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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대림절] 아담과 하와의 관계 (창 2: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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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제목 : 아담과 하와의 관계 
+ 설교본문 : 창세기 2장 18-25절

요즘은 교회에서 가정에 대한 설교를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역기능적인 가정이 많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시대를 가정해체의 시대라고도 합니다. 그만큼 깨어진 가정이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교회 안에도 사별한 가정, 이별한 가정이 좀 있습니다. 눈에 띄게 문제를 가진 가정도 있습니다. 또 겉으로 볼 때는 별 문제가 없는 가정 같은데 깊이 들어가 보면 문제를 가진 가정들도 있습니다.

최근 미국의 부부들 가운데 배우자에 대한 만족도를 조사한 결과 불과 4%만이 만족한다고 응답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증명하듯 현재 미국의 이혼률이 60%에 육박하고 있습니다. 한국도 98년 이후 이혼률이 33%를 넘어섰습니다. 이러한 상황으로 나아간다면 2010년경에는 우리나라도 이혼률이 60%에 이를 가능성이 크다고 예측합니다. 현재 60% 이상의 세계최고의 이혼률을 나타내는 나라는 러시아와 몽골입니다. 많은 사회학자들은 구 소련연방이 무너진 것은 이데올로기의 문제보다 가정의 붕괴를 그 원인으로 진단하고 있습니다. 이제 가정은 무너지지 않도록 지키기 위해 싸워야 하는 최고의 전쟁터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6일 동안 창조하신 후에 마지막으로 아담을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아담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않아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고 아담의 갈빗대를 취하여 하와를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하나님의 주례로 부부가 되었습니다.

오늘은 본문을 통해서 아담과 하와를 통해서 타락이전의 부부의 모습을 살펴보고 부부관계의 모델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이 부부관계를 통해서 주님과 교회의 모습까지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본문과 짝이 되는 엡 5:22 이하에 보면 아내와 남편의 관계에 대해서 다룬 후에 엡 5:32에서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부부관계는 주님과 교회의 관계를 보여주는 영적인 그림자라는 말씀입니다. 그림자를 통해서 실체를 짐작할 수 있듯이 부부관계를 통해서 주님과 교회의 관계, 주님과 성도의 관계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럼 부부는 어떤 관계인지 살펴봅시다.

1. 부부는 서로 돕는 관계입니다(18, 20절).

18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20,21절에 보면 아담에게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하와를 만드셨습니다. 돕는 배필로 아담의 배우자를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여성분들은 돕는 배필이란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내가 남편을 돕는 배필이라고 해서 속상해 하지 마십시오. ‘돕는’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에제르’는 강한 자가 약자를 도울 때에, 하나님께서 상처 난 영혼을 치유하실 때에, 넘어진 자를 일으켜 세우실 때에, 힘없는 자에게 용기를 더하여 주실 때에, 하나님이 인간을 돕는 전능한 손길을 얘기할 때에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예를 들면 시121:1-2의 말씀을 보면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시라고 해서 결코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보다 부족하다는 말은 아닙니다. 성령님을 보혜사라고 하는데 보혜사라는 말이 ‘곁에서 돕는 분’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성령님이 우리 곁에서 우리를 도와주시니, 그분이 약한 것입니까 아니면 무엇인가 부족한 분이라는 뜻입니까? 아닙니다. 우리 인간은 잠시라도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남편은 너무나도 연약하기 때문에 아내의 도움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 면에서 여성분들은 하나님께서 이런 사명을 주신 것에 대해서 긍지와 자부심을 느끼시기 바랍니다.

여성의 돕는 배필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미국 사람들 사이에 이런 농담이 있습니다. 한 번은 미국의 대통령 클린턴과 그의 부인 힐러리가 차를 타고서 고향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고향에 다다르게 되었을 때 기름이 떨어져 주유소에 들러 기름을 넣게 되었습니다. 그곳에는 기름때 묻은 더러운 옷을 입고 얼굴에 비지땀을 흘리면서 일하는 중년의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를 자세히 보니까 힐러리의 옛날 고등학교 동창이었습니다. 기름을 다 채우고 난 뒤에 차를 타고 가면서 클린턴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힐러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 만일 당신이 저런 남자와 결혼을 했더라면 어떻게 되었겠소? 당신이 나를 만난 것에 대해서 고맙게 생각하시오!" 그 말을 들은 힐러리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가 만일 그 남자와 결혼했더라면 지금쯤 그 남자가 백악관 집무실에 앉아 있을 거예요." 돕는 배필로서의 아내의 역할이 그만큼 소중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돕는 배필이라는 말은 남자를 돕는 여자의 역할만을 얘기하는 것 아닙니다. 오히려 돕는 배필은 남성명사형입니다. 오히려 남자가 여자를 더 많이 도우라는 얘기입니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돕는 배필입니다.

