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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는...내게, 나는...네게 (삼상 17:4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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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내게, 나는...네게 (삼상 17:41~49)

할렐루야!
지난 수요일부터(2월 6일) 사순절이 시작되었습니다.
사순절은 부활절 전, 주일을 뺀 40일을 말하는데
금년에는 3월 23일이 부활주일입니다.
사순절은 경건하게 엄숙하게 주님의 고난을 기억하며
부활을 맞기 위해서 준비하는 때라
경건과 희생과 섬김을 뜻하는 ‘보라색’을 사용합니다.
이 기간 동안 경건하게/엄숙하게 지내는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우리들이 세상에 살면서 너무 큰 소리는 듣지 못합니다.
지구가 돌아가는 소리 같은 것은 듣지 못합니다.
너무 작은 소리도 듣지 못합니다.
우리의 귀가 들을 수 있는 소리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른들은 못 듣는 휴대폰 벨소리가 있다고 합니다.
10대들을 비롯한 젊은 사람들만 들린다고 해서 틴벨(teen bell)이라고도 합니다.
노인성 난청이 시작되는 20대 후반 이상의 성인들은
주파수 8,000Hz대 이상의 고음을 들을 수 없다는 점에
착안해 만든 17,000Hz 대 고음역을 쓰는 벨소리입니다.
중학교 수업시간에 한 학생의 핸드폰 벨이 울린다면
반 아이들은 다 벨소리를 듣는데
오직 한사람, 선생님만 그 벨소리를 듣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별 신기한 소리가 다 있다 싶지만 …
서른이 넘은(?) 제 귀에는 들리지 않으니 어떤 소리인지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아이들은 아는데 어른들은 모르는 것이 세상엔 많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막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사람은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순수한 믿음일 때는 하나님 한 분 만이면 기쁘고 행복했는데,
신앙의 연륜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하나님 말고 다른 것에서 기쁨을 찾으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처음 예수 믿을 때 … /처음 세례 받을 때 …
처음 집사 되었을 때 … /권사/장로 되었을 때 …
처음 그 마음과 믿음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많습니다.
오늘은 어린 아이 같은 첫 사랑, 첫 믿음,
처음 생각을 회복하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높이 들고 우리의 믿음을 표현합니다.

저는 예수 믿어 구원받았습니다(요3:16).
저는 예수 믿어 하나님 자녀 되었습니다(요1:12).
저는 예수 믿어 천국 백성 되었습니다(빌3:20).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오늘(시118:24),
하나님 말씀으로 가르침을 받습니다(딤후3:14~17).
눈을 열어 주의 법 안에 있는
놀라운 진리를 보고 깨닫게 하소서(시119:18).
"아멘"으로 순종하여(고후1:20)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 되게 하소서(마5:16).
아멘.

그런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두려움의 대상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어떤 것이 두렵습니까? 무엇이 가장 무섭습니까?
- 주식에 투자한 사람은, 내려가는 주가가 무섭다고 합니다.
- 살림하는 주부들은, 올라가는 물가가 무섭다고 합니다.
- 예상치도 못한 위기가 생길 때, 미래가 불투명해서 앞이 보이지 않을 때 …
사람들은 불안에 떨며 두려워합니다.
아무리 조심하고 피하려고 해도 세상에는 절대적인 안전지대는 없습니다.
그래서 불안과 두려움은 언제나 우리 곁에 있기 마련입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모든 생각이 부정적으로 바뀌고 소극적이 됩니다.
그 뿐 아니라 두려움은 행동 장애를 일으키고
지능까지 떨어뜨리는 이상반응을 가져오기도 합니다.
이런 현상을 가리켜‘공포증’이라고 말합니다.

