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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승리하는 삶을 위하여 (삿 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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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하는 삶을 위하여 (삿7:1-3)

‘여룹바알이라 하는 기드온과 그를 좇은 모든 백성이 일찌기 일어 나서 하롯샘 곁에 진 쳤고 미디안의 진은 그들의 북편이요 모레산 앞 골짜기에 있었더라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너를 좇은 백성이 너무 많은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붙이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스려 자긍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 이제 너는 백성의 귀에 고하여 이르기를 누구든지 두려워서 떠는 자여든 길르앗산에서 떠나 돌아가라 하라 하시니 이에 돌아간 백성이 이만 이천명이요 남은 자가 일만명이었더라’

1990년, 7년 동안의 이민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가서 총신 대학원에 입학하였다. 그 학교의 교훈을 보는 순간 조금은 촌스럽다는 생각을 하였다. 다섯 가지의 ‘… 되라’라는 형식의 교훈이었는데 처음 다섯 가지는 그런 대로 이해가 되었지만 마지막 것은 정말로 이상했다.

처음의 네 가지는 ‘학자가 되라’, ‘성자가 되라’, ‘전도자가 되라’, 목자가 되라’이었다. 그런데 마지막 것은 ‘신자가 되라’는 것이었다. 그 당시에 이것은 정말로 이상하게 들렸다. 믿음을 가지고 신학을 시작하려는 학생들에게 믿는 자가 되라는 말은 뭔가 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기에 충분했다.

한번은 몇몇 한국의 대표적인 목사님들이 한경직 목사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한 목사님께 권면의 말씀을 해달라고 하니 그 때에 한 목사님께서는 잠시 생각에 잠기신 후에 ‘목사님들 예수 잘 믿으시기 바랍니다’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이제는 이 말씀이 그렇게 마음에 와 닿을 수 없다. 지금 저희 교회는 7천 명이 모이는 큰 교회로 성장하였지만 제게는 7천 명을 목회하는 것보다 내 자신 하나를 목회하는 것이 더 힘들 정도이니 이 ‘예수를 잘 믿으라’는 말이나 ‘신자가 되라’는 말이 정말로 맞는 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두 가지 형태의 믿음이 있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믿음은 우리들 대부분이 가지고 있는 믿음이다. 둘째는, 우리 삶 속에서 역동적으로 작동하는 믿음이다. 이 두 가지의 믿음은 확실히 다른 차원의 의미를 가진다. 요한복음11장을 보면, 주님이 사랑했던 마리아, 마르다, 그리고 나사로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들은 예수님을 참으로 사랑하였고 헌신하였지만 그런 사람들도 아프고 죽어갈 수 있는 것이다. 나사로가 죽어갈 때에 그들은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께서 오시기를 청했지만 주님은 이틀을 더 유하신 후에 그들에게로 향하셨다. 더 유하시는 이틀 동안 예수님이 어떤 일을 하셨는지는 성경에 자세히 기록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서 그리 중요한 일은 없으셨던 것 같다.

결국 예수님은 대략 4일이 지난 후에 그들에게 도착한 것으로 보인다. 마리아는 마중을 나오지 않았고 마중 나간 마르다도 섭섭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그 때에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라고 하셨다. 이 말씀을 인생적으로 들으면 더욱 속상하게 하는 말로 들릴 수 있다. 그러나 마르다는 대단한 믿음을 가졌던 것 같다.

요한복음11장27절을 보자.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우리는 조금만 마음이 상해도 교회에 나오지 않거나 남을 미워할 수 있다. 믿음은 믿음이고 세상 것은 세상 것이다. 11장39절을 보자. ‘예수께서 가라사대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가로되 주여 죽은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마르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나서 쓸데 없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조금 전에 자신이 고백한 신앙고백과는 너무도 상반된 것이었다. 마르다와 그의 믿음은 주님의 사역을 가로 막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우리는 베드로의 신앙고백같은 고백을 진실된 마음으로 한다. ‘주는 그리스도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렇게 진실한 마음으로 고백한 것이 우리의 삶에서는 작동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참으로 슬픈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대단한 이율 배반적인 현상이다. 눈을 감으면 진실한 마음으로 고백을 하고, 눈을 뜨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신앙을 고백했다면 그것은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도 그대로 작동되어야 한다. 목사들 때문에 시험들 수도 있다. 목사들 중에는 강단에서의 모습과 뒤에서의 모습이 다른 사람들이 많다. 그렇지만 1.5세 목사들은 조금 나은 것 같다. 그래서 나는 김 목사님을 존경한다.