주님과 우리의 관계도 서로 돕는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도움 없이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주님의 도움이 없이 천국에 들어갈 수도 영생을 얻거나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습니다. 주님의 도움이 없다면 기도응답도 불가능합니다. 우리에게는 전적인 주님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도움이 되시는 주님이 필요합니다.
주님도 우리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주님은 자신의 일을 하실 때 준비된 사람, 헌신된 사람을 통해서 하십니다. 사람이 준비되지 않으면 주님의 일은 진행 될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있었기에 히브리민족이 세워진 것입니다. 모세가 있었기에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왔던 것입니다. 바울이 있었기에 로마가 복음화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저와 여러분이 있기에 하나님의 교회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준비되고 우리가 헌신할 때 우리를 통해서 세계복음화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주님에게도 우리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2. 부부는 서로에게 희생하고 헌신하는 관계입니다(21,22절)

21, 22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고 그 갈빗대로 하와를 만드셨습니다. 성경에서는 잠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아담은 하와를 만들기 위하여 죽음의 과정을 통과한 것입니다. 아담은 죽음을 경험한 것입니다. 자신의 갈빗대를 취하는 과정 중에도 잠들어 있었으니 말입니다. 하와가 만들어지기 위하여 아담은 자신의 갈빗대를 주어야만 했습니다. 이것은 헌신을 의미합니다.

결혼생활은 내가 죽어지는 헌신이 없이는 유지될 수 없습니다. 아담이 죽어 하와가 살게 된 것처럼 내가 죽을 때 배우자가 살게 되는 것입니다. 나의 성질도 죽어야 하고, 나의 고집도, 나의 계획도 죽어야 합니다. 내가 살아서 나만 주장하면 상대가 죽게 됩니다.
결혼 생활은 쉬운 것만은 아닙니다. 결혼 전에는 환상에 젖어 있지만 결혼생활은 현실입니다. 현실은 고달픈 일들도 많은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희생과 헌신이 없이는 유지되기 어려운 것입니다.

결혼생활이 힘들다는 것을 빗댄 유머가 있습니다. 외국에 있는 아들이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축하 편지 한 장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사랑하는 남편이 사랑하는 자식에게 뭐라고 편지 쓰나 아내가 궁금해서 옆에 다소곳이 앉아서 남편이 편지 써 내려가는 것을 읽어 내려가고 있습니다. 남편이 편지를 씁니다. “결혼은 참으로 달콤하고 행복한 것이다. 아들아 너는 참으로 소중한 결단을 했다. 이 아버지가 행복하듯이 너도 반듯이 행복할 것이다. 아버지의 가정생활이 멋있듯이 너도 멋있는 삶을 반드시 살아가게 될 것이다” 아내가 읽다가 말고 흐뭇해서 밖으로 나갔습니다. 아버지가 재빨리 ‘추신’이라고 쓰더니 몇 마디를 더 써내려갔습니다. “방금 네 엄마가 나갔다. 이 바보 멍청아 결혼은 무덤이야. 너는 이제부터 죽었다” 부인은 그것도 모르고 편지를 봉하여 얼른 우체통에 집어넣었다고 합니다.

주님과 신자의 관계도 희생과 헌신으로 맺어지고 아름답게 발전하는 것입니다. 아담이 죽어 하와가 살게 된 것처럼 주님께서 십자가를 통한 희생과 헌신을 하셨기 때문에 믿는 자들에게 영생이 주어진 것입니다. 아무 흠도 없는 주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우리의 죄와 허물을 대신 짊어지시고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신 것입니다.

이제 주님은 믿는 우리들에게 주님을 위한 헌신을 요구하십니다. 주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처럼 우리들에게 죽도록 충성할 것을 요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한 헌신은 시간과 물질과 육체를 드리므로 가능한 것입니다. 말로만 헌신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을 들어보면 주를 위하여 사는 것 같은데 실제로는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주님을 위한 헌신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세 가지 정도로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째는 주님의 일을 위한 헌신입니다. 자신이 계획하고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감동하시고 보여주시고 명한 일이 있다면 그 일을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주님의 교회를 위한 헌신입니다. 교회는 주님의 몸입니다. 교회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할지 몰라도 사실은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교회를 위한 헌신, 교회를 위한 수고, 교회를 위한 시간 투자, 교회를 위한 물질 투자, 교회를 위한 땀 흘림이 있는 사람입니다. 셋째는 주님의 사람을 위한 헌신입니다. 주님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헌신하는 사람입니다. 주님이 찾으시는 사람에게 복음을 들고 찾아가는 사람입니다. 주님이 붙여주신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기 위해서 헌신하는 사람입니다.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의 사역을 돕는 것입니다.

