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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약속의 땅을 바라보고 나아가자! (창 13: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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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의 땅을 바라보고 나아가자! (창 13:10-18)

지난 설 다음 날에 이 장로님 가족이 설 인사를 왔습니다.  세배를 하고 앉아서 다과를 드는데 현희가 제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있잖아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잖아요."
"그랬지"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는데 그때 십자가의 못을 무엇으로 뺏어요?"
이 엉뚱한 질문에 제가 뭐라고 대답을 했을 것 같습니까?  주일날 여러분들에게 물어보고 답을 준다고 했습니다.  해답이 나오면 제게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좌우간 요즘 우리 아이들이 던지는 질문에 대답을 하려면 아주 고차원적인 공부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것은 제가 쓰고 있는 박사 논문보다 훨씬 더 어려운 것 같습니다.

로버트 프로스트라는 시인이 쓴 시 가운데 '가지 않은 길'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노랗게 물든 숲 속 두 갈래 길이 있었네
한 여행자의 몸으로 두 길 다 가지 못하는 서운함으로
한 길이 굽어 꺾어 내려간 데서 나는
바라볼 수 있는 데까지 오래 머물러 바라보았다네."

이 시의 마지막 단원은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 난 한숨지으며 말하게 되겠지.
두 갈래 길이 숲 속에 나 있었다고.
그때 난 사람들이 적게 여행하는 길을 선택했다고.
그리고 그것으로 모든 것은 달라졌다고."

이 시는 무엇보다 우리의 인생길이 여행길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행하는 동안 종종 우리가 두 갈래 길에 서서 선택을 해야 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가운데 우리들에게 특별한 느낌을 주는 것은 아무래도 마지막 대목이 아닌가 싶습니다.  다시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난 사람들이 적게 여행하는 길을 선택했고, 그리고 그것으로 모든 것은 달라졌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인생을 살다보면 실제로 두 갈래 길에 서서 선택을 강요받게 됩니다.  한 길은 가깝고도 쉽게 갈 수 있는 길이고, 또 한 길은 멀고도 험한 길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선택의 길목에서 너무나도 자주 선택의 기준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할 때에는 자기 행동의 방향을 단순히 운에 맡길 수 있습니다.  또는 단순한 편의주의, 응급처치를 따라갈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선택을 잘못하고 나면 끝없는 고난을 당합니다.  사실 우리를 괴롭히는 것은 어떤 불행한 체험이나 상황이 아니라 거기에 어떻게 대응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인생의 미래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이고 확고한 원칙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떤 상황에서 결단을 내릴 때 괴로워하거나 자기 자신의 행동 방향을 운에 맡기지 않아도 됩니다.  사람은 자기 행동의 선택에 대한 자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실은 이 선택은 어떤 원칙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사람이 세상 일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원칙이 통제합니다.  우리는 자신이 행동을 통제하지만 이런 행동의 결과는 원칙이 통제하는 것입니다.  위대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의 배후에는 언제나 남들이 모르는 위대한 원칙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우리 속에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하는 진리의 길, 올바른 삶의 원리를 가르쳐 주십니다.  마태복음 4장에 보면 인간의 갈등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우리 인간들이 당해야 하는 것과 똑같은 시험을 당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선택을 강요하는 그 현실 앞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확고한 원칙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계시면서 당하신 모든 근본적인 선택의 강요 앞에서 말씀의 원칙을 붙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게 될 때 기분에 따라 하는 것과 운명을 따라 하는 것, 그리고 진리를 따라 하는 것의 결과는 전혀 다를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도 진리의 말씀이 내 삶의 선택에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삶의 나침반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왜 성령 충만하기를 원합니까?  순간 순간마다 내 자신의 행동을 하나님이 기뻐하는 쪽으로 선택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원하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기분이 좋으면 성령을 체험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힘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따를 수 없고 내 의지로는 따를 수 없지만, 하나님의 거룩한 권능이 이런 선택을 할 수 있는 능력으로 나를 붙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령 체험을 원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성령의 능력을 받아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원칙에 따른 바른 선택을 할 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십시오.  성령 충만을 받아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향으로 삶의 선택을 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은 바라봄의 원칙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본문 10절을 보면, "롯이 눈을 들어 땅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14절에서는 "아브람이 눈을 들어 땅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보십시오.  두 사람 다 눈을 들어 땅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떤 땅을 바라보느냐?' 에 따라서 축복의 사람이 되기도 하고 저주의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땅을 바라보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시고 기뻐하시는 그 땅을 바라보셔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복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약속의 땅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거룩한 비전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 축복입니다.  무엇을 보고, 무엇을 위해 사느냐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영적 수준을 말합니다.  그 사람의 믿음을 말합니다.  그 사람의 가치관이요, 인생관을 말합니다.  땅의 사람은 땅의 것만 바라봅니다.  그러나 하늘의 사람은 영원한 하늘을 바라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우리들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그렇습니다, 여러분.  위의 것을 생각하십시오.  위의 것을 바라보시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은 아브람이 조카 롯과의 사이에 갈등 구조가 형성되었을 때에 그가 어떻게 해결하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브람이 갈대아 우르에서 나올 때에 동생의 아들인 조카 롯을 데리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가 이집트에 가서 많은 재물을 얻은 후에 벧엘에 올라올 때까지 줄곧 계속해서 롯과 함께 생활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렇게 많은 재물을 얻어서 벧엘로 올라 오다보니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합니다.  아브람의 가축들과 롯의 가축들이 다투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들이 사는 지역은 사막지대입니다.  물이 넉넉하지 못한 곳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가축이 점점 늘어만 갑니다.  그러다 보니까 물과 목초지에 대한 자리다툼이 일어납니다.  급기야는 종들 사이에서 주먹다툼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갈등과 고통의 순간에 하루는 아브람이 조차 롯을 들판으로 불러내어서 한마디합니다.
"네가 좌하면 내가 우좌하고, 네가 우하면 내가 좌하리라."
한 마디로 너 좋은 대로 선택하라는 이야기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조카 롯을 비롯하여 모두가 땅의 문제로 깊은 갈등을 겪고 있는 그 순간에 아브람의 이 여유 있는 마음이 어디에서 생긴 것입니까?

