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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도에게 적용되는 삶의 법칙 (시 66: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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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에게 적용되는 삶의 법칙 (시 66:16~20)

1. 삶의 법칙들

1937년부터 월스트리트에서 활동하기 시작하여 자신의 이름을 붙인 ‘템플턴 그로스 펀드’를 출범시켰으며, 이후 “금세기 최고의 주식 투자가”가 된 존 템플턴은 신앙과 인격과 봉사하는 삶으로도 존경을 받은 사람입니다. 이 템플턴이 정리한 <삶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는데요.

그 중에는 “
1. 마음을 다스리면 모든 것을 지배할 수 있다
2. 비전이 없는 사람은 쇠퇴한다.
4. 이 우주에는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가능성이 있다.
6. 당신의 삶은 당신이 생각하는 대로 된다
7. 사랑을 주는 것이 사랑을 받는 것이다.
8. 용서받기 위해서는 먼저 용서해야 한다.
9. 감사하는 태도는 축복을 받는다.” 등이 있습니다.

그가 이런 식으로 정리한 <삶의 법칙>은 자그마치 200가지나 됩니다.

이 존 템플턴처럼 제법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하여 삶의 법칙들을 만들어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왔습니다. 그 가운데는 <머피의 법칙(Murphy's Law)>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법칙은 '잘못될 가능성이 있는 것은 어김없이 잘못되어 간다'는 의미로, 인생살이에 있어서 나쁜 일은 겹쳐서 일어난다는 설상가상의 법칙과 같은 것입니다. '버스는 기다리면 안 오고,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는 등이 그 예입니다. 이 머피의 법칙과 반대되는 법칙으로서 <샐리의 법칙(Shally's Law)>이라는 것이 있는데요. 이것은 ‘잘 될 가능성이 있는 일은 항상 잘 된다’는 의미입니다.

예를 들면, '시험 당일 아침에 우연히 펼쳐 봤던 책에서 문제가 나온다'든지, '지각이라 잔뜩 기가 죽어 교실 문을 여는데 선생님이 아직 안들어오셨다'거나, '공부하다 졸리운 참에 갑자기 정전된다'거나, 하는 경우입니다. 그리고 <겁퍼슨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일어나지 말았으면 하는 일일수록 잘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또 <프랭크의 전화 법칙>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펜이 있으면 메모지가 없다. 메모지가 있으면 펜이 없다. 둘 다 있으면 적을 메시지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코박의 수수께끼 법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전화번호를 잘못 눌렀을 때 통화중인 경우는 없다’는 것입니다. 또 <홀로위츠의 법칙>이라는 것은 ‘라디오를 틀면 언제나 가장 좋아하는 곡은 마지막 부분이 흘러나온다’는 것입니다.

제가 오늘 이러한 삶의 법칙들을 소개하는 이유는 오늘 본문이 말하는 또 하나의 법칙을 소개하기 위함입니다.

2. 인과관계의 법칙(18)

성도 여러분, <인과 관계의 법칙(The Law of The Cause And Effect)>이라는 것을 들어보셨지요? 인과 관계의 법칙이란, 원인 없는 결과는 없고, 원인이 없는 것 같아 보이는 일도 잘 살펴보면 반드시 그 원인이 있다는 이론입니다. 어떤 결과든지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원인이 있다는 것, 그리고 삶의 노력이나 투자 등 어떤 원인을 만들면 그것에는 반드시 결과가 뒤따른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과관계의 법칙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지는데요. 첫째는 ‘한 가지 원인에 의하여 다양하고 많은 결과가 오는 경우’, 둘째는 ‘수많은 원인을 만들고 또 만들어 하나의 결과를 얻는 경우’ 입니다.

이러한 <인과관계의 법칙>은 사실 아주 오래 전부터 우리 조상들에게 있어 온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것입니다. 이 속담은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결과는 모두 나의 노력 여하에 달려있다’는 말인데요. 인간 만사 모두 이 원칙을 떠나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만약 누군가 심지도 않았으면서 거두려 한다면, 잘못 심고서는 바른 것을 거두려 한다면, 또 적게 심고도 많은 것을 거두려 한다면, 우리의 삶과 이 세상은 상당히 어지러워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수고하지 않고 거두려 하는 것은 그야말로 도둑심보이고, 잘못된 것을 심고서 바른 것을 거두려는 것은 도박에 가깝고, 적게 심고는 많은 것은 거두려는 것은 복권 심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이 잘 되는 사회는 건강하지 못하고, 또 그렇게 해서 잘 되었다고 해도 100이면 100, 그 최후는 불행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원칙은 잘 지켜져야 합니다.

