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교회는 어떤 곳인가?(18) : 일깨어 살아나야 하는 곳 (계 2:8-11)

  • 잡초 잡초
  • 315
  • 0

첨부 1


교회는 어떤 곳인가?(18) : 일깨어 살아나야 하는 곳 (계 2:8-11)

제가 지난 주일 설교하면서 주님께서 지금 우리 한국교회에 편지를 써서 보내신다면 과연 어떤 내용의 편지를 써서 보내실지 모르겠다는 말을 했습니다. 지난 주일 설교의 일부를 그대로 다시 인용합니다. “아마 예수님께서 주기철 목사님이 목회하시던 평양의 산정현 교회나 손양원 목사님이 목회하시던 여수의 애양원 교회에 편지를 써서 보내셨다면 서머나 교회에 보내셨던 편지와 꼭 같은 위로와 칭찬과 격려와 축복의 편지를 써서 보내셨을 것입니다.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계2:9).

그런데 70여 년이 지난 오늘의 한국교회들에게 주님께서 편지를 써서 보내신다면 과연 어떤 편지를 써서 보내실지 모르겠습니다. 옥한흠 목사는 주님께서 지금 한국교회에 편지를 써서 보내신다면 이렇게 편지를 써서 보내실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계3:1).

주님께서 오늘 저와 여러분들에게 편지를 써서 보내신다면 과연 어떤 내용의 편지를 써서 보내시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지금 환난과 궁핍을 모르는 불행한 시대, 순교를 당할 수 없는 불행한 시대에 살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늘의 면류관이 아닌 이 세상의 면류관을 추구하면서 살아가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받을 수 있는 환난과 궁핍이 그리워지는 시대입니다. 주님을 위해서 그리고 메마른 저주의 땅에 주님의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당할 수 있는 순교가 그리워지는 시대에 살아가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이 지난 주일 설교의 일부입니다.

오늘 아침에는 부활 승천하신 주님께서 사데 교회에 보낸 ‘서글픈’ 내용의 편지에 대해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지난 주일에는 서머나 교회에 보낸 ‘무거운’ 내용의 편지에 대해서 설교를 했고 한 달 전에는 에베소 교회에 보낸 ‘책망의’ 내용의 편지에 대해서 설교를 했는데, 오늘 아침에는 사데 교회에 보낸 서글픈 내용의 편지에 대해서 설교를 하게 되어서 여러분들에게 미안한 생각이 듭니다. 주님께서 그런 무겁고 서글프고 책망 섞인 내용의 편지를 써서 보내시면서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 찌어다” 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저는 그대로 설교할 수 밖에 없는 것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아침에 성령께서 우리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사데 교회에 보낸 편지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사데 교회는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자라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교회가 예배와 교제와 사역이 활발한 대단한 교회로 알려질 수가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유명하고 대단하고 멋진 교회라고 알려질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교회가 주님에게 어떻게 보여지느냐가 문제입니다. 사데 교회는 사람들에게는 살아있는 유명한 교회로 알려져 있었지만 주님에게는 영적으로 죽은 교회로 보였다는 것이었습니다.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둘째, 사데 교회에 주신 주님의 권면의 말씀은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신자들이 때로는 사망의 잠을 잘 때가 있습니다. 세상에 푹 빠져서 사망의 잠을 잘 수가 있습니다. 믿음이 죽어가고 사랑이 죽어가고 소망이 죽어 가고 사명이 죽어가는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깨어서 일어나라는 말씀 많이 나옵니다.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라”(롬13:11).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엡5:14).

사데 교회에 주신 주님의 말씀은 일깨어 일어나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지키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너는 일깨워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셋째, 그들이 처음에 어떻게 복음을 받았고 어떻게 복음을 들었는지를 생각하고 그것을 다시 지키고 순종하며 회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신자들이 처음 믿음과 처음 사랑을 잃어버리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에베소 교회가 그런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회개하고 처음으로 돌아가라는 말씀이 무수하게 많이 나옵니다.