먼저 생각해 보면, 네가 잘되는 것이 내가 잘되는 것이고, 내가 너를 사랑하니까 너에게 양보하겠다는 이야기 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목축업을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목초지를 양보한다고 하는 것은 생명을 내어놓는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흔쾌히 목초지를 양보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다른 사람들은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문제로 염려하고 있을 때에 아브람은 자신을 향한 더 큰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브람은 고향을 떠나오는 그 순간부터 한 순간도 자신에게 찾아오셔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잊은 적이 없었습니다.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지금 아브람은 더 큰 것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에 작은 것에 있어서는 여유가 있었습니다.  햇빛 아래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촛불 정도는 쉽게 양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겠다는 약속의 땅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지 않았지만 아브람은 알고 있었습니다.  조카와 갈등을 겪으며 빼앗는 땅 정도는 아닐 것이다.  이 세상에서 싸움으로 얻는 정도의 땅은 아닐 것이다.  내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내가 꿈도 꿀 수 없는 굉장한 것이고 어마어마한 것이라는 사실을 아브람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작은 것에서는 양보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더 큰 비전을 품고 미래를 향해 달려가는 사람은 사소한 것에 얽매여서 시간을 낭비하지 않습니다.  더 큰 꿈을 안고 비상하기를 준비하는 사람은 작은 것에 붙잡혀서 정열을 낭비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아브람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장차 나를 복이 되게 하실 것이다.  나에게 더 큰 약속의 땅을 주실 것이고, 나로 하여금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실 것이다.  아브람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고, 그 말씀을 붙잡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랬기에 그는 모든 문제를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반면에 롯에게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없었습니다.  말씀이 없었으니 당연히 믿음도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선택의 순간 앞에 섰을 때에 하나님보다는 세상을 선택했습니다.  위의 것을 선택하기보다는 땅의 것을 선택했습니다.  미래의 더 큰 비전을 선택하기보다는 눈 앞의 순간을 선택했습니다.  세상적인 행복을 찾았습니다.  그래서 본문 10절에 보면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문 10절을 다같이 읽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사랑하는 여러분, 본문을 보십시오.  여기에는 롯이 땅을 선택함에 있어서 그가 어떤 기준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볼 수가 있습니다.
첫째는, 물이 넉넉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물이 넉넉한 지역을 찾았습니다.
둘째는, 주변 경치가 아름다워야 했습니다.  그는 삼촌 아브람을 따라 다니면서 사막에 진절머리가 났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삼촌이 땅을 선택하라고 했을 때 마치 여호와의 동산처럼 보였던 지역을 어렵지 않게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롯이 땅을 선택함에 있어서 기준은 애굽 땅과 같이 화려함이 있는 지역이었습니다.  그는 삼촌을 따라 애굽에 내려갔을 때에 나일 강변에 펼쳐진 도시의 화려함에 매료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이전에 삼촌을 따라 고향을 떠나왔지만 그 고향 갈대아 우르의 화려한 향락 문화를 그리워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주저하지 않고 요단 들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롯이 땅을 선택함에 있어서의 기준은 세상적으로 보았을 때에는 지극히 당연한 것일 것입니다.  어쩌면 저와 여러분에게 이런 선택의 순간이 주어졌다면 우리도 이와 같은 기준을 가지고 땅을 선택했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롯의 선택은 세상 사람들의 기준으로는 합당했을는지는 몰라도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전혀 아니었습니다.  롯의 선택 기준은 전혀 믿음 없는 사람의 기준이었습니다.  보십시오.  그가 땅을 선택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았다는 이야기가 없습니다.  그가 땅을 선택함에 있어서 하나님께 기도했다는 이야기도 없습니다.  그는 전적으로 자신의 감정과 자신의 의지와 자신의 판단에만 의존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그 땅이 어떤 땅이었습니까?  소돔과 고모라! 역사적으로 가장 무서운 심판을 받았던 저주받은 땅이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롯이 바라보았던 것처럼 화려하고 매력 있는 도시였습니다.  그렇지만 거기에는 하나님의 약속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없었습니다.  단지 인간적인 관점에서 볼 때 행복을 약속해 줄 것 같은 착각을 주는 도시일 뿐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러한 유혹이 어디 롯에게만 있을까요?
우리가 주거지를 선택할 때 세상 사람들과 다른 어떤 판단의 기준이 있습니다.  집 값이 오를만 하기 때문에, 아니면 학군이 좋기 때문에, 이것이 유일한 기준이라고 한다면 여러분은 세상 사람들과 어떤 면에서 다릅니까?  동일하게 내가 직장을 선택할 때에도 자기 나름대로의 어떤 판단의 기준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 기준이 어떤 것이든지 간에 거기에 하나님을 향한, 하나님을 위한,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자 하는 것이 없다면 여러분은 세상 사람들과 어떤 면에서 다르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어떤 근원적인 선택 앞에 섰을 때에 여러분은 그 선택을 향한 판단 기준이 무엇입니까?
세상 사람들과 다른 가치관이 있습니까?
솔직히 어떤 면에서 당신은 세상 사람들과 다르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롯의 실수는 잘못된 가치관으로 잘못된 땅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잘못된 땅을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롯의 실수는 그것만이 아니었습니다.  롯의 비극은 아브람을 떠난 데서부터 시작이 되어졌습니다.  롯은 아브람을 떠나면서 세상을 선택해 달려갔습니다.

