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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족함을 채우는 비결 (욥 22:17~18, 빌 2:2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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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함을 채우는 비결 (욥 22:17~18, 빌 2:29~30)

작년 어느 신문에 “세계 각국은 ‘행복전쟁’ 경쟁이 한참이다”라는 기사가 실린 적이 있었습니다. 세계 각국의 정부는 행복지수 개발과 정책 적용에 열을 올리고 있다는 보도입니다. 경제학계에서는 ‘행복경제학’이 가장 뜨거운 논쟁의 영역이 되었습니다. 영국 보수당의 지도자인 데이비드 캐머런은 연설을 통해 “사람들의 지갑에 돈을 채워 넣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마음속에 기쁨을 불어넣는 일에 몰두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새로운 사회발전의 척도로 ‘총웰빙지수’를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행복감 측정 국민총행복(Gross National Happiness)지수를 고안하기 시작했습니다. 각국에서는 국민총생산(GNP) 대신 국민총행복(GNH)을 국정 지표로 삼고 있습니다. 돈이 많고 사회보장제도가 잘 되어 있다고 해서 반드시 행복지수가 높은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에 무엇을 채우는가 하는 것은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문제입니다. 무엇을 채우는가는 자신의 인격입니다. 인류의 가치 척도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부족을 알고 채우는 것은 온전함으로 나아가는 첩경입니다. 그런데 채우기만 하면 넘칩니다. 때로는 넘치면 모자라는 것만도 못할 수도 있습니다. 부족한 만큼만 채워야 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빈 공간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스피노자는 이것을 ‘공간공포’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빈곳만 있으면 채우고 싶어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채우는 데는 인색합니다. T. S. 엘리엇은 우리는 꽉 찬 사람, 우리는 텅 빈 사람(“We are stuffed men, we are hollow men”)이라고 하였습니다. 찼다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비어 있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없다고 할 때 많은 것이 있습니다. 모른다고 할 때 많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죄인이라고 할 때 의인의 경지에 들어갑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6:8하 ~ 10에서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자로다”라고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부족함을 채운 사람의 자신감, 당당함, 긍정적 자세를 엿볼 수 있습니다.

  루터는 “갇힌 자만이 자유롭게 될 것이다. 가난한 자만이 부자가 될 것이다. 약한 자만이 강하게 될 것이다. 겸손한 자만이 높임을 받을 것이다. 빈손만이 채움을 받을 것이다. 아무 것도 아닌 것만이 무언가가 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채우는 비결을 아는 사람의 한결같은 소리입니다. 자신의 부족을 압시다. 자신의 부족을 고백합시다. 자신의 부족을 채웁시다. 그리고 당당한 자신감이 넘치는 삶을 사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하나님은 부족함을 좋은 것으로 채우십니다.

  욥기 22:18에는 “하나님이 좋은 것으로 그 집을 채우셨느니라. 악인의 계획은 나와 판이하니라”고 합니다. 채우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채울 때 좋은 것으로 채우십니다. 나쁜 것은 채울수록 손해인 것을 잘 압니다. 하나님께서 부족함 채우실 수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부족함 없으시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좋은 것으로 채우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니까 좋은 것으로 채우실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필요를 채우시고, 부족을 채우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수없이 많이 나타나 있습니다. 몇 가지만 보세요. 아브라함은 그의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드리라는 명령을 받들고 모리아로 갑니다. 모리아는 아브라함에게 막다른 골목이었습니다. 산 위에 올라가서 제단을 쌓고 아들을 묶어 제단에 올리고 칼을 들어 치려고 할 때에 하나님은 급히 아브라함의 손을 잡으십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수양이 나무에 뿔이 걸려 있는 것을 보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채우시는 모습니다. 아브라함 종 엘리에셀은 이삭의 아내가 될 사람을 구하러 갑니다. 그는 아브라함의 말대로 가서 우물가에서 기도합니다. 자신에게 물을 달라고 할 때에 낙타에게 물을 먹이는 자가 자신이 찾는 사람이 되게 해달라는 기도였습니다. 그의 기도가 끝나자 리브가를 만났고 리브가는 물을 좀 달라고 하는 엘리에셀에게 뿐만 아니라 낙타에게도 물을 먹입니다. 하나님이 채우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40년은 60만 모두에게 부족함이 없게 만나로 채우신 은총의 기간이었습니다. 엘리사는 자신의 제자의 가족인 사르밧 과부의 딱한 사정을 듣습니다. 그 집에 남아 있는 것은 기름 한 그릇밖에 없었습니다. 동네에 가서 그릇을 다 빌려오게 하여 그 기름으로 모든 그릇을 다 채우게 합니다. 하나님의 기적적인 채움입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 기적은 가나 혼인잔치에서 포도주를 만드신 일입니다. 포도주가 모자란 혼인잔치에서 예수님은 여섯 항아리에 물을 채우게 하신 다음 포도주가 되게 하십니다. 맛을 본 사람들은 가장 맛있는 포도주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최상의 포도주로 채우셨습니다. 예수님의 산상보훈에는 공중에 나는 새와 들의 백합화까지 다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의 필요를 채우시고 충족케 하시는 창조주이십니다.