3. 부부는 하나님이 이어준 관계입니다(22절).

22절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여자를 만드시고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만나게 하셨고 하나님께서 짝 지워주신 것입니다. 결혼의 조건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 다음이 사랑이고, 그 다음이 환경입니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조건을 거꾸로 접근 하는 것 같습니다.

현대 여성들이 특별히 좋아하는 남성상이 있다고 합니다. 그는 돈키호테입니다. 그 이유는 “돈” 돈 많고, “키” 키가 크고, “호” 호남형으로 생겼고, “테” 테크닉까지 갖추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심리학자가 아주 재미있는 분석을 했습니다. “우리나라 여성들이 남성에 대해서 거는 꿈이 무엇인가?” 그에 의하면 우리나라 여성들에게 크게 두 가지 종류의 꿈이 있다고 합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보통 여성들은 남성에 대해서 이런 꿈을 가진다고 합니다. 하나는 이른바 신데렐라의 꿈이고, 또 하나는 온달의 꿈입니다. 신데렐라의 꿈은 백마를 탄 왕자님이 번쩍거리는 유리 구두를 들고서 자기를 곧 찾아와 줄 것을 기대하는 꿈입니다. 그러니까 이미 출세해 있는 남자를 기다리는 꿈입니다. 반대로 온달의 꿈은 현재의 남자가 보잘 것 없지만, 자기가 헌신적인 내조를 다해서 그 남자를 훌륭한 인물로 만들어보겠다는 꿈입니다. 평강공주가 가졌던 꿈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두 가지의 꿈이 겉으로 보기에는 좀 다른 것 같지만 사실은 똑같은 것입니다. 이미 출세해 있는 남자냐 그렇지 않으면 가능성이 있는 남자냐 하는 차이 일뿐, 여자가 남자를 이용해서 자기의 욕구를 충족시키기를 원한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우리나라 남성들은 여성에 대해서 어떤 꿈을 가지는지 보십시다. 그 심리학자에 의하면 남성들의 꿈도 역시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미스코리아의 꿈이고, 또 다른 하나는 복부인의 꿈입니다. 그러니까 아내가 예쁘든지, 그렇지 않으면 아내가 자기를 대신해서 돈이라도 많이 버는 것을 원하는 꿈입니다. 역시 남자가 여자를 이용해서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그리스도인들도 비슷한 꿈을 가지고 있고 이와 비슷한 이상적인 배우자 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담은 하와에 대한 사랑보다 하와가 가진 조건보다 하나님의 뜻을 우선시 했습니다. 아담은 하와를 보자마자 “이는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에 살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이 고백은 엄청난 사랑의 고백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언제 아담이 하와를 본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러면 언제 아담이 하와에 대해서 들은 적이 있습니까? 그런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아담이 하와에 대해서 무엇을 안다고 그 멋진 사랑의 고백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유는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날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내게 가장 좋은 배필을 주셨을 것이다!" 이 믿음이 아담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담이 즉석에서 그와 같이 멋진 사랑의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만일 아담에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었더라면 아담은 즉석에서 그와 같은 고백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아담은 하와가 가진 조건보다 하나님이 맺어주셨으니 하나님의 뜻이라는 사실이 더 중요했던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신랑이신 주님과 신부인 성도의 관계입니다. 그런데 이 관계도 하나님이 맺어주신 것입니다. 요 6:44에 보면 주님께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생각에는 혹시 자신이 스스로 교회를 찾아온 것 같고, 자신이 주님을 선택한 것 같아도 사실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이끄셔서 교회로 오게 하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나오시는 분들은 무조건 “하나님이 나를 선택하시고 나를 부르셔서 이 자리에 있다”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시기를 바랍니다.

4. 부부는 서로 사랑하는 관계입니다(23절).

