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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의 태도 (눅 17: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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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의 태도 (눅 17:1~10)

요즘 우리교회는 참 좋은 소문이 나고 있습니다.
특별히 9시 MBC 뉴스에서는 우리 교회가 갑자기 나왔습니다.
그때 전 후의 뉴스 내용과는 별로 상관이 없이 우리 교회가 나왔습니다.
덕분에 저는 가문의 영광으로 9시 뉴스에 제 얼굴이 약 3초간 나왔습니다.

그 후에도 ‘뉴스 후’라는 프로그램에서도 비판의 대상이 된 교회의 정 반대 케이스로
  제일 먼저 언급된 교회가 우리 교회입니다. 

하여간 지금 한국에서는 몇 몇 큰 교회들이 언론의 표적이 되어 비판을 받고 있고,
    그 정반대편의 바람직한 대표케이스로 우리교회가 부각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사회의 칭찬과 주목을 더 받게 되었습니다.

지난 주 당회 때에 중직을 맡으신 장로님께서 “우리 교회가 더 특별히 한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대단한 일을 한 것처럼 오해하거나 들뜨면 안 됩니다.”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는 그 말씀이 맞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교회가 가진 ‘보이지 않는 성전을 짓는’ ‘희년 정신과 프로젝트’는 정말 이 시대에 꼭 필요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신합니다.

이렇게 다른 사람들과 사회의 칭찬과 주목을 받는 이 때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이 오늘 본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 누가복음 17:1 -10은 예수님께서 자기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실족케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그렇게 하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이 작은 자 중에 하나라도 사람을 실족케 하지 말아라.”하십니다.

실족케 하느니 차라리 연자맷돌을 그 목에 메고 바다에 던지우는 것이 낳다고 하십니다.
이 말은 목숨을 걸고라도 실족케 하지 말라는 아주 강한 표현입니다..

그럼 실족케 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합니까?
영어 성경을 보거나 원어 성경을 보면 실족케 한다는 뜻은 “죄를 짓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실족케 한다는 말은 ‘나로 말미암아 죄를 짓게 만든다’는 뜻이다.
나만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그로 말미암아 남도 죄를 짓게 만든다”는 것을 뜻합니다.

세상에서 죄를 짓지 않고는 살 수 없습니다.
내가 범죄하는 것보다 더 조심해야 할 것은 나로 남이 죄를 짓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명심할 것은 내가 바로 죄의 원인이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죄를 짓는 사람들을 보면 대개가 ‘물귀신’작전을 씁니다.
“나도 지니까 너도 지라”는 식입니다.
그런데 명심해야 할 것은 그러한 사람에게는 화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제자인 너희들은 목숨을 걸고라도 그러한 죄의 원인이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인 우리가 죄의 원인이 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그것은 화를 불러오는 어리석은 행동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아서 누군가를 실족하게 하는 일에 내가 쓰임을
  받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평소 개인의 삶에서도 그렇고, 교회로서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우리와 우리교회는 다른 교회와 성도들을 실족케 하지 말아야 합니다.

누가복음 17장의 매력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정말 이 장은 예수님이 제자들을 위해서 특별히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마태, 마가 복음서에서는 말하지 않은 제자들에게만 주시는 속편이 있습니다.
그 독특한 내용이 3절부터 연이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3절에서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고 하십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는 이 말은 어디에 걸리는 말일까요?
그 앞의 1, 2절의 내용일까요? 아니면 3절에 연이어 나오는 내용에 걸릴까요?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라는 말은 그 앞의 1, 2절에 걸리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무엇을 스스로 조심하냐고 하면,
  우리가 실족케 만들지 않도록 스스로 조심하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로 인해 누군가 범죄하게 된다면 그것은 화를 자처하는 것이므로 스스로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의식적으로 주의하라는 이야기입니다..

눅 17장 3절에서는  예수님은 다른 마18장이나 막9장에서 하지 않으신 요구를 덧붙여서
  제자들에게 하십니다.

어떤 요구입니까?
누군가 (너에게 대해서) 죄를 범하거든 먼저 경계하라고 하십니다..
경계하라는 것은 그렇게 하는 사람을 타일러서 주의시키고 심하면 꾸짖으라는 것입니다.
거기까지는 모든 사람이 다 쉽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에게는 한 단계 더 높은 것을 예수님이 요구하십니다.

