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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자유함과 해방을 위하여 (눅 4: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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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함과 해방을 위하여 (눅 4:16-20)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본문말씀은 이사야서 61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누가복음을 쓴 누가가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해서 기록한 말씀입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님이 어려서 자라신 곳 나사렛에 있는 회당에 들어가서 성경을 읽었다고 했는데 그때 읽은 성경이 바로 이 이사야가 쓴 본문입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 하더라“.

이 내용을 자세히 보면 주목할 대목이 몇 번 나옵니다. 하나는 그곳이 나사렛에 있는 회당이라고 했습니다. 오랜만에 예수님이 고향에 들러 사람들을 만나서 가장 먼저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또 손에 성경을 들고 읽었다고 했습니다. 그때 읽은 내용이 이사야 61장 1-2절로 예수님 자기 자신에 대해서 예언된 내용입니다. 그 당시로부터 700년 전에 이사야가 장차 이런 사람이 세상에 오셔서 이런 일을 할 것이라고 예언했는데 그로부터 700년이 지난 지금 그 예언의 주인공인 예수님이 그 내용을 읽고 있습니다. 아주 흥미로운 일 아닙니까. 여기 보면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몇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파하려

여기 “가난한 자”는 산상수훈 첫머리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요”. 마음이 가난하다는 말은 마음의 순수하고 맑고 무욕하고 사모함이 있는 마음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런 사람은 말씀을 들으면 그대로 믿고 받고 용납합니다. 그런데 마음에 욕심이 가득하고 이생에 집착하는 사람은 순수함이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전도해도 씨도 안 먹힙니다. 그리고 부자들은 대부분 교만함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부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의 실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상대도 하지 않고 경멸합니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은 게을러서 못산다고 생각하고 무능력하다고 단정합니다. 자신이 부한 것은 유능하고 부지런해서 잘 산다고 생각하며 나는 무엇이나 할 수 있다고 단정합니다. 그래서 대부분 부자들은 교만하고 전도해도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시 가난한 사람들을 찾아 전도했습니다. 갈릴리의 어부들을 제자로 삼았습니다. 자신도 구유에서 태어났고 인류의 구원사역을 감당하면서도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먼저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당시 유대인들은 로마로부터 억눌린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이 말씀을 유대인들은 로마의 압제로부터 자유하게 해 준다는 말씀으로 해석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와서 로마를 무찌르고 당당하게 다윗시대의 영광을 재현할 만왕의 왕으로 고대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사람들이 그렇게 열광하면서 맞아들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로마 군인들에게 잡혀가는 예수님의 무력한 모습을 보면서 열광하던 백성들은 반대로 예수를 죽이라고 소리 질렀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잘못 해석해서 나온 결과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오셔서 온 인류를 죄와 사망의 그늘에서 해방시킬 것을 예고하신 말씀입니다.

  이 억압이 얼마나 무거운 짐입니까. 중병자들이 지고 있는 짐이 무겁습니다.  가난도 무거운 짐입니다. 신체장애도 무거운 짐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장차 예수께서 오시면 그런 무거운 짐으로부터, 억압으로부터 자유하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그 무거운 짐을 지고 있던 사람들이 결국 예수를 만나고 나서 얼마나 환희와 기쁨과 감사함을 고백하였습니까. 현실은 변한 것이 없지만 내면에서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마음에 천국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무겁던 짐도, 장애의 짐도, 암 덩어리가 짓누르는 짐도 가볍게 느껴진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를 만남으로 얻어지는 축복입니다.

일본인 가가와 도요히코는 “사선을 넘어서”라는 자서전을 썼습니다. 그는 젊어서 폐결핵을 앓았습니다. 그때는 폐결핵은 치료가 어려운 병이었습니다. 그는 시한부 인생을 살면서 무거운 짐이 짓누르는 고통스런 인생을 살았습니다. 매일같이 절망감이 엄습해 왔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어느 날 작심하기를 “죽는 시간까지 기다리지 말고 남은 시간 선용하자“하고 빈민가에 들어가 그 사람들을 위해서 정신없이 헌신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때 그는 비로소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때 그의 마음에 환희와 감격과 희망과 자유함이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후 50년을 더 살아갑니다. 예수의 오신 목적이 이 무거운 짐으로부터 자유하게 하시려고 오셨다고 했습니다.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세상에는 육신적으로 눈이 어두운 장님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은 육신의 눈은 떠 있으나 영적으로 눈이 어두운 장님도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런 영적 눈을 떠서 천국을 보게 하고 구원의 길을 보게 해 주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육신의 눈이 어두운 것도 고통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더 불상하게 여기신 것은 영적 눈이 어두운 장님입니다. 눈은 있는데 성경을 보면서도 보지를 못하는 불행이 더 큰 불행이라는 것입니다. 이 눈을 가지고 겨우 보는 것이 세상적 재리만 보고 욕망이나 보고 이생만 본 다는 것 얼마나 불행합니까. 헬렌 켈러라는 분은 눈도 귀도 입도 막힌 여인이었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보고 얼마나 불행한가 하고 수군거렸습니다. 그때 헬렌 켈러가 이렇게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나는 세상을 볼 수 없고 당신들의 얼굴도 볼 수 없으나 나는 이 눈을 가지고 천국을 보았고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이 여인을 보고 불행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 영적인 눈을 가진 것이 보배입니다. 육신의 한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신비하게 천국을 보고 하나님을 보고 부활을 믿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여러분들이 모두 육신의 옷을 입고 있지만 천국을 보고 소망하고 바라고 믿는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보다 더 큰 복이 어디 있습니까. 그것은 주께서 세상에 오셔서 우리에게 눈을 뜨게 해 주신 결과입니다. 

