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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닫힌 인생에서 열린 인생으로 (요 4: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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닫힌 인생에서 열린 인생으로 (요 4:5-30)

어제 저녁에 우리 이상주 장로님이 오랜만에 헤드라인 뉴스를 보고 있는데 환희가 장로님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아빠, 헤드가 뭐예요?"
"야, 이놈아, 머리 아냐 머리!!"
환희가 다시 물었습니다.
"그럼 라인은 뭐예요?"
"그것도 몰라? 선이잖아, 선!!"
환희가 또 다시 물었습니다.
"아빠, 그럼 헤드라인이 뭔데요?"
이 장로님이 한참을 생각하고 나서는 이렇게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음... 그건 가르마야."

한 번 웃자고 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제대로 된 바른 답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 이곳 주님의 전에 나오신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교회와 신앙에 대해서 바른 답을 가지고 돌아갈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미국 동부의 한 대학에서 사회학을 가르치며 설교 사역도 하는 토니 캄폴로라는 교수님이 계십니다.  이 분이 한번은 하와이로 휴가 여행을 떠난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하와이에 도착했을 때에는 한 밤중이었는데, 시간 차이로 잠도 오지 않고 배가 고파서 밤 2시가 넘어서 거리로 나와 해변가를 한참 걸었다고 합니다.  혹시 여는 식당이 있나?

드디어 한 식당을 찾아서 들어갔는데 아주 엉성한 식당이었다고 합니다.  들어가서 보니까 생각처럼 지저분하고 정말 분위기도 없는 그렇고 그런 식당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에 그 식당에 들어가서 간단한 음식과 커피를 주문하고 앉아서 막 식사를 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식당 문이 열리더니 7, 8명의 여자들이 들어왔습니다.  한눈에 보아도 평범한 여인들이 아닌 거리의 여인들이 틀림이 없어 보였습니다.  떠들썩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중에 한 여인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야, 내일이 내 생일이다.  벌써 39살이 넘어갔다."
그러자 그 이야기를 들은 다른 여인들이 일제히 여기 저기서 소리를 지르기 시작합니다.
"야, 어쩌란 말이냐?  생일 잔치라도 해 주란 말이냐?  케이크이라도 사라는 말이냐, 아니면 노래라도 불러야 한다는 말이냐?  너 같은 신세에 무슨 생일 타령이냐?"
이렇게 구박을 해대기 시작하자 이 여인이 갑자기 안색이 변하더니 외치기 시작합니다.
"내가 언제 너희들 보고 생일 잔치를 해 달라고 그랬냐?  내일이 내 생일이라는 소리를 하지도 못하느냐?  너희들은 왜 이렇게 사람을 무시하느냐?"
그렇게 소리를 지르자 갑자기 욕설이 오가더니 싸움판이 벌어지고 난장판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식당 한 구석에서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던 캄폴로 교수는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고 합니다.  '내일이 내 생일인데'라는 말에 그냥 누군가가 '축하한다'는 한마디 말이면 넘어갈 수 있는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무엇 때문에 이것이 싸움판이 되고 난장판이 벌어졌는가를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리고 결론은 분명해졌습니다.  그것은 이 여인들의 내면 깊은 곳에 존재하는 상처들이 이들로 하여금 단순한 생일 축하 한마디도 하지 못하게 만드는 그런 그들의 마음이 닫혀 있었기 때문이다 는 결론을 내렸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상처받은 마음, 닫힌 마음은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의 가족과 이웃들을 함께 불편하게 만드는 매우 비극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성경 말씀 속에도 그런 인생이 등장합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 사마리아라는 불모의 사막 한 가운데 있는 동네를 지나가시다가 우물가에 앉아 계셨습니다.  그 순간 한 여인이 물을 길러 옵니다.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그 순간에 전개되는 이 한편의 드라마를 상상해 보십시오.

