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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그네를 대접하라 (창 18:6~10, 마 25:3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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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를 대접하라 (창 18:6~10, 마 25:37~41)

우리 교회에 일본인 가정이 방문하여 오늘 함께 예배를 드린다. 고토우 마시야키 부부는 교사로 무종교인이며 엔도 시로 부부는 회사원으로 불교인이다.

‘왜, 하나님이 이 두 가정을 반형욱 목사와 함께 우리 교회에 오시게 하였을까? 그리고 우리 교인들 집에서 홈스테이(Home Stay)를 하게 하였을까?’라고 생각해보았다. 문득 내 마음 속에 들어오는 생각은 하나님이 저들을 사랑하고 우리를 사랑한다는 생각이었다. 즉 하나님이 우리 교회로 복을 받게 하기 위해 손님을 대접하는 훈련을 시킨다는 것이었다.

롬12:13에 기록된 그리스도의 생활 규범 중 하나가 “손님 대접하기를 힘쓰라”는 말씀이다. 히13:1에도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고 하였다. 그러니까 손님 대접하라는 말은 성경의 명령이다. 성경의 명령이지만 손님 대접하는 일을 잊고 살 때가 허다하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도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과 별반 다를 바 없이 살아간다. 손님을 대접하라는 명령에 관심 없어하며 산다.

나그네란 헬라어로 ‘파로이쿠스’다. 이는 「일시적으로 거주하여 법적 권리를 갖지 못한 떠돌이」란 뜻이다. 그러고 보면 나그네가 바로 우리 자신이다. 언젠가는 이 땅의 모든 권리를 버리고 하늘의 본향으로 가야 한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 이 땅에 있어도, 좋은 집이 있고 이 땅에서 큰 땅을 가지고 조금 나은 삶을 살 것 같아도 다 놓고 가야 한다. 어릴 적 동네 골목에 둘러 앉아서 땅따먹기 놀이를 하다가 해가 지는 저녁에 엄마의 부르는 소리를 들으면 하던 일을 다 버려두고 집으로 달려 갔다. 이처럼 우리는 이리로 오라고 하나님이 부르는 날, 다 던져 버리고 가는 나그네이다. 내가 나그네다. 길 위에 서서 본향을 향해 가기 위해, 영원과 천국으로 가는 나그네이다.

그런데 우리 믿는 자는 길을 알고 있다. 나그네이긴 하지만 성령님과 공행하기에 가야 할 곳을 아는 나그네이다. 그런데 세상의 사람들은 나그네인 줄도 모르고 산다. 그저 먹고 마시는 문제만 찾느라고 영원한 나라로 갈 길을 가지 않는다. 철학으로, 도덕으로, 윤리로 완전하게 되어질 수 있듯 살아가는 이들도 있지만 그들은 인생이 나그네인 줄 알면서도 영원한 나라로 가려고 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나그네인 크리스챤들은 세상 사람을 향해 더 나은 본향, 영원한 도성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럴려면 나그네를 대접해야 한다. 나그네가 이웃이어야 한다.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은 나그네를 살리기 위해서이다. 나그네를 대접하면 나그네만 좋은 것이 아니다. 내가 유익하다. 어떻게 유익한가?

첫째, 내가 기쁜 소식을 듣는 복을 받는다. (창18:10)

마25:34을 보면 나그네를 영접한 사람은 “아버지께 복 받은 자라.”고 하였다. 오늘 본문에서도 아브라함은 나그네 세 사람을 영접하였다. 장막 문에 앉아 있는 오정 시간에 달려나가서 몸을 땅에 굽혀 영접하고 물을 가져다 발을 씻게 하고 나무 아래 쉼을 주었다. 떡과 송아지 요리와 뻐터와 우유를 먹을 수 있도록 준비하였다. 그리고 나그네를 사랑과 존경으로 영접하여 대접한 아브라함은 이 일로 큰 복을 받았다.

창18:10 “그가 가라사대 기한이 이를 때에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란을 떠난 지 24년, 99세의 노장이 된 아브라함 부부에게 아들을 약속하는 복을 받고 있다. 사라가 생각할 때 이미 노쇠한 몸이요, 생리적으로 가능하지도 않는 육신인데 “아들을 낳으리요.”라는 축복의 약속의 받았다. 얼마나 상상 밖의 축복의 소식인가?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은 나의 삶의 문제에 기쁨이 되고 복이 되는 소식을 듣는 역사가 있다.

둘째, 천사를 대접하는 복을 받는다. (창18:8)

창18:8 “아브라함이 뻐터와 우유와 하인이 요리한 송아지를 가져다가 그들의 앞에 진설하고 나무 아래 모셔 서매 그들이 먹으니라.”

사람 셋으로 찾아와서 대접을 받은 이들은 누구인가?

히13:2을 보면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 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느니라.”

그들은 하나님의 천사들이었다. 그 천사들은 아브라함에게만 나타난 것이 아니고 소돔성의 롯에게도 나타나서 소돔성의 멸망을 예언하였다. 사람들로 나타난 그들은 바로 하늘의 메시지를 가지고 온 천사들이었다. 아브라함은 나그네 대접에 최선을 다하다가 기회를 올바로 포착했다. 그 세 사람이 천사였다는 것은 알지 못했으나 부지 중에 천사 대접하는 기회를 얻은 것이다.