눌린 자에게 자유를

이 말씀은 죄의 노예가 되어 세상의 근심과 걱정에 얽매이며 고통 받는 자에게 영혼의 평안과 자유를 주실 것을 예고하신 말씀입니다. 인간이 지는 가장 무거운 짐은 죄의 짐입니다. 우리들이 죄의 짐을 풀었지만 우리 마음에는 아직도  이 죄의 뿌리가 들어 있습니다. 회개해도 이 뿌리는 그냥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기회가 있으면 속에서 이 뿌리가 고개를 들고 나옵니다. 어느 장로님이 장로가 되기 전에 술 고래였다고 합니다. 예수 믿고 술을 끊고 장로가 되었습니다. 어느 날 목사님과 동행해서 심방 가느라고 양조장 근처를 지나는데 순간 막걸리 냄새가 진동했습니다. 그때 그 술 냄새를 맡은 장로님이 “죽여주는구먼” 그랬다고 합니다. 옛날 술 마시던 그 근성의 뿌리가 조용히 있다가 순간 막걸리 냄새에 꿈틀거린 것입니다. 이것이 죄성의 뿌리입니다. 이 뿌리가 가만히 있다가 어느 순간 기회가 되면 꿈틀거리는 것입니다.

또 세상의 걱정 근심도 무거운 짐이고 멍에입니다. 이 멍에 없이 사는 사람이 한사람도 없습니다. 얼마나 그 고통이 심하면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겠습니까. 그리고 그 짐이 얼마나 무거우면 인생을 다 포기하겠습니까. 엊그제 총기 탈취범의 범행동기가 애인과 이별하고 허전한 마음에서 범행을 저질렀다고 했습니다. 그가 지고 있던 짐이 무거웠을 것입니다. 실연당해 본 분들은 그 짐이 얼마나 무거운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좀 일찍 그 짐을 내려놓는 방법을 알았더라면 그렇게 행동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가룟 유다도 목을 맬 수밖에 없는 큰 짐을 지고 있었습니다. 정신이 돌아온 후에 생각해 보니 엄청난 죄를 지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내가 스승을 팔다니, 내가 스승을 배반하고 동료들을 배반하다니”, 그것은 너무 엄청난 짐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곧 돌아와 회개하고 잘못했다고 했으면 되지 왜 미련스럽게 목을 매었느냐고 하지만 유다는 그 상황에서 돌아오기가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목을 맨 것입니다. 오늘도 그런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자꾸만 제 2의 가룟 유다가 출현하고 제 3의 총기 탈취범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모두 감당하기 힘든 근심과 걱정의 무거운 짐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베드로는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베드로도 유다 못지않게 예수님 앞에서 배반하고 실수한 사람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이 보는 앞에서 선생님을 배반하고 저주까지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 말씀대로 닭이 울었다고 했습니다. 그 닭 울음소리와 함께 베드로는 나가서 자신의 실수에 대해서 통곡을 했다고 합니다. “내가 왜 어쩌다 이런 실수를 저질렀는가”, 그때 그 고통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웠겠습니까. 그런데 베드로는 가서 유다처럼 목을 맨 것이 아니고 통곡하고 재기의 길을 걸었습니다. 재기의 길을 걷고 예수께로부터 용서를 받았지만 전설에 의하면 그 후 베드로는 닭만 보면 얼굴을 못 들었다고 합니다.

