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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은혜에 붙잡혀 사는 사람 (고후 6: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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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에 붙잡혀 사는 사람 (고후 6:1-10)

성경에는 예수님께로부터 은혜 받은 사람이 많습니다. 문둥병자였다가 고침을 받은 사람들은 얼마나 큰 은혜를 입었습니까? 심지어 죽은 사람을 살리셨으니 그 얼마나 감사할 일입니까? 장례 하러 가시던 길에 만난 죽은 청년도 살아  났습니다. 이 많은 사람들이 일생일대에 귀중한 은혜를 받았는데 성경을 보면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사람들이 그 다음에 어떻게 살았다하는 이야기가 거의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저런 은혜를 예수님께서 베풀고 여러 사람들이 은혜를 입고는 그 다음에 어떻게 됐다는 말이 없습니다.

우리들도 궁금한 이런 특이한 점을[오스카 와일드]라는 사람이 나름대로 추리해서 우화적인 단편소설을 썼습니다. 예수님이 과거에 은혜를 베푼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만나본 일이 있다는 것으로 소설은 설명합니다.
예수님이 길을 가시다가 어떤 곳에서 알코올 중독자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가만히 보니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묻습니다."우리 어디서 본 일이 없습니까?"그 사람이 대답합니다."아, 있지요. 나는 본래 절름발이 이었는데 예수님께서 고쳐주셔서 제가 이렇게 걷게 되었습니다. 절름발이였을 때에는 이렇게 저렇게 얻어먹고 살았는데 건강해지고 나니 할 일이 없어요. 또 누가 나를 환영하지도 않고. 그래 이럭저럭 하다 보니 타락해서 이렇게 알코올중독자가 되었습니다."그럽니다. 가시다가 또 한사람을 만났는데 이 사람은 창녀였습니다."네가 창녀일 때에 내가 용서하고 구원했는데 아직도 창녀냐?"하고 꾸중하듯이 물었더니 이 창녀가 대답하는 말이"물론이지요. 제가 예수님으로부터 구원받고 새사람이 되어서 하나님의 딸이 되고 감사해서 창녀생활을 청산했었지요. 그런데 아무도 거들떠보는 사람이 없고 갈 데도 없고 할 일도 없고 그리고 무엇보다 외로워서 살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힘들지만 다시 옛날 직업으로 돌아와서 삽니다."예수님이 가슴아파하시면서 또 한 곳에 가서 혈기를 부리면서 싸움질을 하고 있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 사람 역시 옛날에 본 사람이었습니다."자네는 어떻게 폭력배가 되었나?"하고 묻습니다. 그랬더니 이 사람의 대답이"예수님 저는 원래 시각장애자였는데 예수님께서 저의 눈을 치유해주셨습니다. 그래서 감격하고 감사했습니다만 눈 감았을 때는 몰랐는데 눈뜨고 보니까 아니꼬운 사람들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더럽고 치사하고 모순되고 부조리하고 부정부패 사치와 타락, 여기에 울분이 터져서 주먹을 쓰다 보니 조폭이 되었습니다."하더랍니다. 이거 말은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단편 속에 정말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할 것은 예수님께로부터 은혜를 받았고 예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까지는 좋은데 그 다음은 과연 어떻게 살아야하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받은 바 그 귀한 은혜를 지켜가며 그 소중한 은혜 안에 살아가느냐 아니냐하는 그것이 문제입니다.