공포증의 종류는 다양합니다.
- 높은 곳에 올라가면 아무 것도 못하고 벌벌 떠는 고소공포증,
- 엘리베이터 같은 폐쇄된 공간 또는 작은 방에만 있어도 괴로워하는 밀폐공포증,
- 사람을 만나는 것을 두려워하는 대인공포증,
- 씻는 것 자체(심지어 손 씻는 것까지)를 무서워하는 목욕공포증,
- 아내나 남편이 음식물에 독극물을 넣었을 거라는 생각에 불안에 떠는 독살공포증,
- 잠 자러가는 것 자체를 두려워하는 취침공포증,
- 입천장에 끈적하게 달라붙는 땅콩버터를 무서워하는 땅콩버터공포증
- 그리고 자신의 오른쪽에 있는 물건을 무서워하는 우측공포증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것을 두려워합니까?

세상에는 사람이 두려워하는 것들이 참으로 다양합니다.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에게도 이런저런 문제나 어려운 위기가
두려움으로 자리 잡고 주인 노릇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공포를 내어 쫓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신분이 “예수의 군병/병사/군사/군인”(딤후2:3) 이기 때문입니다.

병사된 크리스천의 신앙생활은 세상과/사탄과 싸우는 영적 전쟁입니다.
전쟁터에 선 용사에게 첫째로 필요한 것은 물러서지 않는 용기입니다.
적 앞에서 떨고 도망치는 병사는 아무리 많은 훈련을 받고
좋은 무기를 가졌다하더라도 승리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두려움을 이길 담대함과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과업에 생명을 걸고 완수한 사명자들,
그들 모두는 어떤 위기 앞에서도 비굴하지 않고 당당했습니다.
용기가 넘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에게 두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두려움을 이기고 담대하게 맞서 승리했습니다.

두려움은 두려워하는 사람, 자신이 누구인지를 잊게 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군대가
엘라 골짜기(Valley of Elah)에서 서로 대치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당시 블레셋은 300여 년 전, 여호수아가 약속의 땅에서 쫓아낸 백성들입니다.

그 이후로 블레셋은 끊임없이 이스라엘과 전쟁을 하며 지냈던 원수지간입니다.
그러나 이번 전쟁은 상황이 특별했습니다.
엘라 골짜기에서 이스라엘 군대 앞에 나타난 엄청난 사람 때문입니다.
그 사람의 키는 여섯 규빗(약 2.9m)에 한 뼘이요,
(1규빗은 성인 팔꿈치에서 중지까지 길이로 약 45cm)
놋 오천 세겔(57kg 정도) 무게의 갑옷을 걸쳤습니다(삼상17:4~7).
7kg이 넘는 칼날을 단 창을 자유롭게 다루며, 소리를 질러댔습니다.(삼상17:8)

“내가 오늘 이스라엘의 군대를 모욕하였으니
사람을 보내어 나와 더불어 싸우게 하라”(삼상 17:10)
쉽게 이야기하자면 “내가 너희들을 모욕했다. 그러니 나와 붙을 사람을 내보내라”

그러자 “사울과 온 이스라엘이 … 놀라 크게 두려워하니라”(삼상 17:11) 두려워했습니다.
그냥 두려워 한 것이 아니라 “크게” 두려워했습니다.

사울이 이끄는 이스라엘 군대는 강한 군대였습니다.
출애굽 때는 아말렉을 물리쳤고,
이전에도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크게 승리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군대는 군사 수가 적고, 무기가 부족하더라도 …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능히 이긴다는 것을 경험을 통하여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골리앗 앞에서는 아무도 … 누구도 …
단 한 번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습니다.
무서워 떨기만 했습니다.
골리앗이 40일 동안 아침저녁으로
이스라엘 군대 앞에 나타나 소리 질렀습니다.(삼상17:16)
그런데 40일간의 대치상황 중에서 이스라엘 군대가 한 것이라곤
단지 골리앗 앞에서 두려워 떤 것 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백성,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군대’라는 사실을 잊어 버렸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만나는 골리앗과 같은 상대 / 위기와 문제 … 앞에서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두려움은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잊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조금 전 성경을 높이 들고
“우리는 예수 믿어 구원받고, 하나님 자녀가 됐고,
천국백성이 되었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문제 앞에서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면,
- 하나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합니다.
- 이스라엘 군대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골리앗의 큰 키와 갑옷과 창의 무게에 집중한 것처럼
세상의 기준으로만 문제를 바라보게 됩니다.

