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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대림절] 구원자를 주시는 하나님 (왕하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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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자를 주시는 하나님 (왕하 13:1-7)

오늘 본문은 북왕국 이스라엘의 열한 번째 왕이었던 여호아하스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17년간 왕위에 있었던 그는 그 전후의 모든 왕들이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에게 죄를 범하게 한 첫 임금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가고 거기서 떠나지 않았습니다(본문 2절). 이에 노하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아람 왕 하사엘의 손과 그의 아들 벤하닷의 손에 넘기셔서 학대를 받게 하셨고(본문 3-4절),

그러자 여호아하스는 하나님께 구원을 간구했으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구원자를 주셔서 아람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다시 평화롭게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본문 4-5절). 그 구원자가 누구였는지 기록되지는 않았습니다. 그 구원자가 엘리사였으리라는 것이 우세한 견해이지만 다른 사람으로 보는 견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구원자가 누구였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여호아하스의 간구를 하나님께서 들어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이 여로보암 집의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고 사마리아에 아세라 목상을 그냥 두고 우상을 숭배하기를 계속했다는 것입니다(본문 6절).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람 왕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에 마병 오십 명과 병거 열대와 보병 만 명 외에는 남은 것이 없을 만큼 그들을 거의 멸절시켜 타작마당의 티끌 같이 되게 하셨습니다(본문 7절). 이 이야기는 우리가 사사기에서 줄곧 보아온 이스라엘 백성의 전형적인 역사의 반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배신하고,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외적의 침략과 압제와 수탈을 당하게 되고, 견딜 수 없어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하나님께서 한 지도자를 세워 외적을 물리치게 하셔서 자유와 평화를 되찾게 해주시고, 이스라엘은 또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함으로써 다시 불행한 역사를 되풀이하곤 한 역사입니다.

  우리에게 이미 익숙해진 평범한 역사이야기이지만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다시 한 번 확인시켜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끊임없는 배은망덕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결같으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입니다. 여호아하스는 북왕국 이스라엘의 첫 왕 여로보암의 죄를 그대로 따라간 자였습니다. 여로보암의 죄가 무엇이었습니까? 무엇보다도 우상을 만들어 세우고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우상을 섬기게 한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에게서는 쉽게 떠나면서 우상숭배의 죄로부터는 좀처럼 떠날 줄을 몰랐습니다. 그들은 그것 때문에 이방족속의 침략과 압제와 약탈을 당해야 했고 그 고통을 견딜 수 없어서 하나님께 구원을 간구했으면서도 그들 땅에 아세라 목상을 그냥 두고 우상숭배를 계속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향한 여호아하스와 이스라엘의 간구가 당장 힘든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일시적으로 행하는 것임을 하나님께서는 아시면서도 그 간구를 들어주시는 것을 봅니다. 이스라엘에 친히 벌을 주시고도 거기서 그들을 빨리 풀어주지 못하셔서 그들이 살려달라고 간구하기를 애타게 기다리시는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4-5절이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아람 왕이 이스라엘을 학대하므로 여호아하스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들으셨으니 이는 그들이 학대받음을 보셨음이라. 여호와께서 이에 구원자를 이스라엘에게 주시매 이스라엘 자손이 아람 사람의 손에서 벗어나 전과 같이 자기 장막에 거하였다”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구원을 간구하는 이에게 구원자를 주시는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옛 이스라엘에게만 그렇게 관대하시고 은혜로우신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오늘 우리 모두에게도 그러하십니다. 그리고 그 사실이 우리에게 큰 위로와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인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후에도 또 죄를 짓는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다 아시면서도 우리가 구하면 우리에게 구원자를 보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아니 우리가 먼저 구하기도 전에 구원자를 보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자로 미리 보내주신 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 그것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형언할 수 없는 은혜의 증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 그것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비할 데 없는 관대와 인내의 증표입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께 세세무궁토록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우리는 지난 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독생자를 주셨다는 사실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를 생각해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당신의 유일하신 아들을 내놓으신 사랑이야말로 모든 사람의 이해를 뛰어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당신의 백성을 위해 못 하실 것이 하나도 없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아하스 같은 자의 간구를 들어주시는 일 정도는 사실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구원을 간절히 구하는 이들에게 얼마나 놀라운 일을 행하셨는지를 성경은 수없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간청을 들으시고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려는 뜻을 몇 번씩이나 돌이키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게 뜻을 여러 번 돌이키시는 것이 하나님께 있을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을 정복해가던 여호수아가 숫적으로 압도적인 가나안 연합군과의 싸움을 단 하루에 끝내기 위해서 이스라엘이 완승을 거두기까지 해가 중천에 머물고 달도 움직이지 않도록 해달라고 요청했을 때 그 요청을 들어주신 하나님이십니다(수10:12-14).