왜 아브람을 떠난 것이 그의 비극이 되는 것입니까?  아브람은 복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복 덩어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브람은 축복의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살아가면서 축복의 사람을 만나는 것, 이것이 내 삶의 축복임을 기억하십시오.  기도의 사람을 얻는 것, 믿음의 사람을 얻는 것, 이것이 내 축복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내가 복이 되는 것입니다.  나를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복되게 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여러분이 기도의 사람이 되십시오.  여러분이 믿음의 사람이 되십시오.  여러분이 복이 되십시오.

본문 12절에 보면, 두 사람의 갈림길이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본문 12절을 다같이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거주하였고 롯은 그 지역의 도시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

아브람이 끝까지 거주한 땅은 바로 가나안 땅이었습니다.  가나안 땅은 외로운 땅이었습니다.  기근이 있는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약속이 있는 그 땅을 붙들었습니다.  그런데 롯은 자신을 붙잡고 세상과 물질을 따라갔습니다.  인간적인 행복을 쫓아갔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본문 12절을 자세히 보시기 바랍니다.  여기에는 재미있는 한 표현을 우리에게 남겨주고 있습니다.
"소돔까지 이르렀더라"

어쩌면 롯도 처음부터 소돔까지 가려는 마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롯도 소돔이 타락한 땅, 하나님이 싫어하는 땅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물질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갈 때에 결국에는 소돔까지 가고 말더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는 소돔과 고모라가 망할 때에 그 성에 집을 짓고 그들과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 없이 자기 중심으로 선택을 하면 그 결국에는 망할 때까지 가더라는 이야기입니다.  자기가 가는 길이 망하는 줄도 모르고 가더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브람은 분명히 한 가지는 알고 있었습니다.  세상 사람들 눈에는 척박해 보이는 땅이었지만 하나님이 약속하셨으니 거기에 복이 있으리라.  믿음으로 아브람은 약속의 땅을 붙들었습니다.  그 땅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떠나가도 그는 그 땅을 지켰습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이 아브람을 찾아오셨습니다.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너는 좋은 길을 선택했느니라.'