여기 계시록 2장과 3장에도 회개하라는 말씀이 다섯 번이나 나옵니다.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넷째, 사데 교회에 옷을 더럽히지 않고 아직 살아있는 신자들이 몇 명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이 다 주님을 배신하고 타락해도 주님을 향한 신앙의 절개를 지키는 사람들이 언제나 몇 명씩은 남아 있습니다. 구약시대에 에녹이 그런 사람이었고 노아가 그런 사람이었고 엘리야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마지막까지 믿음의 절개를 지키는 사람들의 이름을 생명 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않겠다고 주님께서 말씀했습니다. “내가 그 이름을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리라.” 이것이 주님께서 사데 교회에 보낸 편지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는 제 설교를 하는 대신 옥한흠 목사님의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지난 7월 8일 저녁 서울 상암월드컵경기장에서 한국 교회 대부흥 100주년 기념 대회가 열렸는데 그날 옥한흠 목사님이 계3:1-6을 본문으로 “주여 살려주옵소서!” 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습니다. 그 때 저는 설교를 들으면서 깊은 감동과 은혜를 받았는데 며칠 전에 그 설교를 다시 읽으면서 다시 깊은 감동과 은혜를 받았습니다.

저는 지난 7월 8일 저녁 옥한흠 목사님의 설교를 들은 후 즉시 소감의 글을 써서 칼럼에 올린 일이 있었는데 며칠 전에 옥한흠 목사님의 설교를 다시 읽으면서 다시 가슴과 눈에서 탄식의 눈물이 흐르는 감동과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지난 7월 8일 옥한흠 목사님이 처절한 심정으로 설교한 설교를 그대로 하려고 합니다. 사실 저는 지난 십 여 년 동안 다른 사람들의 설교를 인용하거나 참고한 일이 거의 없었습니다. 물론 7년 전에 케직 사경회와 암스텔담 전도대회의 설교를 그대로 여러분들에게 전달한 일은 있었습니다. 그리고 몇 달 전에 조용기 목사님의 설교를 인용한 일은 있었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옥한흠 목사님의 설교를 그대로 여러분들에게 전달하려고 합니다. 옥한흠 목사님의 설교문 전부를 여기 그대로 옮겼습니다. 물론 조금씩 뛰어 넘으면서 설교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의 전달 설교를 통해서 감동과 은혜를 주시기를 바랍니다.

“(할렐루야! 주님만이 영광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모처럼 한국교회가 하나 되어서 1907년 평양에서 일어난 대부흥을 기념하는 뜻 깊은 날입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예배에 저와 같이 자격 없는 사람이 설교를 맡게 된 것은 너무나 두려운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은혜를 가로막는 악한 종이 되지 않도록 특별히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100년 전 한국교회는 복음을 받아들인 지 불과 반세기가 되지 않았습니다. 믿는 사람도 3, 4만 명에 불과했습니다. 이렇게 나약한 한국교회를 하나님께서 특별히 찾아오셔서 성령의 불을 부어주셨습니다. 원산에서 타오르기 시작한 성령의 불길은 평양에서 그 절정을 이루었고, 그 후에 연이어 한반도 곳곳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그러자 수 년 사이에 수 십 만 명이 예수를 믿고 교회로 들어오는 놀라운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그 후 나라가 기울자 교회는 사경회, 항일운동, 사회계몽에 앞장서면서 절망에 빠진 백성을 끌어안아 줄 수 있었습니다. 교회가 핍박을 받을 때에는 순교의 피를 흘려 한국교회의 등불이 꺼지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세계가 주목하는 오늘의 한국교회를 가능케 한 뿌리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합니까? 저는 평양 대부흥이라고 확신합니다. 이런 전무후무한 은혜를 백 년 전에 이 땅에 허락하신 하나님을 우리가 어찌 찬양하며 경배하며 영광을 돌리지 않겠습니까? )

