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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봉사자가 됩시다 (사 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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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봉사자가 됩시다 (사 61:6)

사61장6 절 하나님의 봉사자가 됩시다

사61장6절 오직 너희는 여호와의 제사장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 사람들이 너희를 우리 하나님의 봉사자라 할 것이며 너희가 이방 나라들의 재물을 먹으며 그들의 영광을 얻어 자랑할 것이니라

`인간에 대한 봉사'는 스티븐슨이라는 사람에게는 온 생애를 바쳐 이루고자 했던 삶의 원칙이요 이념이나 다름없었다합니다. 언제 어디서든 그는 약하고 힘없는 이들을 위해 싸웠고, 그들을 대신해 온갖 어려움들을 짊어지고 나섰습니다. 그는 그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여겼습니다. 사모아 사건이 생겼을 때도 그는 원주민들을 옹호하기 위해 자신의 말년을 다 소진하였습니다. 그는 그들을 위해서 무정하고 비열한 유럽 정부들에 대항해 극심한 싸움을 벌여 나갔습니다. 그는 원주민들을 변호하기 위한 갖가지 문건들을 끊임없이 작성, 기고하였습니다. 즉 편지도 써서 띄웠고 신문에 칼럼을 쓰기도 했으며, 그에게 있어 과중한 노동을 요구하는 책도 저술하였습니다. 또한 논쟁을 벌리기 위해 회합에도 빠짐없이 참여하였는데, 어떤 때 그는 복통과 출혈로 심한 병고에 시달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폭풍과 빗속을 뚫고 회합장소를 향해 달려가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재판과 투옥 그리고 추방등의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이 싸움을 계속해 나갔습니다. 원주민들이 그를 끔찍이 아끼고 사랑했음은 두말 할 나위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의 집 앞에 `감사의 길'이라는 이름의 작은 도로를 새로 닦기도 했습니다. 그와 같은 체질과 그와 같은 건강상태를 가진 사람이, 아무 데도 의지할 데 없는 미개인들을 위해 단지 순수한 사라의 힘만으로 그토록 놀라운 일을 해낸 것입니다. 이는 실로 역사상 참으로 영웅적인 자기 희생과 봉사의 일을 해낸 수많은 사람들의 기록 중에서도 단연코 추앙할 만한 훌륭하고 영예로운 것입니다.(21세기 예화 옹호 받지 못하는 이들을 위한 봉사)

오직 너희는 여호와의 제사장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 사람들이 너희를 우리 하나님의 봉사자라 할 것이며 너희가 이방 나라들의 재물을 먹으며 그들의 영광을 얻어 자랑할 것이니라 합니다.
  하나님의 봉사자란 표현은 여호와의 제사장이란 표현과 긴밀한 연관을 지니는 것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봉사하며 사람들을 주 앞으로 인도하는 일이 나눌 수 없는 관계임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신 성도들의 제사장적인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밝히 깨닫고 성도들을 향해 하나님의 봉사자라 부르게 됩니다. 구원 받은 성도들의 봉사와 섬김이 진실하기에 세상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의 봉사자로 불리워짐을 말씀 합니다

  교육하고 선교하고 봉사하되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되 하나님의 봉사자가 되는 교인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봉사자는 하나님의 제사장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봉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로 삼으셨습니다.
출 19: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하나님이 위임한 권세로서 아론과 아론의 아들들을 성별하여 제사장으로 세웠습니다
(출 28:1-3) 너는 이스라엘 자손 중 네 형 아론과 그의 아들들 곧 아론과 아론의 아들들 나답과 아비후와 엘르아살과 이다말을 그와 함께 네게로 나아오게 하여 나를 섬기는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되 네 형 아론을 위하여 거룩한 옷을 지어 영화롭고 아름답게 할지니 너는 무릇 마음에 지혜 있는 모든 자 곧 내가 지혜로운 영으로 채운 자들에게 말하여 아론의 옷을 지어 그를 거룩하게 하여 내게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신 일들이 구약 시대에 제대로 이루어지 아니 하였습니다. 그래서 메시야를 보내시고 속량하신 그리스도인들에게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이름을 주었습니다.

