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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처음 보다 많이 봉사 합시다 (계 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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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보다 많이 봉사 합시다 (계 2:19)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소아시아 두아디라 교회는 에베소 교회나 서머나 교회, 버가모 교회와 마찬가지로 교리적, 도덕적으로 타락한 모습이 있었음에도 주님은 여느 교회에게처럼 먼저 칭찬을 아끼지 않으십니다.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계2:19)

거짓 가르침과 악행이 팽배한 두아디라 교회에도 선한 사람은 존재했습니다. 사랑과 믿음을 갖고 그리스도의 복음 사역을 위해 충성했던 그들의 행위를 주님은 아셨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의 유혹과 온갖 죄악의 범람 속에서도 좌절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찬양했던 그들의 인내를 하나님은 아신 것입니다. 비록 소수이기는 하지만 아름답게 살기를 원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가능성을 발견하신 것입니다.

멸망의 도시 소돔과 고모라의 롯을 칭찬하신 주님께서 두아디라 교회의 소수의 신자들을 칭찬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칭찬이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을 칭찬하기를 싫어합니다. 오히려 상대방의 단점을 들추어내기를 원하며 관대함과 선행보다는 오히려 시기와 질투, 정죄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으로 포용하셨습니다. 그 사랑의 표현이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오늘날 모든 성도들이 주님께서 보여주신 모범을 따를 수만 있다면 우리는 우리가 소유했던 처음 사랑을 잃지 않고  주님의 칭찬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하여 성도는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생활화하여 끊임없이 노력하며 더 많이 봉사해야 할 것입니다.

  사업

사업이란 일 행위로서 하나님의 구원 활동으로 선교를 통해 역사 합니다
고전 9:1 내가 자유인이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이러한 사업에 대한 성도의 참여는 신앙을 통하여 이루어 집니다. 신앙안에서 행해지는 모든 것은 주님의 사역이며 동시에 주님을 위한 사역입니다

고전 15: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이모든 일은 하나님의 일하심이기도 합니다.
빌 1:6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이 열매 맞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의미를 줍니다
빌 1:19-24 이것이 너희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하나님의 사업은 하나님 믿고 함께 할 때 이루어 집니다.

어느 날 사업에 실패하고 절망과 좌절 속에 빠진 한 젊은이가 목사를 찾아갔습니다. “목사님, 저는 사업에 실패하여 모든 것을 다 잃었습니다. 이제 세상에서 더 살아야 할 이유를 잃어버린 것 같습니다.”묵묵히 듣고만 있던 목사는 아무 말 없이 백지 한 장을 꺼내고는 앞면에는 ‘잃어버린 것’이라고 쓰고 뒷면에는 ‘아직 남아있는 것’이라고 쓰고는 젊은이에게 건네주면서 거기에 하나하나 적어 보라고 했습니다. 그 젊은이는 먼저 ‘잃어버린 것’에 ‘사업과 재산’이라고 썼습니다. 그리고는 가만히 앉아 있었습니다. 목사는 더 쓸 것이 없냐고 물었습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청년은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그러면 이제 뒷면을 쓰시지요.” 그러자 젊은이는 난처해하며 물었습니다. “남은 것이 뭐가 있나요?” 목사가 다시 물었습니다. “부인은 죽었습니까?” “아니요. 살아있습니다. 아내는 늘 나를 위로하고 용기를 내라고 격려를 해줍니다.” 그러자 목사는 말했다. “거기에 ‘아내’라고 쓰십시오. 또 자녀들은?” “아들 둘에 딸 하나 있습니다. 다 착하고 공부들도 잘합니다.” “종이에 ‘아들 둘, 딸 하나’라고 쓰십시오.” 목사가 계속해서 물었습니다. “그러면 또 묻겠는데, 사업에 실패하면서 재산은 잃었지만 그러는 동안에 얻은 것은 없나요.” “예, 배운 것이 많습니다.” “그러면 그것들을 다 써 보세요. 그게 다 자산이 아니겠어요?”한참 쓰다가 멈추자 목사는 또 물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묻겠는데, 젊은이는 하나님을 믿습니까?” “제가 하나님을 믿기에 오늘 목사님을 찾아온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거기에 하나님이라고 쓰십시오.” 목사는 종이를 받아 들고 앞뒤를 번갈아 보면서 말했습니다. “여기 보니 당신이 잃은 것은 한 가지 뿐이오. 아직도 가지고 있는 것은 이렇게 많은데 왜 그렇게 낙심하고 좌절하시죠? 사업에 실패하여 많은 재산을 잃어버린 것에만 집착해서는 안 됩니다. 내게 주어진 것들이 너무도 많지 않습니까? 사실 그것들은 그 어떤 막대한 재산과도 바꿀 수 없는 것들이 아니겠어요?”

