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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까? (요 6:2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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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까? (요 6:22-35)

2008년 집사와 권사로 유임되신 분들, 새로 되신 분들에게 우리 하나님의 은총이 이 한 해도 함께하시며, 우리 교회가 부흥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오늘의 말씀을 잘 이해하려면 그 전날 예수님께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명을 배부르게 먹이신 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이 놀라운 기적도 기적이지만 문제가 되는 것은 그 기적에 대한 반응입니다. 반응(reaction)과 응답(response)은 비슷해 보이지만 같은 말은 아닙니다. 가령 내가 옆에 있는 사람을 ‘쿡’ 찌르면 그는 ‘아얏’하고 반사작용을 일으킵니다. 그것은 반사 또는 반응으로써 누구나 나타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응답이란 찌르는 사람이 누군가를 쳐다보고 그리고 그가 사랑하는 사람이면 빙그레 웃거나 윙크를 하는 것으로 깊이 생각해서 행동하는 응답입니다. 다시 말하면 반사란 반사신경에 의해 동물적으로 즉각 나타내는 것이고, 응답은 일단 깊이 생각을 하고 그리고 행동을 하는 의미있는 반사를 말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을 먹이신 기적을 경험한 군중들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처음 반응은 아주 단순한 어린이 같은 반사적인 반응으로 깜짝 놀랐고, 그리고 나서는 억지로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 했습니다. 이 응답은 상당히 정치적인 것으로 깊이 생각한 응답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들의 민족적인 소원이 독립이기에 언젠가는 솔로몬과 다윗과 같은 위대한 왕이 나타나 로마를 대항해서 소위 혁명을 일으켜 나라를 찾아 줄 지도자를 기다렸던 것입니다. 둘째로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보았습니다. 이 메시아관은 성서적인 것이 아니고 그들 나름대로의 메시아관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고난의 메시아로 오셨는데 그들은 이적을 보고 영광의 메시아로 착각한 것입니다. 셋째 반응은 가장 유치한 생각으로써 물질적인 해결에다 초점을 맞춘 것입니다. 예수님만 모시면 앞으로 빵 문제는 해결 될 것이라고 가장 현실적으로 나타낸 반응입니다.

그래서, 본문에 보면 다음날 많은 사람들이 어제 기적이 일어났던 바로 그 자리에 다시 모입니다.(요 6:22)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24절, 25절에 보면 ‘무리가 거기 예수도 없으시고 제자들도 없음을 보고 곧 배들을 타고 예수를 찾으러 가버나움으로 가서 바다 건너편에서 만나 랍비여, 어느 때에 여기 오셨나이까 하니’ 어느 때에 이리로 오셨습니까? 하고 묻는 사람들의 질문에, 예수님은 물위로 걸어 오셨다는 말씀을 하시지 않습니다. 다만, 그들이 예수님을 찾는 이유를 꿰뚫어 보시고 비판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요 6:26)’하셨습니다.

사람들의 무지함을 지적해 주는 대답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적을 행하신 목적은, 물론 그들의 배고픔을 아셔서 채워 주셨지만 그것 자체가 목적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아직도 그들이 왜 떡을 먹었는지 의미를 모르고 있음을 책망하시는 말씀입니다. 사실 떡을 먹고 배부른 일로 예수를 존경한다면 얼마나 섭섭한 일입니까!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라는 말의 뜻은, 표적을 실제로 보지 못했다는 것이 아니라 보기는 보았지만 단순히 떡으로만 생각했을 뿐, 표적으로 생각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보았지만 못 본 것이 되고, 먹었지만 모르는 것입니다. 정말 깊고 오묘한 말씀입니다.

가끔 사람들은 예수를 믿는 동기가 기도로써 병이 나았기 때문이라 하기도 합니다. 참 좋은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표적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의 말입니다. 병이 나았다고 해서 다시는 병에 걸리지 않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는 또 병에 걸리고 죽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 때는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병이 나았다는 것은 단순한 기적만이 아니라 표적이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지금 여기 계신다면 군중들에게 하신 말씀을 우리들에게도 하실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따르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라, 병이 나았기 때문이구나’ 병이 낫든지 떡을 먹든지 내가 처하는 사건 하나하나가 모두 표적으로써 보이는 것 속에 보이지 않는 것이 있고, 현재적인 것 속에 영원한 진리가 있음을 알아야겠습니다. 이것을 모르면 떡을 먹었어도 병이 나았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본문에서 말씀하신 뜻도 바로 이것입니다.