벧전 2:5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벧전 2: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봉사자들은 무슨 일이든 하나님이 나를 봉사자로 쓰신다는 분명한 사명의식을 가지고  봉사해야 합니다.

  알버트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 박사는 의사도 없이 병들어 죽어가는 아프리카인들을 보고, 의학 공부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사상가요, 신학자요, 음악가로서 당대 존경받는 훌륭한 인물이었지만, 아프리카의 미개한 사람들을 도와주기 위해 아프리카로 가서 병원을 개설했습니다. 그러한 헌신적 노력 때문에 그는 53세에 괴테상을 수상했고, 76세에는 프랑스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회원이 되었으며, 77세에는 노벨평화상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노벨상 수상금을 가지고 나환자 촌을 세워서 많은 사람들을 도와주었습니다. 그래서 90세에 세상을 떠날 때는 전 세계인의 존경을 받으며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슈바이처 박사의 친한 동료 교수가 한번은 그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자네는 가만히 있어도 생활이 보장되고 편안한 생활을 할 수 있는데, 왜 아프리카로 가서 고생을 하려고 하는가?” 그러자 슈바이처 박사가 갑자기 손을 번쩍 들며 물었습니다. “이게 뭐지” “뭐긴 뭐야. 자네 손이지.” 그러자 그는 “이 손은 내 손이 아니네. 이 손은 하나님의 손이야. 그러니까 나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하나님의 손 노릇을 하는 거야. 자네, 지금 나를 동정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나를 절대로 동정하지 말게. 나는 행복해. 보람이 있어. 나는 기쁘다네. 나는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는 거야!”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봉사자는 화목의 역사를 감당하며 봉사해야 합니다.
제사장은 희생 제사를 관할하는 의무를 맡아 수행했습니다. 하나님에게 예물을 드려 백성들과 하나님 사이에 화목을 이루도록 하는 사역을 감당 하였습니다.

레위기 9장에 위임식이 끝난 아론은 배제사장으로서의 첫 직무를 수행하는데 백성의 죄를 위한 속죄제를 드리기 전에 자신을 위한 속죄제를 먼저 드렸습니다. 이것은 죄인을 속함으로써 죄로부터 생겨난 하나님으로부터의 인간 소외를 제거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야만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위해 속죄제를 드린 아론과 그 아들들은 번제를 드렸습니다. 그 번제의 향기를 하나님께서 향기로운 제사라고 하셨듯이, 번제는 속죄함을 받은 하나님 백성의 헌신과 성결과 충성스러운 삶을 상징합니다. 아론은 자신을 위해 속죄제와 번제를 드리고 난 후 백성을 위해 속죄제와 번제와 소제, 그리고 화목제를 드렸습니다. 이 제사는 백성들과 하나님과의 언약적 관계를 정상적으로 유지하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화목의 직분을 감당하는 봉사자가 되어야 합니다.
고후 5:18-20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받은 은혜를 깨닫고 자기를 희생하게 될 때 화목의 역사는 이루어 집니다.
고레스왕은 성경에 바사라는 나라의 왕입니다. 일반적으로는 페르시아라고 합니다. 이 페르시아가 나라를 만드는 제국을 만드는 그런 과정 속에서 이 나라 저 나라를 점령했습니다. 그런데 페르시아에 속국정치라 하는 것이 앗수르나 바벨론하고는 다릅니다. 앗수르는 거주지를 이전하는 정책을 썼는데 A에 사는 사람을 C지역으로 보내고 C지역사람을 B로 보내고 B지역에 사는 사람을 A로 보내고 그렇게 섞어 놨어요. 그래서 이스라엘의 사마리아가 생긴 겁니다. 혼혈이고 또 믿음도 우상하고 다 섞여서 생긴거죠. 그 다음에 바벨론은 똑똑한 사람들을 데려다가 교육을 시켰어요. 다니엘과 같은 사람들, 교육시켜 나라의 일꾼으로 만듭니다. 그래서 전체를 통합합니다. 이 나라들이 제국이라고 하는 여러나라들을 합한 나라들을 유지하기 위해서 얼마나 애를 쓰는지 몰라요.

