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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대림절] 내 백성을 위로하라 (사 35:3-10, 약 5: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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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백성을 위로하라 (사 35:3-10, 약 5:7-8)

오늘이 대림절 벌써 셋째 주일이 됐습니다. 오늘 세례요한이 우리에게 말씀주시기 위해서 지금 강가를 걷고 있는데요. 세례요한이 걷고 있는 강가 이름이 요단강입니다. 요단강 주변을 뱅뱅 돌면서 세례요한이 하시는 말씀입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면 여러분이 기다리는 메시아가 와서 여러분이 원하는 위로의 복음을 주십니다. 사실 세례요한이 오늘 왜 강가를 돌면서 이 말씀 하실까요. 요단강 언덕길을 거닐며 위로의 복음을 주시는 하나님. 그 메시아가 오십니다. 여기 위로의 복음이라고 써있습니다만. 위로의 복음은 오늘 이사야서 40장을 보면 하나님이 오셔서 찢긴 심정을 위로해 주고 분열된 민족도 하나 만들고 포로로 잡혀진 백성을 자기 땅으로 돌려보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위로란 말이 그냥 심리적 위로가 아닙니다. 위로는 자기 실존적인 삶에, 사회는 자기 사회적 형편을, 나라는 나라의 운명을 완전히 뒤바꿔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새로운 아니 우리가 염원한 새로운 사람과 가정과 사회와 나라를 완전히 뒤바꿔 주십니다. 그 말씀을 여호와 하나님은 위로하러 오신다. 변화시켜서 복 받게 오신다. 이 말씀을 세례요한이 지금 요단강변을 돌면서 하고 있습니다. 제가 오늘 요단강 얘기를 드리려는 게 목적은 아닙니다. 세계문명을 보면 모든 문명의 핵심에 항상 강이 들어와 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은 나일 강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이집트 문명의 한 복판에서 살았습니다. 한 400년 살았습니다. 그 나일 강 문병이 그것이 국가도 되고 왕조도 되고 모든 문명을 포함한다고 칩시다. 이 나일 강 문명의 주인은 이집트 사람이고 이스라엘 백성은 40년 동안 종살이 하면서 지냈습니다. 죄인이 아니라 종살이 지내면서 나일 강 문명에서 그냥 먹고는 살았는데 마지막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라는 지도자를 통해서 나일 강을 탈출하여 본래 하나님이 약속하신 요단강 문명으로 가자. 나일 강에서 요단강으로 대 이동입니다.

대 이동의 중간지대가 사막입니다. 광야에서 40년을 살았습니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은 한 가지 약속가지고 요단강으로 갑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그 말은 굉장히 좋은 말 같습니다만 사실은 젖과 꿀은 목축업을 잘하는 땅, 산림이 우거진 땅. 요단강변의 날씨나 지형이나 더 이상 알 수가 없습니다. 어느 경우는 나일 강보다 나쁠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일 강에서 누리는 종살이 보다는 요단강에서 누리는 주인이 훨씬 좋다. 그런데 요단강에 가면  나일 강에서 먹고 사는 방식이 아니라 요단강식으로 먹고 사는 방식이 있느니라. 그리고 거기는 선택받은 백성이 사는 속박이 아닌 아름다운 희망의 찬가를 부를 수 있는 땅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이 기꺼이 왔습니다. 한참 살아서 요단강 문명을 꽃피웠습니다만. 솔로몬 때까지도 아름다운 찬란한 요단강 문명을 꽃피웠습니다만 그다음에 남북으로 갈라지고 도덕도 헤이해지고 신앙의 열기도 약해지면서 이스라엘 백성은 요단강 문명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바빌론이라 이름 하는 나라가 등장하여 요단강 민족을 완전히 점령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요단강에서 둥지를 틀고 살다가 바빌론의 속국이 되어 지도층은 전부 바빌론으로 강제 이송을 당합니다. 지금 바빌론 이란 나라는 현재 세계지도를 놓고 보면 이라크라는 나라입니다만 이제 요단강 중심부가 강제로 이주를 당해서 바빌론의 중심인 유프라테스 강 주변으로 몰려들기 시작합니다. 요단강에서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농사를 짓고 유목을 했습니다만 유프라테스 강에 와서는 농사가 아니라 완전히 강제노역에 동원이 됩니다. 거기서 비참한 생활을 합니다.