다음 27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우리들을 향하여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하고 있는 태반의 수고가 사실은 썩을 양식을 위한 일입니다. 썩고 부질없는 일을 위해서 새벽부터 밤까지 뛰고 있다는 말입니다. 조그만 방향을 바꾸어 보면 어차피 썩고, 버려두고 갈 것인데 그렇게 탐낼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세계의 영웅 알렉산더가 세상을 떠날 때 유언을 하기를 자기가 죽으면 관에 두 구멍을 내어 손을 내어놓게 하라고 당부했습니다. 그의 유언대로 구멍을 뚫어 손을 내놓으니, 관을 메고 가는데 두 손이 양쪽에서 덜렁덜렁 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그의 마지막 교훈으로써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를 말하고자 함이었다고 합니다. 살아생전에 세계를 흔드는 왕이었지만 결국 이렇게 빈손으로 가니 너무 욕심들을 내지 말라는 교훈입니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썩지 않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우리 마음에 새기고 살기를 바랍니다.

유대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 귀한 말씀에 다시 질문하기를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까?’ 하고 되묻습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말했을 때 유대인들은 곧바로 그것은 선한일(good works)을 하는 것이라는 의미로 생각했습니다. 사람은 선하고 도덕적인 생활을 함으로써 하나님의 은총으로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유대인들이 언제나 가지는 신념이었습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군중들이 이 질문을 하는 의도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고 회당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그리고 바리새인처럼 종교의식을 본업으로 하고 사는 사람들은 당연히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지만, 제사장도 바리새교인도 아닌 일반 백성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인가? 묻는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도 목사나 전도사가 되어야만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람들의 질문에 예수께서 즉각 대답하십니다. 29절에서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십니다. 오늘 성경 본문은 선문답 같기도 하고, 동문서답을 하는 것 같기도 하여서 이해가 쉽지 않습니다. 우선 문자대로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이 보내신 자 곧 예수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직분을 받으신 여러분, 이제 내가 집사로, 권사로 무슨 일을 할까?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 생각하십니까. 예수를 잘 믿는 것, 하나님을 잘 믿는 것, 먼저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너무 간결하여 계속되어지는 말씀 속에서 풀어 생각해 보겠습니다.

읽지는 않았습니다만, 6장 1절부터 죽 보면 예수님께서 5천명을 먹이시는 역사, 바로 그 역사적 장면에서 하나님의 일이 무엇인가 보면 되겠습니다. 이게 아주 드라마틱한 장면입니다. 그리고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배고픈 사람 5천명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배고파하고 있습니다. 뭔가 먹어야 되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떡을 만들어주십니다. 이적으로 떡을 만들어 주십니다. 5천명이 먹고 배불렀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썩을 양식을 위하여 하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 끼 먹고 또 배고플 그런 양식을 주자고 하시는 게 아닙니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라, 떡 얻어먹기 위해서 줄레줄레 따라 다니지 마라.’ 이 무슨 말입니까. 떡을 먹으면서 떡 아닌 영원한 양식을 생각하라, 한 끼의 양식을 먹으면서 그 속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과 계시를 생각하라. 영원한 생명을 생각하라 하심입니다. 그러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런가하면 떡은 누가 만들었습니까. 예수님께서 기적으로, 이적으로 만드셔서 5천명에게 나눠주십니다. 떡을 만드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그러나 떡을 분배하는 것. delivery, 나누어주는 것, 갖다 주는 건 제자들이 했습니다. 대단히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생각해 보면 제자들은 신바람 났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떡을 갖다가 사람들에게 5천명에게 나누어주는 것이니 그럴 때 또 떡 얻어먹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을 얼마나 부러워했겠습니까. ‘저 사람들 출세했네. 아 저 사람 베드로 저거 물고기 잡으러 다니던 사람이 요새 출세했구먼, 어쩌다가 예수님의 제자가 됐나!’ 생각해 보십시오. 그 신령한 양식을 만드시고 제자들의 손에 주셔서 제자들이 갖다가 한 사람씩 주어서 먹게 하고 있습니다. 이 배식하는 것, 이 심부름하는 것,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내가 나의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내가 가담하고 있고 하나님의 몸소 행하시는 일에 내가 ‘요만한’ 수고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조그마한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내게 맡겨주신 대로 일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의 일은 내가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applieation, 적용, 참여에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여러분, 오늘도 제가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내 말을 여러분에게 강연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분의 삶 속에 적용케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여러분에게 분배해서 잘 받아먹고 힘을 얻도록, 생명을 얻도록 하는 것이 설교자의 사명입니다.