24절에 보면 부부는 둘이 한 몸입니다. 사랑하면 상대의 수치스러운 모습도 다 받아줄 수 있습니다. 25절에 보면 아담과 하와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서로에게 부끄러워하지 않는 모습이 나옵니다.
한 몸 되는 것은 사랑으로 가능합니다. 사랑하면 눈이 멀게 되는 것입니다. 몇 일전에 인터넷에서 보니까 몸무게가 25kg 밖에 나가지 않는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에 대한 기사가 실렸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부인의 모습은 거의 해골에 가깝습니다. 그런데도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여 지극정성으로 보살펴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면 눈이 멀게 되는 것입니다.

결혼식장에 가면 종종 주례자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양손을 보시기 바랍니다. 오른손은 남편을 상징하는 것이고, 왼손은 아내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양손 다 손가락이 있고, 골짜기가 있습니다. 손가락은 장점이고, 골짜기는 단점입니다. 남편에게도 장점이 있고 단점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내에게도 장점이 있고 단점이 있습니다. 부부가 한 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남편은 자기의 장점으로 아내의 단점을 메워 주고, 또 아내는 자신의 강점으로 남편의 약점을 메워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역시 사랑하면 가능한 것입니다.

어떤 총각이 텔레비전을 보는데 한 아가씨가 텔레비전에 잠깐 나왔는데 한 눈에 반했습니다. 그래서 수소문해서 아가씨의 주소를 알고 신분을 알아서 펜팔을 시작했습니다. 3년 동안 줄곧 펜팔을 했습니다. 3년 후 결혼을 약속하고 처음으로 만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분위기 있는 곳에서 딱 마주쳤는데 다른 것은 다 좋은데 남자가 애꾸눈입니다. 여자가 얼마나 화가 나는지 “3년 동안 펜팔을 주고받으면서 당신이 애꾸눈이라는 것을 왜 얘기하지 않았느냐? 당신이 애꾸눈이라는 사실 때문에 내가 화가 나는 것이 아니고 속였다는 사실 때문에 지금 분노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말하자 남자가 “무슨 얘기냐? 내가 당신에게 무엇을 속였냐? 나는 하나도 속인 일이 없다. 내가 처음 편지를 쓸 때 당신에게 뭐라고 썼냐? 당신을 보는 순간 내 가 한 눈에 반했다고 하지 않았느냐?”라고 대답했답니다. 여러분 결혼 생활이라는 것이 그런 겁니다. 한 눈을 감고 한 눈으로만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눈멀게 됩니다. 사랑하면 상대가 어떤 모습이든 사랑스럽게 봐주기 때문에 행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사랑에 눈 먼 분입니다. 정말 내세울 것도 없는 연약한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잘하는 것도 없고, 부족한 것뿐인데 나를 사랑하시는 것을 보면 주님은 눈먼 것이 분명합니다.
23절에 보면 아담은 사랑을 표현하면서 살았습니다. 하와를 보는 순간 “이는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에 살이라”고 고백했는데 시적으로 사랑을 표현한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한 눈에 뽕 갔다’는 말입니다. 그는 그 사랑을 표현한 것입니다. 사랑은 표현할 때 상대에게 전달되는 것입니다

하루는 어떤 신문기자가 영국의 수상 처칠에게 물었습니다. "만일 수상께서 다시 태어나신다면 어떤 일을 하시겠습니까?" 아마 그 질문은 "다시 태어나신다고 하더라도 정치를 또 하시겠습니까?"라는 의도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처칠이 그 질문을 받자마자 아무런 주저 없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가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나는 지금 내 아내의 남편이 되겠습니다." 옆에서 그 소리를 듣고 있는 처칠의 아내가 얼마나 행복했겠습니까? 여자는 정말 예민합니다. 그래서 남편의 말 한 마디에 쉽게 감동해서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또 남편이 생각 없이 불쑥 내뱉는 말 한 마디 때문에 마음에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우리가 아담처럼 사랑을 표현하면서 살아가야 될 줄 압니다.

