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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네 연세가 얼마뇨 (창 47: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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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연세가 얼마뇨 (창 47:7-10)

미국인 한 남자가 가족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휴가를 갔습니다. 그런데 여행 중에 갑자기 장모님이 돌아가셔서 시신을 미국으로 모셔가야만 하는 상황이 발생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영사관에 들러서 문의를 한 결과 두 가지의 방법을 말해줍니다. 한 가지는 시신을 미국으로 모셔 가는 방법이고 또 한 가지 방법은 그곳 예루살렘에 매장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비용에는 엄청난 차이가 났습니다. 시신을 미국으로 모셔 가는데 드는 비용은 5천 달러이고 예루살렘에 매장하는 비용은 겨우 백 달러라는 것입니다. 한참 고민을 한 끝에 이 남자는 장모님의 시신을 미국으로 모셔가겠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영사는 그 남자가 장모님을 매우 사랑한 모양이라고 감동하며 칭찬하는 말을 했습니다. 그러자 이 남자가 영사의 귀에다가 속삭입니다."영사님, 그게 아니라 오래 전에 이 곳 예루살렘에 묻혔던 어떤 사람이 3일 만에 다시 살아났는데 우리 장모님도 그러면 안 되거든요."하더랍니다.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둘 중 하나는 잘못된 사람이던가 아니면 둘 다 잘못 살았던 것입니다.

사람의 인생이란 이 세상에 어떻게 왔느냐는 것도 상당히 중요합니다만 마지막까지 어떻게 사느냐는 더 중요합니다. 모든 것에는 처음이 있으면 마지막이 반드시 있습니다. 원인이 있고 결과가 있는 법입니다. 그리고 원인이 무엇이냐에 따라 결과도 달라지는 것입니다. 정말 좋은 것은 원인도 좋아야겠고 결과도 좋아야겠습니다. 정말 가치 있는 삶이란 출발도 좋아야겠고 과정도 좋아야겠으며 마지막은 더욱 좋아야 하겠습니다.

인간이란 여타의 동물들과는 달라서 자신을 돌아 볼 줄 아는 동물입니다. 하루의 저녁에는 그 날의 삶을 돌아 볼 것이요, 주말에는 그 주간의 삶을 돌아 볼 깃이요, 월말에는 그 달의 삶을 돌아볼뿐더러 연말에는 그 해의 삶을 돌아보아야 하는 것이 삶입니다. 더 마지막으로는 인생의 끝에 서서 자신의 생을 돌아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래서 대체로 사람은 나이가 들면 들수록 온순해지고 부드러워집니다. 소위 젊을 때 한 가닥 했던 사람도 나이가 들면서 어쩔 수 없이 조용해지는 것을 봅니다. 이럴 때 사람들은 그 사람을 보고 뭐라 하느냐 하면"아이고 인간 아무개 이젠 다 됐다."라는 표현을 합니다. 뭐가 다됐다는 것입니까? 시쳇말로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결정타는 죽을 때가 됐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육체적으로 보면 기력이 쇠하여지는 원인도 있겠지만 정신적으로 보면 살아 온 삶을 정리하는 단계이기 때문입니다.

정리해보니 내가 잘한 게 없거든요. 몇몇 예외적인 사람도 있다고는 합니다만 통상적으로는 누구라도 지나 온 인생을 돌아보면 만족 보다는 후회와 아쉬움이 있게 마련이라고 합니다.'좀 더 열심히 할 걸....잔소리 좀 작작하고 젊은 사람들 용기를 북돋아 줄걸....남에게 욕먹고 미움 받을 짓 좀 덜 할 걸.....'육신적으로는 쇠퇴해가지만 정신적으로는 오히려 성숙해져 가는 이런 모습이 어쩌면 더 아름다운 모습인지 모릅니다. 이마저도 못하고 하나님 앞에 가버린다면 정말 불쌍한 인생이지요.