  조이스 마이어는 “은혜란 우리의 필요를 값없이 채우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뜻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충만하신 분입니다. ‘충만’이란 헬라어는 ‘플레레스’입니다. 이 단어는 신적 용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충만은 하나님만이 가지신 성품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절대 충만하지 못합니다. 요즘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것을 가지고 삽니까? 50년 전과 비교해보면 그 때보다 20배 이상 필수품과 많은 것을 가지고 삽니다. 그러나 필요한 것을 더 많이 느낍니다. 얼마 전 미국에서 어느 목사님이 오시면서 좋은 선물을 주셨습니다. 청소하는 로봇입니다. 이 로봇이 얼마나 똘똘한가 하면 혼자서 한 시간 내내 집 구석구석을 다니면서 먼지를 다 빨아들입니다. 한쪽에서 막히면 혼자서 돌아서 다른 데로 가고, 침대 밑에도 들어가고, 다른 방으로 건너가기도 합니다. 모든 청소가 끝나면 자기 자리로 와서 멈춥니다. 그런데 이걸 갖다 놓으니 욕심이 생깁디다. 물걸레질 하는 로봇도 있었으면 하는 욕심입니다. 인간은 가질수록 부족을 더 많이 느낍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4:6 ~ 7에서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지각에 뛰어나십니다. 모든 것을 미리 아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모든 것을 채우실 준비가 되어 있으신 분이십니다.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주 나를 박대하시면 나 어디 가리까”라는 찬송이 있습니다. 우리가 손들고 항복해야 채우십니다. 우리가 아무 것도 없이 빈 손이 될 때에 하나님은 비로소 채우시기 시작합니다. 베드로는 밤새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한 날 아침, 빈 그물을 주님은 채우셨습니다. 꽉 채워진 날은 주님을 만나지 못할 것입니다.

  두레박을 우물에 내리면 그 것은 비워져 있는 만큼만 물을 채웁니다. 두레박 안에 돌이 있으면 그만큼 물을 채울 수 없습니다. 우물 아래로 빈 두레박을 내리면 물은 가득 담기게 될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비어 있을 때 가장 많이 찹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가 비어 있을 때에 가장 많이 채우십니다.

  세상을 다 준다고 해도 만족이 있습니까? 세상을 다 줘도 만족이 안 되는 것은 내가 세상 보다 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만족할 수 있는 것은 세상 보다 큰 이가 와야 만족할 수 있습니다. 세상 보다 큰 이가 누구입니까? 세상보다 크신 이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세상의 것으로 채워서 만족이 안 되면 비우면 됩니다. 비우면 채워지고, 우리가 비우는 순간 하나님은 채우십니다.

  야고보서 1:5에는 말씀합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부족한 지혜를 구하면 모든 부족을 다 채우십니다. 솔로몬을 보세요. 하나님께 지혜를 구했을 때에 하나님은 그에게 필요한 부귀와 장수와 모든 것을 채워주셨습니다.

  이제 결론적으로 다윗이 말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굉장한 고백이지요? 이 말씀은 우리 삶의 시작이며 동시에 결론입니다. 여호와가 목자이시면 내가 부족함이 없습니다. 우리의 부족함을 채우는 비결은 여호와 하나님 때문입니다.

둘째, 우리는 서로 부족함을 채워야 합니다.

  빌립보서 2:30에 말씀합니다. “저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공동체 안에서 비로소 가능합니다. 공동체는 서로를 돌아보아 채워주는 곳입니다. 개인 없는 공동체가 불완전하듯 공동체 없는 개인이 불완전합니다.

  우리는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다 부족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진리를 안다는 것은 곧 진리가 자신을 아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진리를 알 때에 우리가 갈망하는 내면적 본질을 채워가는 과정에 몰입하게 됩니다. 진리를 아는 사람은 자신의 부족을 채우려는 갈망을 가집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말 채워야 할 것에 대하여 등한히 하고, 필요 없는 것들로 채우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부족함이 있고, 이것을 인정할 때에 비로소 향상이 있습니다. 골프의 황제 타이거 우즈도 코치가 있습니다. 세계 일인자라고 하지만 부족한 점은 있습니다. 테니스의 황제 로저 페더러도 지난 호주 오픈에서는 노박 조코비치에게 졌습니다. 누구나 부족은 있고 천적은 있게 마련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남을 통해 나를 채워나갈 때가 많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나 자신을 보는 거울일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이 만나 결혼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결혼의 목표는 우리 자신의 필요를 공급받는 것이 아니라 배우자의 필요를 채우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4에서 바울은 대단한 말씀을 합니다.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사람은 자기 일만 하게 만들어져 있지는 않습니다. 사람은 남의 일만 해서도 안 됩니다. 자기 일만 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이기적인 사람입니다. 남의 일만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허영심이 가득한 사람입니다. 자기 일과 남의 일을 골고루 채워야 합니다. 서로의 필요를 채워줘야 합니다. 서로의 부족을 채워줘야 합니다.