얼마나 비참하냐 하면 바빌론이 만들어 논 종교에 다 귀의를 해야 되고 또 바빌론이 강요하는 모든 사회 규범을 지켜야 되고. 끝까지 지키지 않으면서 고수한 게 한가지 밖에 없습니다. 그건 뭐냐 하면 우리 유대 백성은 유대 백성으로서의 생존의 근거를 안식일에 두겠습니다. 안식일만은 강제노역에서 전부 탈피했습니다. 지금 오늘 본문의 말씀대로 느브간네살이라 이름 하는 왕이 유대 성전을 다 멸망시키고 유대 백성을 전부 바빌론으로 끌고 갔습니다.

그 사람의 아들 되는 느브간네살 2세가 얼마나 폭정을 했던지 유프라테스 강은 지긋지긋한 강제노역의 상징입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 백성을 강요했는데 이스라엘 백성은 거기서 좌절과 분노 속에 약속받은 하나님의 위로만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근데 이때 이사야가 등장해서 얘기를 합니다. 여러분의 삶터를 유프라테스 강의 강제 노역에서 해방하여 다시 요단강으로 보내주겠다. 단 조건이 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대들을 해방시켜 위로해 주시려고 지금 오시겠는데 다만 길 좀 닦아라. 그 길은 여러분의 살아가는 현실이 계곡이라고 하면 하나님이 너무 기뻐서 계곡 속에 빠질 수 없다. 계곡을 메워라. 그대들이 너무 교만하면 산등성이라도 좀 깎아서 길 좀 평탄케 하라. 거친 마음씨나 거친 부도덕 불의가 있으면 평탄케 해라. 너무 험난한 산골이 있으면 평지로 만들어라. 큰 길을 만들어야 위로의 하나님이 그곳에 오신단다. 지금 만들자. 이 얘기를 들으면 아마 유대 백성은 지금 유프라테스 강가에서 티그리스 강가에서 강제 노역에 시달리면서 우리에게 꿈 주시고 해방주시는 하나님. 옛날에 나일 강 요단강으로 인도해주신 하나님. 이젠 유프라테스에서 요단으로. 얼마나 꿈에 찼겠고 희망에 벅찼겠습니까? 오늘 이 말씀을 이사야서 40장에 합니다.

단 여호와 하나님은 그냥 멍청하게 있을 때 오시는 게 아니고 길 만드는 사람들한테 온다. 세례요한도 똑같은 얘기 반복입니다. 메시아가 내 뒤에 오고 계신데 아무한테나 오는 게 아니라 메시아는 길 닦게만 온다. 그 길은 어떤 길이냐 하면 신들의 거만과 오만과 욕심이 있으면 깎아야 오지 너무 좌절과 질곡에 헤매는 사림이면 메워야 오지 교만한 마음씨나 허약한 마음 사악한 마음씨 가지고 있으면 평탄하지 않아서 못 오는 거지. 그러므로 우리는 메시아가 오는 길을 닦는 거로 족하다. 길 좀 닦아라. 그 말을 세례요한은 회개하라 그랬습니다.

회개가 다른 게 아니라 길 닦아라. 그러면 그 길로 위로주시는 여호와께서 오십니다. 저는 이 말씀을 보면서 지금부터 한 2500년 전에 이사야가 읊었던 유프라테스 강가에서의 희망의 노래. 이사야서 40장입니다. 2500년 전에 다시 요단강에 외서 세례요한이 요단 강가를 돌면서 다시 유대백성이 부른 희망의 노래. 길 닦자. 2000년이 흘렀습니다. 오늘 우리는 요단강 갈 필요가 없습니다. 한강 둑을 걸으면서 하나님 2007년 지금 저희들이 길닦이를 할 테니 잘못한 거 사죄할 테니 굽은 길 펼 테니 굽은 마음씨도 펼 테니 오늘 위로의 복음을 들고 이 땅에 오시지 않겠습니까? 하고 한강변 돌아봅시다.

세례요한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우리 보고 메시아를 맞을 세례요한 비슷한 여건을 하라고 오늘 이 주일에 저희를 부르십니다. 뭘 어떻게 하시렵니까? 세상의 역사를 보면 요단강 이야기, 희망의 이야기, 길 닦는 이야기. 이런 이야기 들이 엄청난 역사적 정치적 혁명을 통해서 오는 게 아닙니다. 미술 작품 그림 하나로 위로해주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큰 감명을 주고 역사를 바꿀 수 있습니다. 곡 한편이 노래 하나가 세상의 역사를 바꿀 수 있습니다. 오늘 제가 작은 노래하나 소개하겠습니다. 나부코. 오페라 극입니다.