연세 들어가시는 분들 특히 교회 안에서 젊은 사람들이 일하는 것을 보시거든 좀 성에 차지 않더라도 칭찬부터 해주세요. 매일 잔소리만 하다가 나중에 그 후회를 어떻게 하려고 그럽니까? 일을 안 하는 게 문제지 어떻게든 일을 해보려고 하는 것은 칭찬 해줘야지요. 그리고 사실 그 잔소리 할 일도 잘 생각해 보면 그리 중대한 일이 아닐 때가 더 많습니다. 그거 당장에 안 해서 망하는 것도 아니고 또 그거해서 당장에 무슨 큰일이 일어나는 것도 아닙니다. 이 정도는 분별할 줄 알아야 하거든요. 하여간 인생이란 어차피 늙어가면서 그 마지막까지가 중요합니다. 아니 어쩌면 마지막이 더욱 아름다워야 한다는 말이 옳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 가운데서 한 나그네를 보게 됩니다. 130년간의 피곤한 삶을 살아 온, 참으로 불쌍한 한 늙은 나그네의 모습을 만나게 됩니다. 인생 말년에 애굽 땅으로 얻어먹으러 갔고 빌어먹으러간 슬픈 나그네 야곱을 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야곱은 우리가 추구하는 지극히 인간다운 삶을 살아보려고 노력한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복 받기 위해서 빼앗고, 가지기 위해서 싸우고, 속이고, 잘 살기 위해서 뛰고, 참고, 견디며 눈물도 많이 흘리며 자기 자신과 가정을 이루어 나갔지만 어려운 일이 막상 앞에 닥치자 그 모든 수고가 헛된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72명이나 되는 식솔을 거느린 채 버려졌던 아들 요셉을 찾아서 애굽 땅으로 사실상의 피난길에 오르게 됩니다. 막상 애굽에 도착했지만 무작정 아무 곳에나 머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당시 애굽에는 그 나라를 다스리는 왕이 있고 그 왕의 허락을 받아야 땅이라도 얻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야 농사를 짓고 그 대식구가 먹고 살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먼저 바로 왕의 절대적인 신뢰를 얻고 있는 요셉을 비롯한 그 아들들이 일차적으로 바로와의 면담을 끝냈고 이제 의전(儀典)상 아비 야곱이 바로를 만나 친교를 나누는 장면입니다. 그 일을 요셉이 주선하게 되지요. 결과적으로는 바로의 공식적인 승인을 얻어 합법적으로 고센 땅에 정착하게 됩니다만 오늘 그 과정에 서 있는 것입니다.

이 자리에서 바로가 야곱에게 의미 있는 질문을 하게 되는데 그 질문이 8절에 나오는 질문입니다.
"네 연세가 얼마뇨?"이 질문을 문자적으로 보면"네 인생의 년 수가 얼마냐?"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나이에 대한 호기심에서 비롯된 것만이 아닙니다. 이 질문 속에는 야곱이 걸어 온 인생과 거기에서 얻은 교훈을 듣고 싶어 하는 바로의 진의(眞意)가 내포 되어 있는 질문입니다.

그 질문에 야곱의 대답이 곧 9절에 이어집니다."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 삼십 년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라는 대답입니다. 자신의 삶을 나그네 길로 비유하고 있는 야곱의 신앙관을 볼 수 있는 대답입니다. 그리고 이때 야곱의 나이가 130세입니다. 그리고 조부 아브라함은 175세를 살았고, 아버지 이삭은 180세를 살았습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본문에서는 이것을 인식한 야곱의 겸손한 표현입니다.