그것은 그가 회개하면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까지요?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회개하면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이건 정말 쉽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죄를 하루에 7번씩이나 범하고 뉘우치는 놈도 대단한 놈입니다.
더 대단한 것은 그것을 7번씩이나 찾아와서 용서해 달라고 하는 놈입니다..
근데 더 한 것은 그 사람을 7번씩이나 조건 없이 용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제자로서 예수님께 이러한 요구를 받으면 우리는 어떨까요?
저 같으면 차라리 7번째 찾아오는 놈을 개 패듯 패고,
  하나님께 울며불며 회개하는 것을 택할 것 같습니다.
아니면 제가 차라리 떠나겠습니다..
그건 참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어떤 핑계를 대시겠습니까?

대부분의 우리는 아마 “믿음이 없어서..”라는 핑계를 댈 것 같습니다..
그 정도를 순종할 사람은 거의 성자가 되어야 가능할꺼라고 우리는 기가 죽습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자들이 그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5절입니다.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이렇게 말하는 제자들의 마음이면에는 어떤 마음이 있을까요?
지금 이 상황은 예수님이 제자들만 모아 놓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7번씩 용서해라” 라는 식의 이야기는 군중들 앞에서는 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만에게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제자들 마음에는 아마도 이러한 마음이 들었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이다.. 사도들이다...”
“우리니까 예수님이 우리 믿고 하신 말씀일 것이다.” 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대단한 일을 할 수 능력을 제자인 우리에게 더 주옵소서! 라는 식으로
  “믿음을 더하소서”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요구하신 그것은 마치 큰 믿음이 있어야지만 가능한 일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가 갖고 있는 믿음은 너무 적기 때문에 더 큰 믿음을 구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뭔가 내가 대단해져야 가능한 일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뭔가 내가 어떤 수준에 이르러야만 그것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반면에 제자들 마음 한 구석에는 이제야 예수님이 우리에게 대단한 것들을 말씀하시는구나!
내가 드디어 그러한 반열에 들었구나...!!!
그렇다면 더 큰 믿음을 구해야 하겠다.!!
이러한 뉘앙스입니다..

그러한 태도를 갖고 있는 제자들의 태도와 요구에 대해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6 주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결국 이 말씀은 무엇을 의미합니다.
겨자시는 볼펜으로 꼭 점을 찍으면 그 크기가 나타납니다.
아주 작은 것이 겨자씨입니다.

믿음을 더 해 달라고 했는데 예수님께서 점을 찍습니다.
그리고 “이만한 믿음이라도 있었다면 이 나무더러 들려서 바다에 심기우라 하면 됬을꺼다”하십니다. 그렇다면 그만한 믿음이 있다는 이야기일까요? 아닐까요?
용서하라고 해서 “용서합니다.”라고 말 하는 것이 쉽습니까?
아니면 저 나무 뽑아서 바다에 심겨라! 하는 것이 쉽습니까?
말만 하는 것이 쉽지요! 보이지 않으니까요?

나무를 바다에 심으라고 말하는 믿음이 더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니 그것이 가능케 하는 믿음이 겨자씨만한 믿음이라면 제자들이 구하는 ‘용서하게 하는  믿음’은 그 점 만도 못하다는 것입니다.
점 만한 믿음도 아니니 그것은 거의 없는 것입니다.
결국 그들이 구하는 그 믿음은 겨자씨만도 못한 것이며 뭔가 잘못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결국은 그들이 스스로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믿음’에 대한 생각이 뭔가 잘못되었고,  더 큰 믿음이 있어야 7번 용서할 수 있다는 것은 바람직한 태도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순서가 틀렸다는 것입니다..
7번씩 용서하는 것은 믿음을 더해야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조그마한 믿음으로도 먼저
  실천하면 가능하다는 이야기입니다.
믿음과 능력이 더해져야 가능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 말씀이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실족케 하지 말고 죄를 범한 형제를 매번 회개한다면 용서하라는
  말씀(명령)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라고 들었다면 우리는 믿음을 이미 가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당연히 적은 믿음으로 순종하기 시작해야 하는데 그것을
  안 하고 자기를 보고서는 “믿음을 더해 달라” 고 제자들은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해 예수님은 겨자씨만한 믿음도 없는 행동이라고 평가하시면서 “아주 작은 믿음이 어떠한 역사를 만드는가!”를 설명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예수님에 대한 아주 부족하고도 작은 믿음이 있다면, 다시 말해
  말씀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확신이 있다면, 그분의 명령에 대해서 일단
  순종한다면 역사는 일어날 것입니다..
거기서 더 큰 믿음이 있어야 한다고 앉아 있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성경에서는 예수님의 명령을 부족한 믿음으로라도 순종한다면 역사가 있겠다고 하십니다.
특히 오늘 같은 예수님의 명령은 내가 일단 순종해야 합니다.
거기서 꼼짝도 않고 믿음이 없다고 믿음을 더 달라고 하면 안 됩니다.
그러한 말과 지식이 있다는 것 자체가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명하신 것을 우리는 행하여야 합니다.
거기서 믿음을 더 구하면 안 됩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명하신 보이지 않는 성전을 짓는 것은 우리가 순종해야 합니다.
더 미루거나 포기하거나 믿음을 핑계대면 안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보이지 않는 성전을 짓는 일에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면 순종하여야 합니다. 혹시 보이지 않는 성전을 짓는데 아직 동참하지 못하신 분들이 계시다면 동참하시길 권합니다. 적은 참여에서부터 역사는 일어납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순종하는 제자들의 태도에 대해서 ‘종의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왜 이 말씀을 하느냐 하면 순종하여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날 때 그 역사에 쓰임 받는 사람들의 태도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말씀은 순종하면 당연히 역사가 일어날 것이 확신하시고
  “그 역사 뒤에 제자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말씀하십니다.
그때 모든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게 ‘종의 비유’를 들으십니다.
이때에는 노예제도가 있었기에 ‘종’이 누군지 무엇하는 사람인지 다 압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종이 밭에서 열심히 일하고 저녁때에 돌아왔다.
그때 주인이 그 종에게 “하루 종일 수고했으니 와서 앉아서 먹으라” 할 자가 있느냐?
주인이 밥상 다 차려놓고 종을 모실 사람이 있겠느냐? 하는 이야기입니다.
요즘이야 그럴 사람이 있지만 그 당시에는 그런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왜 그 사람은 종이기 때문입니다.