“우리가 평양 대부흥을 돌아보면서 무엇보다도 특별히 주목해야 할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기름 부으심과 함께 강력한 회개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흔히 아는 그런 회개가 아니었습니다. 성령께서 죄를 자복하도록 몰아 붙이지 아니하면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불가사의한 회개였습니다. 당시 기록을 보면 ‘전에는 경험하지 못한 무시무시한 죄의 공포가 우리 위에 임하였다’는 말이 있는가 하면, ‘아무도 그것을 피하여 도망할 수 없었다’는 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장대현교회에 모였던 선교사들과 교인들은 밤새도록 가슴을 치고 통곡하면서 숨은 죄를 토해 놓았습니다. 이런 초자연적인 회개를 경험하면서 한국교회는 세상 앞에 새로운 모습을 보여 줄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왜 백 년 전의 부흥을 다시 사모하고 기다리는 것입니까? 가장 절박한 이유는 한국교회가 다시 살아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가 다시 살아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가 사는 길은 백 년 전과 같이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고 교회 안에 있는 악한 것들, 우리 안에 있는 더러운 것들을 다 쓸어 내는 회개 밖에 없다고 저는 믿습니다. (우리는 ‘한국교회 이래서는 안 된다’는 탄식을 오래 전부터 듣고 왔습니다. 오늘 이 시간 백 년 전과 같이 다시 한 번 하나님이 하늘을 가르시고 우리 중에 임하셔서 성령의 불, 통회하고 자복하게 하시는 회개의 영을 한국 교회 위에 부어 주시기를 간절히 사모하고 소망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사데교회는 오늘의 한국교회 실상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거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솔직히 저는 이 말씀을 전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우선 제게 너무 부담스러운 말씀이고, 듣기에 거북한 말씀이고, 기분이 좋지 않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말씀을 전하고 싶지 않아서 꾀 고집을 피웠습니다마는 주님은 밤낮 이 말씀에만 매달리도록 종을 몰아 붙였습니다. 그러므로 설교자가 전하고 싶어서 전하는 말씀이 아님을 알아 주시기 바랍니다. 오른 손에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한국교회를 위해서 주시는 말씀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사데교회를 향해서 주님은 이렇게 책망하십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었느니라.’ 이름이 살았다 하는 것으로 보아 사데 교회는 평판이 꾀 좋았던 것 같습니다. 이름만 들어도 사람들은 ‘아 그 교회, 대단하지. 대단해’ 하고 인정을 했던 것 같습니다. 성경학자들은 사데교회가 한 때 놀라운 부흥을 경험한 화려한 과거를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오랫동안 그 후광을 즐기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따라서 사람들 보기에는 살아 움직이는 교회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열심도 뜨겁고, 봉사도 많이 하고, 예배도 감동적이고, 뭐 하나 흠을 잡을 데가 별로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어디 까지나 사람들의 눈에 비친 그 교회의 허울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불꽃같은 눈으로 중심을 보시는 주님의 눈에는 불행하게도 그 교회는 행위가 죽어 있었습니다. 행위에서 온전한 것을 찾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행위가 무엇입니까? 말씀대로 순종하는 삶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행위가 무엇입니까? 믿음과 행동이 일치하는 삶을 가리킵니다. 사데교회 안에는 몇 사람을 빼고는 그렇게 사는 자들이 거의 없었던 것입니다.

저는 사데교회를 보면서 오늘의 한국교회를 보는 것 같다는 불안을 감출 수 없습니다. 우리는 수 십 년 동안 기적 같은 부흥을 경험한 화려한 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그것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5만이 넘는 교회, 천만의 성도, 세계 제일의 교회, 새벽을 깨우는 대단한 열심, 남에게 뒤지지 않는 헌신, 만 명이 넘는 선교사들, 많은 헌금, 큰 교회당 등 자랑거리가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세계를 다녀 보십시오. 한국교회에서 왔다고 하면 다시 한 번 우리를 쳐다봅니다.) 겉으로 보면 한국교회는 절대로 죽은 교회가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한국교회는 목숨을 아끼지 아니하고 충성하는 목회자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말씀대로 살아 보려고 목사보다 더 힘쓰는 평신도가 생각 보다 많다는 것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들이야 말로 한국교회의 자존심이라고 아니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만일 누가 오늘의 한국교회를 보고 행위가 죽었다는 소리를 하면 저는 그 말을 절대로 인정하고 싶지 아니한 사람들 중에 하나입니다.

“그렇지만 저의 이러한 확신을 흔들어 놓는 심각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사회가 한국교회를 너무 불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신뢰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목사의 신뢰도는 오래 전부터 하위권입니다. 교회 들어왔다가 실망하고 등을 돌리는 젊은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전도를 해도 잘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무종교자들에게 기독교는 제일 인기가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우리를 이중인격자라고 보는 것 같습니다. 말하고 행동하고 다르다는 것입니다. 사랑, 사랑하면서 왜 그렇게 잘 싸우느냐고 비아냥거립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가 자기들 보다 더 정직한 데가 어디 있느냐고 따져 묻습니다. 돈을 사랑하는 데는 자기들과 똑같다고 봅니다. 사회의 각종 스캔들에 교회 다니는 사람이 끼어도 이제는 더 이상 놀라지도 아니합니다. 한 마디로 자기들하고 다른 점이 별로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기가 막히게도 우리는 이런 비난을 받으면서 한마디 변명도 제대로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예수 믿는 우리들의 도덕성, 가치관, 처세관을 놓고 보면 세상 돌아가는 쪽으로 더 많이 기울고 있다는 것을 숨길 수가 없습니다. 우리도 모르게 우리는 세속주의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 모습을 세상 앞에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교회가 짠맛을 잃으면 우리 보다 더 악한 세상 사람들의 발에 짓밟히도록 내 던지는 것이 주님의 징계요 심판입니다.

