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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께서 오신 목적 (마 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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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오신 목적 (마 20:28 중심으로)
 
성탄절이 가까워지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음이 들뜹니다. 불신자들조차 이 날은 기쁘고 즐겁게 보내야 할 날로 인식합니다. 물론 기뻐하는 이유는 저마다 다릅니다. 장사꾼들은 대목이어서, 아이들은 선물 받을 수 있어서 기뻐할 것입니다. 성도는 어떤 이유로 성탄을 기뻐해야 할까요?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모르거나 혹은 잘못 알고 있다면, 비록 성탄절에 큰 축제를 벌이며 기뻐할지라도 그것은 전혀 의미 없는 행사가 될 것입니다. 오늘은 주께서 오신 목적을 중심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주님께서 오신 목적에 대한 오해 두 가지를 집고자합니다. 첫째는 현실적인 문제들의 해결을 위해 오셨다는 오해입니다. 괴로운 인생살이의 많은 문제들을 해결해주시기 위해서, 최소한 예수 믿고 덜 괴로운 인생살이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 달리 말하면 예수 믿고 이 땅에서 복 받도록 하기 위해서 오셨다고 생각하는 입장입니다. 이런 생각은 완성될 천국을 의미 없게 만들어버립니다. 주님 의 재림이 소망이 되지 못하게 합니다.

두 번째는 예수 믿고 천당 가게 하시려고 오셨다는 오해입니다. 이렇게만 생각하면 이 땅에서의 삶은 무의미하게 됩니다. 오늘 하루의 삶에 대해 애정을 가질 수 없고 의미도 찾을 수 없습니다. 허무한 인생 빨리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기독교 염세주의자가 되겠지요. ‘예수 이 땅’만 외치는 것도 ‘예수 천당’만 외치는 것도 바르지 않습니다. 물론 주님을 믿으면 복 받고 천당 가겠지요. 문제는 그것이 주님께서 오신 목적의 전부인 것처럼 곡해할 때 생깁니다.

그러면 우리 주님께서는 어떤 목적으로 이 땅에 오셨을까요? 예수님께서 친히 그 목적을 말씀하신 마태복음 20:28절을 읽겠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대속물로 자기 목숨을 주시기 위해 오셨다는 말은 인간의 죄책을 해결하고 죄의 세력으로부터의 자유케 하기 위해 오셨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때에 “다 이루었다”(요 19:30)고 하셨습니다. 그 순간까지도 세상에는 여전히 가난한 사람들, 연약한 병자들, 억울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당신님께서 오신 목적을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신 것은 죄의 문제에 대해 완전히 해결하셨기 때문입니다.

복음이란,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행하신 객관적인 역사적 사실들과 그 사실들에 대해 하나님께서 계시해주신 해석입니다. 복음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행하신 일에 대한 선포입니다. 이처럼 신약 성도들에게 있어서 복음은 본질적으로 ‘이미 성취된 그 어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현재적으로 믿는 사람들 중에서 행하고 계시는 것은 복음의 열매입니다. 성도는 복음의 열매를 말하기보다는 복음 자체를 전파해야 할 사람입니다. 열매는 이렇게 나타나기도 하고, 저렇게 나타나기도 할 수 있지만 복음 자체는 변할 수 없습니다. 설교 서두에 지적한 두 가지 문제점은 복음의 열매에 속하는 것을 복음 그 자체인 것처럼 오해한 것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대속물이 되셔서 택하신 자를 구원하신 것은 단순히 그가 죄를 용서받고 죽은 후에 천당 가도록 하기 위해서만이 아닙니다. 복음은 죄로 말미암아 깨어진 하나님과 인간과 만물의 관계가 총체적으로 회복되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것은 단지 아담이 낙원에서 살던 것과 같은 상태로의 회복을 뜻하지 않습니다. 아담에게도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게 되면 도달하게 될 더 나은 상태가 있었습니다. 그가 선악과를 따먹지 않으면 얻을 수 있었던 더 나은 생명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상태와 생명에 대해서 성경은 ‘새 하늘과 새 땅’ ‘영생’이라는 단어들로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죄 사함을 받아 이미 영생을 얻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상속받기로 된 그 존재에 대해서 ‘새사람’ ‘새로운 피조물’ ‘하나님의 자녀’라는 단어들로 표현했습니다. 이 새로운 피조물은 세상에 있으나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아주 독특한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독특한 존재가 이 땅에 있는 동안 개별적인 존재로 살아가도록 의도하지 않으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2:27은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 했습니다. 로마서에서도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롬 12:5)고 했습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오신 목적과 관련해서 생각해야 할 두 번째 과제입니다. 주님께서 죄를 사해주신 것은 곧장 천당에 들여보내시려 함이 아니라, 이 땅에서 죄 사함 받은 자들이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그분의 영원한 생명을 나타내며 살아가도록 하시려는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도 각자에게 각양 은사를 주시고, 각양 직분을 주신 이유에 대해 성경은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 4:11-12)고 했습니다.

