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거라사에 있는 사람 (눅 8:26~39)

  • 잡초 잡초
  • 361
  • 0

첨부 1


거라사에 있는 사람 (눅 8:26~39)

시편 기자는 “잃은 양 같이 내가 방황하오니 주의 종을 찾으소서”라고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시 119:176). 성경은 범죄한 인간의 실상을 ‘버려진 자요, 상실된 자’라고 하였습니다. 로마서 1:28에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라고 하였습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보는 것처럼 인간 세계의 불행은 하나님을 떠나 버려진 상태에서 일어나는 자기상실의 결과입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잃은 자를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눅 19:10). 여기 거라사 지방에 있는 이 사람도 버려진 인간의 실상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잃고 인간성이 망가져버린 이 사람이 예수님 앞에서 새롭게 회복되었습니다.

1.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입니다.

마가복음 5:2에는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라”고 하였습니다. ‘더러운 귀신’은 마귀를 뜻하는데 이는 공중의 권세를 잡은 자로서 사람을 미혹하여 하나님과 멀어지게 만듭니다. 겉은 멀쩡하지만 마음을 빼앗아 그 사람을 지배하기 때문에 비정상적인 삶을 살게 합니다.

1) 옷을 벗었습니다.

본문 27절에 “이 사람은 오래 옷을 입지 아니하며”라고 하였습니다. 옷은 사람의 품위와 아름다움의 상징입니다. 옷을 벗었다는 것은 인간의 존귀함과 영광을 스스로 포기하였다는 뜻입니다. 옷을 벗고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은 도덕적인 감각을 상실하였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세에 사람들은 부끄러움을 영광으로 생각한다고 하였습니다(빌 3:19). 성경에는 성도의 경건한 삶을 깨끗한 세마포로 비유하였습니다(계 19:8). 교회가 세속화되고 성도가 경건을 지키지 못하게 되면 옷을 벗고 수치를 들어내는 것이 됩니다(계 3:18). 어느 시대에나 깨어있는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 자입니다(롬 13:12-14).

2) 무덤에서 살았습니다.

“집에 거하지도 아니하고 무덤 사이에 거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집은 행복한 삶의 본거지입니다. 정상적인 사람은 집에서 가족과 함께 살고 거기서 밥 먹고 잠자며 희망과 행복을 가꾸어 갑니다. 반면에 무덤은 시체를 장사해 놓은 곳으로 죽은 자의 도시입니다.
겉으로는 공원을 만들고 값비싼 돌들로 장식해 놓았더라도 그곳은 죽음의 정적이 깃들인 곳이며 생명이 없는 곳입니다. 마귀는 사람들을 생명이 약동하는 집에서 떠나게 하고 죽음의 도시 안으로 몰아넣습니다. 생명의 본체가 되시는 예수님과 격리시키며 마귀의 활동무대인 무덤으로 끌고 갑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하나님의 집인 교회를 멀리하고 점차 쾌락의 도시 속에서 온갖 죄악의 문화에 길들여지는 것도 이와 같은 현상 때문입니다.

3) 난폭한 행동을 하였습니다.

마가복음 5:4-5절에는 그 사람이 쇠사슬을 끊고 쇠고랑을 깨뜨리며 밤낮 무덤 사이에서 소리를 지르며 돌로 제 몸을 상하게 하였다고 했습니다. 그 마음을 귀신이 지배하면서 무서운 힘을 발휘하여 그를 제어할 수 있는 장치를 끊어 버렸습니다. 또한 광란의 소리를 지르며 돌로 자해를 하는 등 난폭한 행동을 일삼았습니다.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는 사람은 자기 정욕의 종이 되어 마귀가 즐기는 대로 이성 잃은 행동을 하곤 합니다. 사회적인 통념이나 도덕과 양심도 제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심지여 국가의 실정법으로도 다스릴 수 없을 만큼 완전히 망가져 버린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2. 귀신에게서 벗어나야 됩니다.

거라사 지방에 있는 사람은 죄와 마귀에게 지배당하는 세상 사람을 뜻합니다. 이 사람이 온전케 되기 위해서는 그 속에 있는 귀신을 추방하여야만 됩니다.  그렇지만 그 일이 쉽게 이루어 지지 않습니다. 여기에 인간의 고민이 있습니다.