베르디라는 작곡가가 만든 나부코. 저도 아주 좋아합니다. 나부코라는 사람은 19세기 사람인데 이태리 북부 밀라노에서 태어난 사람입니다. 농촌 출신의 여관집 아들. 가난했고 그러나 너무 재능이 있어서 15살 때부터 작곡을 시작했고. 자기 은사님의 딸과 결혼해 두 아들을 가졌으나 일찍 다 여의고 홀로 남은 외로운 사람. 그러나 다시 결혼했고 또 장인 되는 사람이 격려해줘서 이제 오늘 이사야서에 기록된 이야기. 유프라테스 강에서 강제노역에 시달리는 히브리 강제노역자들이 부르고 싶었던 희망담은 염원을 개사하여 당시 자기가 살던 이태리 북부 밀라노. 밀라노가 19세기에 오스트리아의 식민지로 있었습니다.

내 조국 밀라노가 자유하고 싶다. 희망을 받고 싶다 위로를 받고 싶던 그 테마를 당시 2500년 전 우리의 이스라엘 백성이 유프라테스 강에서 강제 노역 때 불렀던 희망가를 개작하여 가사를 만들었습니다. 이 가사에 베르디가 곡을 붙였습니다. 이 곡 이름이 나부코. 그런데 나부코라는 말은 그냥 붙인 게 아니고 당시 이스라엘 백성한테 지긋지긋하게 억누르고 지배했던 왕. 느브간네살을 개칭한 이름입니다. 여기에 제 3막에 보면 우리가 감동적인 가사가 나옵니다.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 그런 제목이지요. 내 마음아 황금빛 날개로 언덕위에 날아가 앉아라. 아름답고 정다운 내 고향. 산들바람 불어주는 내 고향. 요단강 강물이 인사하고 시온 성 무너진 탑 좀 보아라. 빼앗긴 내 조국 내 마음속에 사무치내. 그대들 위해 오늘 주님의 위로하심이 주님의 자비가 풍성하게 임하리라. 이 노래를 듣고 이 노래가 1842년 밀라노의 스칼라 극장에서 처음 공연됐을 때 밀라노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이것은 유프라테스 강에서 희망을 노래하던 유대백성의 노래가 아니고 그때가 다시 2000년이 지나서 옮겨온 우리들의 노래. 이 노래 한편을 듣고 엄청나게 위로를 받았고 물론 독립이 됐습니다.

이 노래는 밀라노 사람들의 위로의 노래, 위로하는 하나님의 백성의 노래. 나부코라 이름 하는 느브간네살의 변형된 이름 속에 이 사람들은 그 노래로 위로를 받았습니다. 위로의 내용은 하나님은 위로하러 오신다. 내 백성을 위로하러. 오페라를 불렀습니다. 그때 밀라노 백성들의 기록을 보면 그 노래를 부르면서 우리의 비공식 애국가라고 하자. 국민찬가. 그걸 밀라노 사람들이 부르면 좋은데 우리도 부르고 있지 않습니까? 밀라노가 아닌 우리도 그 노래를 부르고 감동을 받습니다. 그래서 노래 한편이 온 세상을 뒤집고 가슴을 후벼놓습니다. 희망 찬가로요. 하나님이 위로하러 오신다. 저는 오늘 요단강이 아니고 제가 한강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밀라노 백성도 아니고 이스라엘 백성도 아니고 우리 백성이 오늘 이사야서를 읽고 누가복음을 읽고 세례 요한 얘기를 듣고 이사야 선언을 듣고 하나님 오늘 우리에게 진실로 위로해 주옵소서. 우리가 길 닦겠습니다. 이 길 닦는 이야기를 오늘 우리가 할 수 있습니까? 이스라엘 얘기가 구약 얘기고 나부코 얘기가 밀라노 얘기고 우리는 뭐 하러 아니 이 모든 얘기가 오늘 우리 얘기로 다시 잡아 들여서 우리에게로 승화 상승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임해서 나는 위로하는 하나님으로 오고 싶다. 한강변을 돌아라. 청계천을 돌아봐라. 위로하는 하나님이 오신다고 믿으면 내가 가마. 사실은 이런 얘기를 드리면서 우린 내일 모레 있을 선거를 맞이합니다.

