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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마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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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마 5:4)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9)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10)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에게 주어지는 가장 큰 선물은 기쁨입니다. 우리 인생의 무거운 짐과 죄의 짐들을 예수님께서 다 가져가시니 어찌 기쁘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어렵고 힘들 때마다 의지할 수 있는 분이 계시다는 사실이 우리를 얼마나 든든하게 합니까? 그래서 예배를 드리면 새 힘이 솟고, 말씀을 읽거나 기도하고 나면 이상하게 마음이 평화로워집니다. 어떤 분이 간증하기를 예수님을 믿고 난 후 얼마나 기쁜지 길에 떨어진 휴지가 굴러가는 모습을 보고도 기쁨이 솟더랍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이 회복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기쁨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정반대로 눈물과 애통도 알게 됩니다. 오히려 예수님 믿으면서 눈물이 더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이 눈물은 기쁨의 눈물입니다. 이렇게 좋은 것을 왜 이제야 알게 되었는지 안타까워하며 흘리는 눈물입니다. 또한 그동안 하나님 뜻대로 살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의 눈물입니다. 자기 인생의 문제를 놓고 기도할 때도 눈물이 많아졌습니다. 전에는 어려운 문제들은 혼자서 해결했는데 예수님을 믿고서는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마치 고달픈 시집살이하던 며느리가 친정어머니를 만나서 자기 답답함을 쏟아놓으며 흘리는 눈물과 같습니다. 들어줄 사람이 있기에 속에 쌓였던 것들을 마음껏 내어놓는 것이지요.

자기를 인하여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 때문에 흘리는 눈물도 많아졌습니다. 여전히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한 채 방황하는 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움의 눈물입니다. 세상은 즐거워하는데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은 애통합니다. 왜냐하면 즐거움으로 환호하고 있는 배가 침수하여 기울고 있는 것을 보기 때문입니다. 때로 우리는 분노의 눈물을 흘리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여 거짓을 일삼는 죄의 세력들에 대한 분노입니다.

애통하는 자 이것이 주님을 믿는 제자들의 본질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눈물 없이는 들어갈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웃고 즐거운 것만 좋아하고 슬프거나 눈물 흘리는 것은 피하려고 합니다. 안타까운 것은 오늘 우리들에게서도 이 눈물이 사라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옛날에는 곧잘 울었고, 기도하던 자리에는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져 있었는데 이제는 그런 모습을 보기가 힘들어졌습니다. 통곡하며 기도하던 소리도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눈물을 다시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애통하는 자를 찾고 계십니다.

애통하는 자

애통한다는 것은 몹시 가슴 아파한다는 뜻입니다. 이와 동일한 단어를 창세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야곱이 자기 사랑하는 요셉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애통하는 모습에서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전합니다.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오래도록 그 아들을 위하여 애통하니 그 모든 자녀가 위로하되 그가 그 위로를 받지 아니하여 가로되 내가 슬퍼하며 음부에 내려 아들에게로 가리라 하고 그 아비가 그를 위하여 울었더라”(창37:34-35) 자기 가장 소중한 것을 잃었을 때 흘리는 눈물과 가슴 아픔, 이것이 애통입니다. 애통하는 자 그것은 제자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이처럼 애통하는 자가 될 수밖에 없을까요?

첫째, 죄에 대한 애통입니다.

예수님 믿기 전에는 잘 몰랐는데 예수님을 믿고 나니 이제는 죄가 더 뚜렷하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전에는 죄라고도 생각하지 않았는데 이제는 그것이 하나님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죄임을 깨닫고 슬퍼하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죄에 대해서 민감해졌습니까? 여러분은 복이 있습니다. 여러분 안에 성령님이 계시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거룩하신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 있는 죄와 함께 동거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죄에 대한 애통으로 밖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는 세리의 기도처럼 될 수밖에 없습니다. 누가복음 18장 13절에서 세리가 성전에서 기도하는데 감히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합니다.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고 눈물을 흘리며 고백합니다. 윤동주의 ‘서시’에 나오는 “죽는 날까지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와하였다” 하는 구절처럼 죄에 대해서 예민한 사람들이 됩니다. 전에는 다른 사람의 아픔을 외면하는 것이 당연한 일처럼 되었는데 이제는 그것이 마음에 걸리고 자기 죄처럼 다가오기 시작합니다. 심지어 잊어버렸던 어렸을 때의 죄도 기억하며 가슴 아파 합니다. 어거스틴은 자신의 죄를 참회하며 『고백록』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는 이 책에서 “이 세상에 태어난 지 하루밖에 되지 않는 갓난아이라 할지라도 죄 없이 정결하다할 수 없습니다.” 하며 자신의 어린시절의 죄를 회개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우리가 죄에 대해서 애통하면 할수록 마음은 기뻐진다는 사실입니다. 영혼의 체증처럼 속에 답답하게 걸려있던 것들을 토해내니 얼마나 시원하겠습니까? 또한 우리가 많이 애통하면 할수록 우리는 사랑의 사람이 되어갑니다. 이웃을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은 바로 이 죄에 대한 애통에서부터 나옵니다. 내 자신도 온전하지 못한데 어떻게 다른 사람을 정죄할 수 있나 하는 마음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서로 부족한 사람임을 깨닫고 서로 이해하고 서로 협력하려는 동병상련의 공동체의식이 싹틉니다.

