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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대림절] 메시야의 오심 (눅 4: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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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야의 오심 (누가복음 4:16-21)

인생은 기다림의 연속이라고 말합니다.  대학 진학을 앞둔 학생들과 가족들은 지금 합격 통지서가 날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으며, 학위 과정에 있는 학생들은 지금의 힘든 모든 과정을 마치고 영광스런 졸업식장에 들어설 날을 고대하며 책과 씨름하고 있습니다.  결혼을 앞둔 예비 신혼부부들은 결혼식 날을 기다리며 가슴이 부풀어 있고, 복중에 아기를 가진 부부들은 건강한 아기가 태어나기를 손 꼽아 기다리고 있습니다.  연구실에서 시간과 다투며 일하는 분들은 새로운 결과물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나라에서는 새로운 대통령 만들기에 온 나라가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너도나도 나라의 앞날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또는 염려하는 마음으로 새로운 세상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무려 12명이나 되는 대통령 후보가 등록하여 서로 자기가 가장 적합한 사람이라고 외치며 나를 뽑아달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이런 복잡한 상황에서 국민들은 이번에는 좀 더 나아지겠지 하는 기대감으로 후보들 중에 누군가를 마음에 정하고 신성한 주권을 행사할 그날이 오기를 기다리며 살고 있습니다. 

심리학자William Marston이라는 분이 3천명을 대상으로 사는 목적이 무엇인가에 대한 주제로 리서치를 했는데 응답자의 94%가 대답한 내용을 종합해 본 결과 삶의 목적이 ‘기다림’에 있었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그 많은 시간에, 그 많은 마음과 생각을 전부 기다리는 일에 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주보에 소개한 것처럼, 지금 교회는 대림절 기간을 지나고 있습니다.  대림절은 성탄절 직전까지 4주 동안을 말하며, 문자 그대로 주님이 오심을 기다리며 그 오심의 의미를 생각하는 기간입니다.  우리를 구원하러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감사를 드리고 우리의 죄를 회개하며, 죄 가운데 살던 나를 용서하신 주님의 사랑을 본 받아 이웃을 사랑하고 평화를 위해 힘쓰면서 하나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는 기간입니다.  예수께서 낮고 천한 말구유에 오신 것처럼 겸손히 낮은 마음으로 주님을 기다리며, 어려움을 당한 이웃을 생각하며, 영광스럽게 재림하실 그리스도를 맞이할 준비를 하는 기간이기도 합니다.

예수께서 어린 아기로 세상에 탄생하시던 당시 2천년 전 팔레스틴의 이스라엘 사람들도 그 땅에 그리스도가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미 700년 전에 메시야의 오심을 예언했던 선지자 이사야의 말을 따라 이스라엘 사람들은 메시야를 기다림으로 그들의 고난과 슬픔을 이기며 살아왔습니다.  이사야 61장은 메시야의 임하심을 이렇게 예고하고 있습니다.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사 61:1-3)

이스라엘의 백성들은 이사야의 예언대로 오실 메시야를 기다리며 내일에 대한 희망 속에 오늘의 거친 나날을 참고 견디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내일은 오시겠지’ 하는 이런 기다림 속에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다윗의 고향 베들레헴에 어린 아기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여전히 기다림 속에 살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께서 고향 나사렛을 방문하였을 때 늘 하시던 대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성경을 읽으려고 섰을 때 마침 성경을 관리하는 사람이 예수께 이사야의 글을 건네주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사야의 글 가운데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을 사람들 앞에서 낭독하셨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눅 4:18-19)

그리고는 책을 덮어 관리하는 사람에게 주시고 앉으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이 읽은 말씀에 대하여 무엇이라 강론하시려는 지 그 입을 주목하였습니다.  그때 주께서 하신 말씀은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였습니다.  갈릴리 나사렛 사람들이 그토록 기다리고 있으며, 모든 이스라엘이 고대하던 메시야의 임하심이 오늘 이 글을 읽는 자신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선언이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가 허물 많고 연약한 사람의 모습으로 우리들 속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가 오심을 알지 못하였고 영접하지 못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병들어 고통 당하는 사람들과 신체 불구자로 살아가는 딱한 사람들을 건강하게 회복시켜주셨고, 사람들에게 버림 받고 멸시 당하던 죄인들을 용서하시고 그들의 상한 마음을 고치시며 친구가 되어주심으로 이사야의 예언을 이루셨지만 사람들은 그가 예언대로 오신 메시야이신 줄 깨닫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자신들이 기대했던 방식처럼 그리스도가 위엄 있고 화려하게 오시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오실 메시야는 그 옛날 다윗의 영광을 회복하며 등장하리라 기대했는데 나사렛 목수의 아들이 자신들의 메시야라로 왔다고 하니 도무지 이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메시야가 지금 오시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정치와 종교, 경제를 한 손에 쥐고 있는 그 시대의 주권자들이었고 중심부에 살던 특권층이었습니다.  메시야가 오시면 지금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권력과 재물과 특혜를 다 내려놓아야 한다는 두려움 때문에 메시야가 더디 오시기를 기대했을 수도 있습니다. 

