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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정이냐? 긍정이냐? (마 9:2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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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이냐? 긍정이냐? (마 9:27~31)

예스맨과 노맨

사람의 말이라는 것이 참 이상해서 그 사람이 하는 말을 잘 들어보면 "아, 이 사람이 어떤 성격이구나" 하는 것도 드러나고, 사고방식도 드러나고, 그 사람의 자라온 환경도 드러나고, "지금 이 사람이 어떤 처지에 있구나" 하는 것도 다 드러납니다. 특히 그 사람이 늘 자주 쓰는 말이 무엇인지 알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금세 알 수가 있게 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는 "예"(Yes)라는 말을 더 많이 쓰며 살까요? "아니요"(No)라는 말을 더 많이 쓰며 살까요? 세상에는 '예스맨'(Yes-man)과 '노맨'(No-man) 두 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예스맨'이란 말 그대로 'Yes'를 잘 하는 사람입니다. 매사에 긍정적이고 순종적인 성격을 가진 사람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좋습니다." "좋은 생각입니다." "한번 해 봅시다." "잘 될 겁니다." 이런 말을 하면서 모든 일을 어떻게든 긍정적으로 보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반면 '노맨'이란 말 그대로 'No'를 잘 하는 사람입니다. 매사에 부정적이고 반항적인 성격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의 입에는 언제나 이런 말을 달고 삽니다. "안 돼." "그걸 말이라고 하냐?" "무슨 일을 그 모양으로 하는 거야?" "난 그런 거 싫어해" 등등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 '예스맨'과 '노맨' 중에 어떤 쪽이 좋을까요? 얼핏 생각하면 '예스맨'이 더 좋을 것 같지요. 하지만 어느 '예스맨'이 무조건 좋다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에 '예스맨'만 있다, 모든 사람이 다 '예스맨'이라고 하면 큰 문제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좋게만 보기 때문에 건전한 비판을 할 수 없습니다. 일이 잘못된 방향으로 가도 바로잡을 길이 없습니다. 모두가 "좋다, 좋다"고만 하면 발전이 없는 법입니다. 건전한 비판이 있어야 발전이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세상에 모두 '노맨'만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하는 일마다 안 된다고 하니 아마 싸움도 많이 생기고, 서로 다투다가 끝날 것입니다. 마음만 상하고 되는 일이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모두가 '예스맨'만 있어도 안 되고, 그렇다고 모두가 '노맨'만 있어도 안 됩니다. 이 세상에, 그리고 모든 조직과 모임에는 적당히 '예스맨'과 '노맨'이 섞여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발전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개인은 어떨까요? 앞서 말한 대로 우리가 조직이나 모임에서, 가정이나 회사나 이웃들 사이에서 무조건 '예스맨'이 되는 것은 썩 좋은 일은 아닙니다. 어떨 때는 손을 들고 "아니요" 하고 말하는 것이 용기일 수도 있습니다. 분명히 아닌데도, 이렇게 하면 안 되는데도 "좋습니다"라고 하는 것은 비겁한 일입니다. 예수님도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마 5:37)고 하셨는데 이 말은 '예' 할 것은 반드시 '예' 하고, 아닌 것은 반드시 '아니라'고 하라는 뜻입니다. 아닌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어야 참된 용기인 것입니다. 따라서 무조건 '예스맨'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조건 '예스맨'보다 무조건 '노맨'은 더 나쁩니다. 이런 사람은 정말 도움이 안 됩니다. 안 되는 것과 되는 것을 가려서 해야 하는데 무조건 안 된다고 합니다. 건전한 비판을 해야 하는데 무조건 비판부터 하고 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을 만나면 될 일도 안 되고, 해야 할 일도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무조건 '노맨'은 최악입니다. 그러면 이런 사람이 있느냐? 예, 꼭 있습니다. 어느 집단이건 어느 단체건 이런 사람이 꼭 한두 명씩 있어서 많은 사람을 힘들게 하고, 일이 되도록 하지 못하고 어려움을 겪습니다. 긍정적인 생각을 갖지 못한 사람, 매사를 삐딱하게 보고 일단 잘못된 점부터 찾고 보는 사람, 트집부터 잡고 안 될 이유부터 찾는 사람은 참으로 불행하기 짝이 없습니다.