철학자[파스칼]은 이 세상 사람들은 모두가 두 가지의 죄인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는"나는 죄인입니다"라고 죄인 됨을 알고 사는 죄인이요, 또 하나는 죄인이면서도"나는 죄인이 아니라"고 내 잘못까지도 남에게 떠맡기고 사는 교만한 죄인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씀에 잇대어 생각해 봅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안 입은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가 은혜 속에 태어나서 은혜 속에 삽니다. 그러나 은혜를 아는 사람과 은혜를 모르는 두 가지 사람 밖에 없습니다. 은혜에 감사하며 사는 사람이 있고 은혜를 배반하며 사는 사람 이렇게 두 종류의 사람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은 은혜를 입은 자로서 과연 은혜로 은혜 되게 하는 길에 서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무수한 은혜를 베풀어 주셨고 그 은혜를 분명히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은혜로 은혜가 되지 못하게 할뿐만 아니라 오히려 저주로 만들어 가고 있다면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저주가 딴 게 아니고 불행이 딴 게 아닙니다. 은혜 받은 자가 은혜로 은혜 되지 못하게 하면 그것이 곧 저주이지 무엇이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우리는 생각해 봐야합니다. 나는 과연 하나님의 은혜에 붙잡혀 사는 사람인가 아니면 은혜로 저주되게 하여 사로잡혀 살아가고 있는가를 생각해야합니다.

오늘 본문 속에서 우리는 은혜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 보아야합니다. 내가 받은 은혜는 무엇이며, 나는 은혜 받은 자로서 합당한 삶을 살고 있는가를 스스로 진단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은혜를 받았다고 하면 먼저 은혜 속에 있는 깊은 뜻을 알아야합니다. 은혜 속에 말씀이 있습니다. 그 은혜 속에 목적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이 말씀하십니다."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그 목적성이 무엇이겠습니까? 받은 은혜를 소중히 여겨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라는 말씀입니다. 은혜를 받았습니까? 함부로 은혜를 쏟아버리지 마십시오. 우리가 은혜를 입은 것은 어마어마한 기적입니다. 그렇다면 감격해야 됩니다. 그리고 은혜를 베푸셔서 부르신 이의 깊은 뜻을 헤아려야 됩니다. 은혜에 대한 보답은 만족하는 기쁨으로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 만족과 충만함이 사람을 내적으로 변화하게 하는 것이지요. 즉 그 은혜를 올바로 알고 지키며 살 때 성품이 변하고 가치관이 변하고 세계관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사람이 속이 변하면 얼굴도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표정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싱글벙글하는 사람을 보면 우리가 뭐라 합니까?"뭐 좋은 일 있냐?"고 묻습니다. 틀림없이 숨길 수 없이 좋은 일이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거거든요.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의 가장 좋은 인상은 늘 싱글벙글하는 사람입니다. 사람을 만나면 생긋 웃으면서 인사하는 그것이 얼마나 좋은 것입니까? 좀 웃읍시다. 은혜를 입었으면 은혜 입은 사람답게 달라져야죠.

교회만 오면 찬송도 예쁘게 부르고 열심히 기도도 하고 아주 교회생활을 잘  하는 어떤 여 집사님이 자기 남편에게 교회 나가자고 자꾸 조르는 바람에 이 남편이 하는 수 없이 한 달에 한 번씩 교회에 따라갑니다. 그런데 따라가서는 그냥 졸다가 오는 것입니다. 부인이 보니까 몇 달을 다녀도 가자면 그저'죽은 사람의 소원도 들어주는데'하는 그런 마음으로 따라올 뿐이지 은혜를 못 받는 것 같습니다. 남편이 좀 은혜를 받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애를 쓰다가 유명한 목사님이 부흥회를 한다고 해서 잘 달래가지고 갔는데 역시 졸기만 하고 있는 겁니다.

