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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권력의 오만을 경계하라 (대하 16: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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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의 오만을 경계하라 (대하 16:7-10)

[그 무렵 하나니 선견자가 유다의 아사 왕에게 와서 말하였다. “임금님께서 시리아 왕을 의지하시고, 주 임금님의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셨으므로, 이제 시리아 왕의 군대는 임금님의 손에서 벗어나 버렸습니다. 에티오피아 군과 리비아 군이 강한 군대가 아니었습니까? 병거도 군마도 헤아릴 수 없이 많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임금님께서 주님을 의지하시니까, 주님께서 그들을 임금님의 손에 붙이지 않으셨습니까? 주님께서는 그 눈으로 온 땅을 두루 살피셔서, 전심전력으로 주님께 매달리는 이들을 힘있게 해주십니다. 이번 일에, 임금님께서는 어리석게 행동하셨습니다. 이제부터 임금님께서는 전쟁에 휘말리실 것입니다.” 아사는 선견자의 이 말에 화를 참을 수가 없어서, 그를 감옥에 가두어 버렸다. 그 만큼 화가 치밀어 올랐던 것이다. 그 때에 아사는 백성들 가운데서도 얼마를 학대하였다.]

• 전락

오늘 이야기에 등장하는 아사 왕은 솔로몬의 증손자입니다. 솔로몬이 세상을 떠난 후 이스라엘은 남쪽의 유다와 북쪽의 이스라엘로 분열되었습니다. 분열의 원인은 르호보암의 강압정책 때문이었습니다. 솔로몬 시대에 수많은 건축 사업에 동원되었을 뿐만 아니라, 상당한 세금을 물어야 했던 북부의 지파들은, 르호보암이 왕이 되자 세금을 경감해달라고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르호보암은 그들의 요구를 묵살했고, 그것이 북부 지파들을 자극해 여로보암을 중심으로 해서 새로운 나라를 세우게 된 것입니다. 어찌 보면 분단은 억압과 착취를 본질로 하는 제국의 질서에 대한 항쟁과정에서 생겨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야훼 하나님에 대한 동일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다와 이스라엘은 반목하며 지냈고, 때로는 전쟁에 휘말릴 때도 많았습니다. 남북이 분단되어 있는 우리나라로서는 이들이 겪어온 역사가 남의 일처럼 여겨지지 않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아사 왕 삼십육년에 이스라엘 왕 바아사가 쳐들어와 라마에 요새를 건축하면서 촉발된 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미스바와 예루살렘의 중간쯤에 위치한 라마는 유다가 외부 세계와 접촉하는 중요한 통로였기에 아사는 어떻게 하든지 라마를 되찾아야 했습니다. 그는 여러 가지 전략적인 검토 끝에 시리아를 전쟁에 끌어들이기로 하고는, 많은 금은 기명들을 모아 시리아 왕에게 보내면서 동맹을 맺자고 제안했습니다. 시리아의 왕인 벤하닷은 아사의 제안을 받아들여 이스라엘과의 동맹을 파기하고 전쟁에 개입했습니다. 그가 군사를 이끌고 헤르몬 산 근처인 이스라엘의 최북단 지역을 치자 바아사는 군대를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바아사가 철군하자 아사는 백성들을 불러 모아 바아사가 라마를 건축할 때 쓰던 돌과 목재를 가져 오게 하여, 게바와 미스바를 보수하였습니다. 아사의 전략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셈입니다.