이 여인은 확실히 어떤 곡절이 있는 여인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은 극심한 더위를 피하여 새벽이나 저녁에 물을 길러 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한낮에 불볕 더위 속에 아무도 오지 않는 우물가에 혼자서 물을 길러 왔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여인은 이글거리면서 내리 쬐는 태양열보다 사람들의 눈총과 시선이 더 싫었습니다.  사람과의 관계가 무너진 인생, 사람과의 만남을 두려워해야 하는 인생.  그래서 그녀는 아무도 보지 않고, 아무도 오지 않는 그 시간, 제일 뜨거운 한낮에 물을 길러온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여인은 당시 시대적인 상황으로 보아서 아픔과 사연이 많은 여인입니다.

첫째로, 이 여인은 다른 사람들과 섞일 수 없는 소외감의 아픔을 안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이 여인은 의도적으로 남의 눈을 피해야만 하는 아픔을 안고 있습니다.  이웃이 없는 아픔을 안고 있습니다.  남편을 다섯이나 두어야만 했던 기구한 팔자에 대한 아픔을 안고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자신의 삶의 자리를 좋은 남편을 만나기 위해 다섯 번씩이나 옮겨야 하는 떳떳하지 못한 삶에 대한 아픔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느 누구에게도 지나온 자신의 과거에 대해서 공개할 수 없는 삶의 은폐성에 대한 아픔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이 아픔은 2천년 전 수가성의 이 여인의 아픔만이 아닙니다.  어쩌면 이 아픔은 오늘 이 시대 우리 모두의 아픔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가난도 고통입니다.  질병도 고통입니다.  그러나 사람을 잘못 만난 아픔은 더 큰 고통입니다.  그러나 모든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은 사람을 만나고 싶지 않은 대인 공포증이나 대인 기피증입니다.  사람이 제일 중요한 것을 알면서도 사람을 만나기를 두려워하는 고통, 그래서 사람을 만나는 것을 고통스럽게 여기면서 자신의 이러한 성품을 싫어하는 것은 고통 중의 고통입니다.

내가 나를 싫어하는 사람.  오늘 우리들 가운데 보면 군중 속의 소외를 느끼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그 사람들과 마음을 터놓고 어울릴 수 없는 소외감의 아픔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우리들 주변에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어쩌면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당신일는지도 모릅니다.

두 번째로, 이 여인에게 있어서 고통은 일반 사람들과는 다른 방법으로 살아가야 하는 고통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행복 가운데 가장 큰 행복은 뭐니 뭐니 해도 평범함에 있다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다.  이것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축복입니다.  그렇지만 이미 이 여인은 평범하게 살아갈 수 없는 여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한 번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남이 출근할 때 출근하고, 남이 학교 갈 때 학교에 가고, 남이 일할 때 일할 수 있다는 것은 행복입니다.  남이 잘 때 잘 수 있다는 것, 남이 놀 때에 놀 수 있다는 것, 남들이 하나님의 교회를 찾을 때에 함께 교회에 올 수 있다는 것은 행복 중의 행복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평범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이 굉장한 행복이고 축복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삶의 일상성 속에 숨겨 있는 이 작은 행복을 무시하지 마십시오.

그런데 사람들은 너무 극적인 변화만이 행복인 줄로 압니다.  죽을 뻔하다가 살아나야 행복이고, 다 망했다가 일어나야 기적인 줄로 압니다.  굉장한 일, 깜짝 놀랄 일만이 행복이고 축복이요 기적인 줄로 압니다.  그러나 이것은 착각입니다.  평범한 가운데 다른 사람들과 같은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감사이고, 축복입니다.  그것이 바로 기적입니다.

세 번째로, 이 여인에게 있어서 아픔은 자기 삶에 대한 은폐성, 내지는 조작을 하는 아픔으로 이것은 신분 콤플렉스요 출생 콤플렉스입니다.

"나는 어쩌다 이런 신분을 가지고 태어났을까?"  "내 가정은 왜 이 꼴이었을까?"  "나는 왜 이런 시대에 태어났을까?"  "왜 우리 부모는 나를 이렇게 길렀을까?"  "어쩌다가 사마리아 사람으로 태어났을까?"

