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하나님과 동행하는 성도가 받는 은혜 (시 23:1-6)

  • 잡초 잡초
  • 238
  • 0

첨부 1


하나님과 동행하는 성도가 받는 은혜 (시 23:1-6)

시편 23편은 이스라엘의 성군이었던 다윗의 신앙고백입니다. 듣기 좋게 시구를 꾸민 것이 아니고 그의 실제 경험에 근거해서 하나님께 대한 변함없는 기대를 토로한 것입니다. 여기서 다윗은 하나님을 목자라 하고 자기를 그의 기르시는 양이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사울 왕의 신하가 되기 전에 목자였습니다. 그것도 어려서부터 장성할 때까지 십 수 년을 양치기로 지냈습니다. 더구나 그는 선한 목자였습니다. 사자나 곰이 와서 양떼에서 새끼를 움켜서 달아나면 다윗이 따라가서 목숨을 걸고 싸워서 새끼를 건져냈습니다(삼상 17:35).

이 같은 경험은 다윗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한없이 신뢰하게 만들어 주었음이 분명합니다. 그가 아버지의 양들을 맡아서 치는 일개 목동으로서 그처럼 목숨을 걸고 양들을 보살폈다면, 전능하시고 성실과 인자가 한량없으신 하나님께서 그를 경외하는 자들의 삶을 책임져 주시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저는 시편 23편을 통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성도가 받는 은혜’가 무엇인지 말씀해 드리려고 합니다.

첫 번째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성도는 모든 것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양으로서 자기의 행복함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선한 목자는 좋은 초장이 어디에 있는지 잘 알고 있으므로 양들을 부드럽고 맛난 풀이 자라는 드넓은 풀밭으로 인도해서 마음껏 뜯어먹게 합니다. 양들은 배불리 풀을 뜯고 풀밭에 누워 되새김질을 하면서 휴식을 취합니다. 때가 되면 목자가 양들을 시냇가로 인도해서 맑고 시원한 물을 마음껏 마시게 합니다. 이처럼 목자가 인도하는 대로 따라가기만 하면 모든 것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다윗은 시편 34편에서 “9)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10)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찌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의 영혼과 육신의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십니다. 이렇게 말하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내가 내 능력으로 일해서 수입을 얻어 살아가는데” 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의 능력조차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씀합니다. 신명기 8장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17)또 두렵건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 18)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

목자가 양들을 푸른 풀밭으로 인도하듯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살아가기에 합당한 환경과 여건을 조성해 주시며, 생활에 필요한 재물을 얻기 위한 지혜와 재능을 주셔서 감당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수고해서 재물을 얻을지라도 실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자기를 내세운다면 “…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뇨”(고전 4:7) 라는 책망을 받게 될 것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자손을 보세요. 장정만 60만이 되는 큰 민족이 돌과 모래로 이루어진 황량한 광야에서 한 두 달도 아니고 무려 40년 동안 지냈습니다. 농사를 지을 수도 없고, 무역도 할 수 없고, 도대체 그 많은 군중을 먹일 양식을 구할 수 있는 곳은 아무데도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40년 광야생활을 하는 동안 단 한 사람도 굶어 죽은 적이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40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아침마다 만나를 내려주셨기 때문입니다. 만나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삶을 책임져 주신다는 증표와도 같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성도들의 삶을 책임져 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31)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고 하셨습니다.

그런가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육신의 양식 뿐 아니라 영혼의 양식도 공급해 주십니다. 영혼은 육신과 달리 이 땅에서 나는 양식을 먹는 것이 아니라 신령한 양식을 먹습니다. 곧 영감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영혼의 양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적 생명을 왕성하게 하기 위해서 매일 일용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먹어야 합니다. 성경 말씀을 읽고 묵상하십시오. 그리고 교회에 나오셔서 설교를 들으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은혜를 받아 우리의 영적 생명이 자라게 됩니다.

그리고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요 6:55) 하신 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곧 우리 영의 양식이 되십니다.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의 살을 먹고 그 피를 마실 수 있습니까? 이 말씀은, 곧 예수님을 믿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곧 그 분의 살을 먹고 그 피를 마시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영적 생명을 얻게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 육 간에 필요한 양식을 공급해 주시며, 우리의 삶을 책임져 주시기 때문에 늘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성도는 심령에 만족과 평안을 누립니다.