어느 목사님이 하신 이야기입니다. 경상도 남자들은 다 그렇지는 않지만 대체적으로 무뚝뚝합니다. 사랑하는 아내가 암으로 죽어 가는데 고작 마지막으로 한다는 말 한 마디가 "임자, 죽지마!"랍니다.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 훈련되지 않아서 표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느 서울 아가씨가 경상도 남자에게 시집을 갔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너무 무뚝뚝하니까 재미가 없습니다. 아내는 남편의 사랑이 혹시 변한 것은 아닌지, 그것을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아내는 예쁘게 화장하고 집안의 분위기도 무드 있게 잘 꾸미고서 남편을 기다렸습니다. 남편이 퇴근해서 집에 돌아왔습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달라붙어 온갖 애교를 떨면서 물었습니다. "자기, 나 사랑해? 나 사랑하면 말이야......" 남편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무섭게 말했습니다. "와? 또 뭐 필요한 거 있나? 내가 딱 들어올 때부터 뭔가 좀 냄새가 다르다했지." "아니, 여보! 그게 아니고......" "아니긴 뭐가 아니고? 고마 빨리 말이나 해라." 그래서 아내는 자초지종을 이야기했습니다. "당신이 날 사랑하면 당신 입으로 날 사랑한다고 한 번 말 좀 해봐요." 그랬더니 남편은 다시 이렇게 대답합니다. "와 이라노? 니 뭐 못 묵을 거라도 묵었나?" 그래도 아내가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요구하니까, 결국 경상도 남자는 역정을 내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야가 와 이리 안하던 짓을 다 해쌌노? 니 참말로 돌아뿐거 아이가?" 그러면서 나가버리더라는 것입니다. 결국 아내는 사랑한다는 말도 못 듣고 마음속에 깊은 상처만 남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디 경상도 사람뿐이겠습니까? 우리나라 사람들은 사랑 표현에 약합니다. 훈련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말이 안 되면 행동으로라도 표현해야 합니다. 상대를 기쁘게 하는 것을 행하므로 사랑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몇 일전 텔레비전에서 보니 사랑하는 남녀가 함께 식사를 하면서 남자가 프로포즈를 하는 것을 봤습니다. 커다란 상자가 여자 옆에 있고 여자가 상자를 열자 핑크빛 풍선들이 천장으로 올라갑니다. 그 가운데 유독 큰 풍성하나를 여자가 잡아보니 풍성 줄에 “나랑 결혼 해줘요”라는 내용의 글이 적혀 있고 반지 하나가 매달려 있었습니다. 말이 안 되면 이렇게 행동으로라도 표현되어야 상대에게 전달되는 것입니다.

주님과 우리의 관계를 살펴봅시다. 주님은 성경을 통해서 계속해서 우리를 사랑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의 사랑을 받아드린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를 향한 사랑을 표현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고, 우리를 향한 사랑의 표현으로 자신을 주신 것입니다. 주님도 말로서 그리고 행동으로 우리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셨던 것입니다.

성탄절 장식에 사용하는 포인세티아라는 붉은 색깔의 꽃이 기억납니까? 파란 잎이 빨갛게 변하는 것입니다. 이파리가 뾰족한 꽃 있습니다. 이 꽃의 유래를 잠간 소개하겠습니다. 포인세티아라는 멕시코의 어느 마을에 병든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마음 착한 소녀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한 명의가 찾아와 말했습니다. “이 병을 고치는 좋은 약초가 있다. 그것을 구해오면 병을 쉽게 치료할 수 있다.” 소녀는 명의가 그려준 약초를 찾아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추위와 허기에 지친 소녀는 나무 밑에서 쉬고 있었습니다. 그때 절벽을 바라보니 명의가 말한 하얀 꽃이 피어 있었습니다. 소녀는 서둘러 절벽을 오르다가 그만 추락하고 말았습니다. 중상을 당한 소녀는 “하나님, 제 엄마의 병을 고쳐야 해요” 라고 소리치며 기도했습니다. 그때 천사가 나타나 피 묻은 약초를 건네주었답니다. 그 순간 소녀의 상처는 씻은 듯이 나았습니다. 절벽의 하얀 꽃은 소녀의 피로 붉게 물들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겨울에 잎이 빨갛게 물드는 포인세티아입니다. 이 꽃이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복하는 크리스마스 꽃입니다. 예수님은 아무 흠이 없는 흰 꽃 같은 분입니다. 그러나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린 붉은 꽃이 됐던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을 향해 사랑을 표현해야 합니다. 입으로 주님을 향한 사람을 고백하십시오. 기도할 때도 무엇을 달라고만 하지 말고 “주님 사랑해요”라고 사랑을 표현하시기를 바랍니다. 입으로만 아니라 구체적인 행동으로 주님을 향해서 사랑을 표현해 보십시오. 사랑하는 주님과 만나기 위해서 시간을 작정할 수도 있습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통해서 주님을 사랑한다고 몸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주님 앞에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드리므로 주님이 내게 가장 귀중한 분인 것을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은 성탄절을 앞둔 대강절 기간입니다. 이제 성탄절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성탄절까지 그분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표현해 보도록 합시다. 각자에게 맞는 방법을 생각하시고 성령의 감동을 따라서 주님을 향한 사랑을 표현하는 대강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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