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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 음성을 듣는 예배 (왕상19: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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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음성을 듣는 예배 (왕상19:1-14)

영국 런던 케이 미술관에 <프레드릭 왓츠>의 “희망”이란 그림이 있습니다.
그 그림을 보면
둥그런 지구 위에 어떤 약하게 보이는 한 여자가  앉아 있습니다.
그 얼굴 보면 눈에 수건을 싸매었습니다. 앞을 보지 못합니다.
그 여자의 손에는 조그마한 비파가 하나 있습니다.
그 비파의  줄은 본래 일곱 줄이었으나
        여섯 줄은 다 끊어지고 한 줄만 남았습니다.
캄캄해서 앞을 보지 못하고 여섯 줄은 끊어졌지만
이 여자는 한 줄을  가지고 비파를 계속해서 탑니다.
      그 줄은 희망의 줄이올시다.
그것은 우리  인간이 믿던 모든 줄이 끊어진다고 할지라도
소망의 줄만 끊어지지  아니하면
우리 인간은 계속해서  모든 것을 이기고 나갈 수 있다고 하는 뜻입니다.
마지막 까지 남아 있는 끊어지지 아니하는 희망의 줄이 어떤 줄입니까.
      바로 하나님께 둔 희망의 줄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선지자 엘리야에 관한 기사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엘리야는 약5:17절 말씀같이
[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오고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
하늘에 비를 내리게 하는 사람, 뿐만 아니라
18:30절 이하에서 갈멜 산상에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과의 생명의 대결에서 하늘에서 불의 응답을 받고     
바알 아세라 선지자 850명을 기손 시내에서 다 죽였던
        불의 종, 능력의 종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말씀의 엘리야는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아합 왕의 왕후의 칼이 무서워 광야로 도망하여
    로뎀 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간구하는 
너무나 나약한 엘리야의 모습과 위로 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도 약한 가운데서 하나님의 위로의 음성을 듣는 예배가 되시기 바랍니다.

먼저 본문말씀의 배경을 살펴보면

1. 본문말씀의 배경을 말해 보세요(1-4절, 참조/왕상18장)

왕상17장에서부터 나오는 엘리야는 하나님의 사람 선지자로 부름을 받고
당시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왕 아합에게 찾아가
[ 하나님 말씀이 없으면 수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 ] 하고는
엘리야 자신은
    그릿 시냇가에서 까마귀가 갖다 주는 떡과 고기를 먹고 지냅니다.
그리고 가난한 사르밧 과부의 집에 찾아가 떡 한 개를 얻어먹고는
사르밧 과부의 집에 비가 올 때가지
그 통의 가루와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는 기적을 나타내 보입니다.
그리고는 과부의 아들이 병들어 죽게 되는데
엘리야가 부르짖어 기도하니 아이가 살아나는 기적이 나타납니다.

18장에서는 갈멜산 산상에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과 
여호와가 참 신인가 바알이 참 신인가 생명의 대결을 벌려
여호와의 불의 응답으로 바알과 아세사 선지자 850명을
      기손 시냇가로 가서 다 죽였습니다.
이것 뿐 아니라
산꼭데기에 올라가 무릎사이로 얼굴을 넣고 간절히 기도하니
3년 6개월 매 마른 땅에 큰 비가 내리는 표적을 나타내 보입니다.

그런데 이런 기적과 능력의 종, 불의 종 엘리야가
오늘 본문말씀에서는 왕후 이세벨이 죽이려고 하니
    광야로 도망가 로뎀 나무 아래서 죽기를 간구하는
        나약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하면 약5:17절 말씀같이
    엘리야도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할 때는
하늘에 불도 내리고 비도 내리게 하는 능력의 사람이지만
한편으로서는
한없이 연약한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나약한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은혜 받아 주의 일을 할 때에
      물, 불을 가리지 않고 겁 없이 사역을 감당할 때도 있지만
그러나 한편으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될 정도로
  저 사람이 언제 그렇게 충성 봉사했나? 할 정도로 침체할 때도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럴수록 우리가 한가지만은 꼭 붙들고 있어야 합니다.
바로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 받는 일입니다.
특히 말씀을 통해서 힘을 얻는 일입니다.
어떤 직분자들은 가정에 불화가 있으면 교회 예배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럴수록 예배는 꼭 참석하여 말씀에 은혜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위로를 주시고 힘을 주실 줄 믿습니다.