• 어리석음과 순종 사이

왕과 백성들이 승전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는 그때 선견자 하나니가 아사 왕 앞에 등장합니다. 그는 왕께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시리아 왕을 의지하였기 때문에 이제는 시리아의 세력을 꺾을 수 없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이전에 벌어졌던 에티오피아와의 전쟁, 리비아와의 전쟁을 상기시킵니다. 압도적인 군사력을 가지고 침공해온 두 나라를 물리친 것은 유다의 군사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이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 눈으로 온 땅을 두루 살피셔서, 전심전력으로 주님께 매달리는 이들을 힘있게 해주십니다. 이번 일에, 임금님께서는 어리석게 행동하셨습니다. 이제부터 임금님께서는 전쟁에 휘말리실 것입니다.”(대하16:9)

아사는 하나니의 말에 화를 참을 수가 없어서 그를 감옥에 가두고 말았습니다. 예언자를 통해 들려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귀가 그에게는 없었던 것입니다. 성경은 아사가 그 때에 백성들 가운데 얼마를 학대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때가 아사가 왕이 된 지 36년 째 되던 해이니까, 아사는 권력의 단맛에 취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권력이 그의 귀를 어둡게 했습니다. ‘불합리하다, 어리석다'는 뜻의 영어 단어 ‘absurd'에는 흥미롭게도 ‘귀머거리'를 뜻하는 ‘sardus'라는 단어가 들어 있습니다. 누가 어리석은 사람입니까? 침묵 속에서 들려오는, 혹은 하나님의 종들을 통해 들려오는 하나님의 뜻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순종'을 뜻하는 ‘obedience'에는 ‘듣는다'는 뜻의 ‘audire'가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마음을 모으는 사람은 자기 마음대로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니는 아사가 ‘어리석게 행동했다'고 책망합니다.

예언자는 마땅히 해야 할 말을 합니다. 그것이 어려움을 가져온다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조롱거리가 된 자신의 신세를 탄식합니다.

“내가 입을 열어 말을 할 때마다 ‘폭력’을 고발하고 ‘파멸’을 외치니, 주님의 말씀 때문에 나는 날마다 치욕과 모욕거리가 됩니다. ‘이제는 주님의 이름으로 외치지 않겠다’ 하고 결심하여 보지만, 그 때마다, 주님의 말씀이 나의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올라 뼛속에까지 타들어 가니, 나는 견디다 못해 그만 항복하고 맙니다.”(렘20:8-9)

예수님은 “너희가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고, 터무니없는 온갖 말로 온갖 비난을 받으면, 복이 있다”(마5:11) 하십니다.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으면 오히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십니다.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기 때문입니다. 아사는 하나님보다 자기 경험과 판단과 외교술에 의지함으로써 어리석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당장에는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것처럼 보여도, 그는 이제 지속적인 전쟁에 시달리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외면한 채 얻은 승리를 통해 또 다른 전쟁의 그림자가 유다에 드리우게 된 것입니다. 아사가 처음부터 그런 ‘귀머거리’는 아니었습니다.

• 인간은 주님을 이기지 못한다

성경을 보면 아사가 다스리던 처음 10년 동안은 나라가 조용했습니다. 그때 아사는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일, 올바른 일을 행했습니다. 이방 제단과 산당을 없애고, 각종 석상과 목상을 깨뜨려 야훼 신앙의 순수성을 회복하는 일을 했습니다. 이런 행동들은 어쩌면 폭력적인 행동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방적인 신앙의 특색을 안다면 평가는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종교는 흔히 사람들의 물질적인 욕구 충족의 수단으로 기능할 때가 많았습니다. 종교가 사람들을 더 나은 존재로, 더 자유로운 존재로 만들기보다는, 그들을 옴쭉달싹 못하는 존재로 전락시킨다면 그 종교는 타락한 것입니다. 아사는 그런 신앙을 청산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찾고, 하나님의 율법과 명령을 실천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거룩한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말고 살라는 것입니다. 유다의 역사가는 하나님께서 아사에게 평안을 주셨기에 나라가 조용했다고 전합니다. 전쟁이 없던 평안한 시기에 아사는 유다 지방에 요새 성읍들을 건설함으로써 나라의 안보를 튼튼하게 다졌습니다.

