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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의 법을 이루는 삶 (요일 4: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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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법을 이루는 삶 (요일 4:7-12)
 
이제 2007년도 두 주일 정도를 앞두고 우리 앞을 스쳐가고 있습니다.
한 해를 보내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이루지 못한 일에 대한 아쉬움이 겹쳐올 때입니다.
그러나 종합해보면 결국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로 인도되어져 왔고 그것은 감사할 일임을 우리는 느낍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이 있는 삶이 가장 큰 축복이라는 것도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이제 이러한 연말 특별히 성탄을 앞두고 있는 우리는 오늘 성찬의 예식을 가지게 됩니다.

주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가지시는 자리에서 떡과 포도즙을 나누어주시며 "이것은 내 몸이다, 이것은 내 피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 거룩한 예식에 참여하여 주님 오실 날까지 영원히 기념하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 영원하신 예식에 참여함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몸에 동참한 한 지체의 백성으로써 그리스도의 구원의 보혈에 동참한 은혜의 백성으로써 아름다운 주의 뜻을 세상 끝 날까지 전파하는 주의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특별히 성탄절을 앞두고 사랑하는 모든 성도들이 성찬의 예식을 가지며,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고, 또 주님의 십자가를 묵상하며, 그 제자들에게 고별의 정과 사명을 부여하신 그 은혜를 다시 한 번 느끼고자 하는 것입니다.주님은 십자가를 앞두고 비감한 심정으로 최후의 만찬을 나누시는 자리에서 그의 사랑하는 제자들, 그러나 아직까지 완성되지 못한 어리석은 제자들에게 그들의 사명을 깨우쳐주는 심정을 가지고 생각하며 그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이루셨습니다.

주님은 도대체 왜 십자가를 지셨고 그 십자가를 지기위한 고난의 여정을 진행하시면서 그 백성들, 그리고 그 제자들에게 이와 같은 예식을 이루시기 원하셨을까? 하는 것을 또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결국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우리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부여하셨고, 그 영원한 생명을 부여하시는 그 귀한 사역을 그 성찬의 예식에 동참하는 모든 사람들로 인하여 땅끝까지 전하게 하시기 위하여 주의 귀한 은혜를 이루신 것을 생각을 합니다.

오늘 우리는 거룩한 성찬의 예식에 참여하며 주님의 사랑의 마음을 체감하고 사랑의 법을 완성하는 은혜의 백성이 되기를 원합니다.
따라서 오늘 성찬을 나누기에 앞서 본문의 말씀을 가지고 잠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그가 사랑 안에 있어야 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다면 그 하나님 안에는 사랑이 있기 때문에 우리도 자연히 사랑 안에 거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 안에 사랑이 있으면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안에 거하는 것이며 내 안에 사랑이 없다면 그것은 하나님 안에 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도대체 왜 사도요한이 이와 같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지 얼마 되지 않는 초대교회인 이 시기에 이와 같은 사랑을 강조하고 있을까요?

우리는 볼 것도 없이 이 시기에 역시 사랑이 메말라져 가고 있는 때였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본받아 아름다운 사랑의 은혜를 마음껏 펼쳐가는 그런 때였다면 사도요한은 굳이 사랑의 법에 대해서 슬퍼하지 않아도 괜찮았습니다.

그런데 사도요한의 마음에 안타까운 것이 있으니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사랑의 극치를 통하여 우리들에게 구원을 주셨고 하나님은 그 예수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사랑의 아름다움을 이루셨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아직까지 온전한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나름대로 하나님의 뜻과 사랑을 전파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안타까이 여겨 이와 같은 말씀을 전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우리는 이 시대를 바라보며 우리 자신을 바라보며 입술로는, 혹은 마음의 표피로는 사랑을 생각하지만 그 깊은 속내는 아직까지도 주님께 받은 사랑으로 우리 자신을, 그리고 내 앞에 있는 사람, 멀리 있는 주님의 백성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못하는 우리 자신을 생각하며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사랑에 은혜로 회개하고자 합니다.
만일 주님의 사랑을 이루려는 뜻과 계획이 없다면 우리의 성찬은 단순한 떡 한 덩이, 작은 포도즙 한 잔을 마시게 될 뿐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원하셨던 사랑의 법을 이루기 원한다면 우리는 사랑의 떡을 먹고 사랑의 잔을 마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아름다운 사역이 될 것입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조금 더 생각해 봅니다.

