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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마음이 청결한 자의 복 (마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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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청결한 자의 복 (마 5:8)

웃음과 울음은 우리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는 힘이 있습니다.

살다보면 때로 답답하고 공허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사람마다 어려움을 풀어 나가는 방식이 다른데, 어떤 사람은 개그 프로그램을 보면서 한바탕 웃어버리고, 어떤 사람은 슬픈 영화를 보면서 눈물을 쏟아내기도 합니다. 남에게 나쁜 영향을 주지 않고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것이 있다면 하나는 웃음이고, 또 하나는 울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웃음과 울음은 인간의 감정 중에 가장 전염성이 강한 감정입니다. 내가 웃으면 상대방도 웃게 되고, 내가 울면 상대방도 우는 거역할 수 없는 힘을 가진 것이 웃음과 울음입니다. 서로 웃는 순간 멀리 떨어진 두 사람의 마음의 거리가 아주 가깝게 단축됩니다. 또 울음이란 웃음보다 더 강력해서 함께 울어본 사람은 친구가 되는 우정을 쌓게 합니다. 왜냐하면 웃음과 울음이란 서로에게 한배를 타고 있다는 느낌을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서로 믿지 않고 싫어하는 사람들끼리 모이면 결코 웃지 않습니다. 사실 미소 짓기란 쉬운 것이 아닙니다. 설교를 할 때도 때로 팔짱을 끼고 앉아계시는 분들을 볼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설교하는 사람도 약간 겁이 나고, 무슨 생각을 하며 앉아 계실까를 생각해보게 됩니다. 무표정한 얼굴로 팔자 주름을 근엄하게 한 분도 계십니다. 그러나 반면에 기다림의 미소를 지닌 분들도 계십니다. 영혼의 미소를 갖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준비를 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여기에서 서로 함께 만날 수 있고 말씀듣기를 원한다는 친근한 메시지가 흘러나옵니다.

웃음과 달리 울음은 더 근본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음속의 감정을 쏟나내는 것이 울음입니다. 사람은 속상하고 안타까울 때 눈물을 흘립니다. 외로울 때도 눈물을 흘리고, 비통하며 탄식할 때도 눈물이 나옵니다. 감사하고 감격스러울 때도 눈물을 쏟아 냅니다. 이 눈물은 공감의 의미이며 사랑의 표지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마음속에 쌓여있던 감정의 쓰레기를 씻어내는 강력한 힘이 눈물 속에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눈물 흘리며 마음을 씻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비누로는 몸을 씻고 눈물로는 마음을 씻는다는 말도 있습니다. 탈무드를 보면 천국 한쪽 구석에 기도는 못했지만 울 수 있었던 사람, 눈물을 흘렸던 사람을 위한 자리가 마련되어 있다고 합니다. 기도할 수 없었지만 눈물을 흘린 사람은 그 만큼 가슴과 마음이 세척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마른땅에 비를 내리듯이 인간에게 눈물을 내려 주셨습니다. 우는 것에는 씻김의 작용이 있습니다. 우는 사람만 마음속의 씻음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함께 동참하는 사람도 그런 정화작용 속에 들어갑니다. 특별히 감정이 작용해서 흘리는 눈물 속에는 체내에 있던 독소들이 다량으로 배출된다는 생리학적인 결과도 나와 있습니다.

눈물은 체내에 있는 독소만 빼내는 것이 아니라 영혼을 맑게 해줍니다. 그래서 어떤 시인은 ‘눈에 눈물이 없으면 그 영혼에는 무지개가 없다’는 시를 써놓기도 했습니다. 눈물이 있는 사람의 영혼은 아름다운 일곱색 무지개의 빛깔의 띠고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눈물을 흘려보지 않는 사람은 참으로 기뻐할 줄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여섯 번째 복의 말씀으로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으니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합니다. 마음이 깨끗한 자, 마음이 청결한 자란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저는 이렇게 정의를 내리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곧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속으로 받아들이면서 그 앞에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사람, 가슴에 눈물이 맺히는 사람”

우리는 세상의 오염된 환경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저녁이 되어 바깥에 나갔다 집에 돌아오면 깨끗하게 목욕을 하지 않으면 그냥 하룻밤을 잠들 수가 없는 오염된 공해 속에 살고 있습니다. 대기오염, 물오염, 환경오염 거기다가 정신적 오염까지 우리 주위에 널려 있습니다. 영혼의 오염도 함께 나타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런 오염에서 벗어나는 길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기도와 말씀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할 때 오염에서부터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저는 아침마다 하나님께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마가복음 1:11)는 말씀을 듣게 되면 새벽녘에 벌떡 일어납니다. 그러면 그 순간 저는 “주님, 저도 하나님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며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까를 생각할 때 제 가슴도 촉촉하게 감사의 눈물이 맺혀지는 것을 느끼곤 합니다.