국제 정세의 변동 속에서 유다도 전쟁의 광풍을 피해 갈 수 없었습니다. 에티오피아 사람 세라가 침공했는데, 그 군세가 대단했습니다. 백만 대군에 병거 삼백 대를 이끌고 온 세라에 맞서 싸우기 위해 아사는 유다의 남방 경계인 브엘세바의 북편 마레사에 군영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누가 봐도 승산이 없는 싸움이었습니다. 이럴 때 할 수 있는 일은 엎드리는 것뿐입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돕고자 하실 때에는, 숫자가 많고 적음이나 힘이 세고 약함을 문제삼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이 무리를 물리치러 왔으니, 주 우리의 하나님,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주님, 주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이 주님을 이기지 못하도록 해주십시오!”(대하14:11)

절박함이 깊은 믿음을 낳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전쟁의 승리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진실한 믿음은 기적을 낳습니다. “인간이 주님을 이기지 못하도록 해주십시오.” 하나님은 자기 힘을 의지하여 평화와 정의를 깨뜨리는 제국의 힘을 헛것으로 여기십니다. 성경에는 야훼의 전쟁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구약이 전하는 하나님은 폭력의 이미지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기들의 욕망을 투사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강자들의 횡포에 의해 시달리는 이들을 돌보시는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인간이 주님을 이기지 못하도록 해주십시오.” 세상 도처에서 폭력과 전쟁의 소식이 들려옵니다. 하지만 평화와 정의를 세우려는 하나님의 뜻을 이길 힘은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아사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에티오피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했고, 그랄 인근의 많은 성읍들에서 역겨운 물건들을 없앴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주님의 성전 현관 앞에 있는 주님의 제단을 보수하기도 했습니다. 또 그는 백성들을 불러모아 ‘조상의 하나님만 찾기로 맹세’하게 했습니다. 그 때문인지 아사 왕 삼십 오년까지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 권력의 오만함을 넘어

하지만 앞에서 본 것처럼 아사가 오랜 평화 시기를 지나면서 권력의 단 맛에 취하기 시작하면서 그는 오만한 왕으로 변했습니다. 그는 예언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자식처럼 돌보던 백성들을 학대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위기가 사라지자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던 사람에서 자기를 신뢰하는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부드러움은 생명에 가깝고 굳어짐은 죽음에 가깝습니다. 그의 곁에는 쓴 소리를 하는 이들은 사라지고, 아첨꾼들만 득실거렸을 것입니다. 타락은 귀가 어두워지면서 시작됩니다.

우리는 가끔 정치 지도자들의 탄식을 듣습니다. 자기가 옳은데 국민들이 수준이 낮아서 자기 뜻을 이해해주지 못한다고 혀를 찹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국민들은 교화되어야 할 무지한 대중들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民’의 뜻이 곧 ‘하늘’의 뜻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정부 출범을 앞두고 있습니다. 우리는 겸손한 권력을 원합니다. 다른 이가 한 일 중 잘못한 일이 있다면 고쳐야 하겠지만, 잘한 일은 잘한 것으로 인정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나를 따르라’고 하실 분은 주님 한 분뿐입니다.

하늘의 소리, 국민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은 어리석음이라 했습니다. 이 시대에 기독교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른 것은 그르다고 말하고, 옳은 것은 옳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언자들은 한편으로는 권력의 횡포를 고발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아래에서 신음하는 이들은 위로했습니다. 권력이 해야 할 일은 세상을 고르게 만드는 것입니다.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사람, 많이 배운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사이의 틈을 메워줌을 통해 세상에 평화와 정의를 세워나가는 것입니다. 권력이 오히려 차별을 만들고, 억울하고 원통한 사람들을 많이 양산하는 정책을 택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아사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막는 순간, 어리석은 왕이 되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의 책임이 막중합니다. 우리 시대는 감옥에 갇히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던 하나니를 부르고 있습니다. 이 거룩한 부름에 응답하여 우리 시대의 파수꾼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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