낙심하고 있는 엘리야에게 하나님은 어떻게 찾아오십니까?

2. 낙심하고 있는 엘리야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어떻게 주어집니까?(5-8절)

하나님은 로뎀 나무 아래서 낙심하여 죽기를 간구하다가 잠들어 있는
      엘리야에게 천사를 보내어 어루만지며 이르되
      [ 일어나 먹으라 ] 하시며 떡과 물을 주었습니다.
문맥을 자세히 살펴보면 천사가 와서 탈진하여 잠들어 있는 엘리야에게
    떡과 물을 주니 대충 먹고 다시 누웠습니다.
그러니 먹는 것도 귀찮다는 것입니다.
    사는 것도 귀찮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여호와의 사자가 다시 와서 어루만지면 이르되
[ 일어나서 먹으라. 네가 갈 길을 다가지 못할까 하노라 ] 하니
엘리야가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가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특히 능력 있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낙심될 때 그것도 철저히 낙심될 때
    그 낙심된 삶에서 벗어나는 길이 무엇이겠습니까?

그 답은 예배를 통해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예배를 통한 은혜는 먼저 주의 위로로 나타납니다.
5절 말씀에 보니
로뎀 나무 아래 자는 엘리야에게 천사가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 먹으라 합니다.
여기에 천사에 대해 7절에 여호와의 천사라고 하는데
성경학자들은 바로 구약에 나타나신 예수님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주님의 어루만지심 즉 주의 위로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 주의 위로를 받는 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고후1:4절에                                   
[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 시로다 ]
네가 먼저 하나님께 위로 받아야
      다른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습니다.
특히 주의 말씀을 통해 위로를 받아야 합니다.
시119:50절 [ 이 말씀은 나의 고난 중에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기 때문이니이다. ]
본래 위로란 말은 옆에서 응원한다는 말입니다.           
국민학생 아들이 운동회 때 달리기를 하다가 넘어졌습니다.
아파서 울려고 하다가 눈을 들어 보니
    아버지가 영철아 일어나라 일어나 뛰어 하고 응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아들이 벌떡 일어나 달려갑니다. 이것이 위로입니다.
주의 위로가 있는 예배가 되시기 바랍니다.
행7:에 스데반 집사가 원수들이 던진 돌무더기 속에서도
    하나님 우편에 서서 응원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되려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는 용기를 얻듯이
오늘 우리도 주의 위로를 바라보기를 바랍니다.

여기서 천사가 준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원문에는 뜨거운 돌 위에 놓인 떡입니다. 왜 돌 위에 놓인 떡입니까?
고전10:3-4절에
[ 우리 조상들은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니라 ]
예수님이 주시는 신령한 양식을 말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주시는 말씀의 은혜를 받고 또 받아야 합니다.
      그럴 때 일어설 수 있는 용기를 얻을 줄 믿습니다.
      달려갈 수 있는 힘을 얻을 줄 믿습니다.
엘리야는 용기와 힘을 얻어 사십 주 사십 야를 행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광야를 통과해야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호렙 산에 이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고난의 광야를 통과할 수 있는 힘
    역시 예배를 통하여 얻는다는 것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엘리야가 낙심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3. 엘리야가 낙심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9-10절)

왜 엘리야가 이렇게 낙심을 합니까?         
엘리야가 호렙 산에 이르러 굴에 들어가 유할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임했습니다. 9-10절에
[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
이 말은 [ 무엇이 너를 여기 있게 하느냐? ] 는 뜻입니다.
그때 엘리야가 대답하기를
[ 내가 만군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히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고
칼로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 ] 
그러니 아합과 이세벨의 핍박으로
온 이스라엘이 배교를 하고 선지자들은 이세벨의 칼에 다 죽고
  자기 혼자만 남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로뎀 나무 아래서 죽기를 구하고 있습니다.

