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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심산의 축복 (신 27: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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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경 : 신27 : 1 - 15절                 
제  목 : 그리심산의 축복

돈 버는 사람은 돈이 굴러다니는 것이 눈에 보인다고 합니다.
그래서 전쟁 통에도 돈이 보이고,
    쓰레기 더미 가운데도 돈이 보인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을 재리에 밝다고 하지요.
그런데 예수님의 씨 뿌리는 비유가운데
마13:22절에 [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한다 ]
          고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재리에 밝은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보화를 발견하고
          그 보화를 소유할 줄 아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말씀 속에서 보화를 발견하는 눈이 뜨였으면 합니다.
       
신명기는 광야생활의 종식, 즉 가나안 입경을 앞두고
      모세의 세 편 설교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그 중에 3번째 설교 서론 부분으로서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면
  제일 먼저 준행해야할 두 가지 규례에 대해 지시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약속하신 복된 삶을 누리는 비결에
    눈이 뜨여지는 은혜의 시간되시기 바랍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거든
    먼저 돌 위에 율법을 새겨서 에발산에 세워라 고 합니다.

1. 율법을 새 긴 돌단을 에발산에 세우라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1-4절)

율법을 세긴 돌비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이기 때문에
    약속의 땅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함을 일깨워 주는         
기념비인 것입니다.
왜 이렇게 돌에다가 율법을 새기게 했습니까?
하나님의 뜻은 돌에 율법 새기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무슨 예술 작품이 필요하겠습니까?
      하나님 말씀 듣고 기억하고 순종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 우리 마음의심비에 하나님의 말씀을 새겨야 합니다
고후3:3절에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편지로서
    [ 돌비에 쓴 것이 아니라 심비에 한 것이라 ] 고 합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의 복된 삶을 누리려면
  먼저 심령에 하나님의 말씀이 새겨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의 삶의 기준과 중심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4절에 보니 여호와 하나님게서
    축복의 산 그리심산에 돌비를 세우라 하지 않고
    저주의 산 에발산에 세우라고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신11:29절 그리고 13절에 보면 에발산은 저주를 선포 받은 산입니다.
그런데 왜 저주의 산 에발산에 돌비를 세워라 고 합니까?
저주의 산 에발산은 바로 죄악 세상을 상징하는 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죄악의 세상을 속량하기 위해
        십자가에 피 흘려 돌아가셨습니다.
오늘 우리의 예배도 세상 속에서 이뤄집니다.
    교회는 본래 죄인인 우리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우리가 다시 살게 된 자들의 모임입니다.
그래서 예배는 이 구속의 감격 위에 드려져야만
    참 예배요 진정한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주석가 쉐이퍼>는                         
[ 에발산에 단을 쌓게 한 것은 저주를 면케 해 주는 희생의 제사가
  반드시 필요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강력하게 일깨워 주기 위해서이다 ]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 위에 드려지는
    오늘 우리의 예배를 통해 저주 끝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건 마치 룻기서에 나오는 룻이
    시어머니 나오미가 섬기는 하나님을 섬기기로 결심할 때
    모압 출신 룻에게는 벌써 저주가 끊겨졌다는 말씀과 같은 것입니다.

이렇게 돌비에 율법을 새겨서 에발산 앞에 세우고
그 다음 돌단을 쌓되 하나님께서 특별히 지시 사항이 있습니다.


2. 돌단을 쌓되 특별히 다듬지 않은 돌로 쌓으라는 이유가 무엇입니까?(5-6절)