해와 달이 움직이지 않으려면 그것들과 함께 맞물려 운행되는 모든 천체가 다 멈추어야 하는 것입니다. 불가능해 보이는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행하셨습니다. 남왕국 유다의 왕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었지만 그가 하나님께 울며 기도하자 하나님께서는 그의 눈물을 보시고 삼 일만에 그를 다시 일으키시며 그의 수명을 15년이나 연장해주실 뿐 아니라 그 치유의 약속의 징표로서 해시계의 그림자가 십도를 뒤로 물러나게 해달라는 요구를 들어주신 하나님이십니다. 해와 달이 운행을 중지하고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지만 반대 방향으로 운행한다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죽을 병에 걸려 절망하는 한 사람에게 회생의 확신을 주시기 위하여 그 엄청난 일을 감행하신 하나님이십니다(왕하20:1-11).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예수님께서도 죄인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어느 정도인지를 세 가지 비유로 설명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첫 번째 비유가 의 비유입니다(눅15:3-7). 어떤 목자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라도 잃으면 그는 아흔아홉 마리 양을 들에 두고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며, 찾아내면 즐거워서 어깨에 메고 집에 돌아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기를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한다는 비유말씀입니다. 엄청난 희생을 감수하시면서까지 죄인 한 사람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주는 비유입니다. 두 번째 비유는 의 비유입니다(눅15:8-10).

동전 열 드라크마를 가진 여자가 있는데 그 동전 중 하나라도 잃으면 그 여자는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아내기까지 부지런히 찾다가 찾아내면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기를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아내었노라” 하리라는 비유입니다. 그까짓 작은 동전 한 닢 때문에 온 집안을 다 뒤지며 찾을 사람이 어디 있으며 또 그것 하나 찾았다고 이웃친구들을 다 불러 모으고 잔치를 베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렇게 무리해 보이고 손해 볼 일조차도 마다하지 않으신다는 비유말씀인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비유가 그 유명한 의 비유입니다. 소위 로 더 알려진 그 이야기를 반복하지 않겠습니다. 죄인인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이해할 수 없고 무한한 사랑을 말하는 비유로 이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고 생각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비유말씀들을 통해 설명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친히 당신의 몸으로 실행하시며 증언하셨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당신과 동등한 하나님의 자리에서 사람의 자리로, 종의 자리로 내려 보내신 일이야 말로 가장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들을 구원하시려고 사람이 당하는 가장 고통스럽고 치욕스러운 십자가의 죽음을 죽으셨다는 것도 참으로 그 어떤 일보다 크고 놀라운 사건인 것입니다. 그것은 사실 태양계 안에서의 움직임의 이변 같은 것은 비교도 될 수 없는 이변인 것입니다. 그것은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의 질서가 뒤엎어지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는 그런 불가능한 일조차도 마다하지 않고 행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더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하겠습니까? 우리가 부르짖으면 언제나 우리에게 필요한 구원의 손길을 펴주시는 하나님 안에서 소망을 가집시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못 하실 일이 하나도 없으신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위로를 받읍시다. 그의 그 사랑의 온전한 실현으로서 이미 우리에게 오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소망과 위로를 발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하나님의 인내와 용서의 은혜가 크고 놀랍다 하드라도 끝이 없는 것은 아님을 또한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인내와 용서의 은혜가 크면 클수록 마지막 하나님의 진노는 더욱 클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인내와 용서의 은혜가 오래 가면 오래 갈수록 마지막 하나님의 진노는 영원할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인내와 용서의 은혜를 남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대단히 어리석고 위험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심판의 날은 언제 닥칠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대림절 첫 주일입니다. 우리에게 구원자를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더욱 튼튼히 하고 하나님께서 이미 보내신 세상의 유일하신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확신 가운데 기다리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에 모든 소망을 두며 거기에서 위로와 기쁨과 새 힘을 얻는 믿음의 자녀다운 삶을 바르게 열심히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 새 달은 또한 우리에게 이 나라를 이끌어갈 지도자를 뽑는 달입니다. 정치적 빈사상태에 빠진 이 나라, 경제적 한기에 시달리는 대다수의 국민과 중소기업들, 거짓과 부패와 불신으로 가득 찬 이 사회, 이념과 가치관과 삶의 방식에서 양극화의 수렁에 빠진 이 민족을 살려낼 구원자를 세워야 하는 달입니다. 우리가 간절히 하나님께 구하면 정말 이 시대에 이 나라를 분열과 대립과 침체와 퇴행으로부터 구해낼 지도자도 하나님께서 주실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소망을 잃지 말고 믿음으로 이 나라를 치유하는 우리가 됩시다.
(이수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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