1840년, 리빙스턴은 런던선교협회 소속 의료선교사로서 남아프리카에 파견되었습니다. 이 때 그는 한창 젊음을 발산하는 27세였습니다. 처음에는 사람의 발길조차 드문 두메까지 들어가 전도사업에 진력했습니다.
그러다가 전도와 의료를 겸하면서 아프리카 각지를 탐험하기 시작했고 세계사람들에게 오지의 땅인 아프리카의 실상을 밝혔습니다. 그는 탐험을 계속하는 동안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습니다. 1871년에는 열병에 걸려 사경을 헤맸는데, 다행히 스탠리의 수색 탐험대를 만나 구출되었습니다. 이외에도 죽음의 고비를 여러 번 만났는데 그 때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습니다. 리빙스턴은 자신의 경험으로 '사람은 자기 사업이 끝나기 전에는 결코죽지 않는다'라는 신념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 신념을 가지고 계속 탐험과 선교를 강행했습니다. 그 후 리빙스턴은 스탠리 일행과 함께 조사를 계속하다가 1873년 뱅귀울루 부근의 마을에서 이질로 사망했습니다.

사랑

에베소 교회가 부족했던 덕목으로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마땅히 지녀야 할 삶의 규범입니다
에수님께 어떤 관리가 영생에 관한 질문을 합니다. 인간의 가장 큰 문제인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우리의 노력이 허무한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기에 이 문제에 대해서 질문을 한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가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어디에 있습니까?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율법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것은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실천의 문제요 삶의 문제입니다. 예수께서 지적하신 것은 바로 율법의 실천입니다. 

강도를 만난 사람이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그를 도와준 사람은 외적인 자격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 유대인의 멸시를 받던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진정한 이웃이 누구인지를 말씀하십니다. 말뿐인 사람보다 실천으로 보여 주는 사람이 진정한 이웃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일은 마찬가지로 다가옵니다. 우리의 이웃에게 말로 베푸는 선행은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의 삶을 통해서 실천으로 보여지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며 의미 있는 행동이 됩니다. 우리의 이웃에게 진정으로 자비를 베풀고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있으면 최선을 다해서 도와주는 사랑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마 22:37-40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고전 12:31-13:13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믿음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이 중심되는 삶을 가리킵니다. 
히 11:1-3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을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진술하며 믿음의 본질적인 성격을  말하였습니다. 믿음이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는 말씀과 함께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는 믿음에 대한 정의는 구약의 여러 믿음의 선진들에 의해서도  설명됩니다. 세상의 만물이 하나님의 창조에 의해 생성되었다고 믿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의 증거와 성령의 역사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성경이 증거하는 하나님의 창조는 믿음으로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을 정의한 후  삶을 통해서 믿음을 증거한  선진들을 나열하였습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에 드림으로 의로운 자사는 증거를 얻었습니다.
에녹은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자라는 증거를 얻었습니다. 그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다가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하였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심판의 경고를 받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구원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즉시 그 부름에 순종하여 고향을 떠나 미지의 세계로 나아갔습니다. 그는 독자인 이삭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기까지 순종함으로 믿음의 의를 이루었습니다.

사라는 하나님의 말씀과 능력을 믿었으므로 단산 후에 아들을 잉태하는 복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등 이스라엘 민족의 족장들은 믿음을 따라 살았고 또한 믿음을 따라 소망 중에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믿음을 따라 살다가 죽은 자들은  이 땅에서의 삶을 외국인과 나그네로서 살았습니다. 즉 이 세상에 것에 가치를 두지 않고 본향에 가치를 두고 사모하면서 살았던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들이 하늘의 본향을 사모하며 고대했던 것은 하나님이 계신 곳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로 100세에 이삭이라는  아들을 낳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을 아브라함에게  내리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의 시험에  대해 아브라함은 순종의 믿음을 보임으로 합격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믿음으로 시험에 통과하여 하나님께 복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의 믿음은 행함이 있는 순종의 믿음이었습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 그 약속의 성취로  얻게 된 아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으로 태어난 이삭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이어받아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본향을 소망하며 살았습니다. 이삭은 믿음으로 아들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복 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 실제로 야곱은 이삭의 축복대로 하나님의 복을 받아  이스라엘의 조상이 되었던 것입니다.

야곱은 믿음으로 생을 살았으며 믿음으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요셉은 믿음으로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을 떠날 때가 오리라는 것을 예언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뼈를 출애굽할 때 가지고 가서 가나안에 묻어 주도록 부탁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는 자신의 부귀와 안일을 택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위한 의의 고난을 택하였습니다. 출애굽의 대역사는 쉽고 간단하게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어려움이 따랐으며 이를 부단히 인내했으므로 가능한 사건이었습니다.  모세의 지도하에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믿음으로 시작하였고 믿음으로 홍해를 건넜습니다. 산 믿음은 움직이는 믿음이요, 산 믿음은 적시에 열매 맺는 믿음입니다.

