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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마음의 쇠창살을 걷어라 (사 43: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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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쇠창살을 걷어라 (사 43:1-13)

  노르웨이 화가 중에 에드바르드 뭉크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1800년대 후반에서부터 1900년에 초반까지 왕성하게 활동했던 작가입니다. 그는 개인적으로 매우 불행한 삶을 살았습니다. 어머니와 두 여동생이 결핵으로 죽었고, 아버지는 의사였지만 정신적인 질환으로 고생했습니다. 뭉크 또한 결핵, 만성 천식 기관지염, 류마티즘 열병 등을 앓으며 고생을 했습니다. 그의 작품은 대체적으로 우울하고 음산한 분위기를 느끼게 합니다. 그의 대표적인 작품 가운데 ‘절규’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한번 그림을 보겠습니다. 전체적인 배경은 곡선으로 강물이 흐르는 듯한 평평하고 느린 느낌입니다. 반면에 다리를 표현할 때 급격하게 기울어진 사선과 강력한 직선은 매우 빠른 속도감을 느끼게 합니다. 곡선과 직선, 느림과 빠름의 강력한 대비 속에서 한 사람은 극도의 불안함과 긴장감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절규’라는 작품은 뭉크 자신의 상처입은 내면의 세계를 그림으로 표현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또한 한 세기말의 급격한 사회 변화와 분열, 그리고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며 도덕적으로 혼란하고, 가치관이 뒤흔들리는 당시의 사회 분위기를 그림으로 표현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지난 주에 김홍석 장로님의 초대로 중국 하문을 4박 5일간 여행하는 귀한 시간을 가졌습니다. 천지개벽이 일어나고 있다는 베이징과 상하이를 가보지 못했습니다만 하문이라는 도시도 경제특구로 지정되어 대단한 발전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하문의 중심가는 여의도나 광화문 처럼 대형 건물들이 즐비하게 세워졌습니다. 지금도 여러 건물들의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하문을 돌아보면서 중국안에 대단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바로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주의 깊게 주변을 살펴보면 사회 곳곳에서 어두운 표정과 부자연스러운 모습들을 볼 수 있습니다. 도시 전체 분위기는 중국식 사회주의 체제지만 자본주의 정신이 휩쓸고 있는 분위기였습니다. 제 표현대로 하자면 피 냄새를 맡고 상어가 달려드는 것처럼 중국 사회가 돈 냄새를 맡고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드는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경제를 중심으로 급격하게 변화되면서 옳고 그른 것의 판단이 흐려졌습니다. 특히 경제를 최고의 가치로 세우는 가운데 정신과 가치관의 의식이 소리없이 무너져 내리는 과정에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4박 5일의 동안 안내한 가이드는 연변 여성이었습니다. 가이드는 연변의 조선족사회의 변화에 대해 이야기 했습니다. 연변은 많이 발전했답니다. 그 사람이 하는 말이 연변의 발전은 한국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말합니다. 한국과 교류가 있기 시작하면서 많은 조선족들이 한국에 가서 돈을 벌어 생활이 많이 나아지고 풍요로워지고 좋은 집들도 장만했답니다. 그러나 그런 장점이 있는 반면에 단점도 있는데 가장 큰 단점이 가정의 붕괴랍니다. 연변의 많은 가정의 아이들이 부모의 손에서 자라지 못하고 할머니, 할아버지의 손에서 자란답니다. 왜냐햐면 부모가 모두 한국에 돈을 벌러 갔기 때문입니다. 결손 가정들이 많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에 들어간 남편이나, 아내가 처음에는 중국에 있는 가족들을 생각하며 돈을 벌어 보냈습니다. 그러다가 외로움을 이기지 못하고 한국에서 다른 사람을 만나 함께 살면서 가정의 붕괴가 심각하게 온 것입니다. 연변에서 아이들이 부모와 함께 다정하게 사는 것은 이제 꿈과 같은 일이라고 합니다. 돈이 있어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워졌지만 가정과 가치관의 세계는 무너지고 혼란스러워 졌습니다. 이것이 연변만의 문제가 아닌 중국 전체 문제인 것같습니다.

  4박 5일간의 짧은 기간 동안 하문이라는 도시를 통해 본 중국 사회를 표현한다면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다가 에드바르드 뭉크의 ‘절규’가 생각났습니다. 경제가 성장함으로 앞으로 더 잘살 수 있다는 높은 기대감과 변화하고자 하는 활력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동시에 급격하게 변하는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조직과 사람들의 모습, 그리고 지금까지 옳다고 생각했던 가치관들이 순식간에 무너지는 가운데 당황스러움과 불안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와 같은 혼란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절규하는 사람들의 내면의 모습을 느끼게 됩니다. 앞으로 중국 사회가 대단한 경제적인 발전을 이룰 것이 확실하지만 경제 발전을 위해 브레이크 없이 앞으로만 질주하는 중국 사회가 앞으로 대단한 내적 혼란을 겪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선교적인 차원에서 중국 사회를 본다면 현실의 급격한 변화 가운데서 불안해 하는 저들에게 복음을 통해 영원한 생명과 평안을 전해 주는 것이 바로 우리의 사명임을 느끼게 됩니다. 종교는 사회에서 배의 나침반과 키와 같은 역할을 해야 합니다. 사회가 방향을 잃고 방황할 때 종교는 나침반과 키와 같은 역할을 해 방향을 제시하고 바른 길로 인도해야 합니다. 종교와 신앙인들이 그와 같은 역할을 하지 못하고 시류에만 편승한다면 도리어 종교가 그 사회를 더 타락하게 만듭니다. 중세가 바로 그런 사회였습니다.

