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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준비하라 (눅 1:2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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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하라 (눅 1:26~31)

요즘 교회들은 대부분 차분히 조용하게 크리스마스를 맞습니다.
교회 밖에 크리스마스 장식을 하려고 해도
술집과 호텔 … 등에서 더 빨리 장식하고 화력하게 해 놓으니
대부분의 교회들은 교회 안에 장식하거나
나무에 불을 밝히는 정도로 보냅니다.
그런데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왜 술집과 호텔이 바쁜 것인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성탄절은 세계의 명절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기독교 문명이 넓게 깊게 퍼져 있음을 말합니다.
기독교는 종교 이상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인류의 문화로 대변되기도 하고,
인간의 행동 가치 기준의 척도가 되었으며,
온갖 규범과 법정신의 근본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기독교가 내세운 무기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의 정신 앞에 바이킹의 도끼도, 징기스칸의 칼도,
전체주의의 화력도 … 모두 무너진 셈이 되었습니다.

물론 세계사의 기록 속에 보면 복음을 전하기 위해 기존 문화를 불태우고
피를 뿌리게 한 사실(史實)도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일이 있었음을 인정하며 가슴 아파합니다.

기독교 정신은 사랑입니다. 용서와 이해 그리고 평안입니다.
그런데 지금 세상은 전쟁, 폭력 … 이 끊이지 않습니다.
지금 가장 존경 받아야 할 사람들이
서로 헐뜯고, 비방하며 ‘모였다 헤쳤다’하면서
개그 같은 판을 벌이고 있습니다.
같이 싸우고 서로 잘났다고 떠드는
애들 같은 싸움은 끊일 날이 없고 …
어떤 결과에도 승복할 줄 모르는 웃기는 세상입니다.

이 세상에 … 또 한번의 성탄절이 다가옵니다.
이런 때에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육체의 잠에서 깨어야 합니다.

현대 사회를 말하기를 …‘인스턴트 사회’라고 합니다.
지금은 육체노동을 하지 않고도 목적하는 것을
즉각 얻을 수 있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점점 몸을 움직이지 않습니다.
움직이기 싫어합니다. 게으릅니다.
그 게으름이 자신의 게으름으로 끝나면 괜찮은데
그 게으름을 보충하기 위하여
부지런한 사람들이 땀 흘려 얻은 것을 빼앗습니다.
마음에 상처를 주고 육체에 상처를 주고
심지어 남의 목숨까지도 노립니다. 못된 짓을 서슴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고 가르쳤는데
요즈음은 일하기 싫어하면서도 배부른 부자가 되려는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그래서 한탕주의가 판을 치고 있고
벼락부자 되고 싶은 사람도 많아서 복권이 잘 팔립니다.

그것 뿐 아닙니다.
교회에도 평안한 것만 바라는 사람들 때문에 걱정입니다.
좀더 편안하게 좀더 쉽게 예수 믿으려는 사람들이
교회마다 늘어가고 있습니다.
‘어느 교회에 가야 좋을까, 어느 교회에 가야 영양가가 있을까
어느 교회에 가야 맛있는 것이 있을까’
이런 생각만 가지고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여러분은 집에서 얼마나 호의호식하십니까?
지난 주일에 어떤 남자가 전도사님에게 전화를 했다고 합니다.
“전도사님 오늘 식사를 어디에서 하셨습니까?”하기에
“교회에서 했는데요.”라고 했더니
“그래요? 그 밥 먹고 사람이 어떻게 살겠습니까?
영양실조 걸리지, 반찬 좀 제대로 하라고 하십시오.”라고 하더랍니다.
얼마나 잘 먹고 살기에 …. 여러분 식탁에 반찬은 몇 가지 놓고 드십니까?
우리 집은 반찬 5가지 이상 못 놓게 합니다.
제가 개척교회하면서 목회할 때 큰 아들의 돌잔치를 했는데
그때도 반찬을 5가지 이상 못하게 했습니다.
우리교회 김치가 얼마나 맛있는데 …
우리 교회 여선교회 회원들의 음식 솜씨 기막힙니다.

