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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말씀에 붙잡혀 사는 사람 (행 18: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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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에 붙잡혀 사는 사람 (행 18:5-11)

얼굴에 심술이 가득 찬 남자가 고속도로에서 차를 난폭하게 몰고 있었습니다. 시속 150km로 접어드는 순간 아니나 다를까 순찰차가 사이렌을 울리면서 따라오는 것이었습니다. 순찰차를 따돌릴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시속160km로 달렸습니다. 그래도 계속 순찰차가 따라오자 하는 수 없이 차를 멈추었습니다. 경찰이 와서 화를 내며"당신 정지신호를 무시하고 도망간 이유가 뭐요?"그러자 남자가 한숨을 쉬며 말했습니다."제 마누라가 경찰하고 눈이 맞아서 둘이 도망갔습니다.","그거하고 당신이 순찰차를 보고 도망간 거 하고 무슨 상관입니까?"그러자 남자가"죄송합니다. 전 그 경찰관이 제 마누라를 돌려주려고 따라 오는 줄 알았습니다."그러더랍니다. 웃자는 얘기지만 우리 사는 이야기입니다.

한때 현재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하자는<웰빙(Well-being)>의 열풍이 불더니 이제는 우리의 일상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삶의 방식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러나 잘사는 것도 참 중요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잘 죽는 것과 죽음 이후까지를 생각하고 준비하는 이른바<웰 다잉(Well-dying)>이 중요한 시대입니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버나드 쇼(Bernard shaw)]의 무덤에 세워진 비문에 이렇게 적혀있다고 합니다."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어." 살아 있는 동안 인기 있는 극작가였고 인생 말엽에는 세계 최고의 권위를 인정받는 노벨상까지 거머쥔 그가 죽고 난 뒤 비문에는 이런 회한 섞인 말을 적어놓을 정도면 대부분의 인간은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안타까움이 있기 마련일 것 같습니다.[버나드 쇼]가 그처럼 하고 싶었으나 하지 못한 일이 무엇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그의 이러한 행동으로 우리는 적어도 한 가지 각성을 하게 됩니다. 우물쭈물하다가는 우리의 인생은 의미 없이 끝나 버린다는 것입니다. 마지막까지 잘해야 되는 것이지요.

회귀성 동물하면 연어를 떠올립니다. 연어는 거친 물살과 장애물을 이기고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서 마지막 힘과 마지막 열정을 쏟아 부어서 자기가 태어난 고향으로 돌아가 알을 낳고 죽는 회귀성이 강한 물고기입니다. 그런데 물고기만이 아닙니다. 포유류 가운데서도 많은 짐승들이 죽을 때가 되면 반드시 자기가 태어난 고향으로 돌아가서 거기서 생을 마칩니다. 이건 신비로운 것입니다. 많은 과학자들이 연구하지만 여전히 신비로 남아있습니다. 무엇에 끌려가는 것입니까? 누구한테 배우고 누구한테 듣고 이와 같이 하는 것입니까? 살면서 몇 번씩 와 보는 훈련을 해서 하는 게 아닙니다. 이건 설명이 필요 없는 본능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은 무엇에 끌려 사는 것입니까? 그가 몇 년을 살던지 살면서 배우고 듣고 보는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에 의해 살아가기 보다는 기본적으로 원천적 본능에 끌려서 생을 살다가고 그렇게 돌아가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신 높은 차원의 본능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성과 양심입니다. 이것은 누가 가르치든 안 가르치든 육법전서를 알던 모르던 상관없습니다. 가난하든 부자이든 우리 마음속에 있는 이성과 양심이 인도합니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 가운데"아무개는 법 없어도 살 사람이다."하는 말을 합니다. 이 말을 가만히 생각해 봅니다. 가능한 말일까요? 가능합니다. 이성과 양심이 밝게 작용을 하면 법 없이도 얼마든지 아름답게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성과 양심이 어둡고 악하게 작용해서 사건이 생기니까 이제 법이 필요한 것이거든요. 인간은 밝은 이성과 선한 양심에 끌려 살아야 하는 것이 그 본래의 모습입니다.

또 하나 사람은 기본적인 양심과 이성을 바탕으로 살되 그 신분에 맞는 삶을 살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이것을 사회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이라 말합니다. 그 신분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고 상황과 장소에 따라서도 다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직업이라든가, 의무에 따라서 다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드리고자하는 것은 신앙 안에서의 우리의 신분입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의 신분을 생각해 봅니다. 신앙 안에서 우리의 기본적인 신분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신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그분처럼 살려고 하는 소위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그 신분에 맞게 살려면 무엇을 기준으로 살아야 합니까? 어느 정도의 신앙만 있다면 쉽게 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네 그리스도인은 말씀과 성령에 이끌려 삽니다.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라는 심리학자는 자아를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자아는 물질적 자아라고 말합니다. 물질적 소유에 의해서 자기를 평가하면서 사는 존재를 말합니다. 내가 가진 것, 혹은 내 몸의 가치로 평가 받는 것을 물질적 자아라고 하는데 사실 바람직하지는 못합니다.

