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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구덩이에 던져진 꿈 (창 37: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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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덩이에 던져진 꿈 (창 37:18~24)
 
  요셉은 형들의 안부를 살피고 오라는 아버지의 말씀을 따라 양을 치는 형들에게 안부를 물으러 가게 되었습니다. 형들에게 가는 길은 그렇게 만만하고 쉬운 길이 아니었습니다. 세겜에 갔으나 이머 도단으로 옮긴 다음이었습니다. 그래서 묻고 물어서 형들이 있는 곳으로 갔던 것입니다. 요셉은 형들을 찾기 위해 힘든 수고를 아끼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형들을 발견하게 되었을 때 안부를 확인할 수 있음을 인하여서 기뻐하며 달려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멀리서 요셉이 오는 것을 본 그의 형들은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꿈꾸는 자가 온다"며 꿈꾸는 것이 꿈대로 되는지 어디 보자며 요셉의 꿈을 조롱하며 죽이자고 계획했습니다.

  본문에서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부르는 호칭이 무엇이었습니까?
"꿈꾸는 자"였습니다. 본문에 "꿈꾸는 자가 오는 도다."라고 했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호칭은 무엇입니까?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무어라고 호칭합니까? 과연 꿈이 있는 자라, 꿈꾸는 자라합니까? 우리는 과연 꿈꾸는 사람들입니까? 정말이십니까? 이것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꿈꾸는 자이면 꿈꾸는 사람을 보면 좋아집니다. 가슴이 설레여 집니다. 꿈꾸는 자를 축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게 꿈이 없는 사람은 꿈꾸는 자를 시기합니다. 미워합니다. 분노합니다. 남의 꿈을 찢으려고 합니다. 비웃습니다. 여러분들은 다른 사람들의 장점이 잘 보입니까? 세상 사람들 가운데 잘되는 사람을 보면 가슴이 설레이고 좋습니까? 비전을 이루는 사람을 보면 축복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십니까? 여러분은 꿈꾸는 자의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꿈을 꾸고 살아가는 아주 건강한 영혼을 가진 성도들인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비전을 찢으려 했던 사울, 요셉의 꿈을 찢으려 했던 형들, 모세를 시기했던 미리암 모두 삼류 변두리 인생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보세요. 요셉의 꿈을 찢고 요셉의 꿈을 구덩이에 던져 넣었던 요셉의 형들의 행복했을까요? 절대로 그럴 수 없었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요셉의 꿈을 구덩이에 던져 넣어버림으로써 그 아버지의 가슴을 찢어놓았습니다. 꿈이 없으면 자신만 꿈없이 살아가면 그래도 다행인데 꿈없는 사람은 다른 여러 사람의 가슴을 찢어놓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 가족은 평생 이산가족으로 살았습니다. 형들은 평생 죄책과 불안과 번민과 고민과 걱정으로 살았습니다. 공동체의 행복과 기쁨을 모두 상실하고 살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삼류인생을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꿈이 없는 사람들은 꿈꾸는 자들을 미워하고 싫어하며 꿈을 찢어버리고 없애버리려고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보세요.요셉의 형들은 요셉의 채색옷을 찢고, 그 채색옷에 짐승의 피를 발랐습니다. 그리고 요셉을 구덩이에 던져 넣어버린 것입니다. 세상은 꿈꾸는 자들을 별로 편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변화를 싫어합니다. 어려분! 한번 보세요.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하려고 하면 얼마나 저항이 많습니까?

  최근에 비기독교인들이 비기독교인으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반기독교화되어져서 기독교에 대한 공격이 독해지고 끈질겨지고 조직화되어지고 있습니다. 이제는 안 믿는 자가 안 믿는 자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을 반대하기 위하여 조직화되고 여론몰이에 앞장서고 복음의 문, 선교의 문을 닫게 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더욱 안타까운 것은 교회가 교회를 비판합니다. 믿는 자가 믿는 자를 비판합니다. 참 안 좋은 풍토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고 있습니다. 내가 못하는 것 저 교회가 하고 있네. 축복해야 됩니다. 저 교회는 사회 구원을 위하여 사회 참여를 참 열심히도 하네. 하면서 축복하는 것입니다. 저 교회는 기도를 열심히 하네. 저 교회는 전도를 열심히 하네. 양육과 훈련을 참 잘 시켜, 저 교회는 세상을 잘 섬겨. 우리가 못하는 것 다른 사람이 하면 그것을 축복해 줄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한광교회 성도들은 이런 마음을 가지고서 신앙생활을 아름답게 해 나갑시다. 

