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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눈을 뜨게 하시는 주님 (요 9:3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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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뜨게 하시는 주님 (요 9:39-41)

본문이 들어있는 요한복음 9장 전체는 예수님께서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 하나를 고쳐주신 일과 그 일을 통해 예수님이 누구시며 그가 하시는 일이 무엇인지에 관해 드러난 바를 알리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메시지를 보다 분명히 파악하기 위해 9장 전체의 이야기를 한 번 훑어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 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거지 한 사람을 보시고는 그의 눈을 뜨게 해주신 일이 있습니다(요9:1-8). 그런데 그날이 또 안식일이었습니다(요9:14). 앞 못 보던 사람을 볼 수 있게 해 주신 이가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안 바리새인 가운데 예수님을 가리켜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가 아니라”(9:16) 말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앞 못 보던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그 사람이 네 눈을 뜨게 하였으니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 그 사람은 “선지자니이다” 대답했습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람입니다. 따라서 그 사람의 대답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오셨음을 부인하던 바리새인들의 생각과 정반대되는 생각을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이 유대인들은 눈멀었던 사람이 예수님에 의해 눈을 뜨게 된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아예 그 사람이 본래 눈멀었던 사람이라는 사실 자체를 의심했습니다. 그리고는 그의 부모를 불러 그것을 확인하려했습니다(9:18). 그들은 그의 부모에게 물었습니다: “이 사람이 날 때부터 앞을 못 보았다는 당신네 아들이 맞소? 맞는다면 지금은 어떻게 해서 볼 수 있다는 말이요?”(9:19). 그 부모가 대답했습니다: “이 사람은 우리 아들이 맞고 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했었소. 그러나 지금 어떻게 해서 보는지 또는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에게 물어 보시오. 그가 장성하였으니 자기 일을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9:20-21).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기에 그들을 무서워했기 때문입니다(9:22).

  바리새인들은 할 수 없이 앞 못 보던 사람을 다시 불러 말했습니다: “너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는 이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9:24). “너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것은 바른대로 말하라는 압력입니다. “우리는 이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 한 것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죄인에게 눈먼 사람을 눈 뜨게 하는 권능을 주시겠느냐는 뜻입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대답했습니다: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은 본다는 사실입니다.”(9:25). 그러나 그 사람이 눈 뜨게 된 것을 예수님이 하신 일로 받아들이기 싫은 그들은 그에게 또 물었습니다: “그 사람이 네게 무엇을 하였느냐? 어떻게 네 눈을 뜨게 하였느냐?”(9:26). 그러자 그 사람은 짜증스럽게 대꾸했습니다: “내가 이미 말했어도 듣지 않고 어찌하여 다시 듣고자 합니까? 당신들도 그의 제자가 되려 합니까?”(9:27). “당신들도 그의 제자가 되려 합니까?” 한 것은 “당신들은 그를 믿지 않는 사람들 아닙니까? 안 믿으면 됐지 뭘 자꾸 반복해서 캐묻는 것입니까? 그렇게 확인하고 또 확인해보고 나서 그의 제자가 되기라도 하겠다는 것입니까?” 하고 빈정댄 말입니다. 그러자 그들은 화가 나서 그 사람에게 욕을 하며 말했습니다: “네 놈은 그의 제자인지 모르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다. 하나님이 모세에게는 말씀하신 줄을 우리가 알지만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한다”(9:28-29). 이 말 속에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주신 계명의 하나인 안식일 준수 계명을 어기는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사람일 수 없으며, 따라서 그런 사람의 말을 믿고 따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있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앞을 보게 된 사람이 다시 대답했습니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는데 당신들은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한다고 하니 참 이상합니다. 하나님이 죄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은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창세 이후로 맹인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9:30-33). 이 말은 사실상 바리새인들의 이해할 수 없는 사고와 옹고집을 정면으로 비판한 것입니다. 비천하게 여겨지던 거지로부터 이런 핀잔을 받은 바리새인들은 또 화를 내며 말하기를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고는 그를 쫓아내버렸습니다(9:34).