  로뎀 나무 아래에서 죽기를 구하는 엘리야의 모습,
1) 이런 현상을 현대 정신과 의사의 진단으로서는
  아드레날린 과다분비 우울증이라고 명명합니다.
사람이 어떤 일에 몰두하여 최선을 다하게 되면
우리 몸 속에서 아드레날린이 많이 소모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나면 온 몸과 마음이 쉽게 탈진되고 공허감을 느껴
    우울증에 빠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은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받아 물, 불 안 가리고 충성 봉사한 성도가
      그토록 충성했는데 삶에 어려움을 당하니, 혼자 버려진 것 같아
      어느 날부터 왠지 모르게 마치 우울증 환자처럼
          지쳐 낙심하여 신앙생활을 포기해 버릴까 할 정도로
            실의에 차있는 성도들을 봅니다.

엘리야가 육체적으로 엄청나게 무리를 했습니다.
그 갈멜산의 영적인 대결이라고 하는 것은 어마어마한 거예요.
일곱 번 무릎에 머리 대고 기도하는 일 보통 힘든일입니까?
그리고 먼길을 도망쳐 왔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 저 갈멜산에 가 보면 엘리야 기념 교회가 있는데,
그 기념 교회 앞에는 엘리야 동상이 이렇게 세워져 있습니다.
그런데 엘리야가 칼을 이렇게 들고 있는데요,
    그 칼 끝이 구부러져 있어요. 찌그러져 있어요.
왜 그러냐 하면 그만큼 열심히, 그만큼 뜨겁고 처절함
  싸움이 있었던 것을 표시하기 위하여 칼 끝을 휘어버려 놓았다고 합니다.
얼마나 엘리야의 마음과 몸에 힘이 들었다는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가 있지요.

그것 뿐만이 아니지요. 정신적인 고통도 굉장히 많았지요.
염려하고, 긴장하고, 또 홀로 있었어요.
고독이라고 하는 것이 엘리야를 짓눌렀어요.
적어도 최소한 3년 반 동안은
다른 사람과 별로 만나지를 않은 것 같이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홀로 고독한 처절한 싸움을
      오래오래 계속해 왔다는 것을 알 수가 있지요.
완전히 몸과 마음이 탈진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죽었으면 좋겠다... 생의 의욕을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지요.

그래서 엘리야가 로뎀나무 아래 누워 자는데
천사가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고 합니다.

자, 이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이 맨 먼저 해야 될 것이 무엇인가 하면,
육체의 힘이 소진되었을 때 우울증이 올 수 있다는 것을 꼭 기억하라,
그런 얘기입니다.
미국의 많은 병원들은 우울증 때문에 자살하는 사람들, 자살에 실패한 사람들이
응급실로 불려오면 맨 먼저 취하는 조치가 무엇인가?
스테이크 고기를 먹인답니다.
왜 고기를 먹여야 되는가 하면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을 조사해 보았더니
전부 다 단백질 결핍증에 해당되어 있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정신적으로 특히 영적인 부분에서 신경을 많이 쓸 경우에는
    온 몸의 영양가 중에서
    특별히 단백질의 소모량이 급격하게 늘어나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은 하나같이 단백질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거예요.
그래서 스테이크 고기를 먹이는 것이 최고다 그래요.
또 여러분 우리가 외식을 하러 갈 때 `고기나 한 번 먹으러 갈까?` 그러지요?
그것이 정확한 거예요.
그것이 슬럼프에 빠졌을 때에는
반드시 우리 몸에 단백질이 결핍되어 있는 상태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잘 먹일 필요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입 맛 없을 때 그러잖아요. `나가서 고기나 한 번 먹을까?` 
아니면 뭐 `새콤하고 달콤한 거 좀 먹었으면 좋겠다.`
이것이 다 몸이 요구하는 현상이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어요.
하나님도 먹이셨어요. 그러니까 먹어야 하고 또 잠도 자야 하는 거예요.