시험 앞에서, 문제 앞에서, 여러분의 인생에 나타나는
골리앗 같은 엄청난 존재 앞에서도 …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 …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에 보면
“ …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고 했습니다.


한 교회학교에 다니는 어린아이가
어두운 거리를 걷고 있는데 눈앞에 귀신이 나타났습니다.
너무 무서워 그 자리에 돌처럼 굳어 있는데
“귀신을 만나면 찬양을 불러 쫓아버리라”는
교회학교 선생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그 아이는 용기를 내어 강하고 담대하게 두 팔을 뻗어
교회학교에서 배운 찬양을 불렀습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
......

그러자 귀신의 눈에서 눈물이 고여 떨어지더니 귀신도 노래를 하더랍니다.
“감사해요, 깨닫지 못했었는데 … 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라는 걸”

누가 지어낸 이야기이겠지만,
사탄도 사랑 받고 있다는 사실에 감동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려움을 당하고 위기를 만났을 때 이 어린아이처럼 찬양합니까?
귀신도 사랑 받는다는 사실에 감동했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다는데 우리는 과연 감동받고 사느냐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인데도 왜 강하고 담대하게 살지 못합니까?

우리가 믿음의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담대함/용기가 필요합니다.
- 손해 보지만 정직할 수 있는 것도 …
- 힘들지만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는 것도 …
- 참혹하고 추한 세상 속에서도 주님을 향한 정결한 마음을 지킬 수 있는 것도 …
하나님께 사랑 받음으로 두려움을 정복한 용기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여러분, 용기 있는 신앙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강하고 담대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담대함은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다윗은 전쟁에 참가한 세 형들을 위해 곡식과 떡(빵이겠지요),
치즈를 전해주라는 아버지의 심부름을 하러
이스라엘 군대 진영에 갔습니다.(삼상17:17~18)
다윗이 진영에 도착했을 때
마침 거인 골리앗이 소리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삼상17:23)
그러자 이스라엘 군사들은 몸을 피하고 두려워하며 도망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을 본 다윗은 사울에게로 가서 블레셋 사람과 싸우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사울은 다윗을 말립니다.
사무엘상 17장 33절을 보면
“ … 네가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울 수 없으리니
너는 소년이요 그는 어려서부터 용사임이니라”(삼상17:33) 했습니다.

사울은 골리앗이 어려서부터 전쟁의 경험이 있는
용사로 자라났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위협적으로 보이는 골리앗에 관심을 두지 않고
오직 자신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 초점을 맞췄습니다.

37절에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 …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 ”(삼상 17:37)
하나님께 초점을 맞춘 다윗에게 골리앗은
예전에 자기가 죽여 버린 짐승들과 다름없었습니다.

이처럼 세상의 시각으로 보면 두렵고, 무섭고, 어렵고, 힘들고, 복잡한 일도
하나님의 시각으로 바라보면 쉽고, 간단한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과 동행해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다윗은 무기를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을 말리던 사울은 자기 군복을 다윗에게 입히고,
놋 투구를 그 머리에 씌우고, 갑옷도 입혔습니다.
그러나 걷기도 쉽지가 않았습니다.(삼상17:38~39)
다윗은 왕의 갑옷과 투구와 칼을 모두 내려놓았습니다.
다윗은 양을 치던 막대기와 맹수를 잡을 때 썼던 물매와
시내에서 고른 매끄러운 다섯 개의 돌을 가지고 골리앗을 향해 나갔습니다.
(물매 : 작은 돌맹이를 던지기 위해 중간 부분을 넓게 자른 가죽 조각)

다윗과 골리앗이 마주 선 엘라 골짜기에서
다윗이 이길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오직 한사람 ‘다윗’뿐이었습니다.
블레셋 군대 진영에서는 40일 만에 싸우러 나온 이스라엘의 용사가
막대기를 들고 나온 소년이라는 점에 배꼽을 잡고 웃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진영에서는‘어린 소년이 죽게 되는 구나’하며 안타까워했을 것입니다.