따라서 콩 심은 데 콩이 나야하고, 팥 심은 데 팥이 나야하는 이 원칙은 가장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삶의 원칙이자 삶의 질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하나님의 원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에 합한 원리라는 말입니다. 로마서 1장 20절에 보면,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하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일반적인 세상의 원칙을 세우시고, 그것으로 온 세상과 인류의 삶을 통치하신다는 말입니다. 그 하나님의 통치의 원리 가운데 하나가 이 <인과관계의 법칙>이라는 것이죠.

오늘 본문 18절에도 바로 이 인과론, 즉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이론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내 마음의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죄악을 품는다”라고 할 때, ‘품는다’는 말의 의미는 ‘바라보다, 주목하다, 느끼다’라는 뜻입니다. 즉 기도하는 성도가 하나님만을 바라보지 않고 다른 대상에게 눈길과 마음을 빼앗긴 채로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듣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그 순간에 해결하지 못한 죄를 그대로 품고 있을 경우, 또 응답받기를 바라고 구하는 것의 목적이 하나님 앞에 합당하지 않을 경우, 바로 그럴 때에 하나님은 그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신다는 말씀입니다. 나아가 우리의 행실이나 삶이 잘못되었을 경우,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수고에 적당한 대가와 결과를 주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즉 기도하는 자리에서 올바른 기도를 심거나 뿌리지 않으면, 신앙생활을 하면서 올바른 삶을 살지 않으면, 그리고 자신의 일이나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그에 합당한 것을 심거나 뿌리지 않으면, 즉 정상적이고 정직하게 그리고 열심히 뿌리거나 심지 않은 사람은 기도 응답, 풍성한 신앙생활, 그리고 자신의 일과 인간관계에서의 열매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바르게 살고, 정당하게 일하고 신앙생활 하여, 그에 합당한 열매를 거두시기 바랍니다. 하지 않고 한 것처럼, 뿌리지 않고 따먹으려는 사람처럼, 적게 하고 많이 받으려는 사람처럼 살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3. 콩도 팥도 심지 않았는데(19~20)

그런데 오늘 본문 후반부는 이와는 또 다른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16절부터 18절에서는 세상에서 말하는 <인과관계의 법칙>과도 같은 말씀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19, 20절에 와서 그와는 전혀 다른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먼저 19절을 시작하는 단어를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시인이 19절을 시작하면서 왜 “그러나” 라고 했겠습니까? 여러분은 시인이 이 부분에서 “그러나”라고 한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시인은 앞에서 ‘콩 심은 사람이 콩을 얻고, 팥을 심은 사람이 팥을 얻는 것이 당연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과 그 은혜를 받고 사는 성도에게는 반드시 이 원칙이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 아니더라는 말을 하기 위하여 이 “그러나”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19절 이후를 계속 보시면, “그러나 하나님이 실로 들으셨으며 내 기도 소리에 주의 하셨도다”라고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자신이 하나님이 들어주실만하고 그의 기도에 주의를 기울여 주실만한 신앙이나 삶이 없었거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자신의 기도를 들으시고 자신의 부르짖음에 주의를 기울여 주셨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 단기선교 기간 동안, 제가 바로 이 부분을 묵상하다가 얼마나 감동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일반적으로 구약 성경의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으로 묘사될 때가 많습니다. ‘공의의 하나님’이란 어떤 법칙과 원칙을 세우고 그 원칙대로 우리의 삶을 다스리신다는 뜻입니다. 잘한 사람에게는 상을 주시고, 잘못을 범한 사람에게는 벌을 주시는 것이 공의이지요. 착하고 성실하게 경건하게 사는 사람은 주님이 주시는 복을 받아 누리지만, 그 반대로 사는 사람은 가난하게 되고 약하게 되고 패배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원칙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를 보면 거의 그대로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나 구약 성경의 더 많은 부분에서 만나는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뿌리지 않은 자로 곡식을 거두게 하셨으며, 일하지 않은 자에게 삯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게 하신 일이며,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하신 일이었습니다. 이런 일들을 통하여 하나님은 자신이 공의보다는 은혜의 하나님이심을 보이셨습니다.