2) 성경학자들은 신앙적 진단으로서
  엘리야가 하나님만을 의지할 때는 능력의 종이었지마는 
  하나님보다 환경을 의식하다 보니 낙심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스펄젼 목사의 설교에 스펄젼 목사가 한 농부와 대화 도중에     
소 한 마리가 먼 곳을 보기 위해 돌담 위로 머리를 내밀고 있었습니다.
[ 왜 저 소가 돌담 너머로 머리를 들고 있습니까? ] 물으니
[ 그거야 소가 돌담이 가리워 볼 수 없으니 머리를 든거지요 ] 하더랍니다.
사노라면 우리 앞에 좌절과 실망이 다가올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소가 보여준 방법대로 돌담을 넘어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돌담에 가리워 주저 않는 자들이 아닙니다.
돌담 넘어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말씀이 귀에 듣기워지면
      절대로 낙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바라보던 시선이 세상을 바라보고 환경을 바라볼 때
    낙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엘리야는 사십 주 사십 야를 가서 호렙산 굴속에 당도했습니다.
호렙산 굴속에 머물고 있는 엘리야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합니다.


4. 여호와 하나님께서 호렙산 굴속에 있는 엘리야에게 뭐라고 말씀하시며
      이 사실이 우리에게 주는 영적의미는 무엇입니까?(11-12절)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11절에
[ 너는 나가서 여호와의 앞에서 산에 섰라 ] 고 합니다.
이것은 엘리야에게 힘과 용기를 주신 하나님께서
    직접 함께하심을 보여 주겠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이 함께하는 예배를 체험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무엇으로 하나님이 함께 하는 예배를 드린다고 확신할 수 있습니까?
여호와께서 엘리야에게 산 위에 서라고 하시고는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는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시며
바람 후에 지진이 일어나는데 지진 가운데서도 계시지 아니하시며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서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시며
불후에 세미한 음성이 들려오면서
      세미한 음성 가운데 하나님이 나타나신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바람 지진 불은 구약에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입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는 하나님의 음성 즉
    하나님의 분명한 계시가 나타나지 아니했다는 말씀입니다.
그 뒤에 들려온 세미한 음성은 바로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말합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
뜨거운 찬송과 간절한 기도와 열정적인 감격의 예배는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증거입니다. 믿습니까?
그러나 뜨거움과 감격의 예배 만으로서는 온전한 예배가 될 수 없습니다.
그 뜨거움 속에 그 감격 속에 들려오는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을 때
  진정한 예배라 할 수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간절한 마음이 있어, 예배를 통해 뜨거움을 느낍니까? 감격을 맛봅니까?
좋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나는 예배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전하시고자 하는 세미한 음성을 듣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은
      바로 영적 깨달음이 있고 변화의 삶이 나타날 줄 믿습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서 지금 내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는 예배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럼 우리가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합니까?


5.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13절)

13절에 보니 엘리야가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우고 나가 굴 어귀에 서매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이 들려 왔다고 합니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원한다면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우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사6장에 여섯 날개 달린 천사가 창화 하며 가로되
[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 할 때
그 두 날개로 얼굴을 가리웠듯이
하나님의 거룩함에 대한 인정을 나타내는 행동입니다.
인간의 죄성이 도저히 거룩하신 하나님을 바로 대할 수 없음을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바로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인인 것을 깨달을 때입니다.
    자신의 무능함과 연약함을 알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고 애통한 자가 되며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계1장에 보면 밧모 섬에 유배된 사도 요한에게 나타나신 주님
1:17절에 [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같이 되매
      그가 오른 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라 ] 할렐루야
주의 위로를 받기를 원하십니까?
    주님 앞에 죽은 자같이 엎드리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나를 어루만져 주실 줄 믿습니다. 
엘리야를 어루만져 주시고, 사도 요한을 어루만져 주시는 위로의 주님이

그럼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이 구체적으로 엘리야에게 어떻게 들려 왔습니까?
엘리야는 여전히 10절 말씀같이 14절에서 도
낙심하여 자신의 처지를 늘어놓으며
하나님도 내 형편 되어 보이소 - 살 생각이 조금이라도 나는가?
그러나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새로운 사명과 위로의 음성을 들려줍니다.

