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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탄절] 단순한 사람들을 위한 성탄절 (눅 2: 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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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사람들을 위한 성탄절 (눅 2: 8-10)

서 론

‘단순하다’라는 의미를 영어에서는 ‘simple’ ‘simplistic’ 두가지 단어로 쓰입니다. 그리고 두 단어는 정확한 의미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simple’은 깊이가 있으면서도 단순하다는 의미로 사용되는 반면에 ‘simplistic’은 깊이가 없고 경박한 단순성을 말합니다. 복음의 단순성은 ‘simple'의 의미처럼 깊이가 있으면서도 단순한 것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복음은 ‘simplistic’한 것이 아닙니다. 심오하면서도 단순한 것이 복음입니다. 로마 가톨릭이나 동방정교와 같은 구교 예배는 대단히 복잡하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배순서도 복잡하고, 예배를 인도하는 성직자들의 의복 모양과 색깔도 복잡하며, 절기도 대단히 복잡합니다. 반면에 개신교의 특징은 단순성입니다. 예배순서도 단순하고, 신학도, 예배순서도, 예배당의 구성도 모두 단순합니다.

무엇이든지 복잡한 것은 틀릴 가능성이 많고, 고장 날 가능성도 많습니다. 그러나 단순한 것은 별로 틀릴 것이 없습니다. 단순하기 때문에 고장 날 가능성도 별로 없습니다. 아주 복잡한 자동차는 고장도 쉽게 나고, 고장 나면 고치기도 어렵지만 자전거 같이 간단한 교통수단은 고장 날 것이 별로 없습니다. 그저 바퀴에 구멍이 나면 때우면 그만이고, 체인이 벗겨지면 다시 씌우면 됩니다. 마르틴 루터와 존 칼빈이 일으킨 종교개혁은 한 마디로 ‘단순성으로 돌아가자(Back to the simplicity)’는 것입니다.

1. 인간의 근본 문제와 해결책

어떤 사람이 큰 병을 앓았습니다. 여러 해째 귀울림이 나고, 눈도 충혈 되고, 말을 하려면 얼굴이 갑자기 붉어지는 증세가 계속 되었습니다. 병을 고치기 위해 3년을 병원에 다녔지만, 모든 의사들이 맹장이니, 편도선이니 짐작만 할 뿐, 아무도 그 병을 치료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그 사람의 주치의는 “당신은 앞으로 수명이 6개월 밖에 남지 않았으니 먹고 싶은 것 실컷 먹고, 여행하고 싶은데 실컷 가고, 또 입고 싶은 옷도 실컷 입어라”고 사형선고를 내렸습니다. 이 사람은 평소에 좋은 양복을 실컷 입어 보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그래서 서울에서 제일 좋은 양복점에 가서 양복 3벌, 와이셔츠도 3벌을 맞추고, 두 달씩 번갈아가면서 입고 나서 죽으리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양복점에 가서 옷을 맞추는데 재단사가 자신의 치수를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목의 크기는 105입니다.” 이 사람이 깜짝 놀라서 자신의 목 치수는 15살 때부터 95였는데 왜 105라고 하느냐고 따졌습니다. 재단사가 고개를 갸우뚱하고 다시 목 치수를 재었습니다. “105가 맞습니다.” 그러자 이 사람은 다시 “내 목의 치수는 95요. 내가 여태까지 와이셔츠를 95를 입었는데 왜 105라고 합니까?”라고 말하며 따졌습니다. 자꾸 우기니까 재단사가 화를 내면서 말했습니다. “이보시오. 당신이 고집을 부리면서 95 사이즈 와이셔츠를 계속 입게 되면 귀울림이 생기고, 눈이 충혈 될 것이며, 조금만 말해도 얼굴이 빨개질 것입니다. 그래도 불평하지 마시오.” 이 사람의 진짜 문제는 꼭 끼는 와이셔츠에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문제가 복잡한 것 같아도 다시 보면 이처럼 대단히 단순한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인간 세계가 아무리 복잡하다고 할지라도 그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의 근본원인은 단 한 가지입니다. 바로 죄입니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떠난 죄 때문에 인간의 모든 복잡한 일들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로마서 1장에서 바울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버려 두사 온갖 자범죄를 행하게 하셨도다”고 말씀합니다. 죄는 이처럼 인간의 근본문제입니다. 여러분들에게 가정의 문제, 질병의 문제, 사업의 문제가 있습니까? 혹은 마음에 평안이 없고, 영혼이 불안 합니까? 이 모든 문제의 근원은 바로 죄입니다. 인간 세계의 모든 문제는 죄라고 하는 단순한 원인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나 그 근원이 이렇게 단순하므로, 그 문제에 대한 해결책도 단순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탄생을 축하하는 구주의 이름은 예수입니다. 예수는 이름이요, 그리스도는 신분입니다. 그리스도는 헬라어인데 히브리어로는 ‘메시야’, 즉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의미입니다. 구약시대에 기름부음을 받는 신분은 세 가지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 둘째는 백성의 죄를 사하는 제사장, 셋째는 백성을 다스리는 왕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 가지 신분을 한 몸에 가지신 메시야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이름에는 ‘여호와는 구원하신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마태복음 1장 21절에서 천사가 마리아에게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고 일러줍니다. 예수님은 죄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주이십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문제가 아무리 복잡하다고 할지라도, 그 모든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인간의 근본문제를 해결 받을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여러분의 소망이 무엇입니까? 돈 많이 버는 것입니까? 건강하게 사는 것입니까?