요즘 사람들을 보면 과거 우리 부모 세대에 비해서 분명히 잘 사는데도 불구하고 그 마음에 만족이 없습니다. 점점 더 부자가 되어 갈수록 욕구 불만이 더 커져갑니다. 이처럼 만족할 줄을 모르는 것은 병중에서도 큰 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솔로몬은 말씀하기를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함이 없고 풍부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함이 없나니 이것도 헛되도다”(전 5:10)고 했습니다. 아무리 가진 것이 많아도 만족할 줄 모른다면 그 사람은 거지와 같습니다. 반면에, 가진 것이 적어도 만족하는 사람은 진정한 부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이는 그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만족한다는 뜻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어디로 인도하시든지 따라갈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푸른 풀밭,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든지, 혹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인도하시든지, 기꺼이 따랐습니다. 그 이유에 대하여 3절에 보니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믿고 따르는 자들을 항상 의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그러기에 하박국 선지자는 말씀하기를 “17)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찌라도 18)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합 3:)고 했습니다.

진정한 만족이란 소유의 많음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으므로 아무리 가져도 만족을 누리지 못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것은 사람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재물로써 참 만족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만족은 우리가 하나님의 품안에 있을 때 비로소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다윗이 얼마나 하나님과 친밀한 사귐을 가졌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시 18:1)라고 사랑을 고백했는가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사랑했던지 “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시 19:10)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그의 생애에서 가장 힘들고 어려웠던 시기에 가장 하나님과 가까이 동행하면서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요즘은 경제만능 시대가 되어서 그런지 기독교인들이 재물의 영향을 너무 많이 받는 나머지 경제 사정이 어려우면 믿음도 약해집니다. 우리는 그래서는 안 됩니다. 다윗은 왕이 되어 화려한 궁정에서 지낼 때만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만족한 것이 아닙니다. 사울 왕의 칼을 피해 숨어 다니던 위급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만족을 누렸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하나님 안에서 진정한 평안을 누렸습니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풀을 실컷 뜯어 먹은 후에 초장에 누워 쉬는 양들을 그려보십시오. 얼마나 평화로운 풍경입니까! 목자가 곁에서 지켜주므로 맹수나 도적을 두려워할 것도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양들의 안위는 전적으로 목자에게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목자를 만나느냐에 따라서 양의 운명이 좌우됩니다.

목자라고 다 선한 목자가 아니며 개중에는 삯군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선한 목자와 삯군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1)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12)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13)달아나는 것은 저가 삯군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나 14)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 10:)

세상 종교는 삯군으로서 우리의 영혼을 도적과 강도인 마귀의 손에서 지켜주지 못합니다. 이단들도 삯군으로서 양들의 생명을 마귀의 손에 넘기는 자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 영혼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는 선한 목자이십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참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경외하는 하나님은 평강의 하나님이십니다(살전 5:23). 그러므로 항상 선한 목자이신 하나님과 동행함으로써 영혼의 참 만족과 평안을 누리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성도는 영혼이 소생하는 은혜를 누립니다.

3절과 4절에 보니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성도들도 시험에 들어서 영적으로 큰 손실을 입을 때가 있습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시 42:5)라고 탄식할 때가 있습니다. 욥과 같은 신앙인도 고난이 중첩되고 희망이 보이지 않자 낙심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낙심 중에도 다시금 소망을 붙잡습니다. 그리하여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욥 23:10)고 한 욥과 같이, 하나님을 더욱 의지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하나님의 자녀들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 때가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는 얼마나 대조적입니까? 전자는 생명과 평안을, 후자는 사망과 고난을 의미합니다. 성도들의 삶에도 고난이 있습니다. 다윗은 여러 해 동안 물도 없고 나무 그늘도 없는 황량한 광야에 숨어서 불안한 나날을 보낸 적이 있었고, 아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켜서 도망 다닌 적도 있었습니다.

