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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교회는 어떤 곳인가?(21) : 흰 옷을 입고 찬양하는 곳 (계 7: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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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어떤 곳인가?(21) : 흰 옷을 입고 찬양하는 곳 (계 7:9-17)

지금까지 “교회는 어떤 곳인가?” 라는 주제를 가지고 20번 설교를 했습니다. 금년 7월 1일 주일에 “복 있는 자들이 사는 집”이란 제목으로 설교를 하기 시작해서 지난 주일에는 “열심을 내어 회개하여야 하는 곳”이란 제목으로 20번째 설교를 했습니다. 지금까지는 모두 이 세상에 존재하는 교회들의 모습에 대해서 설교를 했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마지막으로 하늘에 있는 하늘 교회의 모습에 대해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제자 사도 요한에게 세상에 있는 일곱 교회들의 모습을 보여주신 다음 하늘에 있는 하늘 교회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하늘 교회를 보게 되었습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사도 요한은 참으로 복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볼 수 없는 부활 승천하신 주님의 모습도 볼 수 있었고 하늘 교회도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사도 요한은 요한 계시록을 쓰면서 “내가 보니, 내가 보니” 라는 말을 계속해서 반복했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사도 요한이 본 하늘 교회의 모습에 대해서 설교를 하겠습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모두 하늘 교회에 가야 하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첫째, 하늘 교회는 히브리 사람들이나 미국 사람들이나 한국 사람들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각 나라와 각 족속과 각 백성과 각 방언에서 온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들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이 세상은 민족주의와 국가주의와 인종주의와 지역주의적인 대결과 갈등으로 얼룩져 있습니다. 그래서 끊임 없는 분쟁과 전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심지어 예루살렘 교회 안에도 지역적이고 문화적인 갈등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헬라파 사람들과 히브리파 사람들 사이에 갈등이 있었습니다. 미국교회 안에는 백인들과 흑인들 간의 갈등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늘 교회에는 그와 같은 갈등이 모두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하늘 교회에는 인종 차별이나 민족 차별이 존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일본 사람들과 한국 사람이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함께 서서 있었습니다. 흑인들과 백인들이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함께 서서 있었습니다. 아프간 사람들과 미국 사람들이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함께 서서 있었습니다. 몇몇 특별한 사람들로만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 수를 셀 수 없을 정도의 다 인종 다 민족의 큰 무리들로 이루어져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와 같은 그림은 이 세상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그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교회의 주인이 되시고 천국의 주인이 되시는 주님께서 사도 요한에게 보여주신 하늘 교회의 모습이었습니다. 왜 이와 같은 모습을 사도 요한과 우리들에게 보여 주셨을까요? 이 세상에서부터 이와 같은 모습의 교회를 이루기 시작하라는 주님의 분부라고 생각합니다. 가난한 자도 부자도 함께 모이는 교회, 경상도 사람도 전라도 사람도 함께 모이는 교회, 장애인도 비장애인도 함께 모이는 교회, 이와 같은 교회를 이 세상에서부터 이루기 시작하라는 주님의 분부라고 생각합니다.


둘째, 하늘 교회는 어린 양의 피에 씻은 흰 옷을 입은 사람들로만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이 세상에 존재하는 교회는 누구나 들어 갈 수가 있습니다. 양복을 입은 사람도 한복을 입은 사람도 에스키모 사람들처럼 두툼한 털 옷을 입은 사람도 남양군도에 사는 사람들처럼 바나나 잎으로 만든 가벼운 옷을 입은 사람도 다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늘 교회는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흰 옷을 입은 사람들만 들어가는 곳이었습니다. 마22장에 천국에 대한 비유가 기록되어 있는데 천국에는 예복을 입은 사람들만 들어간다고 지적했습니다.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자리에 손이 가득한지라 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올 쌔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 무언이어늘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마22:10-13).

하늘 교회에는 민족이나 인종의 차별이 없이 누구나 들어갈 수가 있었지만 한 가지 조건이 있었습니다. 윤리 도덕의 기준으로 들어가는 것도 아니었고 예배의 의식이나 형식으로 들어가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오직 한 가지 조건이 있었습니다. 어린 양의 피로 희게 씻음을 받은 자들만이 들어갈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피 흘림이 없은즉 [죄]사함이 없느니라”(히9:22).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히10:19).