5-6절에 보니[ 돌단을 쌓되 그것에 철기를 데지 말찌니
          너는 다듬지 않은 돌로 네 하나님 여호와의 단을 쌓고
        그 위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릴 것이며 ] 
철 연장으로 다듬지 아니한 돌로 만든 단
    즉 다듬지 않은 돌로 단을 쌓아라고 합니다.
      자연석 그대로 단을 만들라는 말인데
      그 의미는 인위적인 요소가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1) 다듬지 않은 돌, 징을 데지 않은 돌
그것은 번영과 풍요의 손길로 갈고 다듬어 번지르르하게 광택을 낸
    천연대리석이 아닙니다.
광야에 구르는 투박한 돌, 아무 장식도 꾸밈도 없는,
평범하고 밋밋한 돌임에 틀림없습니다.
인터넷 글에 보니 오늘날 교회가 대리석으로 치장한 것을 비난하는데
    이 말씀을 그렇게 받아드리면 곤란합니다.
이건 무얼 의미 할까요?
하나님의 집은 진리의 집, 진실의 집입니다.
진실은 일부러 다듬고 꾸미지 않습니다.
빈 수레가 요란하다고, 가짜일수록 치장이 화려하고
      교만한 인격일수록 짐짓 겸양을 떠는 법입니다.
      말도 진실한 말은 굳이 꾸밀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꾸밈없이 진실되게 서라는 것입니다.
바로크 음악은 고전예술의 정수라 불리는데,
바로크 Baroque는 고르지 못한 모양의 진주
    즉 아름다운 진주가 아니라 울퉁불퉁한 모습의 보기 흉한 진주라는       
포르투갈어에서 유래한 말이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앞에서는 꾸밈없이 순전해야 합니다.
저는 사진 걸어놓고, 심지어 운전석에 가족 사진 붙여 놓는 것 별로입니다.
  왜? 혹 내게 우상이 될가바.
그런데 그저께 제 손주 사진 책상 유리 속에 끼워 둔 것 있지요.
    귀엽지요 사랑스럽지요
그게 아니라 하나님, 이 아이의 해 맑은 얼굴처럼
            나도 하나님 앞에 순전하게 살게 하소서 !

진실은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다만 존재할 뿐입니다.
거짓말만이 조작되고 그럴 듯하게 다듬어집니다.
참말은 단순명료하지만, 거짓말은 길고 장황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있는 그대로 단을 쌓고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이 말씀을 다른 측면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2) 당시 사회적 배경에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한 후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지시한 사항입니다.
당시에 세워진 애굽의 피라미드는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진 세계 최대의 건축물인데,
이집트 전체에서 94개의 피라미드가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기자 지역의 피라미드로서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인 쿠프왕의 피라미드인데
  2.5t 되는 돌 235만 개와 10t 되는 돌 268만 개 정도의
  화강암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이렇게 거대한 건축물을 축조하기 위해서는
하루 10만여 명이 1년에 3-4개월씩 20여 년(총 2천여 일)동안,
  그러니 연인원 2-3억 명이 동원되었습니다.
죽은 사람 하나를 위해서, 그 사람을 신의 자리에 앉히기 위해서
이러한 대규모 토목사업과 건축 사업을 하면서
    죽어간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이스라엘의 조상 히브리는 이러한 일에 동원되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의 종살이 할 때에 강제로 동원되어 했던 일을 생각하면
어떠한 형상도 만들지 말고, 흙이나 다듬지 않은 돌로 제단을 쌓으라’는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천주교나 동방교 즉 정교에서 성상 혹 성화를 숭배합니다.
    교회를 대단히 웅장하게 짓습니다.
물론 저들의 교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형상화를 통해
        보이는 은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 천주교인들은
    고딕 교회당이나 마리아 상이나 성상들을 우상화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인간의 손길에 가득히는 분이 아니심을 의미합니다.

그리고는 돌단 위에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고 합니다.


3. 그 위에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는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영적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6-7절)

그리심산과 에발산이 서 있는 세겜 땅은
  약속의 땅 가나안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창12:6절에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들어와 처음 단을 쌓은 곳이요
      하나님께서 이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고 약속하신 곳입니다.
이곳에서 하나님 앞에 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린다는 것은
즉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서 복된 삶을 누리는 비결이
    그 중심이 예배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위에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고 하는데
  번제는 하나님께 온전히 바치는 것 즉 헌신을 의미합니다.
  화목제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말 그대로 화목을 말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예배에 꼭 있어야 할 사항입니다.
예배에 있어서 가장 우선적인 것은 예배에 헌신되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터 위에 세워진 제단이지만
    이제는 우리가 희생의 제물이 되고 헌신되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화목 되어져야 합니다.
하나님과 화목 된 증거가 무엇인가 하면 감격이요 감사입니다.
내일의 가족 여러분, 예배에는 감격이 있어야 하고 감사가 있어야 합니다.
    감격이 없고 감사가 없는 예배는 진정한 예배가 될 수 없습니다.
이번 부흥회 때도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헌신과 감격 속에 감사가 넘치는 부흥회 되시기 바랍니다.
고인이 되신 함석헌 선생이 살아생전 결핵요양소를 방문했습니다.
그런데 환자들에게 따뜻한 위로의 말을 해 줄줄 알았는데
느닷없이 결핵환자들 있는 데서 큰소리로 책망하는 말이
[ 이 폐병쟁이들아 ! 하필이면 왜 폐병이냐.
  죽을병이 걸렸으면 몸 사리지 말고 소리라 도 꽥꽥 치고
  무슨 시를 쓰던 그림을 그리던 비명이라도 질러서,
  고갈된 마음을 뚫어서 은혜의 샘이 솟도록 할 줄 알아야지
        누워서 빌빌되며 아프다고 몸만 사리면 어떻게 살 수 있어 ? ]
          하고 막 욕을 하더랍니다.
아무리 어렵더라도 헌신과 감격이 있는 예배가 되시기 바랍니다.       
살려면 몸 사리는 예배가 되지 말고 몸을 던지는 예배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바울은 처음부터 롬12:1절에
[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쁘하시는 산제사로 드리라
  이것이 너희의 드릴 영적예배니라 ] 할렐루야!