나는 그 동안 사람이 천사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천사는 영적 존재이지만 사람에게 나타날 때 사람으로 다가온다는 것을 외면하였다. 그래서 낯선 나그네가 천사이며 낯선 나그네 대접이 곧 천사를 대접하는 기회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허나 천사는 사람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알지 못하는 중에 누구든지 천사일 수 있다. 시장에서 만나는 이나, 관광지나, 산행 중에 만나는 사람이나, 다 스쳐 지나가는 나그네 손님들이다. 그들에게 좋은 관계를 맺고 좋은 인상을 주고 먹을거리 하나라도 나누어 주며 지나치는 일이 천사를 대접하는 기회일 수 있다면 복이 아닐 수 없다. 지금 만나는 사람들에게 최선을 다해야 할 이유가 여기 있다. 그 거지가, 그 눈동자가 천사라면 어떻게 냉정할 수 있는가?

셋째, 내가 주님을 대접하는 복을 받는다. (마25:44)

마25:44의 말씀을 보면 왼편에 있어 영벌에 들어갈 자들이 주님에게 묻는다.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 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니까?”

얼마든지 주님에게 주리지 않도록, 목마르지 않도록 대접했다고 자처하는 왼편의 염소들에게 주님은 말씀해 주신다.

마25:4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그렇다. 지극히 작은 자, 보잘 것 없는 사람, 거지 같은 나그네, 그를 영접하지 않으면 주님을 대접하지 아니한 것이다.

마25:40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지극히 작은 자, 주린 나그네, 목마른 나그네, 벗은 나그네, 병든 나그네, 옥에 갇힌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이 주님을 대접하는 일이다. 우리는 날마다 천사가 아니라 주님을 대접하는 기회 앞에 서 있다. 여기 오늘 내가 만나는 이 사람이 주님이시라면 누가 친절하지 않으며 누가 겸손하지 않으며 누가 주께 하듯 하지 않겠는가? 정말 주님이라면 주가 따뜻한 마음과 웃는 얼굴로 사람을 귀히 보며 존경하지 않겠는가? 아! 우리가 나그네이면서도 나그네를 대접하는 일을 소홀히 하는 것은 복을 몰라서 그렇다. 천사를 대접하는 복, 주님을 대접하는 복을 몰라서 그렇다. 그러므로 교회는 친절의 온상이어야 한다. 겸손히 엎드리고 섬기고 씻을 물과 먹을 물, 배부름을 위한 요리를 대접하는 웃음의 전당이어야 한다. 이름이 알려진 나그네, 손님 뿐만 아니라 성도들끼리의 만남도, 이웃 사람끼리의 만남도 새 가족까지 주님을 대접하는 마음으로 성심을 다해야 한다.

톨스토이의 소설에 보면 어떤 이가 주님을 뵙고자 기도하는데 주님이 나타나셔서 오늘 너의 집에 가겠다고 하셨다. 그는 방 청소를 하고 열심히 주님 맞을 준비를 하는데 청소부 아저씨가 찾아왔다. 그래서 차를 대접하고 기다리는데 아기를 안은 엄마가 찾아왔다. 그를 데리고 와 음식을 먹이고는 또 기다리는데 구두 수선공을 보게 된다. 그래서 그를 데려다가 음식을 준비해서 드리고 남는데 예수님은 오시지 않는다.

그날 저녁을 기도를 했다. “주님 왜 안 오세요?” 그랬더니 주님께서 “나는 너의 집에 세 번이나 갔었다. 청소부, 아기 엄마, 구두 수선공이 바로 나였지.”

그렇다. 지극히 작은 자에 대한 친절한 대접, 그것이 예수님을 대접하는 것이다. 교회에 오는 모든 사람을 우리 모두 예수님으로 안다면 가슴을 비우고 따뜻하고 친절한 가슴으로 바뀌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언어나 달라질 것이다. “어서 오세요, 주님”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이 얼마나 공손하고 사랑이 넘치겠는가? 누구들 대하든지 친절한 얼굴과 말, 손길로 대하는 것 그것은 크리스챤의 태도여야 한다.

프레드릭 헤이브는 친절은 열정이나 실력보다 더 많은 사람을 회심시키고 변화시킨다고 하였다. 우리는 교회에 찾아온 모든 사람, CM에 초대한 모든 사람, 새 가족 식구들 그리고 낯선 사람까지 친절하게 대접하자. 나그네 인생된 우리가 나그네들을 대접하며 살 때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것이다. 더욱이 식구된 우리끼리 친절하자. 항상 차량을 세우다가도 화내지 말고 웃자. 나그네를 대접하고 손님을 대접하는 마음으로 제가 실수했다고 말하며 섬겨 드리자.

나그네의 삶, 우리는 고단하다. 고독하다. 힘에 버겁다. 그러나 성령을 모신 이들로서 친절하게 섬기자. 주님이라고 믿고 섬기자. 그러면 그 지친 나그네도 살고 대접하는 내가 상을 받는다. 그것이 천사를 대접하는 기회이기도 하고 주님을 대접하는 기회이기도 한다. 나와 만나는 사람, 최선을 다해 잘하는 것이 복을 받는 지름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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