오늘 본문은 이 사실을 분명하게 지적했습니다.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사실 기독교는 윤리 도덕의 종교가 아닙니다. 그래서 주기철 목사님은 윤리 도덕을 배우러 온 사람들은 산정현 교회당에서 나가라고 설교한 일이 있었습니다. 기독교는 정치의 종교도 아닙니다. 그래서 주기철 목사님은 민족주의자들은 산정현 교회당에서 나가라고 설교한 일이 있었습니다. 기독교는 철두철미 피의 종교입니다. 그래서 주기철 목사님은 십자가의 피로 중생하기를 원하는 사람들만 산정현 교회당에 머물라고 설교한 일이 있었습니다. 얼마나, 얼마나 귀한 하나님의 종이었는지 모릅니다.

요사이는 교회가 너무 세상적이 되었습니다. 대기업과 같은 모습을 띤 교회들도 있습니다. 정치인들과 기업인들이 인기를 누리는 교회들도 있습니다. 어린 양의 피와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인기를 누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늘 교회에는 어린 양의 피와 상관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 성경은 피로 가득한 책입니다. 피라는 말이 성경에 460번이나 나온다고 합니다.

그 중 몇 가지만 인용합니다.

“너희는 나가서 너희 가족대로 어린 양을 택하여 유월절 양으로 잡고 너희는 우슬초 묶음을 취하여 그릇에 담은 피에 적시어서 그 피를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뿌리고 아침까지 한 사람도 자기 집 문밖에 나가지 말라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을 치러 두루 다니실 때에 문 인방과 좌우 설주의 피를 보시면 그 문을 넘으시고 멸하는 자로 너희 집에 들어가서 너희를 치지 못하게 하실 것임이니라”(출12:21-2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요6:53-56).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엡1:7).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롬5:9).

하늘 교회는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한 사람들만 들어가는 곳입니다.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고 보혈의 공로를 믿고 의지하는 사람들만이 들어가는 곳입니다. “예수로 나의 구주 삼고 성령과 피로써 거듭난” 사람들만 들어가는 곳입니다. “죄에서 자유를 얻게 함은 보형의 능력 보혈의 능력” 이렇게 찬송을 부르는 사람들만이 들어가는 곳입니다.

그런데 여기 또 한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절대적인 조건은 아니지만 필요한 조건이라고 생각합니다. 환난에서 나오는 일이 필요합니다.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한 사람들은 큰 환난에서 나왔다고 지적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행14:22). 예수님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환난이 절대적인 조건은 아니지만 필요한 조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환난을 당할 때 두려워할 필요도 없고 낙심할 필요도 없습니다. 사도 바울을 오히려 즐거워했습니다.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롬5:3). 환난에서 나오는 사람들 그리고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희게 씻은 사람들만 들어가는 곳이 하늘 교회입니다.


셋째, 하늘 교회는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찬양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큰 무리가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이 세상에 존재하는 교회에는 노래를 할 줄 모르는 음치들도 들어갈 수 있고 노래를 들릴락말락 하는 작은 소리로 부르는 사람들도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늘 교회는 그런 사람들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하늘 교회의 성도들은 모두 일어서서 큰 소리로 노래를 불렀습니다.

“큰 무리가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천사들은 보좌 앞에 서서 노래를 부르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져서 노래를 불렀다고 했습니다.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섰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경배하여 가로되.”

우리가 교회에서 예배를 드릴 때 어떤 자세와 모습을 취하여야 할지를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생각합니다. 찬송과 기도를 드릴 때 어떤 자세와 모습을 취하여야 할지를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리를 꼬고 팔짱을 끼고 앉아서 들릴락말락 한 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기도하는 사람은 하늘 교회에 합당하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뜨거운 마음으로 일어서서 큰 소리로 찬송을 부르고 큰 소리로 기도를 드려야 할 것을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때로는 우리 선배들이 한 것처럼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도 아주 좋은 자세와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어제 성경을 찾아보았는데 ‘무릎을 꿇고’ 라는 말이 성경에 너무 많이 나옵니다. “솔로몬이 무릎을 꿇고 하늘을 향하여 손을 펴고 가로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여”(대하6:13,14). “다니엘이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단6:10).
“예수께서 저희를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가라사대”(눅22:41).
“스데반이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행7:59,60).
“베드로가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가로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행9:40).
“이 말을 한 후 무릎을 꿇고 저희 모든 사람과 함께 기도하니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그를 전송하니라”(행20:36-38).
“우리가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어 기도하고 서로 작별한 후 우리는 배에 오르고 저희는 집으로 돌아가니라”(행21:5,6).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엡3:15).