  사람들은 요셉의 형들처럼 꿈꾸는 자를 구덩이에 던져 넣어버릴 수 있습니다. 세상은 요셉의 형들처럼 꿈꾸는 자를 구덩이에 빠뜨려버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꿈을 없애버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으로부터 가리워질 수 있는 구덩이는 이 세상에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꿈이 그 속에 있으므로 하나님이 가만 있지 않으십니다. 앞 뒤가 다 막혀 있을 때에도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대하시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요셉의 생명을 지키시고 보호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제일 많이 나오는 단어가 무엇입니까? '구덩이' 라는 단어입니다. '구덩이' 20절에 보시면 '자 그를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고' 또 22절에도 '그를 광야 그 구덩이에 던지고, 손을 그에게 대지 말라' 24절에도 '그를 잡아, 구덩이에 던지니, 그 구덩이는, 빈 것이라.' 그리고 오늘 본문 다음에 28절, '요셉을 구덩이에서 끌어 올리고' 29절 '르우벤이 돌아와서 구덩이에 이르러 본즉' 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구덩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희망이 없는 장소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희망이 없는 장소. 절망의 장소' 그것을 성경에서는 '구덩이다' 이렇게 말합니다.

  희망이 없는, 전혀 희망이 없는, 희망이 완전히 차단 당한, 희망의 햇빛이 들어오지 않고 절망할 수 밖에 없는 그런 한 장소가 있다면, 그곳은 어디일까요? 그곳이 곧 지옥입니다. 단테는, 그의 유명한 작품인 신곡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지옥의 입구에는, 이런 간판이 붙어 있을 것이다. 일체의 희망을 버려라! " 희망이 없는 곳, 희망을 포기당한 곳, 그곳이 바로 지옥입니다.

  지옥이라는 말을, 헬라어에서는 '하데스'라는 단어를 씁니다. '하데스' 라는 말이, 본래 '구덩이' 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말 성경에서는 '구덩이'라 번역하지 않고 '음부'라고 번역했습니다. '음부' '음큼하고 음란한 여자가' 음부가 아니고, 음부는 '구덩이다' 란 말입니다. '구덩이.' '어두운 곳, 희망이 없는 곳. 희망을 포기 당한 곳.' 그것이 바로 음부입니다.

  창 37장에 여러번 기록된 이 '하데스' 구덩이는 일반저수지나 물웅덩이처럼 변두리가 넓고 중심이 접은 접시모양의 웅덩이가 아닙니다. 사막에서 물을 저장하기 위해서 변두리는 좁게 하고 중심을 넓게 판 호리병모양의 구덩이인 것입니다. 그래서 물을 잘 저축할 수 있고 저축한 물의 증발을 막을 수 있는 의도된 구덩이인 것입니다. 그리고 저축한 물을 다 쓰고 빈 구덩이는 때때로 감옥으로 쓰이기도 했습니다. 들어가면 절대로 자력으로는 나올 수 없는 구조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구덩이는 원래 지옥에 들어갈 사람이나 빠져야 합니다. 정말로 지옥에나 갈 사람들이 구덩이에 빠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보는 것처럼 의인이 구덩이에 빠지는 경우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꿈이 없어서 구덩이를 경험하는 것이야 어쩔 수 없다고 할지라도 꿈꾸는 자가 구덩이 빠진 것입니다. 꿈이 구덩이에 빠지기도 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먼 세계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자신들에게 언제나 찾아올 수 있는 구덩이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악한 마귀 사단은 요셉의 형들처럼 오늘도 우리의 꿈을 조롱하며, 교회를 조롱하며, 믿는 자를 조롱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악한 마귀 사단은 오늘도 우리의 꿈을 구덩이에 던져 넣으려고 합니다. 우리의 정신, 우리의 열정, 우리의 신실함을 구덩이 빠뜨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가 보면, 자주 구덩이를 경험하게 됩니다. 아주 결정적인 구덩이에 던지움을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다시는 나올 수 없는. 자력으로는,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도저히 헤어 나올 수 없는, 그런 구덩이에, 결정적으로 던지움을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 생명을 포기 당하는, 그런 절망을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세상 가운데는 수많은 구덩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 살아가다보면 그 구덩이에 사정없이 처박힐 때가 있습니다.  자녀 질병 사업 부부 등 여러 문제로 깊은 구덩이를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갑자기, 인생에서 희망을 차단 당하고, 어쩔줄 모르는, 그런 절망을 경험하게 됩니다.  참담합니다. 구덩이에 빠져 있을 때는 왜 내가 구덩이에 빠져 있어야 하는지를 모른채 절망하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요셉이, 바로 그런 구덩이를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자기 형제들에 의해, 구덩이에 던지움을 받게 되었습니다.