이제 두 번째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하기를
  11절 이하에서 축복하기 위해 6지파를 그리심산에 세우고
          저주하기 위하여 6지파를 에발산에 세우라고 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의 말씀을 들려 줄 때
6지파는 그리심산에 세우고 6지파는 에발산에 세웠습니까?
왜? 그랬을까요? 여기에는 분명히 중요한 신앙적 교훈이 있습니다.


4. 그리심산과 에발산이 우리에게 의미하는 영적 교훈이 무엇입니까?(11-15절)

여호수아가 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이 말씀에 순종할 때
수8:33절에 보면 그 누구도 예외는 없습니다.
온 이스라엘과 그 장로들과 유사들과 재판장들과
  본토인뿐 아니라 이방인까지도 그리심산에 서든지, 에발산에 서든지
  중간에 머무는 사람은 궤를 멘 제사장들 외에는 하나도 없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하면
하나님 말씀 앞에서는 두 가지 반응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축복의 말씀으로 들리어 지든지 아니면 저주의 말씀으로 들리어 진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든지
    아니면 안 듣기워져서 은혜 못 받으면 심령이 죽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내일의 가족 여러분
항상 교회 와서 예배드릴 때 말씀을 청종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설교가 내게 축복의 말씀으로 듣기워지기를 바랍니다.
부흥회를 인도하다 보면 꼭 이틀째나 사흘째 쯤 되면
“ 목사님 이번 부흥회는 나 때문에 한 것 같애요. 전부 내 말입니다 ”
즉 내게 축복의 말씀으로 들려지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좀 더 사실적으로 표현한다면
하나님의 율법 중에는 축복의 약속이 따르는 말씀이 있는가 하면
어떤 율법은 저주가 따르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십계명 중 제 4계명은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그리하면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겠다고 합니다.
5계명 부모를 공경하면 네 생명의 날이 길리라 고 합니다.
그러나 제 2계명 우상 섬기지 말라
    우상 섬기면 나는 질투하는 여호와라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갚으리라 합니다.
그러니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내가 천대까지 은혜를 베풀리라 하면
    그리심산의 6지파가 아멘, 아멘 하고
우상 섬기지 마라 우상 섬기면 내가 삼사 대까지 보응하겠다. 하면
에발산의 6지파가 아멘, 아멘 하며
      우리는 절대로 우상 섬기지 않겠다고 아멘 합니다.
어떻게 보면 아주 당연한 일 같은데
왜 이런 의식을 행하게 했을까? 의문을 가질 수 있는데
여기에는 중요한 예배와 신앙의 교훈이 담긴 진리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구약 주경가 델리취는 이 사실을 두고 하는 말이
[ 오늘날 교회 안에도 이 형태가 그대로 일어난다 ] 는 것입니다.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을 들을 때
어떤 성도는 그리심산에 선 6지파같이
  늘 내게 축복의 말씀으로 들려져 아멘, 아멘 하다가 보면
  하나님께서 언제 내에 이렇게 복을 주었는고. 하지만
어떤 교인에게는 늘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을 듣지만
    내가 저주 안 받으려고 
    대로는 체면과 외식으로 아멘, 아멘 하다가 보면
    그 삶이 말라 들어간다. 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신29:18절에 보면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 그 마음이 하나님을 떠나 그 마음에 독초와 쑥의 뿌리가 나서 ] 그렇다고 합니다.
결과 심령이 강퍅해져 우상 섬기면 망한다 해도
설마 뭐 그럴까봐 목사들 다 하는 소리 아니가? 하면
이런 사람은 내가 그 죄를 사하지 않을 뿐 아니라
        분노와 질투의 불로 그의 위에 붓게 하고
        그 이름을 천하에서 도말하겠다 고 합니다.
이 독초의 뿌리 쑥의 뿌리가 뭡니까?
신약으로 말하면 히12:16절에 나오는 쓴 뿌리입니다.
쓴 뿌리가 어떻게 나오는지 한 번 들어보세요.             
[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
망령된 자가 뭡니까? 망조가 든다는 말입니다.
결국 [ 저가 그 후에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
절말 불행한 에서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일들이 오늘날 교회 안에서 계속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에
    경각심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물질 때문에 하나님 말씀이 내게 축복의 말씀으로 안 듣기워지는 교인들
히12:28절 하나님의 소멸하는 불이시니라. 고 합니다.
이 성령의 불로 그 마음을 태우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부흥회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우리가 그리심산의 축복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5. 어떻게 하면 우리도 그리심산의 축복을 누릴 수 있을까요?(8-10절)