우리가 지금 그런 끔찍한 상황에 놓여 있지 않은지 두려운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지금 주님께서 한국 교회를 보시고 무엇이라고 하실까요? 이름은 살았으나 행위가 죽었다고 책망하시지 않으실까요? 누가 아니요 하고 변명할 목사가 있습니까? 누가 아니요 하고 변명할 장로가 있습니까? 평양 대부흥 백 주년의 진정한 기념은 이러한 우리의 영적 비참함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 가슴을 치는 데서 출발해야 된다고 저는 믿습니다.

“사데교회를 보면서 제가 두려워하는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일곱 별을 손에 쥐신 예수님께서 행위가 죽은 교회의 책임을 지도자에게 묻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사데교회 사자에게 편지하라.’, ‘사데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사자는 교회 지도자요 목회자를 가리킵니다. 저는 주님께서 왜 목회자에게 책임을 물으시는지 조금 알 것 같습니다. 수 십 년 목회를 하면서 목사의 입장에 서면 이름은 요란하지만 행위가 죽은 교회를 만드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다는 것을 저는 터득하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되는지 여러분 아시고 싶습니까? 이렇게 하면 됩니다. 목사가 말씀을 가르치거나 설교를 하면서 복음을 조금씩 변질시키면 됩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복음이 얼마나 변질되고 있는 지조차 모를 정도로 둔감해지면 됩니다. 그러면 교회는 이름만 살았고 행위는 죽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복음이란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구원 받는다고 하는 기쁜 소식입니다. 그러나 이 복음에는 진리의 양면성이 들어 있습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지만 그 믿음의 진가는 순종하는 행위로 검증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이 구원의 절대적인 요소라면 행위는 구원의 필연적인 요소가 됩니다. 우리는 구원 받기 위해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 받았기 때문에 순종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믿음과 행위는 따로 놓고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가리켜서 좋은 나무와 좋은 열매로 비유하셨습니다. 따라서 목회자는 믿음과 순종을 똑같이 중요하게 다루고 가르쳐야 합니다.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로마서를 설교했으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었다는 야고보서도 진지하게 가르쳐야 하는 것입니다.)

