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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막 10:3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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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막 10:35~45)
                                                   
드디어 새 정부가 탄생되었습니다. 새 정부의 국가 비전은 비단 경제 뿐 아니라 삶의 질에 있어서도 선진화를 달성함으로써, 국제 규범에 따라서도 세계의 인정을 받는 고품격 국가를 지향한다는 것입니다. 대통령 취임연설에 나타났고, 청와대 홈페이지에는 더욱 명쾌하게 제시되고 있습니다. 끝없는 이념 논쟁에 말려 서로 싸우다 퇴보하느니, 이제는 실용을 선택하여 국가 발전을 도모하자는 의지가 분명합니다. 새 정부의 국가비전은 한 마디로 “선진화를 통한 세계일류국가”입니다. 이 비전이 이루어지길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더 나은 형편, 더 향상된 삶의 질을 소망하는 것은 개인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라도 자신의 신분과 역할이 상승하기를 바랍니다. 대학교에서는 시간강사 조교수 부교수 정교수, 회사에는 평사원, 계장, 과장, 차장, 부장, 이사, 군대 직업장교에게는 소위 중위 대위 소령 중령 대령 준장 소장 중장 대장 이렇게 승진해가길 희망합니다. 그만큼 더 중요한 책임을 감당하고, 통솔하는 사람의 수도 늘어나고, 재량권도 많아지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승진대열에서 낙오되면서 던져지는 시선들과 비참한 자괴감을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승진은 쉽게 포기되는 선택 사항이 아닙니다.

무언가 업그레이드되고 향상되며, 진보하고 발전하려는 것, 소위 상향이동성은 개인이나 조직 모두에게 거의 본능에 가까운 성향이요 내적 추진력입니다. 그래서인지 승강기에 해당되는 미국 말에는 아예 내려간다는 뜻이 없습니다. 그냥 elevator입니다. 영국 말도 lift입니다. 백화점의 자동이동계단은 그냥 escalator입니다. 다 올라가기만 합니다. 사실 내려갈 때도 있는데 말입니다.

인간에게 너무도 자연스런 이 상향이동성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다루시는지 오늘 말씀에 나타납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막바지에 접어들면서 변두리 활동 접고, 예루살렘 향해 올라가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머문다고 믿어지고 하나님의 통치가 온 세상에 나타나는 통로라 믿어지는 이스라엘의 중심부, 바로 그 예루살렘입니다.

오늘 본문은 야고보와 요한이 내놓은 모종의 청탁과 함께 시작됩니다. 35절,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가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물으시는 예수님에게 두 사람은 구체적으로 답변합니다. 37절,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께서 권좌에 오르시면, 가장 영향력 있는 실세자리는 다른 사람 말고 바로 우리 형제에게 달라는 인사 청탁입니다. 아니, 공정한 절차를 거쳐 노력에 대한 정당한 대가로 주어지는 자리라면 누가 뭐라 하겠습니까? 그렇게 해서 얻게 된 지위나 자리는 축복해주고 그런 사람은 칭찬해주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이들의 요구는 그렇지 않아 보입니다.

이 야고보와 요한, 당시 막강한 군사력과 진보한 문명으로 온 세계를 지배하는 로마 밑의 힘없는 피식민 국민이요, 초라한 갈릴리 어부였습니다. 어느 날, 그물 깁던 두 형제 앞에 예수님께서 등장하셨습니다. 그리고 “나를 따르라”하시며 제자로 소명하셨습니다. 이웃의 어부 시몬도 예수님과 이미 함께 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두 형제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 즉시 아버지와 배를 버려두고 예수님을 추종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따라 나선 제자들에게 별명을 붙여주기도 하셨습니다.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하신 것이지요. 마가복음 3장은 예수님께서 12제자 중 오직 세 사람에게만 별명을 붙여주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시몬은 베드로라 하셨고, 이 야고보와 요한의 형제에게는 묶어서 보아너게라고 부르셨습니다. 번역하면 ‘우뢰의 아들’입니다. 아마도 대단한 성격을 지닌 것 같습니다. 오죽했으면 “우뢰의 아들”이라고 했겠습니까? 실지로 누가복음 9장 51절 이후를 보면 이들의 성격이 잘 반영되고 있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의 마을에서 예수님 일행을 환영하지 않는다는 소식을 듣고 대뜸 하는 말,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좇아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참 대단하지요?