  바리새인들이 그 사람을 쫓아냈다는 말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그를 다시 만나셔서 물으셨습니다: “네가 인자를 믿느냐?”(9:35). 그가 대답하기를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9:36) 하자 예수님께서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9:37). 그때 그는 말하기를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는 엎드려 절했습니다(9:38). 그가 예수님께 절했다는 것은 그를 주님으로 경배한 행위를 가리킵니다. 그가 예수님에 대해 갖게 된 신앙이 확실하고 고백적이며 실천적인 것임을 보여주는 행위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그 사람의 그런 행동을 보시고 하신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습니다(본문 39절). 우리는 요3:17-19에 이런 말씀이 있음을 기억합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따라서 본문 39절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다”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을 심판하러 오시기보다 구원하러 오셨지만, 그가 오심으로 인해서 구원을 받을 이들과 그렇지 않은 자들 사이의 구별이 분명해지게 되었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진리의 빛이신 이가 오심으로써 그를 통해 참으로 눈을 뜬 이들이 누구이고 눈먼 자들이 누구인지가 확실해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보게 하실 이들을 보게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사역이 드러나게 되었음을 알리신 말씀입니다.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신 말씀은 예수님에 의해 눈을 뜨게 되고 그를 믿고 경배하기에 이른 사람과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며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그를 축출한 바리새인들 사이에서 누가 옳고 그른지를 심판하시는 말씀입니다. 즉 보지 못하다가 보게 된 사람은 육신적으로 눈을 떴을 뿐 아니라 영적으로도 눈을 뜬 사람이고, 바리새인들은 육신의 눈은 뜨고 있으나 영적으로는 눈먼 자들임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러자 그들은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반발하며 말했습니다: “우리도 맹인인가?”(본문 40절). 이것은 “우리가 이렇게 멀쩡하게 눈을 뜨고 있는데 우리 보고 눈멀었다 하는가?”라는 빈정거림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눈멀었음이 영적인 것임을 알지 못하는 신앙적 무지를 그대로 드러낸 말입니다. 그들에게는 떠야 할 눈이 없다고 여기는 그들의 영적 교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반발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한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에 유의해야 합니다: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이 말씀으로 예수님께서는 영적으로 눈을 뜨는 것과 눈이 멀어있는 것을 죄의 문제와 연결시키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와 그의 구원사역을 알고 믿는 일은 단지 지적인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죽고 사는 기로에 서는 문제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의 아들로 믿고 영접하는 사람들은 구원의 은혜를 누릴 이들이고 그를 믿지 않고 거부하는 사람들은 죄 가운데서 결국 멸망하고 말 자들임을 분명히 밝히신 것입니다.