속상해서 다음날 또 데리고 가서"여보, 오늘은 아랫목에 가서 뜨끈뜨끈한데서 은혜 받읍시다."하면서 제일 앞자리에 가서 앉았는데 남편은 여전히 졸고 있습니다. 속이 상해서 집에 오면서"당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하면서 숨겨진 성질을 부립니다. 그러니까 남편이 빙그레 웃으면서 하는 말이"은혜 받으면 어떻게 되는데? 당신처럼 사는 게 은혜 받은 거야? 나 은혜 별로 바라지 않아"그러더랍니다. 이 말에 부인이 할 말이 없습니다. 사실이지 교회 오면 괜찮은 것처럼 살았지만 집에 가면 영 딴판이었습니다. 은혜 받은 사람으로 살기위해서는 그 부인의 마음속에 감격이 있고 생활이 변화가 왔어야 되는데 그것은 없이 잔소리만 하면서 살았습니다. 말하자면 말에는 은혜가 있었는데 성품에는 없었습니다. 남편이 그런 은혜라면 나는 받고 싶지 않다고 할 만큼이었으니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참 은혜는 삶의 의미를 변화시키고 새사람이 되게 하고 얼굴까지 달라지고 마음도 달라지고 말도 변하게 합니다. 그래서 은혜는 다른 사람까지도 감동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받은바 은혜를 잘 지켜가려면 겸손해야 됩니다. 은혜의 극치는 겸손입니다. 그에게 나타나는 겸손의 모습이 곧 그 사람의 은혜를 말해줍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겸손은 얼마만합니까? 그 크기만큼 은혜에 살 것입니다. 은혜를 모르는 교만한 사람은 은혜 받았다가도 쏟아버립니다. 그래서 은혜는 받으면 받을수록 점점 더 겸손해집니다. 점점 더 자신은 낮아집니다. 모든 사람이 나보다 훌륭해 보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나보다 의로워 보입니다. 아니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십니다. 사도바울을 보세요. 육체의 가시를 주어서 교만하려고해도 교만할 것이 없이 꼼짝 못하게 만듭니다. 교만할 거리가 없게 싹 제해버리고 나니 바울은 겸손해졌습니다. 무슨 병인지 알 수 없지마는 계속 그를 괴롭히는 병이 있었습니다. 갈라디아 교회에서 설교하다가 쓰러질 정도로 병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병을 고쳐주시지는 아니하시고<누가>라는 의사를 계속 동반하게 했습니다. 병을 가지고 일하게 하시면서 하나님의 일에는 지장이 없도록 해주었습니다. 그때 바울은 깨달았습니다.'이것이 있음으로 내가 겸손하다.'그리고 결국 그는 고백합니다."나의 나됨은 오직 은혜요 내게 주신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오늘 내가 있다"얼마나 큰 겸손입니까? 그 뿐입니까? 바울은 그 은혜에 얼마나 만족합니까?"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여러분에게 주어져있는 은혜를 충분하게 생각하십니까? 정말 더 바랄 것이 없습니까? 이대로 만족합니까? 받아들이는 거기에 은혜의 지속성이 있습니다.

현실이 어려워도 은혜요, 형통해도 은혜입니다. 모든 것을 은혜로 볼 줄 아는 사람이 은혜로 은혜 되게 하는 사람이요, 이 사람이야말로 은혜를 입은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 2:9절에서"내게 주신 은혜를 앎으로"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는 길리기아 다소라는 이방 땅에서 디아스포라 속에서 태어납니다. 사실 이것은 나그네의 생활 속에서 그리 행복한 생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뒤늦게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가 있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은혜를 은혜로 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오늘 본문 9-10절에 정말 소중한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현실을 은혜로 아는 자가 보여주는 고백입니다."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얼마나 귀한 고백입니까?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는 헛되이 받아서는 안 됩니다.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 은혜를 저버리는 자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 믿고 장로, 권사, 안수집사 혹은 그 어떤 직분 자가 되었습니까? 예수 믿고 성도가 되었습니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그것은 분명 은혜입니다. 귀하게 받은 은혜를 쏟아버리는 자가 되지 맙시다. 받은바 은혜에 붙잡혀 삶으로 말미암아 나의 나됨을 깨닫는 은혜가 점점 더 깊어지고 은혜를 지속하는 지혜가 점점 더 높아지고 신앙의 더 많은 열매를 맺으며 충만한 은혜 가운데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사는 그런 귀한 생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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