아무튼 복음서에는 예수님께서 베드로, 야고보 그리고 요한과 자주 동행하시는 장면이 기록됩니다. 예수님과 함께 변화산에 올라간 사람도 위 세 사람입니다. 나중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도 이 세 사람이 예수님을 대동합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예수님과 세 사람이 상대적으로 더 가까운 관계를 가진 것으로 비쳐질 수 있습니다. 이 세 사람도 상대적으로 우월한 자신의 위치와 예수님과 더 밀착된 관계를 은근히 즐겼을 겁니다. 사실 복음서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긴 해도 항상 베드로 이름이 먼저 나오고 그 다음 야고보와 요한 형제의 이름이 서두에 나옵니다. 그러니까 베드로 야고보 요한 그리고 나머지 제자들, 이런 순서로 배열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보니 야고보 요한 이들 두 형제에게 부담 되는 유일한 경쟁자는 베드로입니다. 베드로는 신앙고백 한번 잘 해서 예수님 칭찬 받으며 천국 열쇠 받아 쥐었습니다. 수제자 자리는 더욱 견고해진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최고의 신임을 얻고 있는 그 베드로가 최근에 들어와서 야단맞기 시작합니다. 인류를 위해 수난 받을 것을 예고하시는 예수님을 만류하다가 “사단아 내 뒤로 물러나라” 혹독한 꾸지람을 받았던 것입니다. 두 형제의 눈에는 베드로가 예수님의 두터운 신임을 잃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베드로의 실추는 자신들에겐 좋은 기회로 여겨집니다. 이참에 야고보, 요한 형제는 베드로를 재껴내고 예수님의 최고신임을 받아내기 원합니다.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혀주옵소서”

이들의 행동에 나머지 제자들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41절, “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화를 내거늘” 나머지 제자들은 화가 치밉니다. 아마 베드로가 제일 불쾌했을 겁니다. “아니 내가 예수님께로부터 야단 좀 맞았기로서니 권좌의 좌우편 자리를 너희 형제가 감히 요구해?” 입장 바뀐 베드로는 나머지 제자들과 합세하여 두 형제에게 분노를 표출합니다.

그동안 12제자는 예수님의 뒤를 추종하면서 세상의 위협을 무릅쓴 운명 공동체를 이루어 왔습니다. 모험과 생사고락을 같이해 왔습니다. 밥도 함께 먹고 잠도 같이 자며 어디든 동행했습니다. 시간도 나누고 공간도 함께 사용하며 땀 흘려 일해 왔습니다. 그들의 물질, 심지어 그들의 마음까지도 한 가족처럼 나누었을 겁니다. 죽으면 같이 죽는 거야. 서로 배반하지 말자. 그렇게 다져온 혈맹의 결사 공동체였지요.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말씀과 보여주셨던 이적들을 미루어 볼 때, 예수님이야말로 이스라엘이 고대해온 바로 그 메시야라고 제자들은 확신합니다. 로마는 곧 축출되고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시키실 것으로 기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온 세상을 통치하는 대권자로 등극하실 것으로 예상합니다. 제자로 따라 나서길 참 잘했다 싶었을 겁니다. 이스라엘의 주권 회복은 예수님 부활 후까지도 이어지는 제자들의 최대 관심사였습니다.

그러면서 서서히 제자들의 마음속에는 이런 생각이 자리 잡기 시작했을 겁니다. ‘예수님께서 권좌에 오르시면 이 가운데 누가 어떤 자리를 차지하게 될까?’ 바야흐로 제자 공동체는 논공행상의 탁류 속으로 서서히 빨려 들어가기 시작한 겁니다. 그동안 견고했던 공동체 의식도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이제는 서로에 대해 형제요 동반자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서로 경쟁하는 고립된 각자요, 어쩌면 원수까지는 아니라 해도 다 방해꾼입니다.

