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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님을 사모하자! (겔 37:1-10; 요 20: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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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님을 사모하자! (겔 37:1-10; 요 20:19-23)

도시에 살던 사람이 은퇴 후 시골에 가서 살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그래서 작은 농장과 젖소 한 마리를 샀습니다. 그리고 사료 파는 가게에서 사료를 사서 열심히 젖소에게 먹입니다. 그러나 젖소는 점점 살찌기는 커녕 말라갑니다. 사료를 파는 가게에 가서 주인에게 묻습니다: "당신에게서 산 사료를 먹였는데 왜 젖소가 말라갑니까?" 사료 가게 주인이 묻습니다: "젖소의 젖을 잘 짭니까?" "예. 내가 아침에 먹을 만큼 한 잔만 짭니다. 나머지는 젖소 안에 보관해 두고 있어요" 젖소의 젖을 충분히 짜내어야만 젖소는 건강하고 신선한 젖을 내는 법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부어진 성령의 능력을 맛보고 최대한 활용해야만 우리는 성령의 사람으로 풍성하고 즐겁게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님의 역사에 대해 더 민감해야 합니다. 통계로 보면 전 세계 20억 크리스챤 가운데 25%가 카리스마틱교회 즉 은사주의교회입니다. 그들에게 임한 성령은 강력하고 우리에게 임한 우리에게는 약합니까? 아닙니다. 성령은 동일하신데, 얼마나 사모하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전이라는 사실을 믿는 것은 신앙의 출발점입니다. 우리의 이성에 성령의 무한하심을 가둬 놓고 성령을 근심하게 하고, 일하시려는 성령을 제한하고 있지 않습니까?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말씀하는데 그분의 인도를 잘 받고 있습니까? 성령은 영적으로 죽은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고, 돌같이 굳은 마음을 부드럽게 하시고, 교회를 연합시키고, 직분을 감당할 은사를 주시고, 병을 치료하는 것과 같은 능력과 표적을 동반하고, 낙심한 자에게 용기를 주시고, 슬픈 자를 위로하십니다.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믿지만, 변화되기 위해서 성령님께 자신을 맡기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요지: "나는 성령충만하여 즐거이 충성해야 한다."

첫째로, 왜 우리는 성령충만하여 즐거이 충성해야 합니까? 우리는 예수님이 하신 일을 대신하도록 성령충만한 제자이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주일 저녁에 두려워 떨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십니다. 스스로 목메어 자살한 가룟 유다와 도마를 뺀 10명의 제자들이 모여 있습니다. '문들' (복수)이 닫혀 있습니다. 바깥문, 안문 할 것 없이 다 닫혀 있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처럼 제자들도 유대인들에게 죽을 수 있다는 공포심이 엄습합니다.

요 20:18절에 보니,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제자들에게 부활의 주님을 보았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사실을 믿지 않았습니다. 불신앙에 빠져 잇을 때는 두려움을 느끼는 법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이 모여 있는 곳을 잘 알고 찾아오셨던 것입니다. 제자 중 어떤 사람이 문을 열어 주었다는 언급이 없지만, 공간을 초월하시는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 가운데 서서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인사하십니다. 이처럼 주님의 부활의 몸은 신비로운 몸입니다. 예수님이 못자국난 손과 옆구리를 제자들에게 보이시니 제자들이 기뻐했습니다. 예수님이 찔리시고 죽었다가 살아나신 것이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기독교의 모든 것을 믿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죽음으로 끝나버린 종교, 죽음의 문제조차도 해결하지 못하는 종교를 믿는다면 얼마나 불쌍한 사람입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라고 다시 인사하시고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라고 말씀합니다. 승천하실 때가 가까워 왔기에 예수님은 제자들을 훈련시켜서 세상에 파송하십니다. 제자들의 사역의 행태는 예수님의 사역의 행태와 다를 수 있지만, 사역의 본질은 변함없이 지속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자신의 사역을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넘겨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궁극적인 목적은 사람을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예수님은 사람에게 다가오셔서 완전한 사람으로 사셨습니다. 그와 같이 제자들도 낮아져서 세상 속에서 사람들을 섬기는 자세로 세상을 향해서 나아가야합니다 (요 17:18).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요 20:21절에서 ‘세상 속’으로 제자들이 보냄을 받았으며, 그 궁극적인 목적은 세상을 구원하려는 것이었고, 그 목적은 이 세상 속에서 제자들이 쏟아내는 수고와 노력을 통하여 이루어야 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하신 후 제자들을 향하여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십니다 (22절). 예수님이 숨을 내 쉬는 것은 구약의 두 사건을 생각하도록 합니다. 먼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은 흙으로 아담을 지은 후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셔서 생령으로 만드셨습니다. 둘째로, 겔 37:9-10절도 중요한데, 하나님께서 골짜기를 가득 매운 마른 뼈에게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사망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게 하라”고 말씀하심으로 생기를 불어넣어 극히 큰 군대로 만드신 사건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죽음과 같은 바벨론 포로 생활을 청산하고 새로운 생명의 회복의 역사가 일어날 것을 상징합니다. 이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령의 생기를 넣어서 제자로 새롭게 창조하십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성령을 받으라"는 무슨 뜻입니까?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요 20장에서 제자들에게 성령의 은혜가 뿌려졌으나, 그들에게 흠뻑 적셔지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이 성령으로 흠뻑 적셔진 것은 오순절 성령 강림 때입니다. 요한복음에서 그 당시 꼭 필요한 은사를 주긴 했으나, 오순절 때 불의 혀로 성령이 임할 때 비로소 제자들은 완전히 새롭게 되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이 본론이고 요한복음의 사건은 서론입니다. 요한복음의 성령의 은사는 전환기적이며 예견적인 반면에, 오순절 성령 은사는 완전하고 결정적입니다. 우리는 요 20장의 잠시 흩뿌려진 성령이 아니라, 오순절에 사모하며 기도하던 제자들을 임하신 흠뻑 젹셔버리신 성령을 받았기에, 사모하기만 하면 충만한 은혜를 사모하면 받을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요 20장에서는 성령을 주심이 예수님의 사역의 계승자로서 제자들을 준비시키는 것이어서, 행 2장의 성령을 부어주심과 그 결과 능력이 임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이 사역을 수행함에 있어 성령이 임재하시는 목적은 무엇이었을까요? 여기서 눅 4:18절의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합시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는 성령의 충만을 받아서 충성해야 합니다. 진리로 자유케 된 성도 여러분. 성령충만을 받아서 세상의 무거운 짐에 눌려서 신음하는 사람들을 구해냅시다.