오늘 본문이 말하려는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분명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의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듣지 않으신다는 일반적인 법칙을 가지신 분입니다. 상식적으로도 옳은 말씀 아닙니까? 하나님께 예배한다고 하면서 생각이 딴 데 가 있는 사람,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기도해야 하는 데 다른 것을 바라보는 사람, 어떻게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시겠으며, 그의 기도에 응답하시겠습니까? 따라서 이것은 반드시 지켜져야 하는 중요한 법칙, 그리고 그 동안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통치하시고 인류와 일반 역사를 주관해 오신 아주 중요한 법칙입니다. 그런데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법칙은 당신의 백성인 여러분에게 와서 그만 깨어져버리고 말았습니다.

다시 오늘 본문의 시인의 입장으로 돌아가 봅시다. 그는 하나님이 들으실 만하고, 자신의 기도에 귀를 기울여 주실만한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들어주셨고, 그의 기도에 주의를 기울여 주셨습니다. 19절에서 그는 “그러나 하나님이 실로 들으셨으며‧‧‧”라고 하는데요, 여기서 “실로”는 놀람이나 두려움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즉 시인은 자신이 부족하고 허물이 많고 불순종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셨다는 것에 놀라고 있는 것입니다. 이어서 20절에서 그는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저가 내 기도를 물리치지 않으시고, 그 인자하심을 내게서 거두지도 아니하셨도다” 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물리치다”라는 말의 뜻 가운데는 ‘고개를 돌려 외면하다’는 것이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일반적인 원칙대로 한다면, 하나님은 자신의 부족과 허물 때문에 자신을 외면하셔야 하고, 그의 기도를 물리치시고, 그리고 자신을 향한 인자를 거두어 가시는 것이 옳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은 “하나님을 찬송하자”고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바로 이것이 오늘 시인이 받았고 저와 여러분이 받아 누리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만약 18절 말씀처럼 “내가 내 마음의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는 원칙이 그대로 여러분의 삶에 적용된다면 여러분은 지금 어떤 모습일까요? 여러분의 마음의 품은 생각과 감정, 그동안 한 행동, 그리고 여러분이 흘려버리거나 놓쳐 버린 것들, 낭비한 시간들과 함부로 취급했던 일들, 그리고 여러분의 인간관계들, 즉 여러분이 제대로 뿌리거나 심지 못한 것들의 그 결과를 여러분들이 그대로 받아야 한다면, 과연 지금 여러분의 모습은 어떨 것 같습니까? 만약 하나님께서 제게 제가 ‘심은 대로 거두며 살라’ 하시고, 제가 ‘뿌린 것만 먹으라’ 하시고, 제가 ‘잘못 한 행동과 삶의 열매만 먹으라’고 하신다면, 제 인생은 너무나 쓰고 고달프고 아프고 괴롭고 답답하고 가난할 것입니다. 아니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서 벌써 이 땅에서 없어졌을 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은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참으로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제가 심지 않고 뿌리지 않은 것을 오늘도 먹고 입고 누리게 하시며, 제가 잘못한 그 모든 결과와 열매들이 제 인생의 밥상에 오르지 않게 해 주셨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인과관계의 원칙> 속에 가두어 두지 아니하시고, 19절과 20절의 원칙으로 저와 여러분을 대해 오셨습니다. 은혜의 원칙, 사랑의 법칙이 여러분에게 적용된 것입니다. 심거나 뿌리지 않았는데도 남들보다 더 많이 가지고 누리게 하시는 은혜, 내가 별 힘쓰지 않았는데도 땅을 정복하게 하시는 은혜, 우리 가족과 어린 자녀들과 연로하신 부모님 등 내가 다 일일이 챙겨주지도 못하는데도 하나님께서 챙겨주시는 은혜 등, 이것을 어찌 다 말로 할 수 있을까요? 그러니 주님께 감사하고, 또 감사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4. 은혜 아니면 ․․․