두 마음을 품지 말고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고 부탁하십니다.

우리는 감사의 노래, 감격의 눈물을 흘릴 때 마음이 순결하고 깨끗해집니다. 하지만 우리 가슴에 매번 감격의 눈물이 생기지 않을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마음이 너무 메말라서 황량한 광야같이 되어 웬만해서는 눈물이 나오지 않습니다. 너무 일상적인 습관에 젖어 있어서 특별한 것을 만나도 쉽게 감동받지 않습니다. 우리는 매일매일 살아있음을 감격스럽게 간증하지 않습니다. 내 심장이 뛰는 것, 내가 호흡할 수 있는 것, 내가 무엇을 먹으면 소화시킬 수 있는 것, 내 손과 발이 움직이는 것, 내 눈이 보고 귀가 들을 수 있는 축복을 매일매일 감격스럽게 하나님 앞에 고백하지 못하고 마음이 찌들어 가고 있습니다. 잘못된 인식과 고정관념의 무지 때문에 마음의 문이 열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무지는 교만의 어머니라고 하는 말도 있습니다. 마음의 죄악과 탐욕을 품고 악과 죄인 줄을 알면서도 악을 즐기려 하기 때문에 가슴에 눈물이 담겨있지 않는 것입니다. 또는 불신앙의 마음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중적인 사고를 하며 두 마음을 품습니다. 두 마음이란 갈라진 마음입니다. 우리에게는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고 두 마음을 품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습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우리에게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전심으로 생명을 걸고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시지만 우리는 여전히 두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랑하기는 하는데 두 마음을 품고 있는 우리에게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요청하십니다.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야보고서 4:8)

인격적인 사랑이란 한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인격적인 사랑이 두 마음이 될 때 마음이 흔들려 깨끗한 마음이 아니라 더러운 마음, 오염된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결혼한 남편과 아내가 다른 여자, 다른 남자와 애정의 관심을 갖게 되면 그때부터 더러워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속되면 불륜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인격이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인간이 만든 우상을 섬기게 되면 하나님께는 그것을  거절하십니다. 더럽다는 것은 거룩하지 못하고 불의한 것입니다.

이중적인 마음으로 섬기는 것은 더러운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고나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께 예물을 갖다 바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보면서 진노하신 이유는 이중 플레이를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면서 바알신, 아세라신을 동시에 섬겼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제물을 갖다 바치면서 바알신에게도 동시에 갖다 바쳤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바알신도 사랑했을 때 하나님은 그것은 더러운 것이요 참된 신앙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두 마음을 품고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인간의 마음에 완악함을 다음과 같이 지적합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예레미야 17:9)

마음이란 그대로 두면 부패하고 타락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마태복음 15:19-20)

예수님 당시에도 이중적인 인간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 스스로는 가장 깨끗하다고 여겼습니다. 나만큼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바로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었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그러했습니다. 바리새인이란 말은 구별되었다는 뜻으로 구별되어서 거룩하게 택함 받은 자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 앞에 자랑스럽게 깨끗한 자라고 이야기했을 때 예수님께서 오히려 세리와 창녀가 너희들보다 훨씬 더 깨끗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의 겉은 번지르르하지만 속은 다 썩었다고 비판하셨습니다.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마태복음 23:25)

예수님은 이중적인 마음을 갖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더러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 마음속에서부터 나오는 것이 거짓과 불의와 음란이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가능성이 없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우리 마음을 하나님 안에서 붙잡으면 그 안에서 정직과 정결이 나오고 거룩함과 사랑이 나온다고 말씀하십니다.

회개의 눈물을 흘리면서 나올 때 하나님께서 받으십니다.

인간의 마음이란 사탄이 끊임없이 붙잡는 삶의 자리인 동시에 성령께서 오셔서 하나님의 은혜로 거주하시는 자리입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할 것인가는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예수님은 회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음의 눈물을 흘리면서 하나님 앞에 나오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다윗은 죄악을 범하여 하나님 앞에 감히 나올 수 없었던 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이렇게 기도하면서 나옵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편 51:10)

그는 하나님께 눈물로 회개하는 마음으로 나왔고 하나님이 눈물을 받으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계속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시편 51:17)

눈물로 주님 앞에 나오면 하나님께서 어떤 죄악과 불의와 거짓도 용서하시고 받아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마음이 깨끗하게 되는 길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회개의 눈물을 흘리면서 하나님을 향해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득 채우는 것입니다.