첫 번째, 오늘의 본문 속에서 생각해보고자 하는 것은 사랑의 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사랑의 하나님으로 인해서 사랑하며 살아야 하고 사랑하며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하고 있다면 하나님의 진정한 사랑을 실현하는 사랑의 백성이라면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라는 것을 스스로 입증하는 겁니다.
내 마음에 사랑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은 내가 하나님이 사람인가 아닌가 하는 것을 판별하는 식이 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4장 20절>은 말씀합니다.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않은 자가 보지 못하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내 눈 앞에 보이는 하나님도 사랑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우리는 자연히 세상과 세상 사람들을 바라보는 눈이 따사로워지고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은혜를 받고 났을 때 가장 먼저 무엇이 달라집니까?
온 세상이 따뜻해 보이는 겁니다. 사람들도 따스해 보이고 모든 주변 환경과 여건들도 따스해 보이고 사랑으로 우리 마음이 푸근해지는 겁니다. 내 주변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애틋하고 살갑고 더욱 더 사랑에 겨운 모습으로 보여 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은혜가 소멸되면 모두가 날 선 마음이 되고 모두에게 대해서 섭섭해지고 모두에 대해서 찬바람이 도는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우리는 압니다. 우리가 정말 행복해지려면 우리는 은혜가 충만해져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은혜가 충만하면 거친 음식도 감사합니다.
역경과 난관도 감사합니다.
어떤 사람들도 사랑의 마음으로 대할 수 있음을 우리는 스스로 느낍니다.
내가 이렇게 큰 은혜에 사로잡혀 사는구나! 하는 삶의 기쁨을 스스로 느끼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우리 주변 모두를 사랑하는 아름다운 사랑의 사람이 되는 것을 느끼고 보임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음을 만인에게 나타내는 사람이 돼야 합니다. 만약 우리 마음에 사랑이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 안에 거하지 않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내 마음에 사랑이 없다면 하나님의 역사도 중단된 것입니다.
어찌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사람이 포악한 말과 남에게 상처주고 하나님의 역사를 가로막는 일을 하겠습니까?
사랑받는 자가 그 사랑을 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랑을 입지 않은 자도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사랑하면 당연히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고 사랑하지 않고 살면 우리는 하나님 안에 있지 않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삶속에 자신의 부족을 느낄 때마다 다시 사랑의 원점으로 회복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일을 하다 힘들거나 세상의 일을 하다 힘들다라고 생각하면 우리는 세상의 일이나 주의 일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내 상태가 좋지 않음을 판단해 볼 수 있습니다.
늘 하는 일인데 유난히 어려워요. 왜 그렇죠? 내 컨디션이 좋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은혜로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우리는 그 사랑의 힘에 떠밀려 결국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우리를 휩싸고 있는 힘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이 우리를 휩싸고 있는지, 내 죄악의 욕망과 욕심이 나를 휘둘리고 있는지,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인지 아니면 미워하고 욕심에 휘둘리는 마음인가 생각합니다.
지금 나는 무엇 때문에 기뻐하고 행복해하고 있는가 생각합니다.
주님의 뜻을 이루고 있기에, 주님의 은혜를 사랑하고 있기에 우리는 감격하고 행복해하고 있습니까?
내 욕망을 이루기 위해서 허겁지겁 달려가고 있습니까?
그림자 같은 삶,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하는 재물을 위하여 분주히 다닌다고 시편기자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이루기 위하여 그 사랑을 나누기 위하여, 베풀기 위하여, 전하기 위하여 분주히 달리고 수고하고 애쓰는 삶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영적인 신비함에 쌓여 우리 삶이 감격 속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성령에 사로잡힌 삶이라는 것은 좀 들뜬 삶입니다.
오순절 성령 충만한 주의 제자들이 밖에 나가 주의 복음을 전할 때 사람들은 뭐라고 얘기했냐면 저 사람들이 술 취했다고 얘기합니다.
성령에 충만한 사람들은 보통 사람들보다 설레는 마음을 가지고 있거든요.