성도들도 질병에 걸려 고생할 때가 있습니다. 시편 여러 곳에서 다윗은 질병에 걸려 고생한 일을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쇠약한 병상에서 저를 붙드시고 저의 병중 그 자리를 다 고쳐 펴시나이다”(시 41:3) 라고 했는데, 이는 그가 육체의 질병으로 고생한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9)여호와여 내 고통을 인하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가 근심으로 눈과 혼과 몸이 쇠하였나이다 10)내 생명은 슬픔으로 보내며 나의 해는 탄식으로 보냄이여 내 기력이 나의 죄악으로 약하며 나의 뼈가 쇠하도소이다”(시 31:)라고 했는데, 이는 그의 심신이 심각한 고통을 겪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윗의 영혼을 소생시키셨으므로 육체의 질병과 마음의 근심과 슬픔이 그를 파멸시키지 못했습니다. 시편 30편에서 다윗은 소생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이렇게 간증합니다.

“2)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매 나를 고치셨나이다 3)여호와여 주께서 내 영혼을 음부에서 끌어내어 나를 살리사 무덤으로 내려가지 않게 하셨나이다 4)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 거룩한 이름에 감사할찌어다 5)그 노염은 잠간이요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찌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다윗도 사람인지라 시험에 들기도 하고 정욕에 눈이 어두워 범죄한 적도 있었으며, 그로 인해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심신이 곤비하게 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목자를 떠난 양이 죽음의 골짜기에 갇힌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윗을 버리지 않으시고 사랑의 매를 쳐서 깨닫게 하셨으므로 다윗은 죄를 회개하고 다시금 하나님의 긍휼을 회복하였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다윗과 같이 범죄하여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고통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한 때 우리는 사유하심이 하나님께 있음을 알고 지체 말고 회개함으로써 소성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질병이나 시련은 다 범죄와 관련이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범죄와 상관없이 질병에 걸릴 수도 있고 여러 가지 어려운 시련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다윗이 사울 왕에게 쫓겨 다닌 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연단하기 위해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 시기는 다윗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선한 목자이신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그의 생애에서 가장 은혜로운 나날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성도들도 물질적인 어려움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다윗은 사울 왕을 피해 다닐 때 양식이 떨어져서 며칠 동안 굶은 적도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놉 땅에 거하는 제사장 아히멜렉을 찾아 가서 떡을 얻어먹은 적이 있었습니다(삼상 21:). 그리고 갈멜에 사는 나발이라는 부자에게 양식을 얻으러 부하들을 보냈다가 거절당한 적도 있습니다(삼상 25:). 얼마나 형편이 딱했으면 그같이 했을까요? 그러나 다윗은 그 어려운 시기에도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므로 멸망하지 않고 생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님들, 어려운 때일수록 더욱 하나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잠언 24장 16절에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 하였고, 시편 84편에 보니 “저희는 눈물 골짜기로 통행할 때에 그곳으로 많은 샘의 곳이 되게 하며 이른 비도 은택을 입히나이다”(6)라고 했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성도가 받아 누리는 합력성선의 은혜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네 번째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성도는 대적들에게서 보호하심을 받습니다.

다윗의 생애를 살펴보면,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보호하심 가운데 살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일개 목동에 불과했던 그가 일약 국가적인 영웅이 된 것은 성도님들께서도 잘 아시는 대로 그가 골리앗을 죽인 사건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 군대와 블레셋 군대가 대치하고 있는데, 적진에서 키가 3미터나 되는 골리앗이 나와서 이스라엘 군대를 모독하는 말을  퍼부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군인들은 겁에 질려서 숨기에 바빴습니다.

이 광경을 본 다윗이 골리앗을 대적하러 나가기를 자청했습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기를 “그를 인하여 사람이 낙담하지 말 것이라 주의 종이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우리이다”고 했습니다. 사울이 보니 아직 홍안의 소년입니다. 용기는 가상하지만 만류했습니다. “네가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우기에 능치 못하리니 너는 소년이요 그는 어려서부터 용사임이니라”

그러나 다윗은 물러서지 않고 사울 왕에게 고하기를 “주의 종이 아비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떼에서 새끼를 움키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 죽였었나이다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 …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삼상 17:)고 했습니다.