  오늘은 3·1절 기념 예배로 드립니다. 일본의 식민지 지배 아래에서 온 백성들이 신음하며 좌절할 때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백성들에게 용기를 불어 넣었습니다. 절망하고 있는 이들에게 희망을 선포했습니다. 억압의 사회에 자유를 선포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3·1절 독립 만세운동입니다. 3·1절 운동 당시 남북 전체의 인구가 2000만 정도였습니다. 그 가운데 기독교인은 20만에 불과했습니다. 전체 인구의 1% 정도였습니다. 적은 기독교인의 숫자였지만 그들은 나라의 독립과 백성들을 계몽시키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기독교가 없었다면 3·1 운동이 있을 수 없었고, 한국의 근대사는 기독교의 역사나 다름이 없다고 학자들이 말할 만큼 교회와 신앙의 선배들은 나라가 어려울 때 나침반과 키와 같은 역할을 잘 감당했습니다. 한국교회가 3·1절을 기념하며 예배를 드리는 이유는 3·1 운동의 정신을 기억하자는 의미도 있지만 3·1절 운동에 담겨 있는 기독교 정신과 역할을 기억하고 오늘의 사회속에서 그와 같은 역할을 하겠다는 다짐의 의미가 더 큽니다. 

  지금은 우리 국민 전체 인구수의 1/4인 25%가 기독교이라고 합니다. 세계 기독교가 놀랄 만큼 짧은 시간안에 한국 기독교가 급속히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기독교의 수와 힘은 켜졌지만 그 힘이 사회를 선하게 변화시키는 영향력으로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니 이제는 도리어 사회로부터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요즘 mbc에서 ‘뉴스후’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한국 교회의 어두운 면을 들춰내어 교회가 많은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교회가 정당하게 변호할 것은 적극적으로 변호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적극적으로 생각해보고 수용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저는 개인으로는 한국 교회안에 예언자적인 소리가 들려오지 않자 하나님께서 사회 매체를 통해 한국 교회를 향해 예언자적인 음성을 들려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이 교회를 향해 바른 지적을 하면 겸허하게 받아 들여야 합니다. 반성할 것은 반성하고, 변해야 할 것은 변해야 됩니다. 그런 정신을 가지고 있을 때 바로 3·1 운동을 이끌었던 우리나라 초대교회와 신앙의 선배들의 믿음의 정신을 이어 받을 수가 있습니다. 

  중국 하문에 수십층 짜리의 고층 아파트들이 세워져 있습니다. 40평 정도의 크기 아파트가 우리나라 돈으로 약 2억원 정도 한다고 합니다. 화폐 가치로 볼 때 상당히 고가의 아파트입니다. 그런 고급스러운 고층 아파트들이 방범창을 하고 있었습니다. 1,2층의 아파트들이 방범창을 설치한 것은 이해가 되는데 17층, 20층의 아파트들도 모두 방범창을 설치고 있었습니다. 고급 아파트에 모양도 아주 단순한 쇠창살의 방범창이 얼마나 볼품 없는지 모릅니다. 가이드에게 왜 저렇게 방법창을 하느냐고 물어 보니 사람들이 의심이 많아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믿지 못하니 도둑이 올라갈 수 없는 높이인데도 방법창을 치는 것입니다. 그 방범창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자신의 집에 설치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자신의 마음에 치는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에서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방범창을 치는 곳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방범창을 치고 사는 사람들을 향해 열린 마음으로 다가가 그들의 방범창을 열게 하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교회가 세상을 향해 담을 높이 쌓기 시작하고 이분법적으로 교회는 선한 곳이고 세상은 악한 곳이라고 정의하면서 세상을 바라 보면 교회는 세상에서 진정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마음 문을 여시고 사람들 속으로 들어 가셔서 그들과 함께 삶을 나눌때 바로 그곳에 복음의 열매가 맺혀졌습니다. 복음을 증거하는 교회의 모습이 바로 그런 모습이어야 합니다. 교회가 사회와 격리 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 그들의 닫힌 마음의 문을 열게 만들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향해 마음의 문을 활짝 열 때까지 그러해야 합니다. 그런 교회의 모습이 될때에 사회에서 교회가 진정한 영향력을 끼칠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 잡혀 가서 70년 동안 종 노릇을 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시 불러 세우시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내가 너를 세워 불렀나니 너는 내것이라.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긴다. 너는 내 영광을 위해 불렀고 창조한 자들이라’ 라고 선포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말씀을 통해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열등의식과 패배의식의 쇠창살을 제거하여 버리라고 강하게 권면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받는 백성으로, 하나님께서 존귀하고 보배롭게 여기는 가장 귀한 사람으로서의 자존감과 자긍심을 가지고 살라고 명령하고 계십니다.

  우리 생활이 불신앙과 부정적인 마음의 쇠창살로 둘러 쌓여 있는 모습은 아닙니까? 열등의식과 패배의식의 쇠창살에 둘러 쌓여 탄식하고 있는 모습은 아닙니까? 세상은 악하고 나는 선하다는 이분법적인 생각을 가지고 세상을 정죄함으로 마음의 쇠창살을 굳게 세움으로 도리어 내가 갇혀 사는 어리석은 삶을 살지는 않습니까?

  너는 내 백성이고, 나의 존귀한 자며 나의 영광이라고 선포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아멘’으로 화답하며 어깨를 펴고 세상을 향해 일어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자긍심과 사명의식을 가지고 삶의 자리를 향해 일어서는 여러분들 위에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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