여러분, 은혜를 받으면 우리 마음에 드는 생각이 설레는 마음입니다. 어떤 말을 들어도 감사하고 은혜가 되고, 누구를 보아도 감격하고, 누구를 보아도 사랑으로 대하고 싶고, 모두에게 감사하고, 이 세상에 있는 공기 한 점까지도 감사한 것이 되는 것이란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으면 내 마음에 사랑의 은혜가 풍겨져 나오게 되는 겁니다.
오늘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님들, 하나님의 은혜 속에 풍성한 사랑의 은혜가 가득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내 마음에 누구를 봐도 그윽한 생각이 들며 애틋한 심정이 드시길 바랍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백성들의 모습입니다.

두 번째, 하나님의 사랑은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인간을 위해 십자가 위에 못 박혀 죽게 하심으로 인간을 구원하신 희생과 헌신적인 사랑입니다.
사랑은 희생적이고 헌신적인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계산을 능가합니다. 우리는 계산도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 계산 잘 합니다. 그러나 계산을 능가하는 더 큰 유익과 기쁨이 있기에 계산을 선택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선택하는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우리는 예수 믿고 사랑해서 손해 보는 사람이 아니라 더 큰 기쁨과 유익을 얻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그 안에 거하기를 소원하는 사람입니다.
사랑을 나누고 베풀고 체험해 본 사람은 결코 그 기쁨을 잊을 수 없어 중독보다 더 강한 사랑의 은혜와 기쁨에 취하여 살게 됩니다.
우리 삶에 무엇인가 남기고 가는 것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세상 살고 나서 나는 무엇을 남길 것인가?
세상 살고 나서 우리는 무엇을 남길 것인가를 생각합니다.사랑은 감정을 능가합니다. 늘 말씀드리지요. 사랑이 변하냐? 변하지요. 감정이라고 생각하면 변합니다. 그렇게 좋아했는데 싫어지는 걸요. 그렇게 사모했는데 보기도 싫다는 말입니다. 감정은 바뀔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감정만으로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감정을 넘어선 의지의 작용이지요.

늘 말씀드리지요. 사랑은 열정으로 시작합니다. 의지로 유지됩니다. 희생과 헌신으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이 희생과 헌신의 단계까지 가지 않으면 사랑의 완성은 이루어지지 못합니다.
내 감정 선에서 끝나면 늘 이루어지지 못하고 깨지는 겁니다.
의지의 선에서 이루어지면 이루기는 이루는데 행복하지 못한 이룸이 됩니다.
희생과 헌신의 심정으로 사랑이 완성될 때 우리는 그 사랑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겁니다.
사랑은 희생적이고 헌신적인 것이기 때문에 사랑이 있는 곳에는 감동이 있는 겁니다.
사랑에는 감동이 있어요. 감동은 사람에게 힘을 줍니다.
사랑은 희생적이고 헌신적인 것이기 때문에 감동이 있구요, 감동은 사람을 세우는 힘과 능력이 있습니다.

저는 요즘도 늘 생각하는데요, 제가 이 교회에서 처음 설교를 시작하고 목회를 시작한지가 만 서른세 살, 서른네 살 이었단 말입니다. 지금 생각해보니까 정말 어린나이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 성도들이 그 말씀을 들어주셨고 어떻게 그 모습을 봐 주셨는지 참 그것이 감사하고 신기한 것 같습니다. 얼마나 참아주셨는가? 또 우리 주님은 얼마나 참아주셨는가?
이것은 사랑이 아니면 설명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랑은 설명할 수 없는 겁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해. 왜냐하면......” 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거래입니다.
사랑은 설명할 수 없는 겁니다. 그냥 좋은 겁니다.
참아주고 그것조차 감사하는 겁니다. 인내할 수 있는 겁니다.