그런데 이제 앗수르나 바벨론하고는 다르게 이 페르시아의 정책이라고 하는 것은 그 나라 사람이 그 나라를 잘 다스리고 대신 조공을 바치고 여기 법대로 따르고 하는 거죠. 그러니까 바벨론 포로로 잡혀갔던 사람이 이 정책에 응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신앙 공통체를 만들고 예루살렘의 성전을 느헤미아를 통해서 다시 세우게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전쟁에 이겼다해도 다 없애 버리는 게 아니고 그 나라 사람을 살려 두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 왕을 앞에다 두고 이 왕을 계속 나의 부하로 삼을 것인가 아니면 죽일 것인가를 시험했다고 합니다. 그 시험을 할 때 이런 일이 있었다 합니다.

하루는 고레스왕이 포로가 된 왕을 무릎 꿇게 하고 얘기를 합니다. “내가 너에게 자유를 주겠다. 너 나에게 뭐를 주겠느냐?” 그랬더니 내 소유의 절반을 드리겠습니다. 그래요. 소유의 절반을 드니는 것은 대단한 거죠. 그랬더니 하는 말이 “그럼 너의 자식들에게도 자유를 주겠다 그러면 어떻게 하겠느냐” 내 소유의 절반을 드리겠습니다. 다 줬지요. 그랬는데 또 고레스왕이 또 말합니다. “내가 네 아내에게도 자유를 주겠다. 그럼 어떻게 하겠느냐” 다 줬는데 더 이상 줄게 뭐가 있겠습니까? 아무것도 없잖아요. 그런데 적국의 왕이 한참 침묵을 하더니 입을 열었습니다. “만약에 제 아내를 살려주시겠다면 나는 당신에게 내 생명을 바치겠습니다. 나를 위해 살림을 해주었습니다. 나에게 진정한 벗이 되었습니다. 외로울 때마다 친구가 됐었습니다. 내 아내에게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큽니까. 나는 내 아내를 위해서 죽을 용기가 있습니다. 내 생명을 바치겠습니다.” 고레스 왕이 이 말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아 이 사람은 은혜를 아는 사람이구나 그래서 생명 바치겠다는 적국의 왕과 그 자녀들과 아내를 다 살려주고 자유를 주었다 합니다.

  하나님의 봉사자는 맡겨진 짐을 지고 봉사해야 합니다.
  제사장은 성막을 옮길 때는 짐을 져야 했습니다.
  그런데 고핫 자손이 져야 될 짐이 다르고 게르손 자손이 질 짐이 다릅니다. 그리고 므라리 자손이 질 짐이 다릅니다.
  게르손 자손들이 책임질 임무는 성막을 두르고 있는 모든 휘장과 천막등이었습니다. 물론 이 기물들은 매우 무겁고 부피도 큰 것이어서 사람의 손으로 운반하기에는 난감했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앞서 성막과 제단의 봉헌 예식 시에 각 지파가 당신께 드린 예물 중 수레 두 개와 소 네 마리를 게르손 자손에게 주셔서 그 무거운 기물들을 옮길 수 있도록 선처해 주셨던 것입니다.

므라리 자손들이 감당할 사명은 성막의 기둥과 받침들을 관리하고 운반하는 것으로서, 그 무게로 인해 게르손 자손의 두 배에 해당하는 운반 수단으로 수레 넷과 소 여덟마리를 공급받았습니다. 물론 므라리 자손은 세 가문 중 가장 힘들고 험한 책무를 맡았다고는 하나, 그 일 역시 하나님께서 친히 맡겨 주신 거룩한 직임입니다.
고핫 자손이 책임질 기물들은 성막 안 지성물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고핫 자손은 자신들의 어깨를 이용하여 기물들을 운반해야만 했습니다.