1) 자기 힘으로 할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변화산에서 내려왔을 때 귀신들린 아들을 데리고 나온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그의 말에 의하면 귀신이 말을 못하게 벙어리로 만들어버렸고, 어디서든지 거꾸러뜨리면 아들은 거품을 물고 이를 갈며 파리하게 죽어간다고 하였습니다(막 9:17-18). 이처럼 귀신에게 얽매인 사람은 자기 임의대로 어찌할 수 없습니다. 범죄한 인간은 공중권세를 잡은 마귀에게 꼼짝 못하고 끌러 다니는 신세가 되어있습니다(엡 2:2). 그 결과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법을 따르고 싶지만 육신의 소욕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결국 거기 얽매여서 죽음의 길로 가고 마는 것입니다(롬 8:6-7).

2)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을 수도 없습니다.

인간은 자율적(自律的)이지 못하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귀신을 능가할 만한 힘이 없습니다. 오히려 시도 때도 없이 유혹하며 접근해 오는 마귀의 시험에 위협을 느낄 뿐입니다(벧전 5:8). 여기 귀신들린 사람도 가까운 가족과 친지들이 그를 쇠사슬로 묶고 쇠고랑에 채우는 등 외부적인 행동을 제약하려는 시도를 했을 뿐 어떤 도움도 줄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에게 어려움이 오거나 속상한 일을 당하게 되면 어디든지 손을 벌리며 속 시원하게 해결해 주기를 바라지만 문제의 해결보다는 더 큰 상처를 받곤 합니다. 시편 146:3에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라고 하였습니다.

3) 예수님을 만나야 됩니다.

마귀를 제어할 수 있는 분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마치 흡혈귀 드라큐라가 십자가를 보면 맥을 못 추고 도망가듯이 아무리 무서운 귀신이라도 예수님의 이름 앞에서는 도망가게 됩니다. 여기 거라사에 있는 사람을 지배하던 마귀떼가 군대처럼 많고 무서웠지만 예수님께서 그곳에 나타나실 때 예수님을 알아보고 꼬리를 내렸습니다. 28절에 “예수를 보고 부르짖으며 그 앞에 엎드리어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께 구하노니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라고 하였습니다. 29절에 “이는 예수께서 이미 더러운 귀신을 명하사 이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고 하였습니다.


3. 예수로 말미암아 회복되었습니다.

35절에 보면 귀신 나간 사람이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예수의 발치에 앉아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39절에는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일을 행하셨는지를 온 성내에 전파하니라”고 하였습니다.

1) 마귀의 속박을 풀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자기 백성을 얽매인 데서 풀어 주는 것입니다. 이사야 61:1에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라고 하였습니다.
시편기자는 “주께서 나의 결박을 푸셨나이다”하고 찬송하였습니다(시 116:16).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다”고 하였습니다(갈 5:1). 예수님은 사탄의 결박에서 우리를 풀어주시고 영혼을 자유롭게 하여 주십니다. 요한복음 8:36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고 하였습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군대귀신에게 포위되어 영혼과 육체가 완전히 굳어져 버린 폐인이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참 자유함을 누릴 수 있는 특권이 주어졌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복음입니다.

2) 대가를 지불하였습니다.

본문 33절에 보면 귀신이 그 사람에게서 나갈 때 거기 있는 돼지떼에 들어갔다고 하였습니다. 귀신의 습격을 받은 돼지들은 비탈길로 달아나다가 모두 호수에 빠져 몰사하였습니다. 순식간에 2천 마리나 되는 많은 돼지를 잃게 된 주인은 기가 막혔을 것입니다. 일반적으로는 사람구실도 못한 채 버려진 자를 살리기 위하여 그 많은 재산을 허비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한사람의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여기시기 때문에 어떤 대가를 치르고라도 그를 살려내고자 하신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배금주의(拜金主義), 물질 만능주의에 빠진 나머지 사람의 생명을 가볍게 여기지만 예수님께서는 잃어버린 인간을 회복하기 위하여 자기의 생명까지도 대가로 치러주셨습니다.

3) 증거로 삼았습니다.

구속받은 성도의 삶은 세상에서 증거가 됩니다. 35절에 보면 귀신 나간 사람이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예수의 발치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였다고 했습니다. 36절에는 귀신 들렸던 자가 어떻게 구원 받았는지를 본 자들이 그들에게 이르렀다고 하였습니다. 마귀의 권세에 얽매여 인간성을 완전히 잃어버렸던 자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속박에서 벗어나게 되고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가 되었을 때 사람들은 기독교 복음의 신비로움을 인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나라가 말에 있지 아니하고 능력에 있다고 하였습니다(고전 4:20).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변화된 사람입니다(고후 5:17).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이 변화된 삶을 실천할 때 이를 보는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39절).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