죄 사함을 받고 새 피조물이 되는 순간, 성도는 예수님을 머리로 두고 있는 몸의 한 지체가 됩니다. 그는 우주적 교회의 한 부분입니다. 따라서 교회를 떠나서는 구원도 없는 것이고,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b)는 말씀은 그분의 생명을 드러낼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입니다. 팔 다리가 각기 저 혼자 따로 존재한다면 그것은 생명력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성도는 독립적으로 그리스도의 생명을 나타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존재 가치나 의미조차 느낄 수 없습니다. 이점에서 성도의 삶은 인격수양과 관련된 타 종교와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성도는 언제나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 살아가야 할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머리의 지시를 받는 한 몸의 지체로서 역할을 하고 있을 때에만 가치 있고 의미 있고 생명력 있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우주적 교회의 본질이 볼 수 있는 형태도 드러나서, 그리스도의 생명을 잘 드러내야 할 존재가 우리 교회와 같은 지교회입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는 지교회가 그리스도의 생명을 잘 드러내지 못함으로 인해, 성도들이 오히려 상처를 받고 실망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런 일이 반복되다보면, 하나님 믿고 혼자 바르게 살면 된다는 생각을 가지기 쉽습니다. 하지만 이는 전혀 정당하지 않은 생각입니다. 그는 아파도 몸의 한 부분으로서 아파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회복이 몸 전체의 회복과 관련된 것임을 생각하고 회복되어야 합니다.

저는 지난 6년 동안 매주 서울을 오르내리며 신학을 공부했습니다. 이제 신학석사학위논문이 통과되고 졸업을 앞두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감사드리는 동안 성도님들의 존재 자체가 저의 신학 공부를 의미 있게 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교회의 위한 신학 공부였기 때문에 참으로 가치가 있었고 의미가 있었습니다. 단지 신학 자체를 위한 신학공부였다면 의미 있게 공부하기 힘들었을 것이고, 지난 6년의 기간도 그리 가치 있게 느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성도는 모든 활동에 있어서 교회의 일부로서 해야 합니다. 결혼과 구직을 위한 준비도 교회의 일부로서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즉시로 의미가 상실되고 맙니다. 내게 주신 은사가 교회의 지체로서 가진 은사임을 알고 전체 몸을 세우는 일에 봉사하고 있지 못한다면, 필연적으로 그는 허무함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비록 그가 하루 종일 부지런하게 무언가를 하고 있을지라도 그다지 가치를 느끼지 못할 것이 분명합니다. 성도라는 존재는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로서 활동할 때에만 가치 있고 의미를 느낄 수 있는 아주 독특한 새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은 이것을 ‘자아’라는 말과 상대되는 말로 ‘교회아’라는 단어로 표현 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후에 이 땅에 그분의 몸을 남겨두신 목적이 무엇일까요? 왜 죄 사함을 받는 순간에 함께 승천하게 하지 않으셨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 곧 은혜의 왕국이 이 땅에서 잘 드러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구속사를 통해서 진행되는 하나님의 언약이 지향하는 목표입니다. 그것은 언약의 내용이며, 신구약 전체의 중심주제입니다. 구약의 성도들은 이 나라가 임하는 날을 학수고대하며 살았습니다. 신약의 성도는 이미 임한 하나님의 나라에 살면서 완성된 하나님 나라를 고대하는 존재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영역에서 그분의 통치를 받아서 살아가는 그분의 백성들의 삶을 통해 드러나게 됩니다. 그래서 그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며, 성도들의 공동체 안에 있습니다(눅 17:20-21). 지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특성이 삶의 어떤 현장에서보다 더 잘 드러나야 할 곳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교회답게 세워지도록 헌신하는 일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 나라가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서라도 얻어야 할 만큼 가치 있는 “감추인 보화”요 “지극히 값진 진주”로 비유하셨습니다(마 13:44-45). 젊은 부자청년에게는 직접 가진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고 명령하기도 하셨습니다(막 10:21). 또한 제자들에게는 “오직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눅 12:31)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반면에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는 다면 참으로 무가치 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막 8:36).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그 나라를 드러내며 살아가기 위해서라면, 전 재산을 다 나눠주고서라도 예수님을 바르게 좇아가는 것이, 많은 재물과 함께 이 땅에서 호의호식하는 것보다 낫다는 ‘전혀 새로운 가치관’은 오직 새로운 피조물만이 가질 수 있는 가치관입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바로 그 날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기쁜 날이 아니었습니다. 그로부터 대략 30년의 기간 동안에도 우리 주님께서 오신 목적을 바르게 알고 기뻐하는 사람은 극소수였습니다. 동방박사들과 양치는 목자들 몇 명, 안나와 시므온 등이 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는 전부입니다. 제자들조차도 예수님의 부활 전까지는 그분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에 대해서 바르게 알지 못했습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에 대한 바른 이해를 통해서, 성탄절을 단지 연중 축제 행사처럼 보내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새로운 피조물로서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며 보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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