그렇지만 분명히 알 것은 이 죄에 대한 애통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점입니다. 어떤 분들은 죄에 대한 애통이 자기 연민이나 결벽증으로 빠지는 분이 있습니다. 스스로에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며 자기를 괴롭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죄에 대한 애통이 아니라 자기에 대한 애통입니다. 자기를 비하하는 것 같은데 실상은 자기를 높이는 사람입니다. 나는 이만큼 괜찮은 사람인데 흠이 묻은 것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것을 씻어 내려고 하면 할수록 우리는 절망에 빠질 것입니다. 인간은 결코 완벽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를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상한 심령입니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시51:17)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은 우리의 완전함이 아니라 다만 죄 때문에 가슴아파하는 상한 심령입니다. 하나님은 이 상한 심령을 받으셔서 우리에게 용서의 은혜를 베푸십니다. 이처럼 우리의 완전함은 하나님의 용서로부터 오는 것이지 우리 자신의 의로움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갈 때는 항상 부족하고 애통하는 자의 모습으로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은혜 없이는 단 하루도 견딜 수 없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은혜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렇게 은혜로 살 때 우리는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의롭게 살려는 짐으로부터 자유해지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매일 하나님과의 관계는 더 깊어집니다.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 없이는 우리가 설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분을 떠나서는 우리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우리 안에 있는 악들은 줄어듭니다. 따뜻한 햇볕에 우리를 두르고 있던 죄의 옷들이 한 꺼풀씩 벗겨지기 시작합니다. 죄는 은혜로만 끊을 수 있습니다.

둘째, 고통에 대한 애통입니다.

애통은 꼭 고상한 애통만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애통은 다 복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 주님은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지, 어떤 특정 종류의 애통만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시지는 않으셨습니다. 죄에 대한 애통이건, 하나님의 의에 대한 애통이건, 병이나 물질적인 문제 등 개인적으로 당하는 애통이건, 젊은이가 사랑과 실연 때문에 우는 애통이건 상관없습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흘리는 눈물이면 하나님께서는 그 애통을 받으시고 복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최근에 출간되었던 책 중에 규장 출판사의 ‘팔복 시리즈’가 있습니다. 첫 번째 ‘가난한 자의 복’으로 맨발의 전도자 최춘선 할아버지의 삶을 다루어 화제가 되었습니다. 두 번째 책은 팔복의 두 번째인 ‘애통하는 자의 복’입니다. 그런데 이 책과 함께 딸린 영상 스토리는 기존의 신앙 서적과는 사뭇 다릅니다. 어떤 한 선교사가 우즈베키스탄에 선교하러 갔다가 사랑하는 아내가 강도에 의해 피살을 당했습니다. 이런 일이 있은 지 근 3년이 넘어가는데 이 선교사님은 그 아픔을 극복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영상 화면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울기만 하는 모습이 비추어집니다. 같은 목회자로서 민망할 정도로 울기만 합니다. 마치 천국 신앙이 없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이 책은 기존 신앙서적이 그러하듯 믿음으로 이 아픔을 극복했다는 식의 결론을 내리지 않습니다. 끝까지 선교사의 눈물만 마음속에 메아리치도록 만듭니다. 저는 그런 점에서 이 책이 애통하는 자의 모습을 정말 잘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모든 애통은 하나님께서 받으십니다. 그 이유는 지극히 단순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고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자녀가 의로운 일로 눈물을 흘릴 때만 그에게 시선을 보내지는 않습니다. 그것이 중요하든 사소하든, 옳든 그르든 아버지는 자녀가 흘리는 모든 눈물에 귀를 기울입니다. 그가 사랑하는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또 애통하는 자의 입장에서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우연은 없습니다. 모든 일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서 재가를 받아 일어난다고 믿기에 우리는 현재 당하고 있는 고통에 대해서 하나님께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때로는 욥처럼 슬피 울며 자기의 태어난 날을 저주하는 형태일수도 있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형태일 수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다 지극히 신앙적인 태도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자녀들을 향하여 네가 복이 있다 말씀합니다. 내가 너에게 위로를 줄 것이라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위로를 주실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끝까지 우리가 붙잡아야 할 사실은 그가 우리 애통을 들으시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가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어떤 식으로든 위로해 줄 것이라는 확신입니다.

