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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두려워하지 마세요 (롬 8: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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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워하지 마세요 (롬 8:12-17) 

<현대인의 어두운 그림자, '두려움'>
세상 살다보면 두려워 할 일이 많습니다. 몰래 저지른 죄가 드러날까 봐 두렵습니다. 숭례문이 전소되었을 때 책임소재를 묻는 공방전이 치열했습니다. 이전에 조금이라도 잘못한 분들은 다 두려움에 떨었을 것입니다. 전에 학위 위조 문제로 시끄러웠을 때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감추인 것이 드러날까 봐 두려워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자기가 잘한 일이 세상에 안 알려질까 봐 두려워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것만큼은 제발 세상이 좀 알아주었으면 하는데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 서운하고 또 두려운 사람들이 있지요.

두려움은 날마다 현대인을 위협하는 원수입니다. 왜 두려워할까요? 자기 힘으로 통제할 수 없는 어떤 힘에 의해, 가고 싶지 않은 어떤 곳으로 끌려간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두려워하지요. 작년에 미국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21세 된 벤 카펜터(Ben Carpenter)라는 청년은 근육 위축증에 걸려 전기 휠체어를 타고 다녔습니다. 어느 날 휠체어를 타고 인도(人道)로 가는데 트럭이 덮쳤습니다. 순식간에 트럭 앞에 휠체어가 끼여 대롱대롱 매달렸습니다. 운전사는 이 사실을 모르고 운전을 계속했습니다. 벤이 탄 휠체어의 바퀴는 쉬지 않고 돌아갔습니다. 다행히 지탱해주고 있었던 안전벨트 덕분에 벤은 밑으로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행인들이 이 광경을 보고서는 911에 전화를 했습니다. 한 4km 정도 간 다음에서야 벤은 구조될 수가 있었습니다. 감사하게도 벤은 멀쩡했습니다.

이 트럭에 매달린 휠체어처럼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힘이 우리가 원치 않는 방향으로 우리를 끌고 가려고 하기 때문에 두렵습니다. 미래가 불확실하기 때문에 두려운 것이지요. 그러나 오늘 바울 사도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격려합니다. 우리를 위협하는 힘이 아무리 크다고 할지라도 그보다 훨씬 더 큰 힘이 우리를 보호하신다는 것입니다.

<'두려워하는 종의 영'으로부터 벗어나야>
본문 15절을 보세요.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오늘 이 말씀을 들으시고 큰 용기를 얻으시기 바랍니다. 일체의 두려움을 이겨내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중요한 말이 '무서워하는 종의 영'입니다. 새번역은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의 영'이라고 했습니다. '무서워하는 종의 영'과 정반대 되는 말씀이 '양자의 영'입니다. 여러분, 먼저 무서워하는 종의 영이 무엇일까요?

요즈음 출애굽기 강해를 하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꼭 그랬습니다. 애굽을 탈출했는데 하나님은 지름길이 아닌, 훨씬 더 험하고 시간도 많이 걸리는 광야길로 인도하셨습니다.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고 있지 뒤로 가면 애굽 군대가 추격해오지 진퇴양난에 빠졌습니다. 바로 이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의 영에 사로잡혔습니다. 즉시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불평과 원망을 쏟아 붓습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히기 때문에 불평과 원망을 하는 것이지요. 

개가 낯선 사람을 보면 왜 짖습니까? 두려움 때문에 짖습니다. 정서적으로 안정이 된 개는 잘 짖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어느 때에 하나님과 모세에게 원망과 불평을 토로했습니까? 두려움이 생길 때 그랬습니다. 그리하여 출 14: 10절은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두려워한 나머지 뭐라고 불평하고 원망했습니까? 왜 애굽에 매장할 때가 없어서 여기 광야까지 끌고 와 우리를 죽게 하느냐는 것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항상 바로와 모세 사이에서 방황합니다. 좀 힘들고 불안정하고 시련이 기다리고 있어도 모세를 따라 자유와 해방의 길로 나갈 것이냐, 비록 종노릇하더라도 등 따습고 배부른 애굽으로 돌아가 바로를 섬길 것이냐, 항상 이것 때문에 고민합니다. 두려움이 생길 때마다 나타나는 전형적인 패턴이지요!