생각과 마음을 단순화시키는 것이 마음을 깨끗하게 합니다.

우리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길은 생각과 마음을 단순화시키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우선권이 무엇인지를 붙잡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시고 내가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된다는 확실한 사실을 붙잡는 것입니다. 복잡하고 난해한 것을 풀 때의 비결은 단순화시키는 것입니다. 모든 변수를 다 제거하고 하나의 상수만을 붙잡는 것입니다.

그림을 여러 종류로 나눌 수 있지만 구상화와 추상화로 나눌 수 있습니다. 추상화는 어떤 대상의 전체를 재연하는 것이 아니라 한두 개의 특성을 강렬하게 부각시킵니다. 반면 구상화는 모든 것을 아주 자세하고 섬세하게 그립니다. 그러나 추상화는 불필요한 부분을 도려내고 한 가지 특성만 잡아 본질을 드러내는 단순화의 과정입니다. 우리는 인생의 많은 것을 경험하면서 살아갈 때 추상화처럼 가장 중요한 한 가지를 붙잡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구상 속에서 추상하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보는 눈의 변화, 생각의 변화, 사고의 전환입니다.

우리는 무엇보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하나님을 볼 줄 아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직접 본 자는 즉사한다고 생각해서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요한복음 14:9)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분으로 만드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들을 수 있고 만질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보지 못하고 주변의 잡다한 것에서 이리저리 방황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 생각을 하나로 묶어야 합니다. 예수님으로 묶어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단순화시켜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 마음이 깨끗해집니다.

많은 신앙의 인물들이 믿음의 눈을 가지고 하나님을 바라볼 줄 알았습니다. 이런 사람으로 대표적인 사람이 구약성서에 나오는 요셉입니다. 그는 어릴 때 꿈을 꾸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꿈 때문에 형들에게 시기와 질투를 당해 애굽으로 팔려갔습니다. 그는 형들에 의한 배신을 피부로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그때에도 그는 자기 삶을 단순화시켰습니다.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갔으나 그때도 삶을 단순화시켜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았습니다. 하나님이 자기와 동행한다는 사실 속에서 모든 것을 단순화시켰습니다. 그때 그는 억울한 누명, 사람들의 조롱, 상황이 갖고 있는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는  용기를 가질 수가 있었습니다.

어린아이처럼 하나님께 안기며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은 아주 복잡하고 번잡합니다. 문제를 해결하려고 해도 난마(亂麻)처럼 서로 얽혀 있습니다. 때로 하루하루 살기도 버겁습니다. 고민 없이 편안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은 다 짐을 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현실에 번잡한 것을 그대로 두십시오. 그리고 먼저 해야 할 것, 반드시 해야 할 것, 반드시 사랑해야 할 것을 먼저 붙잡으십시오.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것을 붙잡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모든 생의 지혜와 비밀이 담겨있다는 진리에 우리 삶 전체를 내걸어야 합니다. 그때 바로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심을 알게 될 것입니다.

몸이 연약할 때 몸보다 먼저 내 마음의 평안을 가져야 합니다. 사업과 직장에 문제가 있을 때 먼저 하나님 앞에 나 자신이 누구인가를 결단해야 합니다. 인간관계에 많은 어려움들이 우리를 붙잡고 어렵게 할 때 먼저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어떤 존재인지,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 존재인지에 대한 자기 자존감에 대한 확인이 필요합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내 옆에서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시며 내 인생의 길을 이끌고 계시는 것을 목도하게 될 것입니다.
밖에 나갔다가 집에 돌아오면서 자녀를 부르는 아빠의 음성을 듣고 “아빠!”하고 품안에 안기는 어린아이처럼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어린아이입니다. 절대적인 신뢰, 절대적인 사랑, 절대적인 순종하는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나오시기를 바랍니다. 그때 주님께서 우리 마음을 깨끗하게 해주실 것입니다. 그때 우리 마음의 눈물을 보시며 용서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주실 것입니다. 그 순간 우리가 하나님이 내 옆에 계신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아바 아버지라는 놀라운 사실을 감격스럽게 느끼며 우리의 길을 갈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무엇이기에 이토록 우리를 사랑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주셔서 십자가에 달리게 하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보기 전에 주위의 문제에 깊이 빠져서 허우적거리고 있었습니다. 주님, 먼저 사랑할 것, 먼저 해야 될 것을 알고 나가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와 동행하시는 인생임을 감사하면서 어려움을 이겨나가는 축복된 인생이 되게 하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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