저는 선거를 통해서 우리가 뽑고 싶은 후보를 등록한 게 아니라 자기들이 등록해 놓은 후보 중에서 뽑을 수밖에 없습니다. 맘에 드는 사람도 있고 안 드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혹시 맘에 들어서 제가 하나님 하나님의 위로의 복음을 최대한으로 이 땅에 전해줄 사람을 제가 뽑겠으니 믿으시면 그렇게 투표할 수 있습니다. 어느 당 이냐가 중요한 게 아니고 그런 후보를 하나님의 위로를 실천할 사람. 그 신뢰가 없으면 하나님의 위로를 실천하리라고 기대하는 사람. 신뢰 투표가 있고 희망 투표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도 아니면 어쩔 수 없고요. 단, 오늘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선거란 중대사가 있을 때 중요한 것은 누구를 믿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은 오늘도 위로하러 오신다. 내가 아는 투표란 큰 길에 하나님이 위로하러 오시는데 이 위로를 줄 사람이 우리 지도자라고 해야 옳고 그렇게 되기 위해서 간구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세례 요한은 우리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회개할 것이 있으면 회개해라. 죄 사함 받으라. 길을 곧게 하라. 닫힌 문을 열어라. 그리고 위로해 주신 하나님이 오신단다. 위로의 하나님은 역사까지도 바꾸고 사람도 바꾸고 오신단다. 만일 이번에 못 바꾸면 위로하는 하나님이 안 오시면 내일도 또 오실 겁니다.

내년에도 오실 겁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신 하나님. 영원까지 기다리면서 우리한테 오실 겁니다. 우리는 이 길을 마련해야 합니다. 저는 네거티브 캠페인 때문에 가슴이 속상하고 있지만 저는 위로하러 오시는 하나님은 포지티브란 이상 세계를 가지고 우리한테 오셔서 그래도 참고 기다리며 하나님의 위로하심을 후보뿐 아니라 우리 자신이 결단하자. 후보는 누구냐 하면 우리 자신은 누구냐 하면 실제로 위로의 주최자가 아니고 사도바울이 오늘 고린도 후서에 말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위로의 복음을 전달할 사명을 받았는데 저는 누군지 아십니까? 저는 위로의 복음의 소유자가 아닙니다.

저는 그 복음에 관리인 일뿐입니다. 관리인이지만 아주 성실하고 신실한 관리자가 되려고 합니다. 우리의 모든 지도자나 저 자신 여러분 자신 다 포함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위로의 복음을 전달하고 탐지할 수 있는 그릇이요 능력을 가졌다고 확신하면 그 위로는 제게 아니고 우리게 아니고 하나님 겁니다. 하나님의 위로의 복음을 저는 관리할 뿐입니다. 아주 신실하고 성실하게. 이 말씀은 다음 주에 있는 선거만이 아니라 제가 살아가는 일생을 제 가정에 제 사회에 제 모두에 가야할 길을 하나님이 위로하러 오시는 길일뿐이다.

이 길속에 하나님은 당신의 위로의 역사를 만들어 주옵소서. 믿으시려면 그렇게 믿고 의지하시구요, 안 믿고 상상하시려면 구태여 이스라엘의 역사 구약의 역사 신약의 역사를 구태여 갖다 댈 필요가 없습니다. 저는 그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실제로 확신이 되면 그냥 받아보시지요. 그분이 위로하러 오신답니다. 원하든지 원치 않던. 제가 길을 만들면. 오늘 세례 요한이 보내서 다시 말씀하신 것은 나는 요단강에만 있고 싶지 않다. 한강도 가고 싶다.

좀 믿고 의지하고 길 닦는 사람을 찾고 싶다. 아니면 관도라. 제발 믿고 싶으면 좀 열어다오. 진실로 열어다오. 꽤 부리지 말고. 그러면 내가 가고 싶다. 다 위로의 복음을 맛본 다음에 나하고 셈하자. 한번 셈 하십시다. 따지는 셈하지 마시구요 받은 다음에 한번 얘기해 보십시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세상에 사는 모든 지도자여, 모든 사람들이여 나는 위로하는 하나님이다. 위로 받고 싶은 자는 위로를 받아라. 발길 좀 열어다오. 가슴 좀 열어다오. 창문 좀 열어다오. 그러면 내가 들어가고 싶다. 믿으시면 메시아 기다리십시오. 믿으시면 메시아가 길 닦기를 원하신다니 길 좀 만드십시오.

그리고 그분과 함께 12월 25일 한번 만나십시다. 진실로 오시는지. 진실로 저한테 위로 자가 되시는지. 그러나 아니시면 또 기다리십시다. 저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사도바울과 이사야를 통해서 하시는 말씀. 나는 간다. 내 뜻으로 간다. 위로하러 가고 싶다. 제발 열고 길만 닦아다오. 메시아가 오늘 여러분 메시아 되시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박종화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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