이제 하늘 교회의 성도들이 큰 소리로 외치며 부른 노래의 내용과 주제가 무엇이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저들이 큰 소리로 외쳐서 부른 노래의 내용과 주제는 하나였습니다.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였습니다. 구원의 은혜를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돌리는 찬양! 그것이 하늘 교회 성도들이 일어서서 큰 소리로 외치면서 부른 노래였습니다.

사실 계5장에도 하늘 교회 성도들이 부른 노래의 가사가 기록되어 있는데 그 노래의 내용과 주제도 꼭 같았습니다.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찌어다”(계5:13). 12절의 노래는 어린 양에게만 드린 노래였습니다.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계5:12).

저는 요사이 찬송 중에서 예수님에 대한 찬양이 제일 좋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찬양을 부르면 은혜와 감동이 넘칩니다. 예수님 생각만 하면 눈물이 흐릅니니다.
“내 주님 입으신 그 옷은 참 아름다워라.”
“구주를 생각만해도 내 맘이 좋거든.”
“나의 기쁨 나의 소망 되시며.”
“예수는 나의 힘이요 내 생명 되시니.”
“천지에 있는 이름 중 귀하고 높은 이름.”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로 나의 구주 삼고 성령과 피로써 거듭나니.”
“내 주 예수 뵈올 때에 그 은혜 찬송하겠네”
“자비한 주께서 부르시네 부르시네.”
“예수 그 이름 나는 말할 수 없네.”
“내 마음에 주를 향한 사랑이.”
“나의 사랑 나의 생명 나의 예수님.”
“예수 사랑해요 나 주 앞에 엎드려.”

저는 요사이 예수님에 대한 찬양을 부르면 은혜와 감동이 넘칩니다. 예수님 생각만 하면 눈물이 흐릅니다. 아마 하늘 교회가 점점 가까워지기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앞서 간 신앙의 선배들을 만날 것을 생각하면 감동과 감격에 사로잡히곤 합니다. 나 같은 불의한 죄인을 사랑하시고 나 위해 죽으시고 그리고 나를 용서하시고 나를 축복하시고 나를 사용하신 주님 앞에 엎드릴 것을 생각하면 너무 황송하고 너무 죄송하고 너무 감사해서 엎드러져서 일어나지도 못할 것 같습니다. 아마 통곡을 하며 울면서 감사를 드릴 것 같습니다.

계시록 7장은 하늘 교회의 아름다운 모습을 더 자세하게 보여주지만 시간이 없어서 간략하게 몇 마디 하고 설교를 마무리 하겠습니다. 그곳에서는 다시 주리지도 않고 다시 목 마르지도 않는다고 했습니다. 다시 상하지도 않는다고 했습니다. 어린 양이 그곳에서도 우리들의 목자가 되어서 생명수 샘물로 우리를 인도하시기 때문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눈에서 눈물을 씻어주신다고 말씀했습니다. 얼마나 친밀하고 얼마나 아름다운 하늘 교회의 모습인지 모릅니다. 누가 하늘 교회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누구나 들어 갈 수가 있습니다. 인종과 민족과 계급의 차별이 하나도 없습니다. 어린 양의 피에 씻은 흰 옷만 입으면 됩니다.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고 보혈의 공로를 믿고 의지하기만 하면 됩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세리도 흰 옷을 입고 들어갔고 십자가에 달린 강도도 흰 옷을 입고 하늘 교회에 들어갔습니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눅18:13,14).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눅23:39-43).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여러분들과 저도 조만간 하늘 나라에, 하늘 교회에 이르게 됩니다. 누가 하늘 교회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누구나 들어 갈 수가 있는데 어린 양의 피에 씻은 흰 옷을 입은 사람은 누구나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날마다 우리의 더러워진 마음과 몸을 보배로운 어린 양의 피에 깨끗하게 씻기를 바랍니다. 날마다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고 회개하면서 어린 양의 피를 믿고 의지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모두 하늘 교회에 들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앞 서 간 성도들과 함께 그리고 천군 천사들과 함께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하나님 아버지와 어린 양 예수님에게 감사와 찬양을 영원토록 돌리시게 되기를 바랍니다. (김명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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