다윗이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골리앗과 싸우러 나간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믿고 골리앗과 싸우기를 자청한 것일까요?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 이 말과 같이, 그가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믿었기에 그처럼 담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죽인 것은 그의 실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에게 승리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골리앗을 죽인 일로 영웅이 되어 가는 곳마다 백성들의 칭송을 받게 되었는데, 사울 왕이 가만히 생각해 보니 다윗을 살려두어서는 자기의 왕좌가 위태롭게 될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러므로 사울 왕은 다윗을 죽일 기회를 엿보았습니다. 그를 위해 수금을 연주하는 다윗을 향하여 단창을 던져 죽이려 하였는가 하면, 밤에 다윗의 집에 군사들을 보내어 죽이려고 한 적도 있었습니다.

다윗이 광야로 도망하자, 정예 군사 3천명을 거느리고 다윗을 찾으러 광야를 샅샅이 수색했습니다(삼상 24:).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윗을 지켜주시니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일 수 없었습니다. 도리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사울이 그의 세 아들과 함께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이로 인해 사울을 대신하여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하나님께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다윗을 지켜주셨을 뿐 아니라, 원수들의 보는 앞에서 잔칫상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또한 그의 머리에 기름을 부어 선민의 왕으로 삼아주셨으며, 잔이 넘치게 곧 기쁨이 넘치는 삶을 누리게 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한 세상 사노라면 친구들도 만나지만 적들도 만나게 됩니다. 특히, 현대는 치열한 경쟁사회입니다. 양심을 어기고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자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 사회는 그리스도인들이 바르게 살아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뿐 아니라, 성도들은 신앙 때문에 핍박을 받기도 합니다. 자, 우리를 적대하는 자들을 어떻게 대하면 좋을까요?

다윗처럼 하나님의 처분에 맡겨야 합니다. “19)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20)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21)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 12:) 우리는 선한 목자이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서 대적들에게서 우리를 지켜주심을 믿고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적대하는 자들 앞에서 우리에게 승리를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다섯 번째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성도는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 살게 됩니다.

6절에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고 했습니다. 이 구절은 영원히 변함없으신 하나님을 우리에게 증거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거역하고 배반하여 떠나지 않는 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평생에 걸쳐서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베풀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아삽이라는 성도는 큰 환난을 당해서 불안한 심정을 이렇게 토로했습니다. “7)주께서 영원히 버리실까, 다시는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실까, 8)그 인자하심이 길이 다하였는가, 그 허락을 영구히 폐하셨는가, 9)하나님이 은혜 베푸심을 잊으셨는가, 노하심으로 그 긍휼을 막으셨는가 하였나이다”(시 77:)

아삽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고 불안에 떨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무지함에서 비롯된 생각일 뿐, 우리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우리를 버리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찌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사 49:15)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기분이나 느낌에 좌우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토대를 두어야 합니다. 성경이 증언하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자기 백성을 대적들의 손에 빼앗기지 않으시고 끝까지 지켜주시며, 우리의 평생에 걸쳐서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변함없이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27)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28)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29)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요 10:)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은총은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다윗은 궁극적인 축복에 대하여 말하기를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고 했습니다. 요 몇 년 간 우리나라는 온통 부동산 문제로 홍역을 치르고 있습니다. 이 문제가 대통령이 나서서 진두지휘해야 할 정도로 심각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답은 간단합니다. 집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집이 투기의 대상이 되니까 꼭 필요한 사람들이 집을 가질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잠시 살다갈 집을 얻기도 쉽지 않습니다.

하물며 영원한 내세에서 거주할 집이 없다면 얼마나 비극적인 일일까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이 세상을 하직할 때 갈 곳이 없이 비바람 치는 밤중에 한 데로 내쫓기는 것과 같습니다. 이 땅에 아무리 좋은 저택을 가진들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동행하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집에 영원히 거할 수 있는 약속을 받았으니 얼마나 마음 든든한 일입니까!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만찬을 나누는 자리에서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이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1)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2)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3)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해 예비하신 영원한 천국 집을 바라보면서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아무쪼록 다윗과 같이 하나님의 기르시는 양으로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십시오. 그리하여 시편 23편에 수록된 다윗의 은혜로운 간증이 하나도 빠짐없이 성도님들의 삶 속에 그대로 성취되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