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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다! (마 3: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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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다! (마 3:13~17)

  박물관에서 어떤 사람이 이상하게 몸을 구부리며 전시물들을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그 행동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습니다. 마침내 경비가 그 사람에게 가서 물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은 자기가 초등학교 교사인데 며칠 후에 학생들과 함께 박물관 견학을 오기로 계획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박물관의 전시물들이 어린 학생들의 눈에 어떻게 보일 것인가 미리 알고 싶어서 그런 행동을 했다는 것입니다. 어른들의 눈높이가 아니라 어린 학생들의 눈높이에서 보기 위해서 허리를 굽히고 무릎을 꿇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대부분의 전시물들은 어른들의 눈높이에 맞춰서 어른들이 보기 편하도록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독일의 어떤 병원 소아과 병동은 각 병실을 몇 호실, 몇 호실로 부르지 않고 호랑이 방, 코끼리 방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의사들도 우스꽝스러운 복장을 하고 아이들을 진료한다고 합니다. 그 병동에 입원한 아이들은 병원을 더 이상 무서운 곳으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아이들과 어울리기 위해서는 동심의 세계로 들어가야 합니다. 먼저 마음이 아이들과 같은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입는 옷이나 사용하는 말도 아이들과 같아질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내가 어른인데.” 이런 마음을 고집하는 한 아이들과 어울릴 수 없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어른들 수준으로 아이들을 끌어올릴 수는 없지 않습니까? 오히려 아이들의 수준과 그들의 방법에 우리가 맞춰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 말씀에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장면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질문을 던졌습니다. “예수님이 왜 세례를 받으셔야 했는가?” 아마 세례 요한도 같은 질문을 던졌을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시라고 믿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은 세례를 베푸시는 주체이지 세례를 받는 대상이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때문에 세례 요한도 물었던 것입니다. “...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마 3:14)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세례를 받아야 하는 사람들과는 다른 분이십니다. 비록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지만... 죄를 범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시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모두 사람들이 손꼽아 기다렸던 바로 그 메시아이십니다. 그런데 그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에게 세례를 받으신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거기에는 무엇인가 중요한 뜻이 담겨져 있을 것 같습니다. 과연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하셨을까요? 예수님은 그 뜻을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 마태복음 3장 15절 말씀입니다. “... 이제 허락하라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모든 의를 이루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셔야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의를 이룬다는 것은 또 무슨 의미입니까? 그것은 바로 낮아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세례 받으신 사건을 통해서 진정한 의미의 낮아짐을 발견하게 됩니다. 가르치는 분이 배우는 자의 입장으로 낮아지셨습니다. 세례를 베풀 수 있는 분이 세례를 받는 자의 입장으로 낮아지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 죄인의 입장으로 자기를 낮추시는 모습, 즉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세상에 오신 사건 자체가 우리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낮아짐의 극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예수님은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기 위해서 죄가 전혀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친히 죄인으로 취급받으셨습니다. 온갖 수치와 모욕과 고난을 다 당하시고 마침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지 않았습니까? 그 십자가는 이 세상에서 더 이상 낮아질 수 없는 가장 낮은 자리일 것입니다. 오죽하면 예수님도 그 십자가의 잔만큼은 피하고 싶다고 하셨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리라고 할 수 있는 그 험한 십자가 위에서 온 인류의 구원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우리가 믿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사건은 바로 십자가 죽음을 향한 결정적인 낮아짐을 가리키는 상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날 밤 제자들과 함께 식사를 나누시는 자리에서 예수님이 남기신 교훈이 무엇입니까?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 13:14~15) 낮아짐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우리에게 분명히 보여 주고 있지 않습니까? 제자들이 스승인 예수님의 발을 씻어 드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제자들이 스승의 발을 씻어 드리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지극히 상식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상식을 거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발을 씻도록 명령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으셨습니다. 낮아짐은 예수님의 삶 속에서 언제나 섬김으로 표현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낮아짐이 없이는 결코 그 어떤 섬김도 가능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마태복음 20장 28절 말씀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 과연 섬김을 받으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려고 오셨습니다. 진정한 의미의 섬김은 무엇이며 그 섬김이 과연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것을 자신의 삶으로 친히 가르쳐 주시지 않았습니까?

  낮아짐과 섬김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이 낮아짐과 섬김은 우리 주님의 마음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주님을 믿는 우리는 과연 어떻습니까? 섬김의 전제 조건이라고 할 수 있는 낮아짐을 기꺼이 선택하고 있습니까? 선뜻 그렇다고 대답하기 어렵습니다. 실제 삶의 현장에서 우리가 낮은 자리에 앉는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라는 다른 사람보다 조금 못하게 평가를 받게 되면 견디지 못합니다. 정치권에서는 노골적으로 남을 깎아내리고 자기를 치켜세웁니다. 직장에서도 자신보다 못한 사람이 조금이라도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속상해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살아가는 이 현실에서는 솔직히 말해서 아무도 낮은 자리에 앉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님은 우리에게 낮아짐과 섬김을 절대적으로 요구하시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마태복음 18장 3절, 4절 말씀에 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까?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조건이 바로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것이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자기를 낮추지 않을 것 같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조차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낮아짐과 섬김이 결코 굴욕적인 패배가 아니라는 사실을 하늘 아버지께서 친히 선포해 주셨습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 말씀 17절에 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까? “...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다만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닙니다. 주님의 낮아짐과 섬김의 도리를 따르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하늘 아버지의 복된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예수님의 세례 받으시는 사건을 통해서 이 땅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어디까지 낮아져야 하며 또한 어떤 모습으로 낮아져야 하는가 분명히 깨달아 알아야 할 것이며 또한 그렇게 실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베들레헴에 있는 예수 탄생 교회로 들어가는 입구는 아주 작은 문으로 되어 있다고 합니다. 물론 처음부터 그렇게 작았던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처음에는 크게 만들었지만 17세기 이후 그렇게 작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회교도들이 말을 타고 교회에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 그렇게 고쳤다고 합니다. 문 높이가 어른 가슴 정도에 해당된다고 하니 고개를 숙이지 않고서는 들어갈 수 없다고 합니다. 그 교회에 들어가려는 사람은 그 누구라도 고개를 숙여야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합니다. 회교도들이 말을 타고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 그렇게 문을 작게 만들었지만 그보다는 더 깊은 뜻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낮추지 않고서는 들어갈 수 없다는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우리를 위해서 철저히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마침내 그 험한 십자가에 달려 물과 피를 다 쏟으시기까지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그 주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모든 것이 분명해지지 않았습니까? 주님이 친히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 그렇습니다! 주님처럼 우리도 자신을 낮출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을 낮추지 않고서는 결코 섬길 수 없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비록 세상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손가락질하며 욕할지라도 앞서 가신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끝까지 걸음으로 장차 그 주님 보좌 앞에 섰을 때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칭찬과 더불어 생명의 면류관, 영광의 면류관을 받아 쓰는 참으로 복된 여러분 모두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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