긍정의 눈, 부정의 눈

지금까지는 그 사람이 하는 말을 가지고 세상에 두 가지 종류의 사람, 즉 '예스맨'과 '노맨'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말뿐 아니라 어떤 눈(보는 눈 말입니다)을 가지고 있냐에 따라서도 두 가지 종류의 사람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즉 세상에는 부정적인 눈을 가진 사람과 긍정적인 눈을 가진 사람,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합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무조건 긍정도 안 좋지만 무조건 부정은 더 위험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긍정적인 자세와 눈을 회복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자기 자신에 대해 긍정적인 눈을 가져야 합니다. 나 자신을 향해 'No'라고 말하기 전에 'Yes' 하는 법부터 배워야 합니다. "나는 못해." "나 같은 게 뭘 하겠어?" 하기보다 "나는 할 수 있어"라고 말하는 법부터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을 향해서도 "저는 못합니다." "저 같은 게 뭘 하겠습니까? 저는 안 됩니다." 하지 말고 "저는 믿습니다. 제가 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제가 믿는 대로 이루어 주실 줄 믿습니다."라고 말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다른 사람에 대해 긍정적인 눈을 가져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보면서, 그 사람이 하는 일을 보면서 "왜 저 모양이야?" "저렇게 밖에 못하나?" "형편없어"하고 비판부터 하지 마십시오. 애정도 사랑도 없는 이런 비판과 판단은 그 사람에게 큰 상처를 줍니다. 깊은 실망감을 안겨주고 그 사람은 이런 말을 듣는 순간 힘이 빠지고 맥이 빠지고 맙니다. 이만저만 피해가 큰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런 부정과 무조건적 비판의 가장 큰 피해자는 바로 나 자신입니다. 내 안에 부정적인 생각이 자리 잡고 있으면 내가 건강할 리가 없고 내가 하는 일도 잘 될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최악의 경우가 무엇인지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애정도 없고 사랑도 없고 그저 비판을 위한 비판을 하는 사람, 한 번 해보겠다는데 열심히 하겠다는데 무조건 안 된다고, 왜 그런 것을 하느냐고 막는 무조건적 '노맨'이 되면 이건 최악입니다. 이런 분들이 꼭 하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다 생각이 있어서 그런다"고, "교회에도 건전한 비판세력이 있어야 한다"고, "모두가 좋다고만 하면 교회가 어떻게 되겠냐"고, "나 같은 사람도 필요하다"고 말입니다. 마치 자신이 의인이라도 된 양, 자유의 수호자라도 된 것처럼 말을 합니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요? 정말인지 아닌지는 한 가지만 점검해보면 금세 알 수 있습니다. 가슴에 손을 얹고 진정 내 가슴 속에 사랑이 있는지, 교회를 정말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지, 그래서 교회만 생각하면 기쁘고, 교회를 위해 정말 눈물로 부르짖으며 기도해 본 적이 있는지를 생각해 보면 됩니다. 내가 정말 저 사람을 사랑하고 위하고 있는지, 그래서 정말 저 사람이 잘못 된 길로 가는 것을 참다 참다가 도저히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아서 내 가슴 속으로부터 뜨거운 사랑의 마음이, 안타까운 심정이 불붙듯이 일어나서 하는 말인지 아닌지를 생각해 보면 됩니다.