여러분, 교회 안에서 되어지는 일들에 대해서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교회 조직(선교회/속회/부서) … 과 무관한 분들
교회 선교 및 봉사와 무관한 분들 …
교인의 의무인 예배참석/헌금 드리는 일 … 등과 무관하게
얼굴은 있으나 이름은 없는 교인이 점점 늘어가고 있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예수는 믿으나 교회는 다니기 싫다며
TV나 인터넷 방송 등을 보며 모니터 앞에 앉아 예배드리며
자칭 신자(信者)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그런 사람은 진정한 크리스챤이 아닙니다.

어느 청년이 부흥사인 무디(D.L Moody)를 찾아와서
“집에서 예수 믿어도 되지 않느냐”고 질문 했습니다.
그러자 무디는 난로 안에서 활활 타고 있는 조개탄 하나를
집게로 끄집어 내놓자 활활 타던 조개탄이 꺼지는 것을 보여 주며
말하기를 ‘혼자서 예수님을 믿으면 이 조개탄같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교회가 필요 없는 것이라면, 성경에 왜 교회가 나와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지금도 교회를 통해 일하고 계십니다.
교회에 적을 두고 적극적으로 신앙생활 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중심, 교회 중심의 신앙생활을 하세요.
마지막 때가 다가옴을 볼수록
초대교회처럼 모이기에 힘쓰고, 기도하고, 전도하고,
서로 사랑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이제 육체의 잠에서 깨어 모이기에 바쁘고
기도하기에 바쁘고, 전도하기에 바쁘고
용서하기에 / 도와주기에 / 사랑하고 / 이해하며 / 봉사하는 …
일에 바쁜 믿음의 사람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정신의 잠에서도 깨어야 합니다.

게을러 나태해진 육체에서 건전함이 나올 수 없습니다.
주께서 차지도 덥지도 않은 라오디게아 교회를 책망하셨습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것을 주님은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빛과 어두움은 분명히 우리가 구별할 수 있습니다.
함께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빛과 어두움은 함께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둡다는 얘기는 빛이 미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밝다는 것은 거기에 어두움이 없다는 얘기입니다.

이제 우리는 쫓아가는 것도, 가려는 길도,
앉으려는 자리도 복된 것인지 살펴야합니다.
오늘 내가 걷는 길이 어떤 길인지 …
오늘 내가 무엇을 쫓아, 무엇 때문에 뛰는지 …
지금 내가 앉은 / 지금 내가 정착한 상태가 복된 자리인지 …
하나님 마음에 드는 자리인지 … 살펴봐야 합니다.

심지어 교회까지도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단이 판을 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우리를 위해/나를 위해 오셨습니다. 믿습니까?
예수님이 오신 성탄절은 모두를 위한 것이라고 말하지만 …
우리 각자/여러분 각자 각자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성탄절은 우리의 날이기도 하지만
“내”날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아흔 아홉 마리 양을 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아가는 목자의 얘기가 나옵니다.
어떤 사람은‘아흔 아홉 마리가 있으면 됐지,
위험한 데 한 마리 찾으러 갔다가 다치면 어떡하느냐 …’고 말합니다.
여러분, 여기서 한 마리 양은 숫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숫자를 셀 때 동질의 것만 구별하여 셉니다.