여러분이 하고 있는 모든 일도 하나님의 일, 그리스도의 역사, 그리스도께서 만백성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그 큰 역사에 가담된 어느 분야에서 조그마한 일을 내가 마치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떡을 가져다가 배달한 것처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의 바른 태도입니다.

의사의 역할로 예를 들어도 그렇습니다. 제약회사에서 좋은 약을 만들었습니다. 이 약을 잘 선택하여 환자에게 적용시킬 때 효력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간단한 일입니다. 그러나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들의 믿음 생활 곧 하나님의 일은 말씀의 적용입니다.

말씀의 적용 -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고, 먹으라면 먹고, 마시라면 마셔야 합니다. 말씀의 적용은 믿음에 있고, 믿음은 순종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고야 말씀의 효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르틴 루터는 말합니다. ‘Let God be God’(하나님으로 하나님 되게 하라) 신앙이란 하나님으로 하나님 되게 하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내게 보여주신 길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내 방법. 내 길이 아닙니다. 그가 보여준 길로 그가 보여준 방법으로 주님께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새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사랑한다’의 반대말이 뭔가? 옛날에는 사랑한다는 말의 반대는 ‘미워한다’였습니다. 조금 더 고상하게 말할 때는 ‘무관심’이라고 그랬습니다. 요새와서는 달라졌습니다. ‘사랑한다’의 반대는 ‘사랑했노라’래요. 언젠가는 사랑했었다. 지금은 아니다 - 이것이 문제입니다. 믿음은 항상 현재적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이 무엇인가 다시 종합하면, 보내신 자, 즉 하나님의 구속의 현재성을 믿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오늘 내게 여기서 구체적으로 나타났다는 사실을 믿고 행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 가르치는 자는 열심히 가르치되 목적은 하나님께 두고, 배우는 자도 전도를 위한 목적으로 열심히 공부해서 하나님의 구속의 사역을 내 현실 속에 구현하는 일에 가담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하라는 것입니다. 나는 그 역사를 분배하는 일에, 배식하는 일에, 적용하는 일에 쓰이고 있다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평범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여러분 오늘도 어디서 일하든지, 부엌에서 일하든지 직장에서 일하든지 길에서 일하든지, 어디서든지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보내신 자를 믿고 보내신 자의 그 큰 뜻을 수용하면서 그의 심부름하는 자로 하나님의 큰 역사에 가담된 그런 생을 살 때 순간순간이 다 하나님의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 일은 하나님께서 책임지시고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렇게 일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하실 것입니다.

30절에 보면 사람들은 또 예수님께 질문을 합니다. ‘저희가 묻되 그러면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까?’ 한심합니다. 표적을 지금가지 보았는데도 불구하고 또다시 표적을 묻습니다. 이렇게 표적을 구하는 사람, 즉 표적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은 죽을 때까지 찾아도 안 됩니다. 교만한 사람, 의심하는 사람들이 바로 이런 사람들입니다. 믿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표적으로써 표적 아닌 것이 없습니다. 아침에 눈을 떠서 잠자리에 들 때까지 하나도 빼지 않고 생활 전부가 표적이요, 기적이며 은혜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곧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이며 이 관계 속에서 무엇을 하든지 모두가 하나님의 일인 것입니다.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고,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니라’는 주님의 책망을 우리는 듣지 않도록 해야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이 교회를 위하여 임원으로 세워진 여러분, 표적을 알고 그것으로 감격해서 오늘도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려 모인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한 우리들의 행진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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