코앞에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고난과 위기가 닥쳤습니다. 그 때 문제와 고난과 위기에 시선을 고정하면 우리는 두려움에 빠집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랬지요. 문제를 해결하시고 고난과 위기를 타개해주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두려운 것이지요. 사도 바울은 바로 그런 사람을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살이의 영을 받은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이 두려워하는 종의 영을 벗어 던져야 합니다. 미래가 불확실합니다. 언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의 영에 사로잡혀서는 안 됩니다.

<양자로 삼으시는 영을 받았으니>
이제 좋은 소식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않고 '양자의 영'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좋은 말씀인지요! 예수 안에 있을 때 우리는 두려움의 노예가 되지 않습니다. 노예는 무엇입니까? 시키는 대로 하는 사람이 노예이지요.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해도 벗어날 수 없는 이가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의 영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조금만 고난과 위기가 닥쳐와도 두려워합니다. 모세와 함께 자유와 해방의 땅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애굽으로 돌아가 바로를 섬기려고 합니다. 두려움의 종이 되어 꼼짝달싹을 못하고 그저 시키는 대로 했던 것이지요!

이제 우리는 예수 안에서 두려움의 종살이로부터 벗어나 양자의 영을 받았습니다. '양자의 영'을 새번역은 '자녀로 삼으시는 영'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여기서 '양자'라는 말은 조금 설명이 필요합니다. 영어 성경을 보면 'Sonship'이라고 되어 있는데 희랍 원어는 'Hiothesias'로 되어 있습니다. 'Hiothesias'는 '양자로 삼는다'(to be adopted)는 의미를 갖습니다. 우리가 예수 안에 있을 때 하나님의 양자 양녀가 된다는 말씀이지요. 이 세상에 이보다 더 큰 영광이 또 어디 있습니까!

로마시대는 철저한 가부장중심제였기 때문에 아버지가 자식들의 출생에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전권을 다 갖고 있었습니다. 이를 지칭하는 전문 용어가 'patria potestas', 즉 '아버지의 권력'(the power of the father)이라는 말입니다. 예컨대 새로 태어난 아이가 있을 때 아버지가 어머니한테 아이를 버리라고 명령할 경우 어머니는 반드시 따라야만 했습니다. 로마 군인이 임신한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가 발견되었습니다. "남자아이일 경우 살리고 여자아이는 죽이시오." 이렇게 생부(生父)로서의 아버지는 그야말로 무소불위의 권세를 가지고 자식을 죽일 수도 살릴 수도, 노예로 팔아 넘길 수도, 유산을 한 푼도 안 물려줄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양자로 들어갈 경우 운명은 180도 달라집니다. 로마법에 명시하기를 양자로 입적된 사람은 양부로부터 그 어떤 해를 받아서도 안 되었고 반드시 유산을 물려받게 되어 있었습니다. 한번 양자로 들어가면 죽을 때까지 양자로서의 특권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이지요! 노예로 있다가 양자가 되었습니다. 종살이는 끝나고 자유가 보장됩니다. 엄청난 빚을 떠 안고 있다가 부잣집에 양자가 되었습니다. 빚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양부가 깨끗이 청산해줍니다. 범죄를 저질러 이력서가 안 좋습니다. 양자로 입적되는 순간 범죄 기록이 말소가 되어서 깨끗해집니다. 이와 같이 로마 사회에서 양자가 된다는 사실은 새로 태어난 것과 마찬가지로 새 아버지의 새 자녀로서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다는 사실을 의미했습니다!

로마 사회와 달리 유대인 사회에서는 양자 제도가 없었습니다. 간혹 노예나 하인을 가족으로 편입시키는 경우가 있었지만 자기 친자식들과 똑같이 대하지는 않았습니다. 상속자로서의 전적인 권리를 안은 채 양자로 입적되는 경우는 오직 희랍 로마의 관습이었습니다. 그래서 희랍 로마의 관습에 젖어있던 바울 사도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속하신 사건을 양자 비유로 설명했던 것입니다.