모세와 여호수아의 지도로 가나안을 향해 나아가던 이스라엘에게 여리고 성은 난공  불락의 성이었습니다. 여호수아를 비롯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믿음으로 그 성을 함락 시켰습니다.
믿음의 여인 기생 라합은 멸망받은 사람들 중에 살았지만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믿음으로 고백하고 행동으로 나타내었기에 삶에 복을  받았습니다.

기드온과 바락, 삼손과 입다를  비롯한 이스라엘의 사사들도 믿음으로 대적들을 무찔렀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으로 인하여 믿음의 선진들이 받아야 했던 여러 가지 시험에 대해 열거하고 있습니다. 혹독한 시련 속에  있는 성도들에게 끝까지 인내할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주었던 것은 더 좋은 삶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소망은 힘써서  달음질을 할 수 있는 바탕이 되고 시험 중에 인내할 수 있는 버팀목이  되기도 합니다. 사망과 생명의 교차로에 선 모든 사람이 성공과 승리를 위해서 도전하고 선택해야 할 유일한 길이 믿음입니다.

믿음이라고 똑같은 것일 수는 없습니다. 역사하는 믿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가 못한 믿음도 있습니다. 위대한 인격, 위대한 신앙은 고난 중에서  더욱 빛이 나게 마련입니다. 성경에서 우리가 만나게 되는 믿음의 위인들은 우리 자신들의 신앙을 확인하게 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의 현장에 끊임없이 도전하고 있습니다. 주를 믿는 믿음의 사람들은 극한 상황 가운데 처하게 되더라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믿음으로 모든  것을 이기고 증거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믿음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인간은 모두 나약하지만 그리스도의 관한 믿음을 소유한 지-는 모든 환경을 극복하는 능력 있는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는 믿음의 선진들이 가졌던 훌륭한 신앙을 본받고 봉사하여야 합니다. 

섬김

이는 '사랑'의 외적 표현으로 칭찬받을 만한 훌륭한 덕목입니다
롬 15:25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고전 16:15 형제들아 스데바나의 집은 곧 아가야의 첫 열매요 또 성도 섬기기로 작정한 줄을 너희가 아는지라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저녁을 가볍게 라면으로 떼운 어느 날 밤, 아무래도 배가 출출한지 아내가 밤늦게 '우리 라면 끓여 먹을까요?' 하고 남편을 유혹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찬장과 냉장고를 열어보더니 '에이, 먹고싶기는 하지만 참지요. 마침 라면도, 김치도 다 떨어지고 없네요.' 하면서 벌러덩 드러 누워버렸습니다. 그러면서도 허전한 배를 무엇인가로 채우지 못한 아쉬움이 가득한 눈으로 남편을 쳐다보았습니다. '그래, 까짓거 오늘은 내가 당신을 위해서 '봉사'를 하지. 라면 사다가 끓여 줄게' 그리고 냄비에 물을 올려놓고 어두운 밤길을 걸어 올라가 상회 문을 두드려 라면을 사오고, 마을 식당에 내려가 김치를 가져왔습니다. 그날따라 가을비가 내리면서 기온이 뚝 떨어져 온몸을 움추리고 덜덜 떨면서 다녔습니다. 드디어 김이 모락모락 나는 라면을 마누라 앞에 대령하였습니다. '미안해요. 날씨도 추운데 오늘 나를 위해서 밤길을 걷게 해서 미안해요.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괜찮은데...' '밤길을 걸은 것도 당신을 위한 나의 '봉사'속에 포함된거야'
예수님은 하늘의 영광스러운 보좌를 떠나 죄로 가득 찬 세상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위해 생명을 버리기까지 '봉사'하셨습니다. '아이고, 예수님. 황송합니다. 정말 예수님의 '봉사'를 감당하기엔 사실 좀 벅차네요. 어찌 저같은 것을 위해서 세상에까지 내려 오셨단 말입니까?' 예수님께서 다정하게 이렇게 말씀해주십니다. '그 여행도 너를 위한 '봉사'속에 포함되어 있도다'(21세기 예화  봉사)

인내

계 2:3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두아디라 교회는 예수 안에서 인내한 교회입니다.

남극 탐험대에 캡틴 스카트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영하 50-60도의 추위에서 남극에 같이 갔던 동료 탐험가들이 낙심하자,'전진하자! 용기를 가지고 전진하자'고 하며 용기를 불어넣어 드디어 성공적인 탐험으로 공적을 세웠다고 합니다.

