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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집 (딤전 3:15~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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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집 (딤전 3:15~15 )

우리나라는 세계적으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다종교 사회를 이루고 있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일제 강점기의 종교 사회화 정책이 한 몫을 했습니다. 기독교나 카톨릭의 경우 교세와 조직력은 다른 종교에 비해 탁월하지만 한국의 문화적 전통과는 개연성에 있어서 취약점을 보이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다른 종교들은 교세나 조직력은 약하지만 한국 전통 문화와 깊이 관계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다종교 사회에서는 자연히 교세 확장을 위해 치열한 경쟁이 불가피하게 되었습니다. 교회가 교세 확장이라는 명분에 포장되어 무모하기 이를 데 없는 데도 불구하고 교리적, 사회적, 도덕적 정당성을 가지게 되는 것은 철저히 근절해야 합니다.

진정한 복음의 확장보다 외적으로 나타나는 수치에 더 관심을 기울이게 되는 것이 이른바 물량주의입니다. 교회 부흥이 교인증가와 교회가 받은 교회적 사명 완수에 있지 않고 화려한 교회당 건물에 있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교회당 건축물과 교회의 위상이 정비례 되고 있다는데 비판의 소리가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교회와 교회당 건물은 구분되어야 합니다. 여기 '하나님의 집'( , 오이코데우)은 교회당 건물을 가리키지 아니합니다. 오직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는 그리스도인 전체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공동체'라고 번역되어야 합당합니다. 하나님의 집은 이 지상에 있는 보편적 교회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렌스키(Lenski)는 "교회를 가리켜 집이라고 한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자녀들을 소유로 삼으시고 그들과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집이라고 할 때 교회당 건물을 의미하지 아니하고 성도들의 집합체인 교회를 가리킵니다.

사도들이 각 교회에 보낸 회람 문서들은 그 지역의 믿는 자들에게 보낸 것이지 그 지역에 있는 어떤 교회당(건축물)에 보낸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성도를 하나님의 권속이나 혹은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했습니다.

에베소서 2장 19절에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 16절에『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 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고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6장 16절에『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또한 자신을 하나님의 집의 청지기라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4장 1절에『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라고 했습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남편이라고 합니다.
에베소서 5장 24절에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고 했습니다.
계시록 19장 7절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라고 했습니다.

성도들은 서로서로 형제자매라고 합니다. 그리고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라고 하고 천국은 아버지의 집이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14장 2절에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라고 했습니다.
교회는 언제나 하나님 안에서 평화를 누리는 절대 안락한 집입니다.

Ⅰ. 이 집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라고 했습니다.

본문 3장 15절에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라고 했습니다.
여기 '살아 계신 하나님의 집'이란 말은 생명 없는 우상과 구별되는 말입니다.
이 집은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것입니다.
사도행전 20장 28절에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1) 하나님의 교회에 대한 어원적 의미입니다.
구약에서는 교회라는 명사로 '카할'과 '에다'가 구별됨 없이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카할'이라는 말은 집회 혹은 회중을 의미합니다(민 16:3; 왕상 8:14; 신 31:30; 느 13:1). '에다'라고 할 때는 지정된 처소에서나 혹은 지정된 때와 장소에 모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세오경에서는 '카할'이란 명사가 '쉬나고게'( )로 표현되었습니다. 그리고 시편에서는 '카할'을 '에클레시아'( )로 표현했습니다.
신약에서는 교회라는 말로 사용된 '에클레시아'( )와 '쉬나고게'( )가 있습니다. '쉬나고게'는 유대인들이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모인 회중과 장소를 가리키는 것으로 신약에만 약 45회 나옵니다. '에클레시아'는 그리스도의 부름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이는 우주적인 교회를 의미하는 것으로 약 115회나 나타나고 있습니다.

2) 하나님의 교회에 대한 성경해석학적 의미입니다.

(1) 교회는 하나님의 집입니다(딤전3:15).
큰 집이라고 했습니다(딤후 2:20).

(2) 교회는 주님의 신부입니다(계 19:7; 고후 11:2).
주님은 그의 피로 교회를 사셨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사랑의 대상으로 삼으셨습니다.

(3)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골 1:24).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한 이유는 사람이 자기 몸을 사랑하듯이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그렇게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상적인 교인들은 한 몸에 있는 지체처럼 서로 돕고 사랑하면서 생활하기 때문이요, 참 교회는 오직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4) 교회는 성령의 전입니다(엡 1:21-22).
하나님이 성도들에게 거룩한 영을 허락하시고 교회가 생명적인 영향력을 소유하게 되며 거룩하게 이루어져 가는 것입니다.

(5) 교회는 위에 있는 예루살렘입니다(히 12:22).
갈라디아서 4장 26절에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고 했습니다. 하늘의 예루살렘이란 성경의 표현입니다(계 21:2, 9, 10).

3) 하나님의 교회에 대한 속성적 의미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부르심이 없이는 형성될 수 없는 성질의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섭리에 의하여 형성된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집입니다.
요엘 3장 17절에 『그런즉 너희가 나는 내 성산 시온에 거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인 줄 알 것이라…』고 했습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형제라고 합니다.
디모데전서 4장 6절에 『네가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치면…』이라고 했습니다.
죄인들이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의 가족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요한복음 1장 11-12절에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했습니다.
교회는 교인들이 살아 움직여야만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가 됩니다.

Ⅱ. 이 집은 진리의 기둥과 터입니다.

본문 3장 15절에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집에 대한 또 다른 명칭입니다. 영원불변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시간적 개념이라면 여기 '진리'( , 알레데이아)는 공간적 개념입니다.
요한복음 17장 17절에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로고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요 1:14-16).