우리 옆에 사람에게 인사한 번 해 봅시다.
“나는 당신이 그냥 좋아요.” 그래야 그게 사랑입니다.
“나는 당신이 이래서 좋고, 저래서 좋고, 당신이 내가 원하는 것 해서 좋고, 예뻐서 좋고, 멋있어서 좋고......” 이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냥 좋은 겁니다. 왜 좋은지 모르겠습니다.
“당신 내가 왜 그렇게 좋아?”
“모르겠는데 그런데 좋아.”
그래야 사랑인 겁니다.
조건 때문에 사랑하면 결국 조건 사라지면 사랑도 식어지는 겁니다.

우리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사랑이고, 설명할 수 없는 것은 지, 정, 의에 복합적인 요소가 우리들에게 녹아져있기 때문에 설명할 수 없는 겁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인간을 사랑한 대가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오히려 용서할 수 없고 사랑할 수 없는 인간을 사랑하신 현실을 능가한 비대가적인 사랑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비대가적인 사랑을 주신 것처럼 이제 하나님 안에 구원받고 영원한 생명과 사랑의 은혜를 체험한 우리도 바로 비대가적인 사랑을 해야 합니다.
'당신이 그러니 나도 당신에게 이래.'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란 말입니다.
사랑은 이해고 용서고 수용과 구체적인 실현입니다.

사랑은 이해해야 이루어지잖아요. 이해하게 되면 용서하게 되고 용서하게 되면 받아들이는 수용의 의지를 발동하게 되고 수용하게 되니까 구체적으로 나아가 그것을 감사하며 기뻐하며 실행하는 것입니다.
저 사람이 내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앙갚음 하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 저 사람이 나를 다시금 기쁘게 할 수 있도록, 그 사람의 마음이 바뀌고 환경이 바뀌도록 기도하고 그의 여건을 만들어주기 위해서 애를 쓰는 것이 사랑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죄성을 이해하고 용서하시고 사랑하신 겁니다.
인간의 죄성을 볼 때 인간은 결국 하나님과의 약속을 깨뜨릴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이해하고 감안하시고 방법이 없어 예수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심으로 인간과의 화목제로 삼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고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죄가 보이고 허물이 보이는 것은 사랑이 식어진 겁니다.
여러분 옆에 있는 사람의 죄와 허물이 보입니까? 사랑이 식어진 겁니다.
우리가 진정한 사랑을 마음에 품는다면 죄도 허물도 보이지 않고 가엾어 보이고 측은해 보이는 겁니다.
사랑은 측은해 보이는 겁니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무엇인가 내가 할 수 있는 몫이 없을까?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의 죄를 봤을 때 너무 측은히 여겨졌단 말입니다.
어떻게 방법이 없을까? 방법이 없어요.
할 수 없이 하나님께서는 예수그리스도를 세상에 내려 보내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인간으로 방법이 없으니 하나님께서 그 방법을 제시해 주셨던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를 받는 우리의 마음은 무엇입니까?
주님의 은혜를 받았으면, 그 주님의 은혜를 받았으면 우리는 그 은혜를 흘려보내야 되지요.
늘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통해서 가로막혀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통해서 흘러야 합니다.

제가 늘 이런 고백하잖아요. 제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도 이 목사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가 막혀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목사가 말씀을 전하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가로막혀지면 안 되고, 목사가 말씀을 전하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가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통해서 가로막혀지면 안 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통해서 흘러가야 됩니다.
저는 여기 있는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흘려보내는 유통하는 통로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통해서 거기서 단절된다면 우리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통해서 다른 사람에게 전파되고 전달되고 흘러가고 그들에게 누릴 수 있도록 우리는 그 일을 감당해야 됩니다.

세 번째,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우리는 서로를 사랑함이 마땅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법을 이루는 겁니다.
사랑은 받을 자격이 있어서 사랑받고 사랑할 정도가 돼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자격 없는데 사랑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평가하면 도저히 사랑할 만한 대상이 아닌데도 사랑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았기에 우리도 다른 이들에게 조건 따지고 평가해서 우리는 사랑할 수가 없는 겁니다.