  사람은 원래 하나님이 만드실 때 남의 부족과 필요를 채워주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과학자 폴 맥린은 고도로 발달한 인간의 대뇌 피질은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워 주는데 요구되는 통찰력이 생기게 하며 또한 모든 살아 있는 것들에 대한 관심을 갖게 해준다고 말했습니다. 다른 사람을 채워주는 것은 인간의 본능입니다.

  그런데 죄인 된 인간의 모습은 채우지 않고 자신만 채우려고 합니다. 계몽주의는 인류의 발전에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반면에 지식과 과학과 이성의 발달은 인간 본래의 모습을 상실하고 채우지 않고 빼앗고 살아가는 반인륜적, 비인간적 모습으로 변질되고 말았습니다. 사람은 서로 채워줄 때에 보람을 느끼고 만족하게 됩니다.

  사람의 눈은 바깥을 향해 있습니다. 그래서 나보다 남이 잘 보입니다. 나보다 남이 잘 보이는 것은 남을 비판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남을 채워주고 도와주게 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채워주지 못하고 비판하고, 도와주지 못하고 깎아 내리고 상처를 주며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본래의 모습대로 사는 사람들은 남을 도와주고, 남의 부족을 채워주고 살게 될 것입니다.

  물은 항상 가장 낮은 곳을 먼저 채웁니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더 낮아지고 자신을 더 비울수록 신적인 영광은 더 신속하고 풍성하게 그 사람 안에 들어옵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알아야 채워집니다. 겸손한 자가 차게 됩니다. 겸손하면 다른 사람의 충고를 듣습니다. 겸손하면 자신을 채웁니다. 겸손하면 비로소 채워집니다.

  존 맥스웰은 성공이란 진리를 알고, 그 진리를 수용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필요를 발견하고 그 필요를 채우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문제를 직면하여 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생명을 잃고 다시 찾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을 따르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자신의 재능을 발견하여 그 재능을 사용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천국에 가는 것이며 또 천국에 가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아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영적 성공의 비결은 부족을 채우는 삶입니다.

  새해가 되면 누구나 마음에 새해의 결단을 담습니다. 일반적으로 가장 많은 사람의 연초의 결단이 무엇인지 아세요? 벌써 답이 나왔지요. 연초문제입니다. 담배를 끊는 일입니다. 그런데 1월에는 담배 판매가 급감한답니다. 그런데 3월이면 다시 원상복구한다고 합니다. 새해의 결단이 얼마가지 못합니다. 기독교인들에게 가장 많은 새해의 결단이 뭔지 아십니까? 올해는 더 열심히 기도하겠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성경 읽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은 전도하는 일입니다. 여러분도 그렇지 않습니까? 아무리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다고 해도 누구나 다 부족함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제 다시 결단하세요. 여러분의 신앙생활에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서 서로 권면하고 올해는 꼭 성취하세요.

  내가 알지 못하고 남이 아는 내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남의 도움이 필요하고, 남의 부족을 채워주어야 합니다. 여러 해 전 외국의 어느 집회에 여러분이 알만한 목사님과 함께 강사로 갔습니다. 그 목사님과 제가 같은 방을 쓰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잘 아는 목사님이지만 서로가 조심스러운 것도 사실입니다. 첫째 날을 자고 아침에 일어났는데 그 목사님께서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목사님, 난 참 억울합니다. 난 한 번도 코를 곤 적이 없는데 제 아내는 밤마다 제게 코를 곤다고 야단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 목사님께 그랬습니다. “저도 억울하기야 마찬가지네요.” 잠이 들면 나는 모르지만 나와 함께 잠을 자는 사람은 다 압니다. 사람에게는 내가 알지 못하고 다른 사람이 내 자신에 대하여 아는 것도 제법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부족을 채워줄 이웃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웃의 부족을 채워줄 책임이 함께 있는 것입니다.

결론

  악기 연주자가 하루를 쉬면 자신이 알고, 이틀을 쉬면 선생님이 알고, 사흘을 쉬면 관객이 안다는 말이 있습니다. 나의 부족은 내가 압니다. 그리고 남이 압니다. 때로는 내가 몰라도 남이 알고 있습니다. 루빈스타인이라는 유명한 유대인 피아니스트가 있었습니다. 그는 “나는 한 번도 실수하지 않고 연주해본 적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대가의 자세라고 봅니다. 물론 그 분이 피아노를 연주하면서 건반을 잘 못 눌렀다는 말은 아닙니다. 매번 연주를 할 때마다 자신의 마음에 완벽하게 만족하는 연주가 없다는 고백입니다. 자신의 부족을 채우려는 간절한 마음이 예술의 혼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부족한 것을 채우세요. 과연 무엇이 부족합니까? 사랑입니까? 인내입니까? 용서입니까? 전도입니까? 기도입니까? 서로의 부족을 권하여 채우세요.

  올해는 우리 모두가 부족을 채워 온전한 하나님께 나아가는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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