물론 이후로도 야곱은 17년을 더 살아 147세에 생을 마감합니다만 오늘 이 말 속에는 조상들에 비하면 많은 세월을 살지 않았지만 자신의 삶은 한 마디로 험악한 세월이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표현한대로 정말 이 한마디가 야곱의 생애를 가장 적나라하게 표현한 문구입니다. 장자의 축복을 받으면 행복할 줄 알고 운명을 바꾸려는 엄청난 일까지 저지르면서 다른 인생, 다른 운명을 살아가고자 피나는 노력의 개척적인 정신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주어진 운명대로만 순응하며 사는 단순한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야 복을 받을 수 있다고 믿고 그 복만큼은 받아내고야 말겠다는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복을 얻으려고 하는 야곱의 이 축복 관 만큼은 칭찬할만합니다. 참으로 대단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렇게 축복관은 좋았는데 그 방법에는 문제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먼저는 분수 이상의 것을 추구했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간사했고 비열했으며 때로는 정당하지 못했습니다. 감히 아버지를 속이는가하면 형의 약점, 배고파하는 본능적인 약한 기회를 포착하여 한 그릇의 팥죽을 내어주고 기어이 장자의 기업을 사들이는 행위는 간계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일단 복은 받았고 성공한 줄 알았지만 훗날에 자기 자신도 아들들에게 속는 어처구니없는 보상을 받게 됩니다.

자기가 속일 때는 잠깐 속이고 바로 드러나고 말았지만 자신이 속을 때는 무려 20년간이나 속고 살지 않습니까? 멀쩡하게 살아 있는 아들을 죽었다고 20년이 넘게 눈물을 흘리며 살지 않습니까? 속였더니 속았습니다. 사랑하는 여인을 위하여 7년을 수고했는데 결혼을 하고 첫 날밤을 자고나니 신부가 바뀌어 있습니다. 삼촌으로부터 속았습니다. 하지만 이 사건 속에는 어쩌면 이런 하나님의 음성이 있었을 것입니다."이 놈아 너는 아버지를 속였지 않느냐? 그러면서까지 형의 축복을 빼앗았으니 이제 신부쯤 바뀌는 것은 당연하게 받아들이면 안 되냐?"만약에 야곱이 이 뜻을 깨닫고 겸손히 레아와 평생을 살았더라면 야곱의 생애는 완전히 달라지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러나 그는 매력에 끌린 사랑 하나만을 생각하며 욕정만을 따라 기어이 7년을 더 일해서라도 라헬을 얻어 보겠다고 해서 얻었는데 역시 장미에는 가시가 있다고 성경을 가만히 보면 야곱에게 일어나는 모든 불행은 이 라헬이라는 여자 때문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렇게 속으면서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무려 20년간의 종살이를 거쳐서 우여곡절 끝에 돌아오는 길에 얍복 강가에서 천사를 만나면서 환도뼈가 부러지는 등 불행으로 얼룩진 질고의 삶을 살았던 야곱입니다. 속이면서 출발한 자신이 일생동안 속았고 아무도 믿을 수 없는 고독한 생을 살아야 했습니다. 물론 결과적으로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야곱을 세워 은혜로운 마지막을 맞이하게 하는 과정이긴 합니다만 지금 바로 앞에 선 야곱의"험악한 세월을 살았노라"는 고백이 현실적으로는 가장 합당한 그의 고백입니다.

나중에 야곱이 죽을 때에 아들들에게 유언하면서 자기가 죽으면 조강지처인 레아에게 묻어 달라고 부탁하는 것을 보면 철들고 죽었지 않습니까? 라헬하고 살아 온 삶이 결코 행복한 삶이 아니라 얼마나 험악한 삶이었는지를 보여주는 야곱의 마지막 결단입니다. 야곱은 마지막에 가서야 하나님 앞에 완전히 손을 들었습니다. 남은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께 감사할 뿐 더는 할 말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당신의 역사를 어김없이 이루어 오셨고 앞으로도 변함없이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그 과정에 서 있는 우리들의 삶이 과연 어떤 모습으로 서 가야 할 것인가를 심각하게 고민하는 연말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일 년을 지내왔습니다. 무엇을 얻었고 무엇을 잃었습니까? 지나 온 일 년의 삶은 어떻게, 무엇을 따라 다니며 살았다고 하겠습니까? 돌이켜보면 후회되는 것도 많고 그릇된 것도 많을 것입니다. 이제 여기서 깊이 반성하십시다. 기억할 것은 이 모든 실패의 원인은 하나님의 약속을 성실히 따르지 못한 것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중에 원점으로 돌아가서 다시 새롭게 주님의 뜻을 따라가는 귀한 결산이 있어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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