예를 들면 밥상 위에 놓은 숟가락이 몇 개인지,
밥그릇이 몇 개인지, 반찬그릇이 몇 개인지 …
그런 것은 한 개를 잃어버리면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한 사람, 두 사람, 세 사람 …
이렇게 산술적으로 셀 수 있는지는 모르지만
여러분 한 사람 각자는 다시없는 유일한 존재입니다. 믿습니까?
고신일이라는 목사는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것입니다.
온 세계 어디에도 없습니다.
여러분이 그런 저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곳에 가봐야 없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한 개, 두 개, 한 사람, 두 사람 …
셀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제가 없으면 아무도 제 대신 대체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가정에 자식이 없어졌다고
밥숟가락 놓듯이 아무거나 다른 것을 갖다 놓으면 채워집니까? 아닙니다.
우리 각자는 유일(唯一)한 것입니다.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습니다. 다시 있지 않은 것입니다.
과거에도 앞으로도 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흔 아홉 마리 양을 둔 목자가 하나 밖에 없는 양,
잃어버리면 어떤 것으로도 보충 할 수 없는 양을 찾으러 갔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독생자를 보내신 것은 우리 모두를 위한 것이지만
여러분 각자 각자를 위하여 독생자를 보내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세상에 둘 도 없고 하나밖에 없는 것은 결코 수식화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호칭할 때
‘하나’의 의미가 숫자‘1’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유일무이(唯一無二)한 것으로서의
‘하나’를 의미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주님은 나를 여러 명 중 한 명으로 보지 않으시고
천하와도 바꿀 수 없는 귀한 존재로 여기셔서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는 생각을 하면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지 모릅니다.

나를 구원하시려고

성탄절이 왜 귀합니까?
나를 위해 예수님이 오셨기 때문에 귀한 것입니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원하시려고/나를 구원하시려고
처녀의 몸을 통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믿습니까?

하나님께서 세상에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은
세상 보통 사람들이 태어나는 방법으로 오시지 않고
동정녀를 통해/처녀 몸을 통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동정녀 탄생 방법 말고도
다른 방법으로 구세주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실 수 있었습니다.
33살짜리 건장한 청년으로 이 땅에 보내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기적적인 탄생의 방법으로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신성(神性)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완벽한 인간의 모습으로, 어린 아이로 태어나신 예수님은
완벽한 인성(人性)을 보여 줍니다.

아기를 가질 것이라는 천사의 말에 마리아는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눅 1:34)
하며 몹시 당황했습니다.
이에 대한 가브리엘 천사는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눅 1:37) 고 대답했습니다.

여러분, 성경을 다 읽고 이해하지 못해도 …
한 절만 이해하고 믿으면 됩니다.
잠 안 올 때 레위기를 읽으면 얼마나 빨리 잠이 오는 지
아침이 금세 옵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여러분, 창세기 1장 1절을 믿습니까?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믿습니까?
그렇다면 다 된 것입니다.
부부 간에 성관계를 갖고 아기를 낳는 일은
자연적이고 규칙적이고 평범한 일입니다.
누구도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남자와 성관계를 가진 적이 없는 여자가
임신을 한다는 것은 명백하게 자연의 법칙에 반(反)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하나님의 방법에 따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셨습니다.
천지를 지으신 것처럼 ….

그러므로 동정녀 탄생을 믿지 않는 사람들,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믿지 않는 사람,
그런 사람들은 창세기 1장 1절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신학대학에서 교수를 하고 공부하는 사람도
동정녀 탄생을 믿지 않는 사람은
창세기 1장 1절을 믿지 않는 사람이요
하나님의 존재도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목회자들 가운데도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창세기 1장 1절을 믿지 않는 것이요
성경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참 하나님의 백성인 것을 구별하는 기준은
성경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 입니다.

이사야 7장 14절은 예수님 탄생 740년 전에 했던 실질적인 예언입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이사야 7:14)

그리고 이것은 마태복음 1장 23절에서 되풀이됩니다.
마태복음 1장 25절에
요셉과 마리아가 구주의 탄생이 있기까지는
결코 남편과 아내로서 함께 살지 않았다고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이 특별하게 마태복음 1장 25절이 있게 하신 것은
예수님은 인간의 아버지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의사로서 누가는 이 현상에 가장 흥미를 느꼈을 것입니다.
모든 아이는 아버지가 있어야 탄생합니다.
아기 예수의 아버지는 누구였을까?
그래서 누가는 누가복음 1장 27, 31, 34, 35절에서
특이한 잉태를 조심스럽게 설명합니다.
누가복음 1장 34절에서 마리아는
결혼하지 않은 채 “어떻게 아이를 가질 수 있는가”하고 천사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이것은 마리아가 부도덕한 여자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 줍니다.