이 때, 다윗은 담대하게 자신의 믿음을 선포합니다.
“…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삼상 17:45)

골리앗은 단 한방에 쓰러졌습니다.

두려움에 가득 찬 사람은 단 두 가지의 말 밖에 할 수 없습니다.
“불가능해!”, “희망이 없어!”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저런 거인을 이기는 것은 불가능 해’
‘저 거인 때문에 우리에겐 희망이 없어’

두려움은 닥친 어려운 문제를 더 큰 문제로 만들어 버립니다.
여러분 앞에 닥친 어려움, 골리앗 같이 우뚝 서있는 장애 앞에서 …
불가능하다고만 생각하지 말고 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아가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바라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똑같은 삶과 똑같은 상황 속에서도 어떤 눈을 가졌느냐에 따라
붙여지는 이름도, 표현하는 말도 달라집니다.

<채의숭 장로님이 쓰신「주께 하듯 하라」 p.66>는 책에 보니
아프리카 최남단의 원래 이름이 ‘폭풍의 곶’, ‘악마의 곶’이었습니다.
곶(바다나 호수로 가늘게 뻗어 있는 육지의 끝 부분)
그런데 포르투칼의 탐험가 ‘바스코 다 가마'가
이곳을 항해한 후에 이름을 달리 붙였습니다.
아름다운 해변과 잔잔한 바다가 너무나도 아름다워서
그곳을 ‘희망봉’이라고 붙였습니다.
똑같은 곳을 어떤 사람은 ‘악마, 폭풍’이라고 표현했는데
‘바스코 다 가마’는 ‘희망봉’이라고 했습니다.

이 책에 보면 다음과 같은 글이 있습니다.
“융통성, 나는 이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성경은 ‘예’하고 ‘아니오’ 할 때 ‘아니오’라고 가르친다.
성경은 ‘글쎄요’라는 말을 가르치지 않는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믿고 사십니까? 아닙니까?
‘글쎄요’ 라는 답은 안 믿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어정쩡한 태도의 사람이 아니라 확실한 믿음의 사람을 통해 일하십니다.

담대한 사람, 다윗에게 골리앗은 기회였습니다.

담대한 사람에게 ‘위기(위기)’는 ‘기회(기회)’가 됩니다.
골리앗을 만나기 전 다윗은
한 집안의 별 볼일 없는 막내이자, 양치는 목동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골리앗을 죽인 후,
다윗은 이스라엘의 군대 장관이 되었고(삼상18:5),
왕의 사위가 되었으며(삼상18:27),
훗날 이스라엘 왕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한 골리앗을 쓰러뜨림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민족을 구원하는 영웅이 되었습니다.

담대함으로 승리하는 삶을 사십시오!

오늘도 우리가 예배드리고 난 후 세상에 나가면
그 곳에도 하나님을 욕하며 조롱하고
하나님 믿는 사람들을 비웃는 골리앗 같은 것들이 여전히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됨을 잊게 만들고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는 사명을 잊어버리게 만드는 골리앗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두려움에서 이기고 담대하길 바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딤후1:7)

여러분, 두려워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아직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가 골리앗을/골리앗 같은 것을 두려워 할 이유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내 편 되시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게 두려움이 없나니 …”(시118:6)
무서워할 것 없습니다. 도망 칠 이유도 없습니다.
닥쳐오는 골리앗을 향해 담대하게 다윗처럼 믿음을 선포하십시오.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지만
나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간다”는 것이
여러분의 선언이 되시기 바랍니다.

골리앗에게 집중하면 사울과 이스라엘 군대처럼 두려워 떨지만 …
하나님을 바라보면/다윗 같은 믿음과 용기를 가진다면
그깟 골리앗 같은 것은 한 방으로 끝날 것입니다.