콜룸부스가 신대륙을 향해 항해할 때에 선원들은 모두 그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지구가 둥글고 신대륙이 어떻고 하는 콜룸부스의 말을 믿지 못하고, 실망하고 낙심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항해하라고 용기있게 끝까지 밀고 나간 콜룸부스는 마침내 미대륙을 발견할 수가 있었습니다.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용기를 가지고 인내하는 사람입니다. 인내는 우리를 소망의 정상에 도달하게 도와 줍니다.

안주는 2,000호 되는 개척 부락인데 단오날이 되면 그 부락 사람들이 체육대회를 합니다. 그 가운데 1만미터 경주가 있는데 처음에는 수백 명이 뛰다가 도중에 차츰차츰 떨어져 나가고 나중에는 몇 명만 남습니다. 그 사람들이 결승점에 다 들어왔는데 한 사람이 남아서 천천히 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구경하던 사람들과 뛰다가 중지해 버린 사람들, 먼저 다 뛴 사람들이 모두 그 사람이 오는 것을 기다렸습니다. 그 사람은 머리가 하얗고 60세 정도 된 국민학교 교장 선생님이었습니다. 천천히 뛰었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걸렸지만 그 분은 끝까지 뛰어서 드디어 완주를 했습니다. 그 분은 다 뛰고 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교훈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비록 꼴등이었지만 끝까지 뛰었습니다. 인생을 저처럼 뛰십시오'
얼마나 잘 한 것입니까! 우리는 1등을 하기 위해 뛰는 것은 아닙니다. 비록 1등이 아니고 꼴등이라고 해도 마지막까지 뛰어야 하고 꾸준히 인내하며 섬겨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에 하신일있습니다 .그 하나는 세례 요한에게 물 세례를 받으신 것이며, 다른 하나는 마귀에게 시험을 받아 이기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육체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성령으로 잉태되어(마1:18), 죄를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악에게 시험받으실 아무런 이유가 없었습니다. 더욱이 그는 공의로우신 하나님 자신이시기 때문에(빌2:6), 더욱 악에게 시험받으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인간과 같이 죄의 권세를 체휼하시사 모든 인간들에게 변명치 못하게 하시기 위하여 악에게 친히 심판받으시기를 지원하셨습니다.  죄가 없으신 예수께서 악에게 시험을 받으신 또 다른 이유는 그의 택하신 백성들에게 죄를 이기는 모범을 보이시기 위함입니다.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까지 모든 인류는 죄의 노예 상태에 있어 죄에게 종 노릇 하는 실패의 삶을 살았습니다.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이 그것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러한 인간의 패배의 삶에 대해 이제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시기 위해 친히 인간의 몸으로 시험을 받되 이기는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죄가 없으신 예수께서는 인간이 죄를 이기도록 모범을 보이시기 위해 악에게 시험을 받으시고 이기셨을 뿐만 아니라, 택한 백성들이 반드시 죄에게 이기어 영원한 승리의 기쁨을 얻을 것임을 보증해 주시기 위해서 악에서 시험을 받으시고 이기셨습니다. 즉 예수는 죄로부터의 승리의 가능성 뿐만 아니라 확실성을 보증해 주시기 위해 친히 육체를 입으신 상태에서 죄의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더 많이 봉사하려고 할 때에 사단의 시험이 있을 수 있습니다.
기갈과 상처난 자존심이 돌처럼 깔려 있는 이 세상에서 마귀의 권세를 이길 힘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 안에서 더 많이 봉사 하는 것 뿐입니다. 이것을 깨닫게 하기 위하여 지금도 성령님께서는 우리를 광야에 서게 하십니다. 주님께 덮였던 광야의 먼지와 자갈들을 둘러쓸 때 슬픔이 몰려오고 주님을 시험했던 마귀가 이제는 내게 다가와 유혹할 때 공포와 혼란에 빠져 몸부림쳤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담대히 사단에게 명령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동ㅂ
“사단아, 물러가라. 육신의 삶이 비록 어렵다고 해서 빵 한 조각으로 나를 유혹하지 말라. 우리 인생이 가야 할 광야에서 세상의 권세로써 나를 시험하지 말라. 나는 오직 하나님께만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길 것이다. 사단아, 물러가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며 주님의 길을 따르며 더 많이 봉사하기를 원하는 나에게서 즉시 떠나가라.”

교육하고 선교하며 봉사하는 교회가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되 더 많이 봉사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모두가 되어야 합니다.
사순절을 맞으며 시험을 물리치고 십자가의 길을 가신 주님을 본 받아 시험을 물리치며 더 많이 봉사하는 모두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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