“청중은 원래 귀에 듣기 좋은 말씀을 선호하는 경향이 높습니다. 믿기만 하면 구원 받는다고 하면 모두가 ‘아멘’ 합니다. 믿음만 있으면 하늘의 복도 받을 수 있고, 땅의 복도 다 받을 수 있다고 하면 ‘할렐루야’ 하면서 열광합니다. 그러나 행함이 따르지 않는 믿음은 거짓 믿음이요, 구원도 확신 할 수 없다고 말하면 얼굴이 금방 굳어져 버립니다.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죄를 지적하거나 책망하면 예배 분위기가 금방 싸늘해져 버립니다. 듣기가 싫고 몹시 거북스럽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교회에서 사역할 때 저는 비슷한 반응을 가끔 볼 수 있었습니다. 이런 청중의 반응에 예민해 지면서 저도 모르는 사이에 그들이 좋아하는 말씀을 일부러 골라서 설교하는 사람으로 바뀌는 것을 보았습니다. 대신 죄라든지, 회개라든지 순종이라든지, 거룩이라든지 하는 듣기 피곤한 말씀은 할 수 있으면 피하거나 꼭 말을 해야 할 때에는 달래듯이 부드럽게 말하고 싶어하는 유혹에 끌려가는 것을 보았다. 저의 이런 모습은 절대로 예수님도 바라시는 것이 아니요, 저도 절대로 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런 일이 강단에서 일어나고 있었고, 그 결과 저도 모르게 복음을 조금씩, 조금씩 변질시키는 설교자가 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되니까 교회가 커지면 커질수록 말씀대로 순종하는 행위에는 별로 관심이 없고 믿음만 가지고 떠드는 값싼 은혜에 안주하기를 좋아하는 무리들이 자꾸 늘어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종교개혁자 루터를 여러분 기억하실 것입니다.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받는다고 하는 놀라운 복음을 재발견한 위대한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구원을 받는데 우리의 의로운 행위는 아무런 공로가 되지 못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는 비텐베르크에서 34년간 4천 번 이상 설교를 했습니다. 그러나 믿음을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루터의 신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은 그의 메시지를 곡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순종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 사람들이 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데 죄 좀 지었다고 해서 그게 뭐가 그리 대단한거냐 하면서 자기 욕심대로 살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 도시는 믿음의 방종이 난무하는 타락한 사회가 되어갔습니다. 이런 기막힌 상황을 지켜보면서 루터는 자기 설교에 대한 확신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한동안은 설교를 그만 두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탄식했다고 합니다. ‘선한 양심을 가진 목사라면 설교하기보다 차라리 수레를 끌고 돌을 운반하는 편이 낫겠다.’ 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루터가 우리에게 주는 아주 값진 교훈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교회 지도자가 복음을 가르치면서, 복음을 전하면서 믿음만 일방적으로 강조하고 믿음의 열매가 되는 행함을 등한히 다루든지 무시하면 입만 살고 행위가 죽어 버리는 사데교회가 되어 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0장 20절을 보면 바울은 유익한 말씀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 없이 전하고 가르쳤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저 자신을 포함하여 한국교회 많은 지도자들은 바울처럼 무엇이든지 거리낌 없이 전하는 용기를 잃어버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단 것은 먹이고 쓴 것은 할 수 있으면 먹이지 않으려는 나쁜 설교자가 되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설교자는 청중에게 인기가 좋아서 사람들을 많이 끌어 모으는 데는 성공할지 모르나 행위가 죽은 교회를 만드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한국교회 지도자 여러분, 복음을 변질시켰다는 주님의 질책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자가 몇이나 됩니까? 입만 살았고 행위가 죽어버린 교회를 만든 책임은 너에게 있어 하고 따지신다면 ‘나는 아니요’ 하고 발을 뺄 수 있는 목회자가 몇 사람 됩니까?) 평양 대부흥의 진정한 기념은 복음을 변질키고 행위가 죽은 교회를 만든 죄를 놓고 가슴을 치는 목회자들의 회개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이것은 한국교회를 향하신 주님의 간절한 소원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주님은 행위가 죽은 사데교회를 향해 회개하라고 명하십니다. 회개만이 살길이라는 것입니다. 한국교회를 향해서도 똑같은 명령을 하고 계신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답답한 일은 우리 힘으로 회개가 잘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다 해보셔서 아시잖아요. 우리 힘으로 회개 잘 못합니다. 입으로 잘못했다는 말은 수없이 할 수 있지만 죄를 끊어 버리고 단호하게 돌아서는 거룩한 결단은 잘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백 년 전에 하디 선교사가 하던 회개, 길선주 장로가 하던 회개를, 무명의 성도들이 밤새도록 추운 겨울 밤 찬 마루 바닥에 엎드려 땅을 치며 통곡하던 그 회개를 더 이상 한국교회에서는 찾아 볼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들에 비해서 우리는 엄청나게 많은 죄를 더 짓고 사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회개는 점점 한국교회에서 형식적인 것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오늘 한국교회의 생명을 서서히 죽이는 암과 같은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진정한 회개를 하고 세상 앞에 새 옷을 갈아입으려면 성령께서 회개할 힘을 우리에게 주셔야 합니다. 통회하고 자복하고 버리는 결단을 할 수 있도록 성령이 우리를 도와 주셔야 합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안됩니다. 우리의 능으로도 안됩니다. 오직 하나님의 신으로 할 수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성전 된 우리를 깨끗하게 청소하실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 100년 전과 같이 하나님께서 하늘을 가르시고 이 땅에 강림하셔서 아낌없이 부어주셨던 성령의 불, 회개의 영을 다시 부어달라고 힘을 다해 부르짖어야 될 것입니다. 부르짖고 문을 두드리면 주님께서 응답하실 줄 믿습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네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우리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한국교회가 진정으로 회개하고 죽은 행위를 벗어 버리면 아직도 죽음의 권세 아래서 신음하고 있는 이 백성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한국교회가 믿음과 행함이 일치하는 온전한 복음을 다시 회복하면 온갖 더러운 죄로부터, 그 죄에서 나는 악취로부터 이 사회를 치료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한국교회가 성령의 능력을 다시 입으면 북한의 무너진 교회를 우리 모두 다시 일으킬 수 있다고 믿습니다. 한국교회가 성령의 거룩한 불이 타오르는 용광로가 되면 주님께서 21세기 세계를 위해 가장 중요한 일에 우리 한국교회 불러 주실 것이라 믿습니다. 믿습니다.