이 출신 콤플렉스에서 오는 숙명적인 열등감이 자꾸만 조작 행위를 하게 합니다.  이 출신 콤플렉스가 결국에는 삶의 위축 현상을 낳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만나는 것을 싫어합니다.  매사에 소극적이고 패배감에 차 있습니다.  무기력하고 모든 것이 시들합니다.  자기 모습대로 자기 혼자만 살고 싶어하는 자기 불행의 굴을 자꾸만 파고 들어갑니다.

이 출신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나는 성장 과정이 나빴다, 나는 나쁜 성품과 인성을 가지고 자랐다, 나는 육체적인 결함을 가지고 있다는 등 자꾸만 자기를 학대하고 정죄합니다.  삶의 은폐 현상을 조작하다 보면 행동이 자연스럽지 못합니다.  자기 중심적이 되고 너그럽지 못합니다.  정직은 하지만 교만해지고 욕심이 많고 사람이 자상하지 못합니다.  이기적이고 인정머리가 없어집니다.  이것에 대한 반동 현상으로 드러내 놓고 막 가버립니다.  될 대로 되라는 태도가 생깁니다.  남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습니다.  고집이 세고 안하무인이 되어서 한마디로 온유와 겸손이 그리운 모습이 되고 맙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마리아 수가성 우물가에서 만난 여인의 안고 있는 아픔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물가의 여인의 이 콤플렉스는 오늘 저와 여러분들의 문제입니다.  삶의 은폐 현상, 대인 기피 현상, 위축 현상이 일어나서 결국에는 가는데 까지 막 갑니다.  소속 집단으로부터의 소외감, 남들과 같이 될 수 없다는 자신의 현실에 대한 극단의 불안감, 동화할 수 없고 이웃이 없는 현실성의 아픔, 일상성에 대한 허무감이 생깁니다.  인간미는 점점 없어져서 너그럽지 못하고 강퍅해 집니다.  인성과 그 심성에 쓴 뿌리의 상처가 깊어만 갑니다.  자기 중심적인 자기 포로 현상이 나타납니다.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싫어하고 자기 내면 속에 들어가면서 자기 기분에 빠져 나오지를 못합니다.  자신의 상한 감정이 자신을 이끌어갑니다.  이것은 인생에서 불행이요, 비극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주님을 만났습니다.  주님과의 대화 속에서 이 여인은 심령 깊은 곳에 내려져 있던 쓴 뿌리와 아픔들이 치유되기 시작합니다.  이 여인은 주님을 만나면서 자신의 운명이 바뀌기 시작합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한 인생이 예수님을 만나면서 그의 운명이 바뀌어졌다는 이야기는 무수하게 많이 들을 수 있습니다.

멀리는 창녀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을 만나면서 거룩한 성녀가 되었다는 이야기, 평생 고기 잡는 어부가 예수님을 만나면서 사람을 낚는 제자가 되었다는 이야기, 구두쇠 세리장이가 예수님을 만나면서 선한 이웃으로 바뀌어졌다는 이야기.  이와 같은 이야기는 우리들 주위에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고, 들을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믿는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을 만나십시오.  이론적이고 추상적인 예수가 아닙니다.  박물관 속의 예수가 아닙니다.  인격적인 예수를 한 번 만나보십시오.  지금 내 안에서 역사하시고 치유하시는 사랑의 예수님을 만나보십시오.  기억하십시오.  예수를 만나면 운명이 바뀌어집니다.  예수를 만나면 삶의 환경이 바뀌어집니다.  그래서 예수를 만나면 행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놀라운 행복의 만남을 경험해 보지 않으시겠습니까?

본문에서 이 여인을 치유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보십시오.  주님께서는 이 여인에게 "네 물을 내어 놓으라"고 하십니다.  여기에서 물은 생명을 뜻합니다.  "여인아, 너의 생명을 내 놓아라!"  이 말씀은 능동태로서 명령문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여기서 그 모습 그대로 너의 생명을 나에게 내어놓으라는 것입니다

목마르고, 소외되고, 사람을 기피하고, 남과 어울리기를 싫어하고, 너그럽지 못하고, 교만하고, 도전적이고, 자상하지 못하고, 고집에 차 있고, 그냥 막가고 있는 그 생명을 지금 여기에서 나에게 내어놓아라.  너의 길을 잃고 방황하는 생명, 갈급한 생명, 갈증스런 생명, 목마른 그 삶을 주님 앞에 내어놓으라는 것입니다.