저는 애정 없는 비판, 사랑 없는 지적을 좋아하는 분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대통령이나 지도자를 향해 너무도 쉽게 손가락질을 하고 옆집 강아지 부르듯 함부로 욕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자기가 뽑아놓고도 말입니다. 틀려먹었답니다. 몹쓸 인간이랍니다. 정말 그 지도자를 사랑하고 위해서 하는 말입니까? 아니면 책임 없이 하는 비판입니까? 우리는 솔직해야 합니다. 교회를 보며 틀려먹었다고 합니다. 교회가 왜 이 모양이냐고? 우리 교회는 수준이 낮다고, 이 정도밖에 안 되냐고 불평합니다. 그런데 누구의 교회입니까? 내 교회지 않습니까? 그러면 내 살을 깎는 아픔으로, 내 자신을 향해 채찍을 내리치는 심정으로 그렇게 말해야 할 텐데 정말 남의 일 구경하는 것처럼 너무 쉽게 비판하고 불평합니다. 교회가 잘 되어도 내 교회고, 교회가 부족해도 좀 문제가 있어도 내 교회 아닙니까? 내 자식이 부족하고 못났다 해도 그렇게 무책임하게 비판하고 불평하지는 않을 겁니다. 진정 애정이, 사랑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입니다. 목회자나 교회에서 앞장 서 일하는 분들을 향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안 된다고 하기 전에, 왜 그 모양이냐고 하기 전에, 그렇게밖에 못하냐고 하기 전에 정말 내가 저 목사를 위해, 저 앞에 서서 일하는 분을 위해 눈물로 기도했는지 살펴보시고, 정말 내 목사라고, 내 형제요 자매라고 생각하고 내 자신의 살을 찢는 아픔을 가지고 하는 말인지, 아니면 그저 남의 일 보듯이, 심사위원이 되어 심사하고 평가하는 자세인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만약 내가 진심을 담고 있다면, 저 사람을, 저 지도자를, 내 교회를 정말 사랑하는 절실한 마음으로 하는 말이라면 아무리 쓴 소리도, 아무리 속 쓰린 지적이라도 사람들은 달게 받아들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마음 없이 감정으로, 책임도 없이 하는 말이라면 누구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너희 믿음대로 되라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이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후에 거기에서 떠나려고 하실 때 두 사람의 맹인이 예수님을 따라오며 이렇게 크게 소리를 지릅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맹인이라고 하면 앞을 못 보는 사람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참으로 불쌍한 장애인들입니다. 그런데 이 말이 틀렸습니다. '불쌍하다'는 말은 맞지 않습니다. 나 자신이  불쌍하다고 생각하니까 정말 불쌍해지는 것입니다. "나는 너무 불행해.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이야. 왜 세상 사람들은 다 멀쩡하게 두 눈 뜨고 사는데 우리만 이렇게 앞을 못 보게 된 거야?" 하고 생각하면 스스로를 제일 불쌍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나는 너무 가난해, 너무 건강이 안 좋아, 공부를 많이 못 했어"부터 시작해서 "나는 왜 이런 부모를 만난 거야? 나는 왜 이런 자식을 낳은 거야?" 하고 생각하면 정말 우리가 천하에 제일 불행하고 불쌍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아니, 스스로를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그러지 마세요. 나는 불쌍한 사람 아닙니다. 스스로를 불쌍한 사람, 불행한 사람으로 만들지 마십시오.

그런데 왜 오늘 두 맹인은 예수님에게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말한 것일까요? 이 말은 나를 정말 불쌍한 사람으로 봐달라는 뜻이 아니라 내가 예수님의 도움을 받아야 할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둘이 무슨 차이가 있나요? 우리가 길을 가다가 동냥을 하는 거지를 만났습니다. "너무 불쌍하다. 이 추운 데 동냥을 하고 있네" 그냥 불쌍한 생각이 들어 돈 천 원을 줬다고 칩시다. 이건 그냥 불쌍히 여긴 것입니다. 하지만 내 마음에 "천 원 줘봐야 한 끼 식사도 제대로 해결 못하는데 이건 진심으로 도와주는 것이 아니야. 이 사람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이 아니야. 아예 이 사람을 데려가서 일을 시키고 직업을 주자."고 생각하면 이것은 단순히 불쌍히 여기는 차원을 넘어서서 그 사람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입니다. 두 사람의 맹인은 지금 예수님에게 우리를 그냥 불쌍히 여겨서 적선하는 셈 치고 도와달라고 외친 것이 아니라 정말 우리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그래서 아예 눈을 뜨게 해달라고 외친 것입니다. 분명히 아주 다릅니다. 만약 두 맹인이 스스로를 아주 불쌍하고 불행한 사람으로만 여겼다면 두 사람은 자포자기하고 아무 희망도 가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 같은 맹인들이 뭘 하겠어?" 하고 모든 소망을 버리고 그저 동냥이나 하며 하루하루 먹고 살기에 바빴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스스로를 불쌍하고 불행한 사람으로 만들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변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만 만나면 이 모든 상황을 극복하고 이겨낼 수 있다고 믿은 것입니다. 그래서 28절에 보면 예수님이 그들에게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고 물었을 때 "주여, 그러하오이다." 하고 대답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가 능히 이 일을 할 줄을 믿느냐?"고 물으신 까닭은 무엇일까요? 두 맹인의 마음속에 과연 확신이 있는지, 어떤 믿음이 있는지 알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믿음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이건 안 돼, 불가능해, 절대 안 돼, 아무리 예수님이라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하는 것도 일종의 믿음입니다. 절대 안 된다는 믿음 말입니다. 누가 뭐래도 안 된다는 확신이요 믿음입니다. 이런 안 되는 믿음 가진 사람은 그 믿음대로 안 되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이건 된다, 가능하다, 반드시 할 수 있다, 그런데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신다. 이분에게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죽은 자도 살리시는 분이 우리 눈 정도 못 뜨게 하시겠냐? 반드시 해 주실 수 있다." 하는 믿음이 있으면 어떻게 될까요? 그 믿음대로 되는 것입니다. 된다고 믿으니까 되는 것이요, 예수님이 하실 수 있다고 믿으니까 그 일이 정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29절에 보면 이렇게 나온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의 눈을 만지시며 이르시되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시니 그 눈들이 밝아진지라." 뭐라고 하셨습니까? "너희 믿음대로 되라." "내 믿음대로 되라"도 아니고 "내가 믿노니 너희 눈이 밝아질 지어다"도 아니고 "너희 두 사람의 믿음대로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두 사람의 믿음대로 된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만약 두 맹인이 "우린 너무 불행해, 너무 불쌍해, 우린 끝났어. 아무 소망도 없어" 하고 믿는다면 그 믿음대로 아무 일도 안 일어날 것이요, 반대로 "우린 할 수 있어. 예수님이 이루어주실 거야. 예수님이 우리 눈을 뜨게 해 주실 거야." 하고 믿는다면 그 믿음대로 눈을 뜨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너희 믿음대로 되라"는 말의 뜻입니다. 이것이 긍정의 힘이요 소망의 힘입니다. 자신을 향한 긍정, 자신을 향해 'Yes'를 외치고, "그래, 난 할 수 있어, 난 그렇게 믿어." 하고 선포하는 사람의 결과입니다. 자기 자신에게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지도자에게도, 교회에서도, 나라와 민족을 향해서도 이런 믿음을 가지고 가능성을 보는 사람에게는 회복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변화가 일어납니다.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게 됩니다.