민 4:15 진영을 떠날 때에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성소와 성소의 모든 기구 덮는 일을 마치거든 고핫 자손들이 와서 멜 것이니라 그러나 성물은 만지지 말라 그들이 죽으리라 회막 물건 중에서 이것들은 고핫 자손이 멜 것이며

민 7:9 고핫 자손에게는 주지 아니하였으니 그들의 성소의 직임은 그 어깨로 메는 일을 하는 까닭이었더라

민 10:21 고핫인은 성물을 메고 행진하였고 그들이 이르기 전에 성막을 세웠으며

고핫 자손을 택하여 성막에서 제일 중요한 부분을 메고 운반하게 하셨습니다.

  우리에게도 짐을 지라고 합니다.
갈 6:2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고 나와 있습니다. 교회가 서로 짐을 지고 서로 사랑하려면 짐을 나누어 져야 됩니다.
갈 6:5절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임이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지고 있는 짐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짐을 주실 때에 “하나님, 나에게 왜 이런 짐을 주십니까? 나는 질 수 없습니다”  “나는 짐을 질 도구가 없어서 짐을 못 지겠습니다.” 라고 핑계 댈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고핫 자손은 어깨를 가지고 짐을 졌기 때문입니다. 어깨도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봉사자는 짐을 지는 짐꾼입니다. 우리가 짐꾼이라고 하면 업신여김을 받는 직업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공항에도 가면 짐 나르는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성막에서 짐을 나르는 짐꾼들은 업신여길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이들은 대단히 위대한 특권을 가진 사람입니다. 기쁨으로 행복함으로 그 사명을 감당해야 할 사람인 것입니다.
  짐을 새로 져야할 때 “나는 못합니다.” 하지 마시고 “나는 부족하나 하나님이 시키시니 내가 순종하겠습니다” 하고 짐을 지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 타고 들어가신 것이 나귀 새끼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신기한 이야기 입니다. 예수님이 나귀를 가져오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이 “그 주인에게 뭐라고 말하고 나귀를 데리고 올까요?” 라고 묻자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주가 쓰시겠다고 하라.” 이 한마디를 하셨습니다. 그 때에 그 나귀 주인은 아무것도 묻지 않습니다. “당신들의 주가 누구인데 나귀를 달라고 하시오? 이 나귀가 얼마인줄 아시오?” 이렇게 묻지 않았습니다. “주가 쓰시겠다고 하라.”는 한 마디에 나귀를 풀어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나귀를 타고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주인은 물론이고 나귀는 얼마나 영광이겠습니까? (마21:3이하)

주님이 “내가 네 어깨를 좀 써야겠다.” 하시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주님 여기 있으니 쓰십시오.”라고 대답하시기 바랍니다. “네가 네 팔을 좀 써야되겠다.”, “내가 네 다리 좀 써야 되겠다.” 할 때에 주님께 기꺼이 내어 드리는 시기 바랍니다.

  짐은 교훈적입니다. 고핫 자손 가운데 법궤를 지고 간다고 하면 그 사람은 법궤에 대하여 연구할 것입니다. ‘저 법궤에는 무엇이 들어 있는가? 저 법궤는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저 법궤를 포장할 때는 어떻게 하고 운반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또 게르손 자손 가운데 앙장(커튼)을 운반하는 사람은 ‘이 커튼은 길이가 얼마고 색깔이 무엇이고, 무게는 얼마나 나가고, 이 커튼은 어디에 놓아서 운반해야 하는가?’에 대한 전문가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어깨에 무슨 짐을 지워주시든 간에 그것은 교육의 과정입니다. 주님을 위해서 사역의 짐을 지든 고난의 짐을 지든 오해의 짐을 지든 핍박의 짐을 지든 간에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짐을 통해서 우리 성도들을 교육하시는 교육의 방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어떤 짐을 지고 가든지 간에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가 지고 있는 이 짐을 통해서 나를 가르쳐 주옵소서 내가 이 짐을 통해서 영적인 성숙을 이루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이 주시는 짐도 있습니다. 사람은 어차피 짐 없이 다닐 수는 없는 존재입니다. 피곤하고 무거운 것이 짐입니다. 세상 짐은 더욱 피곤하고 무거운 짐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세상 짐을 내려놓고 내가 네게 주는 그 짐을 져라”하십니다.