아일랜드 출생 프랑스 희극 작가 사뮤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작품에 기다림이라는 주제가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 작품에 나오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곤 은 길가의 작은 나무 옆에서 고도(godot)라는 사람을 기다립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그들이 기다리는 고도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외모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를뿐더러, 고도라는 사람에게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고, 그가 언제 올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 그뿐 아니라 그들이 기다리는 고도라는 사람이 실제 존재하는지조차 확신하지 못하면서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실체가 없는 '고도'라는 인물을 기다리는 내용을 그린 이 희극은 구원을 목마르게 기다리는 인간의 내면을 잘 표현하고 있을 뿐 아니라, 기다려도 아예 오지 않거나 오더라도 처음에 기대했던 것만큼 좋지는 않을 그 무엇인가를 기다리며 살아가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힘으로 해결 할 수 없는 문제 혹은 스스로 극복할 수 없는 한계상황을 만나면 그것을 해결해 주는 도움의 손길을 막연하게나마 기다리게 됩니다.  아니면 적극적으로 그것을 찾아 나서기도 합니다.  그것이 친구일 수도 있고 가족일 수도 있고 그들이 믿는 초월적 존재일 수도 있습니다.  내일이면 뭔가 달라지겠거니 기다리는 막연한 희망과 같은 기다림이나 찾음은 블라디미르와 아스트곤이 기다렸으나 결코 만날 수 없었던 "고도"와 같을 뿐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약속하신 구원은 실현 불가능하고 실체가 불확실한 막연한 희망이나 기다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성실하게 이루시는 우리의 도움이시며 구원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는 이사야의 예언대로 육신으로 이 땅에 오심으로 고난 받는 종으로서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셨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심으로 보냄 받으신 그 사명을 다하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성경이 약속하고 있는 것처럼 다시 오실 구주이십니다.

이번 성탄을 맞이는 교우 여러분은 아무리 기다려도 결코 만날 수 없는 것을 기다리고 거기에 기대를 거는 것이 아니라 약속대로 이미 오신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기다림으로 주님께서 주시는 영혼과 육신의 평안과 기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 각자의 마음과 삶 속으로 들어오십니다.  그리고 온 우주가 확실히 알도록 공공연하게 임하실 것입니다.  이사야의 예언을 이루시며 2천년 전에 우리를 구원하러 유대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주님은 이제 온 우주적인 심판과 종말을 향해 오고 계십니다. 

지금 마음이 가난하고 고달픈 사람들, 지금 억눌리고 병들어 아파하는 사람들, 고난 받는 사람들을 향해 주님은 오고 계십니다.  요한계시록 3장20절에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하시며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분이 나의 삶의 주인이 되시도록 자리를 내어드리시기 바랍니다.  그가 나를 다스리시고 나를 치료하시며 나를 회복하시도록 내 삶의 중심에 주인으로 영접하는 대림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지난 주간에 이스라엘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는 김 선교사님으로부터 기도편지를 받았습니다.  선교사님의 신변 안전을 위하여 이름을 밝힐 수는 없지만 위하여 늘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편지 내용을 일부 소개합니다.

“온통 녹색으로 바뀌는 광야를 기대하며 반년 남짓 뜨거운 태양이 이 땅을 뜨겁게 달구어도 참을 수 있었습니다.  이른비가 내리면 온 대지의 목마름을 채울 것이고 사람들의 마음도 시원하고 넉넉해 지지 않을까요?  곧 신록이 우거진 이 땅을 보게 됩니다.  우리를 위로 하시는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임을…

이제 겨울입니다.  물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 비가와도 우산을 쓸 수가 없습니다.  올 여름은 유난히도 길었고 뜨거웠습니다.  물론 겨울은 춥습니다. 집도 춥고 길도 춥고 햇빛이 없으면 더운 물도 사용 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우린 비가오면 좋습니다.  구름 한 점 없던 하늘이 온통 회색 구름 입니다.  멋있습니다.
올 이른비의 냄새는 비가 올 것 같은 냄새를 멀리서도 맡을 수 있었습니다.  여름이 길었던 만큼이나…  기다림이란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 해봅니다.  주님이 오시기를 기대하는 자들만이 그분이 오시는 냄새를 맡을 수 있지 않을까도 생각해 봅니다.  뒤 돌아보지 않고 앞 만보고 가야 되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옆도 보지 않고 말입니다. 그 냄새를 맡으면서 말입니다.”

영국에 있는 우리는 긴 겨울의 비가 지겨워 따뜻한 태양빛을 기다리는데 이스라엘에서는 긴 건기를 지나면서 메마른 대지를 흡족히 적실 단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마치 메마른 우리의 삶에 주께서 단비처럼 임하기를 기다리듯이…. 얼마나 목마르게 기다리는 비였으면 멀리서도 비의 냄새를 맡을 수 있다는 표현이 너무나 절실하게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2천년 전에 오셨던 주님은 역사의 종말을 향해 다시 오십니다.  다시 오실 주님은 <고도를 기다리는 사람들>처럼 끝없이 막연한 내일의 희망을 품다가 절망에 이르게 하는 분이 아니시라 약속대로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이십니다.  우리의 참 행복과 구원과 자유함은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으로부터 임합니다.  비를 기다리는 농부처럼, 멀리서부터 오는 비의 냄새를 느낄 수 일을 만큼 예민한 사람들처럼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에 민감한 사람들로 이번 성탄절을 기다리며 또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성도들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지금 무엇을 기다리고 있든지 그 기다림이 주님과 함께 하는 기다림이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지도와 인도하심을 받는 복된 기다림이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기다림의 보람을 꼭 얻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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