우리가 따라야 할 모습

사랑하는 여러분, 절대 부정적인 '노맨'은 되지 마십시오. 자기 스스로도 불행해지고 남도 그렇게 만듭니다. 자기가 속한 모든 곳과 교회까지도 어렵게 만듭니다. 최악의 결과입니다.

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이런 성도, 이런 목사가 되면 좋겠습니다. 무조건 'No' 하지 마십시오. 왜 'No'라고 해야 하는지,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어떤 결과가 생길 지, 정말 내가 책임질 각오를 하고 그렇게 하는지 잘 생각해 보고 'No' 해야 합니다. 내가 저 사람을 정말 사랑하는지, 내 살을 찢고 뼈를 깎는다는 자기반성을 가지고 'No' 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Yes'만 하지도 마십시오. 'Yes'에도 큰 책임이 따릅니다. 저 사람 듣기 좋으라고 편하라고 무조건 'Yes' 하면 무책임한 것입니다. 오히려 그 사람을 망치고 교회를 망치는 결과가 옵니다. 그러니 'Yes'를 하더라도 책임질 각오를 하고 'Yes' 하십시오. 무조건 할 수 있어, 잘 될 거야 하지 말고 반드시 왜 가능한지, 왜 잘 될 것인지 생각하십시오. 내가 할 수 있고 내가 잘 될 것이 아니라 예수 안에서 할 수 있고, 예수 안에서 잘 될 것입니다.

내 입에서 'No'라는 말을 가급적 제거하십시오. 안 되는 이유보다 되는 이유를 찾고, 가능성을 바라보십시오. 또한 긍정적인 '예스맨'이 되십시오. 무조건 된다고 하지 말고, 근거도 없이 무조간 잘 될 거라고 하지 말고 '예수 안에서' 가능하다고 믿는 사람이 되십시오. 저는 이렇게 나는 못 하지만 '예수 안에서' 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을 '예수맨'(Jesus-man)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발음은 비슷하지만 '예스맨'이 아니라 '예수맨'입니다. 무조건 될 거라고, 나는 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 안에서 가능하다고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어"("I can do everything!")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교만이지만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어, 주님 안에서"("I can do everything in Jesus Christ!")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믿음입니다. 그저 "예수 안에서"(in Jesus Christ)라는 한 마디가 더 붙었을 뿐인데 두 말은 엄청나게 다른 뜻이 됩니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하는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맨'이 되십시오. "할 수 있다 하신 이는 나의 능력 주 하나님"입니다. 이 믿음을 따라 우리의 말과 행동을 바꾸십시오. 우리의 눈과 생각과 사고방식과 삶의 방식까지도 바꾸어 가십시오. 그러면 내 삶이 변화됩니다. 내 주위 사람들이 변화됩니다. 교회가 변화됩니다. 우리가 그런 기적의 일들을 만들어가는 사람이 되어야지요.