아브람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그리울 때에 하나님께서 찾아와 주셨습니다.  아브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이 필요할 때에 말씀을 주셨습니다.  새로운 꿈이 필요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새로운 꿈을 보여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브람에게 있어서 복이 무엇입니까?  눈이 열리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14절 말씀에 보면 롯이 아브람을 떠난 이후에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찾아오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브람이라고 왜 갈등이 없었겠습니까?  내가 이 땅을 붙잡고 지켜야 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  뿐만 아니라 자기 살붙이와도 같은 조카 롯이 미련 없이 자기를 버리고 떠나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얼마나 마음이 아팠겠습니까?

나를 떠나라고 이야기할 때에 마음 한 구석에서는 "삼촌! 나는 삼촌을 떠날 수 없어요.  하나님이 삼촌과 함께 하는 것을 나는 보았어요.  삼촌은 복이라고 말씀하셨잖아요.  삼촌을 떠나는 것은 곧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기 때문에, 약속을 떠나는 것이기 때문에, 축복을 떠나는 것이기 때문에 나는 삼촌을 떠날 수 없어요."  그렇게 매달리기를 기대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조카 롯은 훌쩍 떠나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자신이 받은 비전이 가장 가까운 롯에게까지 인정받지 못한다고 생각할 때에, 소중하게 여겼던 가족에게조차 용납 받지 못한다고 생각할 때에 얼마나 상심이 컸을까요?  믿음이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꿈이 송두리째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믿음의 눈으로 내일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약속의 땅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이 좋아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시야가 넓어진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은혜 받으면 사람이 변화됩니다.  변화되면 사소한 일에 집착하던 사람이 큰 일을 바라보게 됩니다.  땅만 보고 살던 사람이 하늘을 볼 수 있게 됩니다.  가까운 것만 보고 살던 사람이 먼 곳을 보게 됩니다.  왜소하던 사람의 마음이 커집니다.  생각이 커집니다.  눈이 넓어집니다.  꿈이 커집니다.  그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세계를 보게 하는 것입니다.  한번도 보지 못한 세계, 들어보지 못한 세계, 꿈꾸지 못한 세계를 향하여 마음과 눈이 열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세상일이라고 하는 것이 대게 보면 너무나 뻔한 것입니다.  신기루 같은 것입니다.  붙들지만 마지막에는 한줌의 재로 남아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영원히 살 것처럼 펼쳐질는지 모르지만 언젠가는 끝나는 날이 있습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그러나 믿음을 열고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새로운 세계가 보이게 될 것입니다.

롯을 떠나보낸 아브람에 찾아오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동서남북 새로운 세계를 보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세계를 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도 바울은 히브리인이었습니다.  유대인을 사랑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만나고 난 다음에 보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를 보게 됩니다.  지옥의 불쏘시개나 개처럼 취급받던 이방인들에 대한 새로운 꿈을 꾸게 됩니다.  오고 오는 세대에 오대양 육대주에서 펼쳐갈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를 보게 됩니다.  그리하여 그는 이방인의 사도로 나서게 된 것입니다.

마포 삼열 박사는 미국의 부통령으로 지명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눈을 들어 기도하는 가운데 무너져 가는 한반도를 보았습니다.  예수 없이 죽어 가는 한 민족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복음의 불모지인 한국 땅에 와서 장로회 신학대학을 세우고 한국 최대의 교단인 장로교를 세웠습니다

허드슨 테일러는 중국을 보았습니다.  스터드라는 젊은이는 아프리카를 보았습니다.  윌리암 캐리는 인도를 보았습니다.