가정에도 골리앗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을 깨려는 엄청난 장벽이 있습니다.
부부사이에도 골리앗이 있습니다. 일터에도 골리앗이 있습니다.
넘기 어려운 태산 같은 것이 있습니다.
배움의 과정에도 절망하게 만드는 골리앗이 있습니다.
신앙생활하는 데도 골리앗처럼 다가서는 것이 있습니다.

두려워 떨게 하고, 도망치고 싶게 하고, 포기하고 싶게 하고
일어설 마음까지 눌러 버리고 희망까지 빼앗아가는 골리앗이
우리들 삶 주변에/곳곳에 있습니다.
매일 반복하여 사탄이 ‘넌 안돼. 넌 못해. 넌 작아. 넌 힘없어. 넌 못 이겨.
넌 끝났어. 넌 틀렸어 …’ 하며 끊임없이 우리 귀에 들려줍니다.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는 것/사람/일은 끊임없이 다가옵니다.

눈의 초점이 두려움을 주는 골리앗 같은 것에 있으면
우리는 벌벌 떨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눈의 초점이 하나님께 가 있으면 능히 이길 수 있습니다.


미국에 야구잡지에 소개된 이야기입니다.
미국에는 많은 프로 야구팀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많이 우승했고, 작년에도 우승했던 뉴욕 양키즈팀이 있습니다.
뉴욕 양키즈팀의 캣쳐로 [요기 베라]씨가 활약하고 있을 때
상대편 [가라기 올라]라는 선수가 뱃트를 들고 나오더니
몇 번의 연습 스윙을 하더니 땅에다가 십자가를 그리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것은 많은 미국 선수들이 하듯이 공을 잘 치도록 기원하는 행동입니다.
요기 베라는 심판에게 타임을 얻어‘가라기 올라’에게 항의하였습니다.
“나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고 자네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인데
하나님이 이런 형편에서 누구 편을 들 수 있겠는가?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이 경기를 구경만 하시도록 내버려 두세.”
그랬더니 가라기 올라 선수는 “우리 교회에서 들은 설교에 의하면
하나님은 구경만 하는 것을 제일 싫어하시는 분이라네.
하나님은 저 관람석에 앉아 있기를 싫어하시고
이 경기장 속에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일세.”라고 했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의 삶의 현장에서 땀 흘리고 애쓰는 모습을 하나님은 구경만 하시고
나만 열심히 최선을 다하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여러분의 삶의 현장에 간섭하시고 동행하시는 하나님으로 믿으십니까?

다윗처럼 “하나님이 내 편이라”고 할 만한가? … 자신을 점검해 보십시오.
- 여러분이 정말 하나님 사랑함을 하나님께 보였습니까?
- 마음으로 …, 말로 …, 행동으로
“하나님이 내 편이시다”라고 표현할 만큼 최선을 다했습니까?
예배드림에 얼마나 최선을 다했습니까?
찬양에 열정이 담겨 있습니까?
여러분이 드리는 예물이 정말 온전합니까?
하나님 마음에 드는 삶이십니까?
성경 말씀대로 살려고 애썼습니까?
- 혼자 있을 때, 집에서, 일터에서, 교회에서 …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십니까?

10대 아이들만 들을 수 있는 고주파의 소리가 있듯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도‘다윗과 골리앗 얘기’다 아는데 … 하며
익숙한 얘기를 듣는 것으로 끝납니까?

오늘도 말씀 중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귀가 열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합니다.
“하나님이 내 편이시라”고 선언할 만큼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신앙생활을 하는지 자기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자신의 믿음을 돌아보아
내가‘여호와는 내 편시이라’,‘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아간다’고 선언하며
멋진/위대한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신앙생활을 하는 승리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은혜와 사랑을 감사합니다.
이 거룩한 주일에 예배 하는 자리에 나왔습니다.
다윗과 골리앗 얘기를 듣고 가는 자가 아니라
우리 앞에 수시로 나타나는 골리앗 같은 엄청난 것들을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물리쳐 내는 믿음의 사람인지
자신을 점검해 보는 시간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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