지금 이 컵에 주스가 반 정도 차 있다고 칩시다. 그런데 똑같은 컵을 보고 사람마다 반응이 다릅니다. 부정적인 눈을 가진 사람, 부정적인 '노맨'은 이렇게 말합니다. "에게, 주스가 겨우 반 컵밖에 안 남았네?"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긍정적인 눈을 가진 사람, 긍정적인 '예스맨'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이고 주스가 아직도 반 컵이나 남아있네." 이 두 사람의 차이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똑같은 주스 컵을 보고도 이렇게 다른 눈과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다르게, 너무나 다르게 반응하듯 똑같은 상황에서도, 같은 일을 당하고도 사람들은 그 자세와 생각에 따라 너무도 다르게 반응하더라는 것입니다. "난 이제 망했다, 끝났다, 왜 나한테만 이런 일이 생기나?"하는 사람도 있고, "누구에게나 생길 수 있는 일이 나에게 일어났을 뿐이야, 이겨내면 되지"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단지, 우리 그리스도인, 예수맨들은 여기에다 "이겨내면 되지, 예수 안에서"라는 말을 덧붙이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차이입니다. 우리의 믿음대로 될 것입니다. 안 된다고 믿으면 정말 안 되고 된다고 믿으면 정말 됩니다. 이 '된다'고 믿는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날마다 기적이 일어나게 마련입니다. 누가 그래요? 누가 된다고 하고 누가 기적이 일어난다고 합니까? 우리 주변에 수없이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이런 체험을 이미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하고 있습니다.

역사상 기도응답을 가장 많이 받기로 소문난 신앙인이 있습니다. 5만 번 이상의 기도응답을 받은 영국의 죠지 뮬러라는 분입니다. 죠지 뮬러(1805~1898년)는 프러시아인으로 어렸을 때 아버지의 주머니를 상습적으로 뒤져 돈을 훔칠 정도로 문제아였지만 1825년 어느 토요일 저녁기도모임에서 무릎 꿇고 기도하는 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고 감동을 받아 회심하게 됩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그는 좋은 직업 다 마다하고 영국으로 건너가 고아원을 세우고 2천명이 넘는 고아들을 기도로 양육하는 일을 시작합니다. 그는 1898년 93세로 소천하기까지 15만 명의 고아들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키웠기에 오늘날까지 `고아의 아버지'로 불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가장 좋아하고 힘을 얻은 성경구절은 바로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는 시편 81편 10절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내가 믿는 대로 도와주신다고, 그대로 채워주신다고 믿고 고아원에 필요한 모든 물질을 어떤 부자나 정부나 기관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언제나 간절히 기도하며 오직 하나님의 도움만 의지했습니다. 그랬더니 이 믿음과 기도를 보시고 하나님은 63년 동안 750만 달러(한화로 약 30억 원) 이상을 주셨습니다. 지금부터 거의 200년 전 일이니 이 돈은 오늘날 3천 억, 3조가 될 지도 모르는 어마어마한 돈이었습니다. 그가 처음 고아원 사역을 시작할 때 준비된 것이라곤 선물 받은 접시 3개와 쟁반 스물여덟 개, 물병 하나, 컵 한 개, 소금 병 받침 세 개, 칼 네 개와 포크 네 개, 채소를 깎는 강판 한 개뿐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채워주신 것입니다. 분명하게 믿고 기도하며 입을 크게 여니까 그 연 입만큼, 그 믿음만큼, 그 기도만큼 채워주신 것입니다. 5만 번 이상 그의 기도에 정확히 응답하셨습니다. 우리라고 왜 못 합니까? 우리 안에 믿음이 있으면 됩니다. 긍정하고 구하면 됩니다.

여러분도 이렇게 날마다 하나님의 응답을 체험하고 평생토록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며 살고 싶지 않습니까? 걱정 마십시오. 하나님이 하십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좋아하는 "왜?"라는 찬양 가사를 소개하고 마치지요. 아니, 아예 불러보지요. "♫왜 슬퍼하느냐 왜 걱정하느냐 무얼 두려워하느냐 아무 염려 말아라 큰 어려움에도 큰 아픔 있어도 이젠 아무 걱정 하지마 내가 널 붙들어 주리 내가 너와 항상 함께 하리라 내가 너를 지키리라 실망치 말고 나를 보아라 나는 너의 하나님이라 안 된다 말고, 불가능하다 말고 나를 보아라 너는 너의 하나님이라󰁗 아멘." 이 믿음 여러분 가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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