사실은 나도 1.5세 목사이다(?). 우리의 믿음의 고백은 직장과 사업터와 가정과 학교에서 그대로 작동되어야 한다.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그 돌 하나 옮기지 못하시겠는가? 그런데 주님은 그들에게 돌을 옮기라고 지시하신다. 그 상황에서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 아닌가? 우리는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원수를 사랑할 수 있다. 우리는 오 리를 같이 가자는 친구와 함께 십 리를 같이 갈 수는 있다. 우리는 사랑하는 일은 힘이 들어도 할 수 있다. 많은 은사가 있었던 고린도 교회가 무너졌던 것은 그들에게 사랑이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여러분들은 너무도 좋은 예배를 드리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정말로 진실된 신앙고백을 하고 있다. 세계 어디를 가더라도 이렇게 좋은 예배를 보기는 어렵다. 분당 우리 교회의 예배도 좋지만 여러분들의 예배보다는 못하다. 이렇게 좋은 예배의 은혜가 여러분의 삶의 현장으로 이어지기를 바란다.

오늘 본문에는 참으로 귀한 교훈이 있다. 지금 이스라엘은 미디안과 전쟁 중이다. 적은 무려 125,000명의 대군을 이끌고 있었지만 이스라엘은 고작 32,000명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상황에서 정말로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을 하신다. 지금의 32,000명이 많다는 것이다. 그리고 군사를 300명까지 줄이라고 요구하신다. 이 장면과 이 말씀을 보면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있다. 하나님은 준비 안 된 32,000명보다 준비된 300명과 함께 하시기를 좋아하시는 분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세 가지 마음을 알 수 있다.

(1)잘 준비된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신다.

32,000명 대 300명은 대단한 경쟁율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대단한 300명에게 일을 시키신다. 그런데 그 대단한 사람들에게 시키시는 일이 무엇인가? 하나님은 한 밤 중에 체조를 시키신다. 19-21절을 보라. ‘기드온과 그들을 좇은 일백명이 이경 초에 진 가에 이른즉 번병의 체번할 때라 나팔을 불며 손에 가졌던 항아리를 부수니라 세 대가 나팔을 불며 항아리를 부수고 좌수에 횃불을 들고 우수에 나팔을 들어 불며 외쳐 가로되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이여 하고 각기 당처에 서서 그 진을 사면으로 에워싸매 그 온 적군이 달음질하고 부르짖으며 도망하였는데 삼백명이 나팔을 불 때에 여호와께서 그 온 적군으로 동무끼리 칼날로 치게 하시므로 적군이 도망하여’ 준비된 대단한 군사들에게 주어진 임무는 고작 항아리를 부수고 횃불을 들고 나팔을 부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무엇하려고 그렇게 힘들게 300명을 선발하였는가? 시시한 일이 아닌가? 그러나 하나님은 시시한 일도 준비된 사람에게 시키기를 원하시는 분이다.

하나님이 사용하셨던 성경 속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이와 같았다. 바울을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을 보라. 그는 참으로 못된 짓을 많이 한 인물이었다. 당시에는 아주 잘 준비된 것 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참으로 복잡하게 바울을 선택하시고 훈련시키신다. 하나님은 아마도 바울이 인생의 방향만 잘 잡아주면 쓸 만한 인물이 되겠다는 생각을 하셨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매우 열정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방법은 적중했고 그는 하나님의 큰 종이 되었다. 그는 하나님을 엄청나게 핍박하다가 대박(?)을 터뜨린 사람이었다. 다윗은 양치는 일에 목숨을 걸었던 인물이었다. 그러다보니 하나님은 그에게 엄청난 일을 맡기시고 이루셨던 것이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잘 준비된 사람들이 되기를 소원한다. 나는 모든 성도들이 나를 좋아할 것을 기대하지는 않는다. 어떤 성도는 나를 좋아할 것이고 어떤 성도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나는 다만 아무도 나를 시시하다고 말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여러분들은 작은 일에도 목숨을 거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란다.