두 손을 높이 들고 여러분 따라 합시다. ‘주여, 한국교회를 살려 주옵소서.’ ‘주여, 한국교회를 살려 주옵소서.’ “통회하고 자복하는 영을 부어 주시옵소서.’ ‘부어 주시옵소서. 부어 주시옵소서.’ 머리 숙여 기도합니다. 거룩하신 주여! 이놈이 죄인입니다. 이놈이 한국교회, 입만 살았다고 떠들고 행위가 죽어버린 한국교회를 만드는 장본인입니다. 주여 이것이 감히 설교할 자격이 없는데도 주님이 말씀을 전하라고 비천한 것을 몰아붙였습니다. 아버지, 아버지 겉모양은 요란하지만 내면은 죄악이 쌓여있는 이 한국교회를 주여 불쌍히 여기시고, 성령을 부어주시되, 통회하고 자복하는 영을 부어주셔서 한국교회를 깨끗하게 해 주옵소서. 깨끗하게 하옵소서. 깨끗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이 민족에게 소망을 주게 하시고, 이 나라를 바른 길로 인도하게 하시고, 주의 거룩한 영광이 이 땅에서 경배를 받으시도록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저는 며칠 전에 이 설교를 읽다가 새해에 “주여 우리를 살려주시옵소서” 라는 주제를 가지고 기도 모임을 가지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즉시 다섯 분들에게 전화를 걸고 2008년 1월 11일 아침 “주여 우리를 살려주시옵소서” 라는 주제를 가지고 말씀과 기도 모임을 가지자고 제안을 했습니다. 옥한흠 목사님은 몸이 너무 아파서 올 수 없으니 제발 살려달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반드시 와야 한다고 했더니 그러면 오겠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조용기 목사님은 그날 다른 약속이 있어서 오기가 힘들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반드시 와야 한다고 했더니 기도해 보겠다고 말했는데 그 다음날 전화를 걸고 오겠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방지일 목사님은 지금 미국에 계셨지만 너무 중요한 모임을 준비하고 있으니 오시겠다는 대답을 즉시 메일로 보내왔습니다.

정진경 목사님은 나이가 많은데 자기는 빼 달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방지일 목사님에 비하면 젊으시니까 반드시 오셔야 하다고 했더니 오시겠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결국 1월 11일 아침 7시 강변교회에서 “주여 우리를 살려주시옵소서!”라는 주제를 가지고 신년 기도 모임을 가지기로 했습니다. “주여 우리에게 각성을 주시옵소서!”라는 제목으로 옥한흠 목사님이 10분 동안 발표하고, “주여 우리에게 회개를 주시옵소서!”라는 제목으로 방지일 목사님이 발표하고, “주여 우리에게 사랑을 주시옵소서!”라는 제목으로 조용기 목사님이 발표하고, “주여 우리에게 성결을 주시옵소서!”라는 제목으로 정진경 목사님이 발표하고, “주여 우리에게 통일을 주시옵소서!”라는 제목으로 박종화 목사님이 발표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다섯 가지 제목을 가지고 손인웅 목사님과 김상복 목사님과 유재필 목사님과 최희범 목사님과 전병금 목사님이 각각 기도하기로 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기도 모임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사데 교회처럼 거의 죽게 된 우리 한국교회다 다시 살아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일깨어 살아나야 하는 곳입니다. 지금 주님께서 한국교회를 향해서 그리고 강변교회를 향해서 일깨어 살아나라고 말씀하신다고 생각합니다. 거의 죽게 된 우리드의 믿음과 사랑과 소망과 사명이 다시 살아날 수 있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주여, 우리를 다시 살려주시옵소서! 주여, 우리를 다시 살려주시옵소서! 주여, 우리를 다시 살려주시옵소서!  (김명혁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