오늘 주 앞에 예배 드리러 나오신 사랑하는 여러분, 예배가 무엇입니까?  예배는 나의 생명을 주님께 내어놓는 것입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주님 앞에 올려 드리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아신다면 오늘 이 시간 여러분의 내면을 가리고 있는 모든 가면을 벗어버리고 신실하신 주님을 만나십시오.  주님 앞에 내 생명을 온전히 드리십시오.

"물을 좀 달라"  "너의 생명을 내어 놓으라"는 주님의 말씀에 이 여인은 어떻게 반응하고 있습니까?
"버려진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나에게 얼마나 숨겨진 복잡한 삶이 있는 줄을 알기나 하십니까?"
자기로부터의 혁명과 변화를 스스로 거부하고 있습니다.  자기 내면에 뿌리를 강하게 내리고 있는 쓴 뿌리를 치유하고자 하는 어떤 손길도 포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이 비단 이 여인만의 반응이겠습니까?  이 여인의 반응은 오늘 변화를 거부하고, 자신의 내면에 머물러 있으려고 하는 우리들의 반응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에게 있어서 안목의 차이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오늘 이 여인이 찾아 헤매던 물은 썩은 물로 생명이 죽은 물입니다.  고인 물이요, 땅의 물이요, 쾌락의 물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주시는 물은 살아있는 물이요, 솟아나는 물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물이요, 진리의 물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고인 물을 먹으면 병이 나거나 죽습니다.  썩은 물 폐수를 먹으면 죽습니다.  생수를 먹어야 삽니다.  솟아나는 물, 하늘의 물,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성령의 생수를 먹어야 삽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바로 알아듣는 것이 축복입니다.  제대로 알아듣는 것이 축복입니다.  말귀가 열려야 합니다.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는 백성, 귀 있는 자는 성령의 소리를 들으라고 했습니다.  이 사건 바로 앞에 나오는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말씀을 못 알아듣고 근심하며 갔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고 덤벼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은 덤벼드는 것입니다.  매달리는 것입니다.
"주여, 이런 물을 내게도 주사 목마르지 않게 하소서!"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들에게도 이 여인과 같은 매달림이 있어야 합니다.  내 안에 있는 아픔과 상처를 그대로 주님 앞에 내어놓으십시오.  그리고 주님을 만나십시오.  오랫동안 마음의 문을 닫고 살아왔던 이 여인에게 예수님의 만지심이 느껴집니다.  무엇을 느꼈을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이 여인이 느꼈던 그 느낌을 한 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얼마나 오래간만에 느껴본 따뜻하고 친밀한 손길이었을까요?

심리학자들은 오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를 가리켜서 포스트 모던의 시대라고 말합니다.  포스트 모던 시대의 특성은 해체와 파괴입니다.  모든 것이 해체되고, 모든 것이 파괴되어서 조각나버리는 시대입니다.  뿔뿔이 자기만의 외로운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 이런 현대인들은 무엇보다도 스킨십에 목말라하는 고독한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내 곁에 다가오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이런 인생들 곁에 다가가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아무도 만지기를 기뻐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손길을 내미시는 바로 그분, 그리고 그 사람의 마음을, 그 사람의 지친 몸을 만지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이 만지시는 그 순간마다 사건이 일어납니다.  질병에 고통을 받고 있었던 사람들이 예수님이 만지시는 순간 치유가 일어납니다.  상처받은 사람들이 그가 만지시는 순간 마음의 치유를 경험하고 새로운 용기를 얻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만지시는 순간 닫힌 마음들이 활짝 열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하늘을 바라보는 새로운 인생이 시작됩니다.