또 하나는 사회적 자아입니다. 내가 누구의 친구냐, 누구의 자녀냐, 어느 회사의 사장이냐 그리고 어디 출신이냐, 어떠한 박사학위를 가졌느냐하는 사회적 관계와 그 역할에 따라서 평가하는데 이것 역시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세 번째 평가는 영적 자아입니다. 사람을 평가 하는데 있어서 외모로 할 것도 아니고 소유로 평가할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을 생각합니다. 얼마나 하나님의 형상이 살아 있느냐, 얼마나 깨끗한 하나님의 형상이 보존되었느냐하는 그것이 그 사람의 평가기준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 이보다 더 영원한 가치의 것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이런 모습이 있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함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알아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 가운데도 영적으로 살지 못하고 철저하게 육주도적으로 살아가는 안타까운 모습을 볼 때가 있습니다. 도무지 신앙적인 모습이라고는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말이나 행동이나 그 생각 자체가 아예 신앙하고는 거리가 멉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몇 년을 신앙생활 했느냐, 교회의 직분이 무엇이냐가 도무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신앙생활 잘못한 것이요, 인생을 잘못 살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의 사도바울을 배워야합니다. 말씀 속에 그 나름의 인생관을 확실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의 2차 전도여행 말기에 고린도 지방에 복음을 전하는 중입니다. 고린도는 당시 우상숭배와 물질문명의 중심지였습니다. 바울이 이곳에 전도할 즈음에 여러모로 좋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그 때의 심경이 고전2:3절에 나와 있습니다."내가 너희 가운데에 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너무나 솔직한 자신의 모습을 돌이켜 말하고 있습니다. 약하다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것입니다. 의지가 약해졌습니다. 의욕을 상실했다는 말입니다. 또 두려워 한다는 것은 환경에서 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도 깊이 생각해보면 내적인 문제입니다. 왜 그런지 무서워서 전도할 자신이 없고 용기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바울이 왜 연약했겠습니까? 적어도 바울은 경제적인 문제로 인하여 이렇게 나약해질 사람이 아닙니다. 또 생명 문제로 인하여 괴로워할 사람도 아닙니다. 감옥을 제집 드나들듯 한 그가 감옥 가는 것을 두려워했습니까? 또 감옥에서 찬송을 불러 옥문이 열리고 간수가 벌벌 떨 때"주 예수를 믿으라."고 소리 지를 정도로 용기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죽는 것을 겁을 낸 사람입니까? 아니거든요. 그런데도 이상하게 자신의 연약함을 느꼈고 깊이 생각한 결과 그는 자신이 연약해 진 것은 영혼의 문제라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이것이 바울의 위대함입니다. 약해지면서도 왜 약해지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문제입니다. 신앙적으로 인격적으로 잘못되어 지면서도 왜 자기가 그렇게 되는지를 모르는 사람은 답답합니다. 오늘 바울에게서 배워야합니다. 온전하지 못했던 자신이었지만 다시 십자가만을 알기로 작정하고 십자가의 은혜 안에서 재기하게 된 것은 자신의 지식도 아니요, 자신의 능력도 아니요, 자신의 의지도 아니요, 변화되는 환경에서 온 것도 아닙니다. 오로지 십자가의 복음을 재발견하는 데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의 신앙을 돌아보는 깨달음에서 온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 삶을 오늘 성경에서는"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혔다"고 말합니다. 붙잡혔다는 말은 말씀에 완전히 포로가 되어서 나에게는 자유가 없다는 말입니다.

생각도 의지도 운명도 이제는 다 그를 붙잡은 하나님의 것이 되고 맙니다. 바로그 상태가 바울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내 생각이 내 체면에 매달리지 않습니다. 그래야 내 말이 함부로 거칠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야 내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모범이 될 수 있습니다. 내가 도대체 무엇에 붙잡혀서 살고 있는지를 생각해야합니다.

또한 오늘 본문을 읽어 가다보면 6절에서 바울은"나는 깨끗하니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자기는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대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행할 바를 다 행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도 복음을 듣지 않고 구원을 얻지 못하는 것은 자신들의 책임이라는 말입니다. 겔33:4,5절에 악인들이 죄에서 떠나라는 경고를 듣고도 여전히 죄 가운데 있다가 멸망을 당할 경우 그 책임은 전적으로 구원을 거절한 그들에게 있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바울의 말입니다. 그만큼 바울은 유대인의 구원을 위해서 남겨 둔 일이 없을 만큼 최선을 다하여 할 바를 다했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실 일이 있고 내가 할 일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할 일을 내가 다한 다음에는 나머지 일을 하나님이 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내가 할 일을 내가 다했느냐 입니다. 제할 일은 못하면서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겠다고 나서서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놓고는 하나님이 수습하게 합니다. 이건 잘못된 겁니다. 바울처럼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공동체를 위해서 정말 할 바를 다하고야"나는 깨끗하니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나는 무엇에 붙잡혀 살아가는 것입니까? 적어도 언제 어디서든지 예수를 믿노라고 말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먼저 말씀을 생각하고 말씀에 붙잡혀 사는 길 외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프랭클린]이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쓰고 있는 열쇠는 항상 빛난다."그렇습니다. 늘 쓰는 열쇠는 언제나 손에 닳아 빛납니다. 그러나 지하실이나 창고같이 자주 쓰지 않는 열쇠는 녹이 슬거나 색깔이 변해 있기 마련입니다. 여러분의 영성이 빛나길 원하십니까? 말씀으로 살아가는데 사용하십시오. 그러면 빛날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격이 빛나길 원하십니까? 말씀 앞에 인격을 맡기십시오. 그러면 틀림없이 빛날 것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빛나는 믿음이 되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늘 말씀에 내 신앙을 붙잡혀 가도록 맡기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신앙이 정말 빛나는 신앙이 될 것임을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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