마11:28-30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니라.”

그러므로 세상 짐을 지든지 주님이 주시는 짐을 지든지 둘 중 하나는 해야 합니다. 주님도 우리에게 짐을 주시는데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짐은 어려운 듯 하면서 쉽고 무거운 듯 하면서 가벼운 것입니다.
  헨리.모어하우스는 자기가 짊어져야 할 어려운 일로 말미암아 녹초가 되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때 그는 아내에게 줄 봉투를 손에 들고 있었습니다. 층계 아래에 있던 딸 미니에게 '어머니는 어디 있니?'하고 묻자, 소아마비로 기동을 못하는 딸이 휠체어 안에서 대답했습니다. '2층에요. 그 봉투를 어머니께 가져 갈거죠. 나로 가져가게 해 주세요'  '너는 갖고 갈 수 없지 않니?' 아버지가 그만 이렇게 말하자 딸은 말했습니다. '내가 봉투를 들고 아버지가 나를 이층 엄마 있는 데로 데려가면 되잖아요.' '아아, 그렇군.' 그는 그때 구름이 걷힌 듯이 깨달았습니다. '이 모어하우스가 아니다. 하나님이 해주신다. 이 짐을 안은 채로 나를 예수께서 짊어져 주시는 것이다.'

  짐이 복이기도 합니다. 한 생물학자가 자신의 눈에는 한낮 가벼운 짐으로 밖에 안 보이는 한 가닥의 짚을 물고 어디론가 옮겨가고 있는 개미를 관찰하고 있었습니다. 한참을  가고 있던 개미 앞에 너무 넓어서 개미가 건너기에는 역부족일것 같은  땅의 틈이 나타났습니다. 개미는 잠시 그 자리에 서서 그 틈을 지나갈  궁리를 하는 것 같더니, 곧 이어 물고 가던 짚조각을 그 틈에 가로 질러 놓고 그 위를 무사히 지나갔습니다. 사람에게 주어진 짐은 그 사람의 발전을 위한 다리로 쓰여질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근시였기 때문에 항상 안경을 두 개씩 가지고 다녔다합니다. 한번은 루스벨트가 선거운동 중 슈렌크라는 사람이 쏜 총에 가슴을 맞고 쓰러졌습니다. 의사는 그의 안주머니에서 박살난 안경집을 꺼냈습니다. '이 안경집이 당신을 살렸습니다. 총알이 안경집에 맞아 각도가 꺾였지요.' 그러자 루스벨트는 미소를 지으며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나는 그 쇠로 만든 안경집을 항상 귀찮은 짐으로만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게 내 생명을 구했군요.'

  짐이 없는 것이 불행이기도 합니다. 마 20:6,7 제십일시에도 나가 보니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서 있느냐 이르되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행진을 할 때에 짐이 없는 사람은 처음에는 기분이 좋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인생에 아무런 질 짐이 없는 사람은 한동안은 행복하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짊어질 짐이 없는 인생은 행복한 것이 아니라 괴로운 것입니다. 휴가를 가보면 알지만 사람이 노는 것도 하루 이틀은 행복해도 보름만 넘어가면 쉬는 것도 괴로운 일입니다. 더구나 노는 것은 더 괴로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인생에 뭔가 질 짐이 있다면 그 사람은 행복한 사람인줄 믿고 하나님의 봉사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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