우리의 친부(親父), 즉 아담과 하와의 후손인 육신의 부모가 죄를 지어서 우리와의 진정한 영적 관계가 깨어졌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양자 삼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실 때 영적인 아버지 되신 하나님의 양자가 되어서 모든 특권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요 1: 12절은 말씀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예수님을 영접하면 하나님의 양자가 됩니다. 아버지가 사는 집이 누구 집이 됩니까? 아들집이 되지요. 사실 아들은 집 장만하는데 일원 한 장 보태준 것이 없지만 단지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아버지의 재산이 다 자기의 것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양자가 되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누릴 모든 권세를 누리게 됩니다. 그런데 로마 시대에 양자로 입적시킬 때 7명의 증인이 필요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양자가 된 것을 누가 증언해줍니까? 본문 16절을 보세요.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성령님이 우리 안에 내주하셔서 우리가 하나님의 양자 되었다는 사실을 증언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양자가 되는 과정이 얼마나 힘든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미국의 어떤 중산층 가정이 딸이 셋이나 있었지만 양자를 하나 들이기로 했습니다. 러시아 태생의 사내아이를 입적시키려고 결심했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이 보통 힘든 것이 아닙니다. 러시아에서 수속을 밟는 데에만 14개월이 걸렸습니다. 다시 미국에서 법적인 과정을 거치는데 12개월이 필요했습니다. 미국 판사는 물론이고 러시아 판사 앞에서 러시아어로 서약을 해야만 했습니다. 법적인 서류들만 두꺼운 바인더를 가득 채울 정도였습니다. 어떤 서류는 18쪽이나 되는데 기입을 완료하는 데에만 6일이 필요할 정도였습니다. 러시아에 두 번씩이나 가서 일주일 이상을 체류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니 수속하는 비용은 얼마나 많이 들었겠습니까?

이와 같이 세상 양자가 되는 길도 참 어려운데 하나님의 양자가 되는 길은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양자가 되는 길은 너무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됩니다. 행위나 공로가 아니라 오직 믿음 하나로 하나님의 양자가 되는 특권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있는 양자의 특권>
  이제 하나님의 양자가 되면 놀라운 특권 하나가 기다립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삼으시는 그 영 덕분에 하나님을 '아바,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영으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빠'라는 말은 '아바'(Abba)라는 말인데 아빠를 뜻하는 아람어를 희랍어로 음역해 놓은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이 아빠라는 말을 쓰시기 전까지 유대 사회에서는 그 누구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을 친밀하고 다정하게 부를 수 있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안에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모든 법적인 권리를 보장해주시는 양자가 되었습니다. 단지 양자가 되는 정도가 아니라 예수님과 더불어 공동 상속자가 됩니다(17절).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모든 영적인 유산을 우리도 똑같이 물려받게 된 것이지요! 

양자 비유는 참 놀랍습니다. 모든 친자식들이 사랑 받고 환대받는 것은 아닙니다. 이른바 생물학적인 부모로부터 버림받거나 학대받는 자녀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양자는 다릅니다. 아무도 우연히 어쩌다가 양자 삼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랫동안 기도해보고 이것저것 다 따져보고 결심합니다. 자신감이 생기고 책임질 준비가 되었을 때 양자를 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양자 삼으신 것도 마찬가지에요! 우연히 어쩌다가 하신 것이 아닙니다. 숱한 고민과 아픔을 통하여 결심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박으시는 엄청난 수고를 겪으시면서 결단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감사해야 합니다. 더 이상 두려워하는 종의 영에 사로잡혀서는 안 될 것입니다. 조금 불편하고 힘들다고 해서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 바로를 섬기려는 유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하나님의 양자로 삼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감히 부를 수도 없는 하나님을 '아바, 아빠, 아버지'라고 다정하게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둘도 없이 친밀한 관계속에 들어간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것은 무엇이든지 다 상속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육신의 아버지의 것이 다 내 것이듯이 영적인 아버지 하나님의 것이 다 내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동구라파가 아직 공산권이었을 때 리처드 범브랜드 목사님이 복음을 전하다가 투옥되었습니다. 성경을 읽다가 '두려워 말라'는 말씀에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성경에 '두려워 말라'는 말씀만 나타나면 밑줄을 그었습니다. 그랬더니 365회나 나오더랍니다. 그 때 이 목사님이 "그래. 맞아!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1년 365일 날마다 나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하면서 용기를 가졌다고 합니다.   

여러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두려움의 종살이로부터 벗어나 떳떳하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양자가 되십시오! 자유함이 있습니다. 풍성함이 있습니다. 거기에 소망이 있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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