(2)좌절하지 않는 마음을 갖기를 원하신다.

음악 대학을 지원하는 사람이라면 무엇보다도 먼저 대학을 결정한다. 왜냐하면 그 대학의 입학기준을 알아서 그것에 방향을 맞추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 하나님께도 명확한 기준이 있다. 하나님의 기준은 무엇인가? 오늘 본문의 3절을 보자. ‘이제 너는 백성의 귀에 고하여 이르기를 누구든지 두려워서 떠는 자여든 길르앗산에서 떠나 돌아가라 하라 하시니 이에 돌아간 백성이 이만 이천명이요 남은 자가 일만명이었더라’ 하나님은 기준은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상대가 워낙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다. 여기서 이스라엘 군사의 2/3가 탈락했다.

하나님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두려워 하지 않는 사람을 원하신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은 오직 믿음이 작동되어서 두려움을 이기는 사람이다. 나는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 큰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미국에서 공부하며 주로 영어 문제가 나로 하여금 열등감을 갖게 하였다. 그러나 은혜를 받고나니 환경은 달라진 것 없어도 내 태도가 달라진 것을 알게 되었다. 어떤 때는 성도들에게 야간을 치기도 하지만 심했다는 마음이 들면 곧바로 사과를 드린다. 한 번은 어린 딸에게도 무릎을 꿇고 사과한 적도 있었다. 이것은 용기이다. 그리고 이 용기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사업이 잘못되고 있다하여도 두려워하지 말기를 바란다. 다만 시시한 인생을 살지 않도록 기도하고 소원하자.

(3)겸손의 능력을 아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왜 군사의 수를 줄이라고 요구하시나? 이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 말씀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2절에서 말씀하신다.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너를 좇은 백성이 너무 많은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붙이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스려 자긍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32,000명으로 미디안을 이길 경우에 저들이 교만해져서 자신들의 손으로 승리하였다는 교만에 빠질 것이라고 생각하셨다. 자신들의 전략과 리더쉽으로 이겼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이 교만하지 않고 오직 겸손하기를 원하신다. 때로는 32,000명으로 125,000명을 이길 수도 있다. 그러나 300명으로 125,000명을 이긴다는 것은 완전히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는 이민 올 때에 32,000명으로 내 인생을 성공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했다. 그런데 하는 일마다 막히고 모든 일이 잘 되지 않았다. 왜 그런가? 하나님이 우리를 다루고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있는 32,000명을 300명으로 줄이시는 과정이다. 하나님은 강남 8학군에 사는 약한 부모가 아니다. 우리 하나님은 한번 다루기로 결심하시면 거의 죽을 때까지 그리 하시는 분이다. 나의 인생에서도 300명으로 줄이시는 과정이 있었는데 그 때에는 인생의 바닥을 벅벅 기었다. 나는 마치 내가 버러지 같다고 생각하였고 잠이 들면서 내일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때로는 자살을 시도하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기도 하였다.

하나님은 내 인생 가운데에 32,000명이 있을 때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으셨다. 300명까지 내리시더니 그 때부터 하나님은 기적을 베풀기 시작하였다. 나같이 부족한 목사가 어떻게 이런 자리에 설 수 있었겠는가? 300명이 되면 하나님이 일하셔서 홍해를 가르시고 기적을 일으키실 것을 믿으라. 여러분들이 300명으로 일할 수 있기를 바란다. 아직도 멀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나님께서 훈련시키시기로 작정하셨다면 아무리 기도해도 지금 당장은 안된다. 300명까지 내려가고 하나님께서 일하시도록 내어드리자. 하나님께서 일하실 것이다.

백발이 성성한 할아버지 장군이었던 갈렙의 고백을 노래로 지은 찬양이 있다.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그날에 주께서 말씀하신 이제 내게 주님의 이름으로…’ 갈렙은 노년이 되도록 주 앞에서 오직 겸손의 바닥까지 내려가는 믿음의 본을 보인 장군이었다. 우리 모두 이러한 믿음까지 이르는 주님의 용사들이 되기를 소원한다.  (이찬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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