눈물의 여인 한나의 애통을 보십시오. 한나는 아들이 없어서 애통했던 사람입니다. 이것은 어떤 의로움이나 거룩함에 대한 애통이 아닙니다. 한 여인으로서 아들을 낳지 못한다는 부끄러움과 소망 없음에 대한 애통입니다. 사무엘상 1장 10절에서 “한나가 마음이 괴로와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애통하였다고 전합니다. 15절에서는 이렇게 슬퍼하며 기도하고 있는 한나를 보고 술취한 여자로 오해하고 있는 제사장 엘리에게 한나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한나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여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니요 여호와 앞에 나의 심정을 통한 것뿐이오니” 한나는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눈물의 여인의 기도를 받으셔서 사무엘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마음이 여린 분이십니다. 여러분의 눈물을 견디지 못하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속을 썩이십니까? 하나님 전에 나와서 엎드려 기도하십시오. 눈물로 기도하십시오. 그 아들이 위대하게 될 것입니다. 그 아들이 부모님께 가장 효도하는 자녀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모든 애통의 눈물을 받으십니다. 병으로 인해 오랫동안 고생하며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다른 사람의 손을 통하지 않고는 대소변도 볼 수 없는 무력감과 또 자기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존재처럼 느껴질 때 흘리던 그 애통의 눈물을 우리 주님께서는 받으십니다. 남편의 핍박과 갖은 어려움 속에서 남몰래 흘리던 그 애통의 눈물을 우리 주님께서는 받으십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죽음으로 또는 경제적 이유로, 또는 전혀 예상치 못하던 이유로 강제로 생이별을 한 후 통곡하던 그 눈물을 하나님께서 다 듣고 계십니다. 애통하시되 사람 앞에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애통하시길 바랍니다.

셋째, 의에 대한 애통입니다.

이 애통은 또한 의, 곧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지 않는 것에 대한 애통입니다. 우리 주님은 이스라엘을 향하여 애통하셨던 분입니다. 주님께서는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마23:37) 하시며 애통해 하셨습니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눅19:41-42)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죽이며,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 멸망의 길을 가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쌍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의 눈에는 이런 식으로 살다가는 40년 후에 로마에 의해서 예루살렘이 붙타고 수십만이 죽는 일이 생생하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기뻐하나 우리는 슬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구약의 예레미야 선지자는 눈물의 선지자, 곧 애통하는 선지자의 대명사입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죄와 그로 말미암은 민족의 심판 앞에서 애통했습니다. 예레미야 애가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애통의 기록입니다.  “밤새도록 애곡하니 눈물이 뺨에 흐름이여 사랑하던 자 중에 위로하는 자가 없고 친구도 다 배반하여 원수가 되었도다.”(애1:2) “어찌하면 내 머리는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 근원이 될꼬 그렇게 되면 살륙당한 딸 내 백성을 위하여 주야로 곡읍하리로다”(렘9:1)

예레미야의 애통의 눈물은 하나님의 의에 대한 애통이었습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는 민족,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는 이스라엘 민족을 생각하니까 잠이 안 오고 눈물만 흘렀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처럼 하나님의 뜻으로부터 멀어지는 민족의 모습을 보며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우리 속에는 이런 애통함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 물신과 이기적 욕망에 사로잡혀 가는 민족을 바라보며 눈물 뿌려 기도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이처럼 애통하는 한 사람이 있어야 민족이 삽니다. 애통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위로가 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에 소망이 있었던 것은 애통하는 한 사람 예레미야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많이 애통하고 눈물을 흘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다시 바벨론 포로로부터 돌이키겠다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예레미야가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렸기에 이스라엘은 70년 후에 기쁨으로 단을 거두는 감격적인 은혜를 맛볼 수 있었습니다.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눈물을 흘릴 수 있다는 것이 복입니다. 마음이 메마르거나, 인생이 권태로 가득 찬 사람은 눈물이 없습니다. 돌이켜 은혜 받던 때를 생각해 보면 그 때는 눈물이 많았던 때입니다. 지은 죄가 많아서 울고, 감사해서 울고, 십자가 보면서 울고, 사람들을 보면 불쌍해서 울고...... 이렇게 울고 나면 속이 시원합니다. 눈물이 없다는 것은 신앙생활이 무미건조하고, 습관적이 되었다는 사인입니다. 나무도 어린나무이거나 한창 성장하는 나무가 물이 많습니다. 그러나 고목이 되거나 겨울이 되면 나무는 바싹 마르고 맙니다. 죽은 나무는 물이 없습니다. 바싹바싹 소리만나거나 먼지만 날릴 뿐입니다. 물이 많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반증입니다.