둘째로, 우리는 무엇 때문에 성령충만하여 즐거이 충성할 수 있습니까? 세상 속에서 성령의 능력을 받아 죄 사함을 통한 구원의 역사를 일으키기 위해서 입니다.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신 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누구의 되든지 사하면 사하여 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고 말씀합니다 (23절). 사람은 그 누구도 죄를 사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죄를 사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23절은 죄 사함을 통한 구원의 역사를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계획에 제자들이 수종든다는 말씀입니다. 제자의 사역의 핵심은 복음을 전하여 죄 사함을 얻도록 하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이제 제자들을 통해서 역사하시기 때문에, 교회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선포하는 현장에, 우리가 회개와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는 현장에 믿음의 반응이 있으면 하나님께서 죄용서와 구원을 주시고,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정죄와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교회의 전도를 통해서 하나님은 현재적인 심판과 구원을 이루십니다. 주목할 것은 ‘사하여질 것이요’와 ‘그대로 있으리라’는 말씀이 현재완료 수동태로 묘사된 점입니다. 이 말은 주님으로부터 보냄 받은 교회의 사명은 이미 하늘에서 작정되고 이루어진 뜻을 이 땅에 계속하여 실현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죄를 사하시고, 사하지 않으시는 것은 하나님의 소관이라는 것입니다. 단지 우리는 구원 즉 죄 용서를 받는 방법을 가르쳐 줄 뿐입니다.

예수님의 지상 사역의 목표는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하여 죄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어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삼는 것입니다. 그 사역은 이제 성령의 임재와 더불어 우리에게도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이 죄 사함과 용서 그리고 회복은 병든 자를 고치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하고 죽은 자를 살리는 사역과 분리되어 진행될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영혼 구원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중심이었던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과정을 통해서 일어났습니다. 따라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나 병든 자를 고치는 것, 죽은 자를 살리는 것 등은 죄 사함의 역사와 분리될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사도행전에서 죄 사함을 선포하는 베드로의 설교가 많은 경우에 가난한 자들에 대한 배려와 병든 자를 고치며 치료하는 과정을 수반한 것을 볼 때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행 2:42-45; 3:1-10등). 우리는 세상을 섬김으로써 구원의 역사를 일으켜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어떻게 성령충만하여 즐거이 충성할 수 있습니까? 능력의 성령을 받아 능력 있는 삶을 살도록 늘 사모해야 합니다.

죄 사함과 구원의 역사를 감당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준비되어야 합니까? 우리는 예배의 생활을 통해서 주님의 부활의 권능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을 더욱 알아가야 합니다. 요 20:19절 이하를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가 드리는 주일 예배 순서와 유사합니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날 저녁 즉 주일에 나타나셨습니다. 신약 교회도 주님이 부활하신 주일에 모여 예배드립니다. 주님이 나타나셨을 때 제자들이 비록 근심과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을지라도 부활의 예수님은 그들에게 평안을 주십니다. 예배로 나아올 때 세상 근심과 불안이 있을지라도 말씀과 성령으로 예배 가운데 주님은 세상이 줄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는 평안을 주십니다. 제자들이 주님의 십자가의 흔적인 두 손과 옆구리를 보았듯이 교회는 정기적으로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성찬을 통해 기념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죽음을 이기신 주님의 승리가 우리의 승리가 된 것임을 믿고 기뻐합니다. 그리고 예배를 통해서 성령의 충만함과 새 힘을 받아 세상을 향해 나아갑니다. 우리는 예배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보냄을 받습니다. 우리의 삶이 이런 회복을 경험하는 예배의 생활이 될 때, 하늘에서 계획되고 이루어진 것을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전권대사로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배의 삶을 살 때 빌 3:10절에서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교회는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을 알고 그 고난에 동참하기를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성령의 역사는 교회의 전체 사역에 있어서 필수적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우리의 말씀의 선포와 세상의 변화를 위해 반드시 필요합니다. 성령의 역사는 영혼구원을 위해 말씀을 선포할 때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고,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병든 자들을 돌보아 주고 고쳐주며 눈먼 자를 낫게 하기 위해 노력할 때도 반드시 있어야만 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성령을 선물로 우리에게 불어넣어 주시는 것은 우리를 회복시키고,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 만드시고, 새롭게 창조하시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성령을 받은 사람은 재창조함을 받은 사람입니다. 새롭게 창조된 사람은 성령의 생기로 사는 사람입니다. 성령의 생기가 없는 자는 살아 있어도 죽은 사람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성령님이 주시는 생동감과 힘과 새롭게 하심을 날마다 경험하는 사람입니다. 성령의 능력이 우리 교회를 덮도록 기도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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