가만히 보면 사람들은 거부 속에 살아갑니다. 
가뭄이나 홍수 같은 천재 지변같은 거부도 있고
파면 사업실패 불합격 같은 삶 가운데 거부도 있고
결혼파탄 가정불화 배신과 같은 인간관계에서 거부를 체험하며 살아갑니다.
이런 거부를 직면할 때
어떤 이는 원망과 한숨 속에 주저앉아 낙심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이는 거부 속에 세미한 음성을 듣고 다시 일어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제너럴 모터사의 <잭 웰치> 회장의 자서선에서
그는 두렵고 어려울 때면 어머니가 주신 교훈을 늘 생각했다고 말합니다.
웰치가 고등학교 하키 선수 시절에 패배를 견디지 못해
    스틱을 집어 던지고 라커 룸으로 들어 왔을 때
그의 어머니가 화난 표정으로 달려와 멱살을 잡고 이렇게 꾸짖습니다.
[ 패배를 받아들이지 못하면 멋진 승리도 얻을 수 없다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면 너는 더 이상 경기할 자격이 없다 ]
이 후 웰치는 패배를 인정하는 용기를 갖게 되고
    이것이 인생의 성공으로 나를 이끌어 주었다고 합니다.
실패하고 패배했습니까? 낙심하고 있습니까?
물론 전문가의 도움을 받을 수 있고
    아니면 상담을 통해서도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만
성도는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을 때 패배에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이 세미한 음성 어디서들을 수 있습니까?
바로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들을 수 있습니다.
    예배를 통해 설교가 내게 들려주는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이 되어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엘리야에게 들려주신 세미한 음성             
즉 새로운 사명이란 1) 15-16절에서
다메섹에 가서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 왕이 되게 하고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하고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선지자가 되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바로 낙심하고 있는 엘리야에게 희망의 메시지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엘리야가 낙심하여 불평하는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군주 아합 왕 하나도 어떠할 수 없는 하나님인 줄 알았는데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 왕이 되게 하라는 것은
      당시 세계의 강대국 아람 나라까지도 통치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하라는 것은
      지금 너를 죽이려고 하는 아합 왕은 이제 끝이 났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선지자가 되게 하라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를 대를 이어 계속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세미한 음성을 통해                   
      엘리야에게 새로운 사명을 들려주었습니다.
예배는 이렇게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고
  새롭게 일어서는 사명자로 변화 받는 예배가 진정한 예배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진정과 신령으로 드리는 예배인가
    시험해 보는 것 중 한가지는
우리가 모일 때보다 흩어질 때 우리가 더 많이 변화되었는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2) 18절 엘리사가 낙심한 이유는 아합 왕의 핍박으로
이스라엘 자손은 다 주의 언약을 버리고 배교하였으며
선지자들은 다 아합의 칼에 죽었는 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7000명을 남겨 두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나 혼자 고통당하도록 버려두고
      고독하게 살아가도록 무관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우리는 이 땅에 그냥 던져진 존재가 아닙니다.
다 목적이 있어 이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사명자요 심부름꾼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고
    사명을 감당하는 참 심부름꾼이 되어야 합니다.
참 심부름꾼은 거드름을 피우지 않습니다. 뒤로 미루지도 않습니다.
          즉각 달려가 주인의 뜻을 받은 그대로 전해 주는 자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세미한 음성을 듣고 사명을 낳는 예배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사명, 사명 하니깐 너무 거창하게 듣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독교 교육으로 유명한 <헨드릭스> 박사에게
기자가 이렇게 질문을 했습니다,
[ 박사님의 교육 50년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 하니
[ 저는 바른 삶을 살고자 노력한 평범한 한 인간입니다.
  단지 저에게서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제가 떠난 후에도
  그리스도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랄뿐입니다. ]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고
        새로운 사명을 받았다면
나로 말미암아 영향력을 받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내일교우들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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