미국의 LA는 끊임없이 펼쳐진 사막에 불과했습니다.  서울에 10배가 넘는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꿈을 가진 사람들은 400km, 500km 밖에서 물을 끌어다가 나무를 심고 도시를 건설합니다.  거미줄처럼 고속도로를 도시 가운데 건설하고 전세계 수많은 인종들이 모여 함께 행복한 도시를 건설해 가고 있습니다.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먼저 눈을 들라고 하십니다.  눈을 내리깔고 땅을 보라는 말이 아닙니다.  눈을 크게 뜨고 약속의 땅을 바라보라는 말입니다.  눈을 크게 뜨고 하나님이 주시는 비전을 바라보라는 말입니다.  보십시오.  롯도 눈을 크게 떴습니다.  그러나 그는 약속의 땅이 아니라 소돔과 고모라가 망하는 땅인 줄 모르고 그 길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약속의 땅이 보여졌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환경을 보면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을 열고 보면 온 세상에 행복이 보이게 될 것입니다.  내가 나 자신을 들여다보면 초라한 인생입니다.  그러나 내 안에 계신 예수를 바라보면 나는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 안에서 나는 존귀한 존재임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약속의 땅을 붙들고 버틴 아브람을 하나님은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아브람을 찾아오신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다시 약속의 말씀을 주십니다.  본문 15절과 16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한 마디로 역사를 바꾸는 영향력 있는 인물이 될 것이라는 약속이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축복은 무한하다는 뜻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셀 수 없을 만큼,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무한대로 펼쳐질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복은 우리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무한하십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가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전능하십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주시는 땅은 내가 보지 못하는 땅입니다.  내가 꿈꾸지 못하는 땅입니다.  내가 땀흘려서 만든 땅이 아닙니다.  내가 가꾼 땅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 땅을 우리에게 주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땅은 영원한 땅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남은 인생에 의미 있는 일을 찾아야 합니다.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네가 보지 못했던 하나님이 약속하신 새로운 땅, 새로운 세계를 보라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일반적으로 우리는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도 천국을 막연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은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땅입니다.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구체적이고 더 실제적인 땅입니다.  생생한 땅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사람이요, 하나님의 자녀일진대 저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면서 살아갈 줄을 알아야 합니다.
'마라나타!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우리는 저 영원한 천국, 사랑하는 우리 주님과 함께 있을 하늘나라를 바라보셔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생명의 기간에는 분명한 의미가 있고 목적이 있습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경륜이 있고 계획이 있습니다.  그것을 발견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약속의 땅을 얻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앉아 있는 이곳, 교회는 분명히 약속의 땅입니다.  그것은 여기에서 황무한 이 땅을 바꾸고 변화시킬 꿈을 펼쳐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곳을 약속의 땅이요, 꿈 땅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이곳은 세상에 있지만, 세상에 있는 땅이 아닙니다.  천국으로 이어질 땅입니다.  이 재단, 이 전에서 미래의 꿈쟁이가 일어날 것입니다.  미래에 복된 자들이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일어날 것입니다.

깊은 산 속에 사는 멧돼지 한 마리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먹이를 찾아서 어슬렁거리다가 뜻밖에 도토리 나무 밑을 지나다가 여기저기에 도토리가 널려져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눈에 띄는 도토리를 다 주워 먹었지만 배가 차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가랑잎을 코로 헤치고 주둥이로 땅을 파니까 땅속에서 도토리가 나오는 것 아니겠습니까?

멧돼지는 혼자 생각하는 것입니다.  '땅속에서 도토리가 나오는 것이라구'.  그래서 '이것 보라. 내가 얼마나 지혜로운 존재이냐.  아무도 이걸 모를 거야.'  땅을 파헤치기 시작했습니다.  한참 팠더니 또 도토리가 하나 나옵니다.  '이것 봐.  이것 나 혼자만 발견한 거야.'

그래서 계속해서 땅을 파헤치는 가운데 상수리나무가 서 있을 수 없을 만큼 사방에 땅을 파헤치고 말았습니다.  결국 상수리가 넘어지는 바람에 상수리나무에 이 멧돼지는 깔려서 죽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땅이나 파면서 사시겠습니까?  약속의 땅을 바라보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을 위하여 준비한 축복의 땅을 바라보십시오.  의미 있고 보람찬 일을 바라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펼쳐질 미래에 여러분을 향한 영광스런 계획을 보십시오.  믿음의 눈을 열고 여러분의 내일을 바라보십시오.  준비한 땅을 바라보십시오.  주께서 여러분의 역사를 새롭게 펼쳐 주실 것입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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