  본문의 이야기 속에서 등장하는 두 부류의 사람 사이의 대비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한쪽 사람은 앞을 보지 못하다가 고침을 받은 사람이고 다른 쪽은 바리새인들로 대표되는 유대인들입니다. 먼저 우리는 앞을 보게 된 사람에게서 일어난 변화를 주목합니다. 그 변화는 그에게서 이루어진 신앙의 생성과정입니다. 그는 사람들이 그에게 “네 눈이 어떻게 떠졌느냐?” 하고 처음 물었을 때는 그저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고 대답했습니다(9:10-11). 그리고 “그가 어디 있느냐 ?”는 물음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노라”고 대답했을 뿐입니다(9:12). 예수님의 능력에 대해서는 믿고 있었지만 그가 참으로 누구이신지 알지 못했고 그를 더 찾아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 바리새인들과의 대면과 문답을 거치며 그는 예수님에 대한 이해를 갖기 시작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그에게 다시 묻기를 “그 사람이 네 눈을 뜨게 하였으니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 했을 때는 “선지자”라고 답했습니다. 즉 예수님을 하나님으로부터 온 이로 본다는 것이었습니다. 또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가리켜 “우리는 이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9:24) 했을 때는 대답하기를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라고 하여 사실상 예수님께서 죄인임을 강력히 부인했습니다(9:25). 더 나아가 하나님은 죄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은 들으시는 하나님이시며, 창세 이후로 태어날 때부터 보지 못하는 사람의 눈을 뜨게 했다는 말을 들어본 일이 없는데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셨다면 자기의 눈을 고치는 일 같은 것은 할 수 없었을 것이라(9:31-33) 하며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분이심을 조리 있게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바리새인들로부터 축출을 당한 자기에게 다시 찾아오신 예수님 앞에서 “주여, 내가 믿나이다”라고 고백하며 그를 경배하는 신앙의 소유자가 된 것입니다(9:34-35, 38). 그는 예수님으로부터 육신의 눈을 뜰 뿐 아니라 영의 눈을 뜬 사람으로 인정을 받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이에 반해 바리새인들의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그들에게서 우리는 아무런 변화도 발견하지 못할 뿐 아니라 그들의 마음이 더욱 완악해져갔음을 봅니다. 우리는 그들에게서 태어날 때부터 앞 못 보던 사람이 보게 된 사실에 대한 그 어떤 기쁨과 감사와 축하의 말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그 크고 놀라운 일을 행하셨다는 사실은 인정하려 하지 않고, 그가 침을 뱉어 진흙을 이기는 노동(?)을 안식일에 함으로써 안식일을 범했기에 그는 죄인이며, 따라서 하나님으로부터 온 사람일 수 없고, 그러기에 눈먼 사람을 고치는 일 같은 것은 할 수 없다는 논리에만 매달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와 그의 사역과 권능을 근본적으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이 드러난 명백한 사실 자체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 완악함을 보였으며, 그 사실을 자신의 몸과 체험으로 증언하는 이를 축출하는 불의를 자행했습니다. 이들이야말로 진정 눈먼 자들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들은 결국 주님으로부터 정죄를 당하고 만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말씀하셨습니다(요8:12). 오늘 본문의 이야기의 중심에는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을 보게 하신 예수님이 계십니다. 자연히 빛과 어둠의 대비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따르는 이와 그를 거부하고 어둠에 거하는 자들 사이의 대비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진리와 생명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영적으로 진정 눈을 뜨는 사람과 완강하게 그 반대편에 서서 어둠과 멸망의 길을 가는 사람들을 보여주며 우리에게 어떤 길이 우리가 설 길인지를 묻게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길을 가다가 태어날 때부터 앞 못 보던 사람을 보고 제자들은 예수님께 이렇게 여쭈었습니다: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9:1-2) 그때 예수님의 대답은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였습니다(9:3). 그 사람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 무엇이었는지를 오늘 본문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치유와 구원의 사역이었습니다. 눈먼 사람을 눈 뜨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영적으로 죽은 이들을 살리시는 일이었습니다. 참으로 눈 뜬 이와 눈먼 이가 누구인지를 가리는 일이었습니다. 빛에 속한 이들과 어둠에 거하는 자들을 밝히 드러내는 일이었습니다.

  오늘의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시며 그를 통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눈을 뜨게 하시는 주님을 봅니다. 육신적으로 먼눈을 고쳐주실 뿐 아니라 영적으로 먼눈을 고쳐주시는 주님이십니다. 영적으로 눈멀었던 상태에서 눈을 뜨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구원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우리도 맹인인가?”(본문 40절) 하며 냉소적인 물음을 던졌습니다. 이 냉소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가 가져오신 참 빛을 외면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삶을 영적인 눈으로 바라볼 줄 모르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눈 뜨기를 원치 않는 것입니다. 교만과 무지의 어둠 속에 머물러 있기를 고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저항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대로 죄인으로 살며 영원한 멸망을 자초하는 일입니다. 옛 바리새인들처럼 “내가 뭐 눈이 멀었는가?” 하는 교만하고 무지한 질문을 하며 살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게  “나는 과연 눈 뜬 사람인가?” 하는 질문을 진지하게 던질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 있는 이의 모습이고 구원의 시작입니다. 그 질문 없이는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고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습니다. 스스로 영의 눈이 멀었음을 깨닫는 이만이 그 눈을 뜰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눈을 뜬 이들만이 남들이 보지 못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주어진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고 그것을 소유하며 향유할 수 있습니다. 더 이상 눈 뜬 자 같으나 눈 먼 자로 살지 맙시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영적으로 눈을 뜨는 역사가 우리 모두에게서 일어나기를 기원합니다. (이수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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