1960년대 미국의 청년들은 당시의 허무주의의 물결 속에 깊이 빠져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청년들이 자기의 집을 뛰쳐나와 가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학교를 그만두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수많은 청년들이 거리로, 바닷가로 나가서 방황하기 시작합니다.  머리를 길게 기르고, 그리고 마약을 먹고 환각 속에 빠져 들어가는 소위 히피족들이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아무 일도 하지 않습니다.  당시의 미국 지도자들은 이렇게 무기력한 청년들로 변해 가는 현실을 바라보면서 절규합니다.
"이제 미국은 미래를 잃어버렸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이런 청년들에게 그들의 삶을 바꾸는 거대한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이 운동의 이름을 당시에 'Jesus movement', '예수 운동'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을 체험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이 나갔든 집으로, 떠나갔던 교회로 떼를 지어 다시 돌아오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찬양을 부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인생의 새로운 꿈을 꾸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놀라서 묻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
이 물음에 대해서 그들은 그들에게 일어난 변화를 노래로 대답을 했습니다.  그때 탄생한 유명한 가스펠이 있었습니다.  이런 노래입니다.  우리들에게는 '험한 세상 나그네 길'이라는 노래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험한 세상 나그네 길 / 나의 맘이 곤할 때 /
사랑스런 주의 손길 / 내  맘을 항상 두드리네
오 주님 나의 주님 내 맘에 기쁨 넘치네
나의 기쁨 나의 생명 주 손길 날 구원했네"
"He touch me.  Oh He touch me and oh the joy that floods my soul. And Something and now I know He touch me and made me whole"

그렇습니다.  이 여인의 닫힌 마음을 만지시던 주님은 오늘도 살아 계십니다.  살아 계셔서 여러분과 저의 마음을 만져주십니다.  저는 오늘 그 예수님이 여러분 가운데 어떤 분들을 만져주시기를 축복합니다.  깊은 탄식으로 내 인생 속으로 다가오시는 그 분이 여러분과 저를 만져주시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는 어떤 분이십니까?  그는 닫힌 마음의 인생들을 보고 탄식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다가와 우리를 만져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 여인, 그래서 마음의 상처와 아픔을 치유 받은 이 여인.  그녀는 오랫동안 닫았던 입술을 열어서 말하기 시작합니다.  노래하기 시작합니다.  춤추기 시작합니다.  닫힌 마음이 열렸습니다.  그리고 동네로 달려갔습니다.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무엇이 이 여인을 변화시켰습니까?  이 사람이 한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단지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심령 깊은 곳에 닫힌 그의 상처를 예수님께서 만지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예수를 구세주로 영접한 순간 모든 것이 변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에 보면 우리 예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은 지금도 우리의 마음 문 밖에 오셔서 우리의 마음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만약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열어서 그분을 받아들이고 영접하면 그는 나와 더불어 함께 먹으시겠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그를 내 인생의 구주로 모셔들이기만 하면 이제부터 축제의 삶을 만들어 가시겠다고 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과 함께 하는 축제의 인생, 그와 더불어 새롭게 살아가는 이 여인의 황홀한 인생을 사모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저는 오늘 이 설교를 토니 캄폴로라는 교수가 하와이의 한 밤중에 들어갔던 식당의 이야기, 거기서 만난 7, 8명의 거리의 여인들의 이야기로 시작했습니다.  이들의 그후의 이야기를 계속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식당 주인이 싸우고 있는 여인들을 말렸습니다.  여인들의 소란은 진정되었고 이 여인들은 하나씩 하나씩 뿔뿔이 그 자리를 떠나갔습니다.  캄폴로 교수는 이 새벽녘 식당의 주인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그 여자 분들이 자주 식당에 오나요?"
이 때 식당 주인이 이렇게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자주가 아니라 매일 오지요.  똑같은 시각에 옵니다.  단골인데 좀 골치 아픈 손님들이지요."
그러자 캄폴로 교수가 말합니다.
"사실은 제가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거든요.  저에게 혐조해 주시겠습니까?"
"뭔데요?"
"그 여성 가운데 내일이 생일이라는 여성이 있잖아요?  그 여인의 생일 잔치를 제가 준비하고 싶습니다.  주인께서 좀 도와주시겠습니까?"
그때 그 주인 옆에 있던 주인 부인이 "아니 선생님! 어떻게 이렇게 재미있는 아이디어를 생각하셨나요?  그 여인의 이름은 아그네스인데요, 착한 여자예요.  그런데 불쌍한 여자지요."