이제 우리는 영적인 잠에서 깨어서
우리를 위하여/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나 때문에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영접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탄절을 귀히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맞기 위해 쓸고 닦고 육체도, 정신도, 영혼도,
하나님의 온전하심처럼 온전하기 위해 애쓰는 것입니다.
지금은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신앙적으로 … 혼란한 때입니다.

자기가 정의라고 자기가 이해하는 것만 맞다고,
내가 이해하지 않는 것은 틀렸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기준으로 다른 사람을 평가합니다.
자기가 이해되지 않으면 교회도 비난하고, 성경도 비난하고,
예수님도 목사도 비난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점점 많아집니다.
자기 기준으로 다른 것은 틀렸다고 하면서 돌을 던져 화나게 만듭니다.


‘신밧드의 모험’에 나오는 이야기지만,
높은 나무 위에 있는 코코넛을 딸 수 있는 방법은
사람들이 거기에 올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 나무 위에 있는 원숭이들에게 돌멩이질을 하여
화를 돋우면 된다고 합니다.
성미가 난 원숭이들은 코코넛을 따서 던집니다.
그때 피해 있다가 코코넛을 줍기만 하면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손쉽게 목적을 달성할 수 있습니다.

원숭이가 화를 못 견뎌 코코넛 열매를 따서 집어 던지는 것이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는 것처럼
오늘 우리들의 성질을 돋우는 것들이 많습니다.
마귀는 우리의 성질을 돋워 우리의 귀한 것을 집어 던지게 만듭니다.
마귀는 우리가 갖고 있는 믿음, 소망, 사랑,
신뢰, 평안, 용서, 미소까지도 …
돌을 던져 우리를 화나게 만들어 집어 던지게 만듭니다.

마귀는 여러분의 가족이 화목하게 평안하게 사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가정에 돌을 던져 화나게 만들어서
여러분의 가정에 화목이라는 보물을 집어 던지게 합니다.
마귀는 교회가 평안한 것을 원치 않습니다.
우리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자꾸 돌을 던집니다.
마귀는 성경말씀대로 사는 성도들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도 돌 던지고 성경에도 돌을 던집니다.
여러분, 마귀의 장난에 놀아나면 안됩니다.
여러분의 믿음을 집어 던지면 안됩니다.
사랑을 집어 던지면 안됩니다.
여러분의 평안을 집어 던지면 안됩니다.
여러분의 미소를 집어 던지면 안됩니다.

우리들의 생각이, 우리들의 말이, 행동이,
하나님의 뜻을 실현시키는 것인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 힘들고 고달픈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이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니 평안하시기 바랍니다.
평안을 깨는 것은 마귀입니다.
마귀는 우리가 평안한 것을 원치 않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평안한 것, 부부간에 화목하고 평안한 것,
가정이 평안하고 교회가 평안한 것을 마귀는 원치 않습니다.
그래서 자꾸 돌을 던집니다.
우리가 가진 귀한 것을 집어 던져 버리라고 합니다. 속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심으로 천국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위해 차분히 조용히 준비하십시다.

우리의 마음에 주님이 계시는 가 …
우리의 가정에 주님을 모실 공간이 있는가 …
우리의 교회에 주님 오심을 알릴 나팔이 준비되어 있는가 …
곳곳에 그리스도의 소식을 전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 확인해 보십시오.

언제 주님이 천사장의 나팔소리와 함께
재림 예수로 다시 오신다 할지라도
“아멘 주예수여 오시옵소서.”하며
다시 오실 주님을 영접할 만한 믿음의 사람으로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이 세상에 사는 우리들이 구원 받은 백성임에 감사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나를 위하여
독생자를 보내 주신 것 감사합니다.
우리를 향하여 돌을 던지고
평안을 깨려고 하는 마귀의 장난에 넘어가
우리의 귀한 것을 집어 던지는 어리석은 백성들 되지 않도록
주여 도와주시옵소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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