도리어 종에게 저녁 때 되었으니까 밥상을 차리라고 종에게 주인은 시킵니다.
그리고는 너는 “그 후에 치우고 먹고 마시라”고 합니다.
왜?  종이니까..
이것은 그 당시에는 주인뿐만 아니라 종들도 다 아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그 당시에는 당연한 일입니다.

밭을 갈고 양을 치고 그 이후로 저녁 차리라는 명령을 순종했다고 그에게 사례하겠느냐?
예수님은 또 말씀하십니다..
종님 감사합니다.. 당신이 이런 일을 하시다뇨...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 당시 상식 밖의 일이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이해 못하는 제자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면서 10절에서 결론을 지으신다.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라 할찌니라.”

내가 죄를 범한 형제를 용서하는 것이 대단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명령이기에 해야 할
  것을 한 것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형제를 실족케 안하고 실족한 형제를 용서하는 것은 당연히 예수님의 제자들이 해야 할
    일인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칭찬 받을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왜? 내 주인이신 예수님이 말씀하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제자로서 가져야 하는 태도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하나님의 일을 제자인 우리를 통하여 하십니다.
역사는 지금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오늘 날에도 하나님은 우리교회를 통하여 보이지 않는 성전을 짓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하신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통일을 준비하고 인재를 양성하고 가난한 자들을 자활시켜야 합니다.
계속 순종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통하여 역사하셨을 때 나는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합니까?
그것을 지금 예수님이 가르치시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 우리는 무익한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한 것 뿐입니다...라고 해야 합니다.
마치 역사가 나의 믿음 때문에 일어난 양.. 나의 능력 때문인 양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사실 정말 무익한 존재들입니다.
죽어 마땅하고, 버림받아 마땅한 사람들입니다.

내가 없으면 하나님은 다른 사람을 일으켜서 쓰실 것입니다.
꼭 내가 있어야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하나님이 나를 쓰시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쓰시면 우리는 반드시 이 고백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와같이...너희도 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쓰셨을 때 어떤 역사가 이루어졌을 때 우리가 누구인지를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말씀과 명령에 순종하는 의미에서 ‘종’입니다.
종이 할 일은 순종하는 것입니다.
종이 댓가나 사례를 늘 기대한다면 그것은 품꾼이지 종이 아닙니다..
종은 명령대로 해야 할 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우리를 통하여 일어난 후에 혹시 내 마음에 교만한 생각이 들때마다,
  마치 이 모든 것을 우리가 잘나서 한 것 같은 자만심이 들려고 할 때마다,
  우리는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대사를 해야 할 것입니다.
“나는 무익한 종입니다. 나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사회에서 칭찬 받는 일을 하고 있는 우리교회, 그리고 앞으로 더 큰 일을 할 우리교회가
  꼭 명심해야 할 대사입니다.
개인의 삶에 또 교회로서 우리의 삶에 이 고백이 때때마다 넘치길 원합니다.
(문희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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