8절에 [ 너는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그 돌들 위에 명백히 기록할찌니라 ]
왜 명백히 기록하라고 합니까?
  물론 하나님의 언약이기 때문에 잊지 말라는 의미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심령에 새겨져야만 거기에서 생수가 솟아나옵니다.

민중신학을 주창했던 한국신학대학 <안병무 교수>의 글에 보면
우리의 생명에는 무한한 생수가 있는데
    나는 요새 그것을 기(氣)라 는 말로 자꾸 생각되어진다고 합니다.
사람에게 기가 있는데 모든 문제는 기가 막혀서 생긴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누구에게 기가 가장 강하게 솟아나는가? 하면
    자기 자식에게 라고 합니다.
        왜? 새끼이기 때문입니다.
        즉 자식은 새기, 즉 새로운 기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사이는 이 기도 막힌다는 것입니다.
하여튼 그게 열리면은 별일이 다 있고 놀라울 정도의 모성애가 발동합니다.
이 기가 통하면은 기적이 일어납니다.
  내가 왜 이렇게 무능한 사람일까? 내가 왜 이렇게 답답한 사람일까?
      그게 기가 막혀 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생수가 솟아나지를 않아 고갈되어 무기력한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기죽어 살면 안됩니다. 기 죽지 마세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수가성 여인에게 하는 말이 요4:14절에
[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
안병무 교수의 말대로 한다면
예수님이 주시는 물을 마시면 우리 속에서 기가 펑펑 솟아난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돌에다가 율법의 말씀을 명백히 새기라고 합니까?     
그리고 9절에 [ 이스라엘아 잠잠히 들어라 ] 고 합니다. 
말씀이 듣기워지면 기가 통하고 살아서
    하나님 백성의 삶에 놀라운 역사가 나타날 줄 믿습니다.
겔37장에도 보면
에스겔 골짜기에 마른 해골 떼들이 군대를 이루는 대역사가 나타나는데
거기에도 말씀을 통한 성령의 역사를 생기의 역사라고 합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에스겔 선지자에게 하시는 말씀이
    생기야 이 사망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게 하라고 명하십니다.
그때 에스겔이 생기야 불어라 하니 일어나 곧 큰 군대가 되더라고 합니다.
이번 부흥회를 통해 말씀을 듣고 마음에 새길 때에
    내 심령에 나의 삶에 생기의 역사가 나타날 줄 믿습니다.

2) 왜? 하나님께서 그리심산을 축복의 산, 에발산을 저주의 산으로 정하였을까요?
구약 주경가 <델리취>는
[ 하나님은 이렇게 자연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교훈 하시는데
그리심산은 항상 햇빛을 바라보는 산이요
에발산은 항상 햇빛을 등지고 있는 산이기 때문이다 ]
그리심산과 에발산은 다 세겜 성 근처에 있는데
너비가 200미터 정도 되는 골짜기 하나를 두고
    남북 방향으로 서로 마주 보고 있습니다.
그리심산은 855m 정도의 높이가 되고 에발산은 920m의 높이입니다.
        이 두 산을 하나님께서 택하신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이 두산이 인근에 골짜기 하나로 붙어 있지만,
  그리심산은 산림이 무성하며 생명의 기운이 왕성한 산이요,
  에발산은 거의 황폐하다시피 한 산입니다.
  지금도 그리심산은 나무가 무성하고 에발산은 민둥산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그리심산은 햇빛을 바라보고 있어 일조시간이 길어 항상 밝은 곳이고,
  에발산은 햇빛이 잘 들지 않아서 그늘진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내가 지금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고 섰다면
    그리심산에 서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에 무관심하다면                   
    나는 지금 에발산에 서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고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면
      반드시 이번 부흥회가 내게 축복의 말씀으로 들려질 줄 믿습니다
(김성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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