금식하고 엄격한 십일조 생활을 하면서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기도하는 태도가 문제입니다! 바리새인은 분명히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으로 기도를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 감사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구속하시고 은혜 베푸신 것에 대한 감사가 아닙니다. 자기는 세리와 같은 죄인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사람임을 과시합니다. 자신의 종교 생활이 아주 특별하고 남다르다는 사실을 자랑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기도라는 형식을 빌어서 실상은 자기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선전하고 있습니다. 과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들으라고 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들으라고 '자기PR'을 하는 기도라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들으시는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혹시라도 멋들어진 미사여구를 통해서 우리의 기도솜씨를 자랑하려 한다면 하나님이 들으시는 기도가 될 수 없습니다. 기도를 통해서 은근히 자신의 신앙을 자랑하고 자기보다 못한 사람들을 가르치고 훈계하고 정죄하려고 한다면 그 역시 잘못된 기도입니다. 우리는 자기의(自己義)가 숨겨진 기도를 조심해야 합니다!

유대인 랍비 시므온 벤 조카이(Simeon ben Jocai)는 이런 말을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 오직 두 사람의 의로운 사람들이 있다면 나와 내 아들이다. 만일 한 사람의 의인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나다!" 비유 속에 나오는 바리새인이 바로 이런 인물이었습니다. 오직 자기만 의롭고 다른 사람은 다 죄인입니다. 그는 하나님께(to God) 기도하러 간 것이 아니라 자기와 더불어(with himself)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그는 자기가 얼마나 의로운 사람인가를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하여 기도했던 것이지요!

② 죄인의식으로 가득찬 세리
이제 세리의 기도를 살펴볼 차례입니다. 13절을 보세요.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여기 보세요. 세리의 기도는 바리새인의 기도와는 정반대입니다. 먼저 바리새인은 자기와 죄인들을 의도적으로 구별하기 위하여 따로 서서 기도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가슴을 치는 행위는 고대 근동 지방의 여성들이 극한 슬픔을 못 이길 때 하는 관습입니다. 만일 남자가 가슴을 쳤다면 이는 아주 예외적인 일이었는데 그만큼 고통과 번민이 컸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그렇습니다. 바리새인은 자기가 너무 잘나서 못난 사람들과 자리를 같이 할 수 없기에 따로 기도를 했는데, 세리는 자신이 너무 죄가 많고 못나서 감히 바리새인 근처에 갈 엄두도 내지 못했던 것입니다. 바리새인의 의인(義人)의식이 너무 커서 따로 떨어졌고 세리는 죄인(罪人)의식이 너무 커서 멀찍이 서서 하늘을 우러러볼 엄두도 못 내고 가슴을 치며 기도했던 것입니다.

기도의 내용도 정반대입니다. 바리새인은 자기를 과시하고 자랑하는 기도를 잔뜩 늘어놓았지만 세리는 "아, 하나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하고 부르짖습니다. 자기를 낮추는 기도입니다. 자기가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다만 주님의 자비만 구할 뿐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인인 자기 사이의 간격이 너무 깊다는 사실을 자인합니다. 한 마디로 세리의 기도는 마음이 깨어져서 드리는 겸손의 기도이지요!

<세리를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
이제 예수님의 결론이 중요합니다. 14절을 보세요.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여기서 예수님은 두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첫째로, 의롭다 인정받고 자기 집으로 내려간 사람은 바리새인이 아니라 세리라는 것입니다. 적어도 외적인 면에서 본다면 세리와 바리새인은 비교가 안 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누구나 다 바리새인이 의인이요 세리가 죄인이라고 인정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기도의 태도로 보건대 하나님께서 의롭다 인정하신 사람은 바리새인이 아닌 세리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하나님은 교만한 사람의 기도를 듣지 않으십니다. 겸손한 사람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천국 문은 너무나 낮기 때문에 무릎을 꿇지 않고서는 들어갈 수 없습니다. 동료를 업신여기는 사람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듣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혹시라도 나만 의롭고 세상은 다 잘못되었다는 교만과 착각에 빠지면 안 됩니다. 우리는 흔히 기도할 때 저 죄악된 무리들과는 상종하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본문 말씀으로 보건대 우리 주님은 이런 우월의식으로 가득찬 기도를 듣지 않으십니다.

둘째로,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진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야말로 가인 대신 아벨을, 에서 대신 야곱을, 므낫세 대신 에브라임을 선택하는 차자 우선의 성서 원리와 일맥상통합니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마 19: 30)는 주님의 말씀과도 궤를 같이 합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사람을 쓰십니다. 축복하십니다. 교만한 사람을 물리치십니다. 예수님이야말로 겸손의 모범이 되신 분입니다. 빌 2: 6-8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은 구중 궁궐에서 나지 않으셨습니다. 구유에서 나셨습니다. 백마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않으셨습니다. 나귀 새끼를 타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이 되신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중죄인이 되셨습니다. 창기와 죄인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겸손의 왕이셨습니다!

강림절이 찾아왔습니다. 주님의 겸손을 본받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교만은 위험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집니다. 사람들로부터도 배척받을 수 있습니다. 겸손은 언제나 안전합니다. 유익합니다. 오늘 여러분이 행복하시기 원합니까? 겸손하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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