출세하는 것입니까? 그러나 돈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건강도, 명예도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가진 어떤 것도 해답이 될 수 없습니다. 오로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죄를 극복하고, 인간의 힘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사망도 극복하며, 이생을 넘어 영원세계까지 나아가 영생과 부활의 몸을 입고 살게 될 줄로 믿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근본문제에 대한 해답입니다.


2. 평범하고 단순한 사람들을 위한 복음

오늘 본문을 보면 인류의 근본 문제에 대한 해결책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소식이 목자들에게 먼저 알려졌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해 양 치던 목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소식을 먼저 알려주셨다는 것은 첫 번째로 복음은 평범하고 단순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는 진리입니다. 당시에 유대사회에서 양치는 목자들은 대단히 비천한 신분계층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기 때문에 무식한 사람들로 취급당했습니다. 종교인들조차도 양 치는 일을 부정한 직종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왜 주의 사자가 이와 같은 인류 최대의 기쁜 소식을 정치권을 쥐고 있는 왕이나 왕자들, 교권을 쥐고 있는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 학문권을 쥐고 있는 학자들, 물권을 쥐고 있는 사업가들에게 먼저 알려주시지 않고 비천한 목자들에게 먼저 알리셨을까요? 이것은 복음이 낮은 사람, 평범한 사람, 무지한 사람, 단순한 사람, 즉 히브리말로 암 하레츠(땅의 백성)들을 전혀 배제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물론 복음은 왕이나 학자, 사업가와 같은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도 구원하지만, 낮은 사람, 평범하고 단순한 사람들도 전혀 배제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평범하고 단순한 사람들이 먼저 복음을 받아들이고 믿으며 기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그 둘 중에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 가로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마21:31).

고린도전서 1장 27절에서도 바울은 같은 진리를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신다.”

복음은 세상이 볼 때, 미련한 사람, 약한 사람, 무지한 사람, 가난한 사람들에게 먼저 임하는 축복의 소식입니다.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에서 배제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탄절에 마음을 낮춰야 합니다. 요즘 우리나라에서 왜 이렇게 어려운 사건들이 많이 일어날까요? 저는 우리나라가 살만 하니까 사람들이 마음이 높아져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복된 성탄절에 하늘 영광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의 낮고 낮은 곳에 오신 예수님을 생각하며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낮추어야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23장 12절에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했습니다. 또 베드로전서 5장 5절에서도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겸손하고 단순한 사람들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이것이 복음의 위대성이요, 복음의 아름다움입니다. 복된 이 날에, 복잡한 것을 다 정리하시고 단순성을 회복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누구나 깨달을 수 있는 복음

목자들은 지식인들이 아니었습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무지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도 목자들은 복음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목자들이 들에서 양을 치고 있을 때, 주의 사자가 목자들에게 나타나 “무서워말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고 말씀합니다. 온 인류에게 미칠 큰 기쁨의 소식이 무엇일까요?

11-12절 말씀을 보면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 다윗의 동네인 베들레헴에서 그리스도 곧 구주가 나실 것인데, 이 구주는 마구간에서 태어나셔서 강보에 싸이고 구유에 누이실 것이라는 간단한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처럼 예수님께서는 마구간에서 태어나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이셨습니다.