세상에서 사기만 치던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천국 입구에서 심판대에 섰습니다. 때마침 베드로가 자격심사를 하다가 그 사기꾼을 만났습니다. 그를 보자마자 “너는 천국에 갈 자격이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러니까 사기꾼이 “왜 안 되냐”고 따졌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너는 맨날 사기나 치고 배반이나 하고 사람들을 속이지 않았느냐”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사기꾼이 짐 보따리를 슬그머니 베드로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사기꾼이 말했습니다. “이게 뭔지 아십니까, 한번 들추어 볼까요” 베드로가 그 짐 보따리 속을 들여다보니까 그 속에 닭 한마리가 들어있었습니다. 그 닭을 보자마자 베드로가 두말 안하고 “빨리 들어가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걱정과 근심” 이 짐이 그 옛날 사람에게도 오늘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감당하기 어려운 짐들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억눌린 자에게 자유를 주려고 왔다”고. 성경을 보면 그때부터 예수님은 3년 동안 하루도 쉴 날 없이 이 억눌린 사람들을 치료하고 자유하게 하시려고 동분서주하셨습니다. 가는 곳 마다 찾아오는 병자들을 고치셨습니다. 나면서부터 소경된 사람, 앉은뱅이 된 사람, 하루 종일 피를 흘리는 혈루병자, 중풍병자, 나병환자 등 각종 병자들을 고치셨습니다. 예수님이 그 모습들을 볼 때 참으로 기가 막혔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죄의 멍에에 씌워져 저렇게 고난 받고 있으니 얼마나 마음이 아팠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쉴 사이 없이 병자들을 고쳐서 육신의 멍에로부터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또 사랑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귀신들로부터 억압당하고 이방인들이 보는 앞에서 별 미친 짓을 다하고 있는 그 모습을 보시고 탄식하시면서 그 사람 안에 들어있는 귀신에게 명하시기를 ”귀신아 나오라“고 외치시고 귀신들린 자를 고치셨고 사람들이 귀신들로부터 억눌린 것을 영적으로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또 영적 무지자들에게 가르쳐서 그들을 무지로부터 해방시키셨습니다. 율법에 한정된 안목을 가지고 살아가던 당시 유대인들에게 복음의 세계를 보고 믿게 하시려고 회당 마다 찾아가셔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또 내일 일 때문에 매일 같이 근심 걱정하는 사람들에게 그날그날을 살아가는 삶의 지혜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무거운 짐은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정신적 질병들도 다 짐입니다. 이를테면 편견, 늘 비난하는 병든 생각, 이것들도 무거운 짐입니다. 그 사람들도 늘 입만 열면 누구를 흉보고 악평하는 자신이 싫었을 것입니다. 그것도 그가 지니고 살아가는 짐입니다. 어느 그림 비평가가 늘 비평만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세상에 온전하게 보이는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비평거리였습니다. 이 분이 마침내 시력까지 어두워졌습니다. 어느날 부인과 함께 미술 전시장엘 갔는데 그림이 윤곽만 보였습니다. 남편은 어느 그림 앞에서 비평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화가는 그림을 잘 그렸는데 모델을 잘못 선택했어, 모델이 너무 못 생겨서 그림을 잘 그리고도 실패했군, 예술가가 명작을 기대한다면 모델을 잘 선택해야 해“, 그때 옆에 있던 아내가 자꾸만 이야기를 중단시키려 했습니다. 그런데도 계속 비평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아내가 소리 쳤습니다 “여보, 당신은 지금 거울을 보고 있단 말 이예요.” 그래서 이것이 병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지한자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천국을 보게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그 가르침을 받고 들을수록 눈이 뜨였고 귀가 열렸고 마음이 열렸습니다. 그래서 천국이 보였고 귀신들이 막 쫓겨 가는 것이 보였습니다. 얼마니 신비했겠습니까. 지금까지 자기들이 오해한 것, 무지해서 보지 못하던 것들, 근심 걱정의 무거운 짐을 지고 있던 것들은 알고 보니까 문제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신났겠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이 그 가르침에 먹는 일도 잊어버리고 광야로 따라다니며 말씀을 들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을 듣고 이 눈이 뜨이고 귀가 열린 사람들은 모두 자유하게 하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큰 은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이 자유입니다. 패트릭 헨리는 “나에게 자유를 달라 그렇지 않으면 차라리 죽음을 달라“고 외쳤습니다. W. 위트만은 “자유보다 우선하는 것은 없다”고 했습니다. 성경은 다시는 죄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자유함을 누린 사람은 사도 바울일 것입니다. 숨길 것 없는 자유, 잃을 것 없는 자유, 두려워할 것 없는 자유를 누렸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자유하게 하시려고 오셨습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자유 해야 할 가치를 지니고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자유 하도록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무엇엔가 억눌려 살고 무거운 짐을 지고 산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내 자식이 그런 짐을 지고 곤고하게 살아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래서 하나님은 세상에 예수를 보내신 것입니다. 모든 무거운 짐을 벗겨 주시고 사해주시고 평안을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탄생 700년 전에 이 말씀으로 장차 이 세상에 메시아 예수께서 태어나실 것을 예언했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오늘 우리는 내가 그 예수를 알게 된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은혜를 입었나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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