여러분, 사람을 평가하면 사랑할 수 없더라고요. 사람을 평가하면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사람을 이해하기로 작정해야 사랑할 수 있는 겁니다.
우리가 어릴 적 생각을 하면 모든 것 고민한 것 지금 보면 참 유치해요. 왜 그 정도 가지고 고민했나? 그런데 그 당시에는 그것이 너무 중요하고 큰 문제였단 말입니다.
살아가는 우리 삶의 자람의 한 과정일 뿐입니다.
우리의 삶이라는 것은 어찌 생각하면 유치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유치한 삶의 과정들을 눈여겨보시고 지루하게 참아주시고 우리들에게 기회를 주시고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사랑을 베풀어주신 겁니다.
모든 일의 판단, 모든 행동의 근원이 사랑이어야 합니다.
사랑은 따뜻하고 감동을 주고 모든 것을 바꾸는 겁니다.
사랑이란 것은 상대를 살림으로 나를 살리게 되는 겁니다.
우리는 애써 하나님의 사랑의 법을 우리 스스로 이루고 완성해야 됩니다.
우리의 삶을 사랑을 이루는 삶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사랑의 법이 우리의 기준이 돼야 하고 우리는 사랑하기 때문에 모든 일을 진행하고 모든 일을 이루어 가야 합니다.

이제 올해가 보름정도 남았습니다. 저도 이제 좀 정리를 해야겠다고 생각을 해서 며칟날 정리를 할까하고 날짜들을 좀 계산해 보고 시간들을 계산해 봤습니다.
첫째, 하던 일들도 좀 정돈 해 놓고, 하던 일들도 파일 정리도 해놓고, 그 다음에 모든 사물들도 정리를 해놓고, 마음도 정리를 해놓고, 올해를 정리하고 내년을 맞이하기 위해서 정리정돈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하고 생각을 합니다. 아마 여러분도 다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연말 대청소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 생각을 하다가 정리가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정리라는 것이 무엇일까? 제 나름대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리라는 것은 버려야 될 것과 버리지 말아야 될 것을 구분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러분, 집에서 대청소한다, 집안 정리한다, 하면 뭐죠? 주로 버려야 될 것들을 다 뽑아내서 버리는 것이 정리죠? 그것 안 버리면 집이 난장판이잖아요.

이것 구분하지 않고 여기다 놓고 정리해 놔 봤자 시간 지나면 또 엉클어져요.
제가 말씀드렸지요? 3년 동안 안 쓴 것은 보지도 말고 다 버리세요.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집안 정리가 안 됩니다. 나중에 뭐 버렸는지도 몰라요. 뭐 버렸는지도 모르면 그것은 쓸 일도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버려야 될 것과 버리지 말아야 될 것을 정리해서 버리지 말아야 될 것은 가장 잘 사용할 수 있도록 적합한 위치에 놓는 겁니다. 그리고 효과를 보도록 정돈해 놓는 겁니다.
여러분, 정리라는 것은 버릴 것과 버리지 않아야 될 것을 구별하는 작업입니다.

우리 오늘 성찬식을 가집니다.
이제 주님이 오신 날이 멀지 않아 우리가 이와 같이 성탄의 아름다움을 기대하면서 오늘 성찬의 예식을 가집니다.
성찬의 예식을 가지면서 우리를 정리합시다.
내게서 무엇을 버려야 할 것인가?
나는 무엇을 떨쳐내야 될 것인가?
한 조각의 떡을 먹으며 주님의 몸에 동참하고, 한 잔의 포도즙을 마시며 주님의 보혈에 동참한다는 마음의 감동을 받는데 나는 오늘 무엇을 정리할 것인가?
무엇을 내 삶에서 떨어내야 할 것인가?
무엇을 버려야 될 것인가?
정리해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나는 무엇을 유지하고 가져야 할 것인가? 어떻게 가장 잘 정렬해놔서 그것을 가지고 최고의 효과를 보아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을 우리는 정리하고 정돈해야 합니다.

오늘도 성찬에 동참하는 주의 성도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 속에 올 한 해를 정리하고 정돈하며 버려야 될 것 다 버리시고, 있어야 할 것들 다시 정돈하셔서 주님 앞에 아름다운 주의 성도로서의 삶이 이루어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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