주의 사자는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이처럼 복음이란 가서 보고 아는 것, 보고 믿는 것입니다. 간단한 진리입니다. 그 아기는 단순한 분이 아니었지만, 그의 탄생은 누가 봐도 알 수 있는 단순하고 쉬운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목자가 봐도 알 수 있는 것이고, 무지한 사람도 쉽게 보고 알 수 있는 사실이었습니다. 복음은 이처럼 누가 봐도 알 수 있는 단순한 것입니다. 쉽고 단순한 것이기에 말구유에 태어난 아기가 우리의 죄를 용서하는 구주라는 복음을 몰랐다고 핑계 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리 큰 죄인이라도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께서 그를 의인으로 대접하십니다. 아무리 하나님과 원수 된 사람이라 할지라도 예수님을 믿게 되면 하나님께서 그와 화목하십니다. 인간의 근본 문제인 죄를 해결하고, 사죄와 칭의와 화친의 3대 은혜를 주시는 구주가 바로 구유에 태어나신 어린 아기 예수라는 것이 곧 복음입니다. 그 근본이 상고와 태초에 있는 영원한 신성을 가진 하나님께서 인간의 육신을 입고 성육신(incarnation)하신 분이 바로 이 아기라는 사실이 복음입니다.

복음이 얼마나 단순한 것입니까? 그러나 이 복음이 얄팍한 것은 아닙니다. ‘simple’ 하지만 ‘simplistic’하지는 않다는 말입니다. 2,000년 동안 수많은 학자들이 이 복음을 연구하여 수 십 만권의 책을 써 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써내고 또 써낼 만큼 심오한 것이 바로 이 복음입니다. 그래서 위대한 스펄전 목사님은 “복음은 태평 양 바다와 같다”고 했습니다. 바다에는 아무리 유식한 학자라도 갈 수 없는 깊은 심연이 있고, 어린아이라 할지라도 쉽게 접근하여 놀 수 있는 해변도 있기 마련인 것처럼 복음이 쉬울지라도 때로는 깊은 심연과 같은 심오함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 성탄절이 먹고 마시고 흥청망청 놀면서 지내는 날이 될지라도, 우리에게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예수님을 우리 마음에 구주로 모시는 복된 날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를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고, 언제 죽는다 할지라도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서 영원한 천국에서 영생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복음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혹시라도 “내가 복음을 몰라서, 복음이 이해가 되지 않아서, 복음이 어려워서, 목사가 하는 설교가 도저히 어려워서 내가 못 믿었다”고 핑계하는 사람들은 언젠가 주님의 심판대에 설 때에, 그 입술을 가리고 또 가려야 할 것입니다. 복음은 몰라서 못 믿는 것이 아닙니다. 안 믿어서 안 믿는 것입니다. 복음은 목자도 알 수 있는 단순한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은 복음을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혹시라도 오늘 이 자리에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분이 계시다면 예수님을 구주로 마음속에 영접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 단순하게 반응해야 하는 복음

세 번째로 우리는 목자들처럼 복음에 대해 단순한 반응을 보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죄를 사해주시는 구주시라는 사실을 믿고, 증거하고, 삶 가운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찬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목자들은 천사들이 전해

준 소식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15-16절 말씀을 보면 ‘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니 목자가 서로 말하되 이제 베들레헴까지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하고 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목자들은 가서 천사들이 전해준 사실을 보고 “아! 이것이 진실이구나”하고 믿었습니다. 이 아기가 우리의 죄를 사하실 구주라는 사실을 믿은 것입니다. 목자들은 예수님을 보고 믿었습니다만, 우리들은 지금 예수님을 보고 믿을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이미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듣고 믿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5장 24절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보고 믿는 신앙이 고급입니까? 보지 않고도 믿는 신앙이 고급입니까?
예수님은 도마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 20:29) 우리는 지금 예수님의 탄생을 눈으로 보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보지 못하고도 믿는 우리가 더 복되다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목자들은 보고 믿은 사실을 증거했습니다.

누가복음 2장 17-19절 말씀을 보면
“보고 천사가 자기들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한 것을 고하니 듣는 자가 다 목자의 말하는 일을 기이히 여기되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지키어 생각하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보고 말한 것을 다 고했다는 것은 증거했다는 말입니다. 목자들은 자신들이 보고 들은 바를 요셉과 마리아에게 증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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