요한복음 14장 6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기둥과 터는 견고한 기초를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진리를 떠받드는 의무를 감당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진리의 기초가 되는 교회가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을 교회의 기둥으로 여겼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9절에 『또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나와 바나바에게 교제의 악수를 하였으니 이는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저희는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이들로 말미암아 주님의 몸 된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우리는 본래 진흙입니다. 이사야 64장 8절에 『그러나 여호와여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거듭난 우리는 돌이 되어서 교회의 기둥이 되었습니다. 거듭나서 믿음을 얻은 자는 이긴 자들입니다. 이 믿음이 세상을 이깁니다.
요한일서 5장 4절에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이긴 자가 성전의 기둥이 된다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 12절에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라고 했습니다.

Ⅲ. 이 집은 주님의 몸 된 교회입니다.

에베소서 1장 23절에 『교회는 그의 몸이니…』라고 했습니다.
골로새서 1장 18절에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고 했습니다.
골로새서 1장 24절에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했습니다.

1) 이 집(교회)은 경건한 비밀이 있습니다.
본문 3장 16절에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라고 했습니다.
여기 '비밀'은 믿음과 동의어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 비밀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전 생애입니다.
여기 '경건'의 내용은 복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헌신입니다.

예수님께서 나타내 보이지 아니하셨다면 우리는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계시종교라고 합니다.
①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셨습니다(3:16).
②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었습니다(3:16). 비록 육신의 몸을 입으셨으나 죄가 없으시고 성령으로 의롭다하는 확증을 얻었습니다.
③ 천사들에게 보이셨습니다(3:16). 예수께서 하늘의 천사들에게 자신을 보이심으로 땅과 하늘의 주인이심을 나타내셨습니다.
④ 만국에서 전파되셨습니다(3:16).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될 사실을 말합니다.
⑤ 세상에서 믿은 바 되셨습니다(3:16). 세상 사람들이 믿을 때 믿는 대로 역사가 일어날 것임을 말합니다.
⑥ 영광 가운데 올리우셨습니다(3:16).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에서 시작하여 하늘에 이르렀습니다. 이것이 바로 비밀인 것입니다.

2) 이 집(교회)은 권세가 있습니다.

(1) 천국 열쇠의 권세가 있습니다(마 16:18-19).
(2) 가르치는 권세가 있습니다(마 28:18-20).
(3) 다스리는 권세가 있습니다(마 18:15-18; 살후 3:14-15).
(4) 봉사하는 권세가 있습니다.
① 예배봉사의 권세(요 4:23-24)
② 신유의 권세(계 11:6; 마 10:7-8; 약 5:14-15; 막 16:17-18)
③ 자선의 권세(마 6:3-4; 행 6:1-4)
(5) 현실참여의 권세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 13-14절에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여기 '현실'이라는 말은 철학적으로 보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사실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넓은 의미에서 이 세상 사람들은 누구나 현실에 참여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이런 것을 가지고 현실참여라고 하지 아니합니다. 오늘날 이 말의 의미는 정치, 경제, 사회구조를 유지하려는 노력이나 변화시키려는 제(諸) 활동을 현실참여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사회참여는 상당한 갈등이 수반됩니다. 왜냐하면 사회참여 속에는 상당한 도덕적 요소가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이 말하는 도덕적 원칙을 끝까지 견지해야 합니다.

첫째는 성경적 양심을 가지고 현실 앞에서 타협하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는 겸손해야 합니다.

인간이 현실과 미래에 대하여 무식하다는 것은 성경적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현실과 인간의 역사라 할지라도 세상은 인간의 손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진행되고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연법칙에 의한 하나님이 아니라 자연법칙 위에 계시는 분이십니다.

셋째는 자신을 드러내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기적을 행하시고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했습니다(마 9:30; 막 7:36; 막 9:9; 눅 8:56; 눅 9:21; 눅 9:36). 이미 예수님은 군중들이 자신을 왕으로 추대하여 로마에 대항하고자 하는 그들의 심리를 아셨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들이 가난한 자와 고통을 당하고 억눌린 자들과 함께하는 것이 성경적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으로 인해 사람들에게 알려져서 오히려 현재보다 유명해 지는 것은 성경적이 아닙니다.
성경은 은밀한 봉사와 구제를 요구했습니다. 이른바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했습니다(마 6:3). 그러나 오늘의 한국교회는 자신이 행한 것을 드러내기를 너무 좋아합니다. 그래서 구제하는 수단을 통해서 왕이 되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갈보리교회는 하나님의 집입니다. 하나님의 집은 저와 여러분들입니다. 하나님의 집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말씀(진리)을 떠받드는 기둥과 터입니다.
갈보리교회는 하나님이 자기 피로 값 주고 사신 주님의 몸 된 교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곧 성전입니다(요 2:21).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 우리는 성전입니다(고전 3:16-17;고후 6:16).
교회는 하나님의 집입니다. 따라서 교회당은 성도들이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는데 필요한 특별한 공간이면 족합니다. 교회운동에 필요한 공간은 그 어떤 희생을 치루더라도 만들어야 합니다. 어느 해인가 직분 자들의 서약서에 교회건축 자체에 의미를 가질 때는 자신은 반대한다고 했습니다. 좋은 생각입니다.
문제는 교회당 건물이 교회 운동의 제 1순위가 된다든지 교회건축 자체가 교회적 사명의 완수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따라서 교회건물은 사용가치로서 족한 것이지 교환가치로 속용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집에서는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세상은 자기 종교화(과학, 명예, 쾌락, 예술, 저급한 이데올로기 등)로 인해 불타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불꽃 사이를 거닐면서 타지 않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들입니다. 그 하나님의 일은 구령운동입니다. 구령의 내용은 계시록 18장 4절에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서 다른 음성이 나서 가로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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