여러분 주의 성전에 와서 엎드리기만 하면 눈물이 쏟아집니까? 그러면 그것이 바로 축복입니다. 울 수 있다는 것, 애통할 수 있다는 것이 큰 복입니다. 애통의 눈물을 하나님께서 받으시기 때문에 그렇기도 하지만 애통 자체가 축복입니다. 울면 속이 시원합니다. 눈물이 있다는 것은 그래도 삶에 대한 기대와 희망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인생의 희망을 포기한 사람은 눈물이 없습니다. 무미건조한 일상사만 반복될 뿐입니다. 마음이 강퍅한 사람은 눈물이 흐르지 않습니다. 바리새인들이 그랬어요. 세리는 가슴을 치면서 자기 잘못을 회개하는데, 이미 그 심령이 마르고 완고해진 바리새인들은 눈물 대신 불이 나와 다른 사람들마저 죽이고 맙니다.

하나님은 애통하는 자를 위로하십니다. 무엇보다 애통하는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 우리를 위로하십니다. 우리가 흘리는 눈물을 아무도 받아주지 않거나 아무도 듣지 않는다면 그것보다 더 절망적인 상황은 없을 것입니다.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는 이유는 그 애통을 전능하신 하나님, 그리고 사랑이 한이 없으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 듣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시편에서는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으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시56:8)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가 흘리는 눈물을 당신의 병에 담고 계십니다. 우리가 흘린 눈물은 결코 헛되이 땅으로 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는 날 그분은 우리에게 이 눈물 종지를 보이며 내가 흘리던 눈물, 하나도 떨어뜨리지 않고 내가 받아 놓았다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위로는 실제적인 위로입니다. 고통 받은 만큼 행복으로, 바닥에 있었던 만큼 높은 곳에 올리실 것입니다. 이사야서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사61:2-3) 이것은 단지 죽은 후에 누리게 될 천국에서의 위로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실제 바벨론 포로로부터 돌아오면서 이런 기쁨과 위로를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126편에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에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시126:1-2) 하나님은 우리 인생에서 함박 웃음을 가져다주심으로 우리를 위로하실 것입니다. 이어지는 5절과 6절에서 시편 기자는 간증적으로 이렇게 고백합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하나님께서는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린 자에게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게 해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나의 눈물의 기도를 들으시고 아들을 주셨습니다. 어머니 모니카의 눈물의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은 그 아들 어거스틴을 돌아오게 하시고 성자요 대 신학자로 높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위로는 실제적입니다. 말의 위로가 아닙니다. 그 위로는 이 땅에서부터 받게 되는 은혜입니다. 자녀를 위하여, 또는 가족을 위하여, 또는 내 인생에 흘린 눈물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갚아 주실 것입니다.

무엇보다 가장 큰 위로는 하나님 자신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애통은 마치 몸이 아픈 것과 같습니다. 아프면 온 신경이 상처부위가 있는 그곳으로 쏠리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이 땅을 보살피시는데 누구에게 먼저 찾아가실 것 같습니다. 바로 애통하는 자에게 입니다. 어린 아이의 울음소리가 계속 들릴 때 사람조차 그 소리를 외면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은 더하시지 않으시겠습니까? 하나님은 기뻐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하나님과 가까이 있기 때문입니다. 애통은 더 이상 절망이 아닙니다. 그 애통이 하나님 앞에서의 애통이라면 오히려 복입니다. 우리는 애통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우리의 애통이 변하여 기쁨이 되게 할 것입니다.

우리가 가야 할 곳도 이 애통이 있는 곳입니다. 그곳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가장 신음소리가 많이 들리는 곳, 가장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 하나님은 그곳에 계십니다. 우리의 위로는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위로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자 그가 참으로 복 있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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