이렇게 해서 주인 내외와 토니 캄폴로 교수는 그 이튿날 새벽에 파티를 준비하기 시작합니다.  한 밤중에 식당을 꾸며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주인 부인이 알고 있는 거리의 여인 몇 사람에게 미리 귀뜸을 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한 밤 중 2시가 넘어서 그 거리 인근의 모든 거리의 여인들이 그 식당에 가득히 채워졌습니다.

그리고 새벽 3시 반, 드디어 아그네스가 몇몇 친구와 함께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 식당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소리칩니다.
'Happy Birthday, 아그네스!'

이 아그네스라는 여인은 식당으로 들어오다가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이 서 버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놀라는 표정.  캄폴로 교수는 자기가 평생을 살아오면서 이렇게 놀라는 사람의 얼굴 표정을 처음 보았다고 합니다.  그러자 다시 사람들의 노래가 시작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아그네스.  생일 축하합니다.
Happy Birthday to you!"

이 여인의 뺨을 타고 굵은 눈물 방울이 흘러 내려오더니 어깨를 흔들면서 통곡하면서 울어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있는 식당의 모든 사람들의 눈이 흥건하게 젖어들기 시작합니다.  누군가가 아그네스에게 "아그네스, 생일 케이크를 잘라야지"

마련된 케이크가 등장하자 그 케이크를 바라보고 있던 아그네스는 갑자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저요, 부탁이 하나가 있는데요.  이 케이크를 지금 자르기 보다 제가 집에 가지고 가서 얼마 동안 이렇게 간직하면 안될까요?"

누군가가 동의를 했습니다.  그는 케이크를 집에 갖다 놓고 금방 돌아오겠다고 말하고 그 케이크를 들고 식당 바깥으로 나갑니다.  마치 무슨 보물을, 마치 무슨 거룩한 물건을 가지고 나가듯이 식당 바깥으로 케이크를 들고 나가는 아그네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모든 사람들은 깊은 침묵 속에 빠져 들어갔습니다.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모르는 순간이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캄폴로 교수는 다시 일어나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제가 저 아그네스의 행복과 여러분 모두의 행복을 위해서 기도하면 안될까요?"
"예, 기도해 주세요."
캄폴로 교수의 기도가 시작됩니다.  가장 교회 같지 않은 곳에서 가장 감동적인 기도가 계속되고 있는 동안 모두가 울고 있었습니다.

캄폴로는 기도를 마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 행복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는 여러분의 삶의 주인이 되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분을 마음으로 받으시겠습니까?"
"예, 오 예"
그날 여인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그리스도를 그들의 마음 속에 받아들였습니다.  캄폴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가장 교회 같지 않은 곳에서 그날 상하고 닫힌 마음들이 활짝 열리는 광경을 보았으며, 이 엉성한 식당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을 목격할 수가 있었다"

이 사건을 경험하고 나서 캄폴로 교수는 책 한 권을 쓰게 됩니다.  그가 쓴 책의 제목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파티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신앙생활은 그냥 교회만 왔다갔다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축제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예수님과 함께 하는 놀라운 축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마음 문을 여는 순간 이 축제는 시작됩니다.

들리지 않으십니까?  혹시 들리지 않으십니까?  오랫동안 닫아 두었던 여러분의 마음 문을 노크하고 있는 그 분의 음성이 들리지 않으십니까?  닫힌 마음의 문을 여십시오.  내가 마음의 문을 여는 순간,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내 인생의 구주로 인격적으로 초대하는 그 순간 이 축제는 시작이 됩니다.  그리고 당신은 결코 꼭 같은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오늘 주님의 교회에 나오신 여러분 모두에게 이 축제를 선물로 드립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면서 의식하며 메마른 사막과 같은 인생을 사시겠습니까, 아니면 내 영혼의 만족을 누리며 행복한 푸른 초장과 같은 삶을 사시겠습니까?

오늘 이 시간 찬양하는 가운데서 주님을 만나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만나서 닫힌 인생에서 열린 인생으로 여러분의 인생의 운명이 바뀌어지기를 축복합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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