  누구에게나 고난의 구덩이는 힘든 일입니다. 불행의 구덩이, 고난의 구덩이는 우리의 인격을 파괴할 수도 있습니다. 너무 많은 고난의 구덩이를 겪은 사람을 보게 되면 마음도 어둡고 표정도 어둡습니다. 고난이 그의 인격의 한 부분이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건강하고 튼튼하던 사람도 감옥에 들어가면 자포자기하고, 흐느적거리게 된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고난을 잊기 위해서 하루 온 종일을 잠만 자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고난의 구덩이가 그의 심장을 지배하여 영혼까지 무너뜨리는 경우입니다. 정신과 육체가 모두 무너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요셉은 형들에 의해서 고난의 구덩이에 던져짐을 당하였지만 그는 어둠이 그의 심장을 파고드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구덩이 안에서 형들에 대한 억울함이나 분노를 되새기지 않았습니다. 만약에 억울함과 분노만을 묵상했다면, 어둠이 그의 심장을 파고 들어 그를 무너지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요셉은 외부환경은 어둠이었으나, 그의 심장은 밝았습니다.   
 
  알프레드 월리스의 자연과학 수필 중에 나오는 고전적인 이야기가 있습니다. 누에나방이 번데기에서 고치를 뚫고 나와 나비로 변하는 과정에 관한 것입니다. 누에고치에는 바늘구멍만한 틈이 있습니다. 그 틈으로 나방이 나오기 위해 꼬박 한나절을 애를 씁니다. 그 힘든 과정을 치루고 나와 화려한 나비가 되어 날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좁은 구멍을 어렵게 나오려고 하던 나비는 영롱한 빛을 비취며 나는데, 쉽사리 구멍을 벗어난 나방은 날지를 못하고, 떨어져 죽는다는 사실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좁은 구멍을 나오려는 발버둥과 몸부림이 그를 강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즉 힘든 고난이 나비의 날개 근육을 강하게 만든 것입니다.
  고난은 영적근육, 믿음의 근육을 강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요셉이 구덩이에 던져졌을 때 기가 막혔을 것입니다. 참담했을 것입니다. 내가 뭘 잘못했는데. 몸부림 쳤겠지요? 그러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요셉은 그 구덩에서 주님을 만났습니다. 창39장에 보면 주께서 그와 함께 하시므로 형통하였더라, 그래서 그는 멋지게 견디었습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도 부는 바람처럼 반드시 다 지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도 흘러가는 물처럼 반드시 다 지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다 지나갑니다. 안지나 가는 것이 어디 있습니까? 조금만 더 참고 견디십시다. 한 번 더 일어납시다.

  아이엠에프때 실재로 있었던 일인데 가내공업이 망하고 남편은 날마나 술에 취하여 병들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주머니가 자살을 하려고 아이를 업고 강으로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아이가 등에서 "엄마 내 신발 한짝이 벗어졌어요"라고 한 것입니다. 그 아주머니는 아이의 신발을 찾으려고 오던 길을 되돌아가면서 신발을 찾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신발을 아이의 신발 한짝을 찾으면서 죽을 생각이 없어져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돌아와서 가내 공업을 일으켜서 훌륭한 벤처기업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지처 쓰러질 때에라도 결코 끝이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내 영적 근육을 강하게 만들려고 하시는 의도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구덩이에 빠졌을 때, 좋은 미래가 내 앞에 올 것을 믿어야 합니다. 벌써 절망하기는 이른 시간이라고 자신에게 강하게 선포해야 합니다.
  꿈이 있는 사람은 예외 없이 누구나 고난의 웅덩이를 경험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마을에 홍수가 나서 강물이 범람하게 되었습니다. 온천지가 다 물바다입니다. 아주 신실한 성도가 화급하게 지붕 위로 올라가 죽을 고비를 넘겼습니다. 그 때 한 사람이 배를 타고 오더니 "이 배를 타시오"라고 강권했습니다. 그런데 이 신실한 성도는 감사합니다만 하나님이 저를 건저 주실 것입니다. 그 사이에 물은 점점 불어올라왔습니다. 잠시 후 또 다른 한 사람이 배를 가지고 와서 타시오 했습니다. 그런데 이 때도 하나님이 저를 건저 주실 것입니다. 하고 거절했습니다. 물은 점점 불어 그 신자는 결국 물에 빠져 죽었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왜 나를 건저 주시지 않은 것입니까? 이게 뭡니까?"
  하나님은 안타깝게 신자를 바라보시면서 "내가 두번이나 배를 보내주지 않았느냐?"

  사 38:17 "보옵소서 내게 큰 고통을 더하신 것은 내게 평안을 주려 하심이라 주께서 나의 영혼을 사랑하사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지셨고 나의 모든 죄는 주의 등 뒤에 던지셨나이다"했고, 시 40:2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케 하셨도다"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장의 조롱에서 우리를 반드시 건저내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빠진 웅덩에서 우리가 던져진 구덩이에서 우리를 끌려올려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구덩이 가운데서도 절대로 절망하지 않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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