저는 지난 주 동안에 아프리카 케냐에서 선교하시는 안찬호 선교사의 <들어쓰심>이라는 책을 감동적으로 읽었습니다. 그는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한 듯이 막 살다가 급기야 광산에서 갱도가 무너져 죽기 일보직전까지 갔었습니다. 그런 그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고 신학을 공부한 후에, 40세라고 하는 늦은 나이에 아프리카 케냐에 사는 아프리카 전사(戰士)의 상징인 마사이 부족 선교사로 갔습니다. 그런데 이 양반이 선교사로 가면서 무슨 선교학적인 이론이나, 문화인류학적인 접근, 혹은 최소한 자신이 갈 부족과 그들의 문화와 특성에 대한 공부라도 하고 갔느냐? 그것을 일절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무작정 차를 타고 가다 내린 곳에서 사역을 시작했고, 그곳 원주민 언어인 스와힐리어는 고사하고, 선교사의 필수과목인 영어조차도 유치원 수준 밖에 안 되는 데도 그대로 원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렇게 사역한 지 벌써 17,18년째를 맞고 있는데요. 지난 사역의 결과 현재 수많은 유치원,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 대학교, 신학교와 병원 등을 지었으며, 35만 마사이 부족 전체가 존경하여 떠받드는 명예 대추장이 되었습니다.

많은 선교학자들이 이 안찬호 선교사를 연구한다고 합니다. “선교 이론대로 선교하지 않고, 도무지 어떤 원칙이라는 것을 찾아 볼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어떻게 성공했을까?” 이것이 선교학자들의 고민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의 책을 읽어보면, 이 안찬호 선교사에게도 확고한 원칙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가진 원칙은 무엇일까요? 그의 원칙은 무조건 하나님께 매달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사역하다 안 되면 산에 올라가 나무를 붙잡고 그 뿌리가 뽑힐 때까지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언어가 안 되고, 의사소통이나 문화적인 이해가 안 되어도, 무조건 말씀에 따라 ‘아멘’으로 밀어붙인 결과, 사나운 마사이 부족민을 변화시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말씀은 안찬호 선교사는 선교사로서, 마사이 부족과 그들의 문화에 따라 제대로 된 선교의 콩이나 팥을 심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오직 당신만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바라보는 안 선교사를 기뻐하시고 복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법칙이고, 이 법칙이 오늘 여러분에게 적용되고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이 세상과 인생살이는 하나님이 내신 일반적이고 보편타당한 법칙들에 의해 유지됩니다. 그것은 일종의 기차의 철로와 같습니다. 그것을 벗어나면 혼란스러워집니다. 그 중의 하나가 <인과관계의 법칙>이지요.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심은 대로 거둔다.” 공짜도 없고, 부정도 없고, 도박도 없습니다. 다만 성실히 심고 뿌리고 가꾸고 노력한 자 만이 열매를 거둘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외 없는 법칙은 없다”는 말처럼, 이 <인과관계의 법칙>이 반드시 지켜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 전능하신 주권과 섭리로 하나님의 백성된 저와 여러분에게 또 다른 원칙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심은 대로 거두는 인과관계의 법칙이 아닌 은혜의 법칙입니다. 죄인은 반드시 자신의 죄로 인하여 고난당하거나 죽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대신 죽어주시고, 당신의 아들을 주신 그때로부터 하나님은 우리에게 각양 좋은 은사와 선물들을 주시고 있으며, 우리에게 성령과 말씀으로 말미암아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복과 신령한 은혜를 한없이 주시고 있습니다. 우리가 전혀 심거나 뿌리지 않았는데도 말입니다.

이 법칙으로 여러분을 대하시는 주님을 찬양하고, 그 하나님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분명 여러분의 삶은 성실히 일하고 열심히 노력하여 그 열매를 거두어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서 살아온 지금까지의 우리의 삶은 이 <인과관계의 법칙>을 벗어난 것이 더 많았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인과관계의 법칙>이 아닌 <은혜와 사랑의 법칙>으로 여러분을 대하시는 주님께 늘 감사하고 찬양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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