더욱이 예수님의 행보가 이스라엘의 중심부 예루살렘으로 향하게 되니 자리다툼을 향한 서로의 긴장은 더 팽팽해지기 시작합니다. 소위 D-day가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자리를 향한 욕구가 언제든 노골적으로 표출될 수 있는 상황입니다. 바로 이런 때에, 야고보와 요한 두 형제가 힘을 모읍니다. 피를 나눈 형제니 쉬웠을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좌우편이라는 제한된 두 자리를 과감하게 요청한 겁니다. 나머지 10제자의 입장에서는 저 두 자리 선점당하면 자신들은 권력의 핵심에서 밀려나는 것입니다. 그러니 두 형제를 아예 “공공의 적”으로 간주합니다. 왜 화 나지 않겠습니까?

따라서 두 형제를 향한 열 제자의 분노는 “거룩한 의분”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제자 공동체의 단결과 연합을 헤치는 두 형제의 불순한 발상을 저지하려는 선한 공동 대처로도 보이지 않습니다. 열 제자의 분노는 앞으로의 논공행상에서 어쩌면 밀려날 수도 있는 자신들의 자기 방어적 몸부림에 불과합니다. 나머지 열 제자가 두 형제와 근본적으로 달랐던 것이 아닙니다. 다만 야고보와 요한은 그 속내를 먼저 표현했을 따름이고 나머지는 마음속에 담아 두었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온 인류의 피 속에 흐르고 있는 상향이동성을 잘 이해해주십니다.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니라고 보십니다. 열심히 노력하고 공정한 절차를 거쳐 진출한 자리는 선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아름다운 영적 기회입니다. 하지만 그 상향이동성을 이루어내기 위해서라면 때로 형제마저 버릴 수 있는 비틀린 인간성도 간파하고 계십니다. 뿐만 아니라 무슨 동기로 또 무엇을 위해 그 높은 자리를 확보하려는 것인지도 정확하게 꿰뚫어보십니다. 공생애 막바지입니다. 그동안 참 많은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이제 얼마 있지 않아 육신으로는 다시 못 볼 제자들입니다. 제자들이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보다는 이 세상 논리에 더 영향 받고 있는 모습이 안타까우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애타는 심정으로 가르치기 시작합니다.

42절-44절,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이 세상 집권자들이나 고관들과는 너희가 좀 달라야 하겠다. 이 세상에서는 어떤 지위에 올랐느냐, 어떤 권력을 확보했느냐, 얼마나 많은 사람을 부릴 수 있는 자리를 차지했느냐에 따라 서열이 결정된다. 그리고 틀어 쥔 그 권력 사용하여 자기 마음대로 사람들을 부리기도 한다.

너희가 지금 그런 세속 가치관에 영향을 받고 있구나. 그것 때문에 지금 너희가 서로 다투는구나. 그래 권세 있어 보이는 자리는 매력이 있겠지. 종은 자기 의견도 내지 못하고 이리저리 휘둘리니 얼마나 서글프겠냐? 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제자로 부름 받은 너희는 달라야 한다. 정 너희가 크고자 하고 높아지고자 한다면, 천국 영광은 높은 자리에 달려있지 않다는 것을 꼭 알아야 한다. 그것은 자리와 상관없이 지금 현재 도달한 위치에서 어떤 자세로 살아가느냐에 달려 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을 섬겼느냐, 남을 얼마만큼 섬겼느냐, 그리고 문자 그대로 종이나 머슴이 할 수 있는 일을 얼마나 많이 했느냐에 따라 천국 영광이 주어진단다.

그리곤 섬김의 궁극적인 예를 들고 계십니다. 45절,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너희들이 추종하는 나도 섬김 받는 권좌에 오르기 위해 온 것 아니다. 너희와 온 인류를 섬기기 위해 희생 제물로 목숨 바치려고 왔다. 말만 앞세우신 것 아닙니다. 하나님 뜻에 순종하여 머슴으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죄로 말미암아 고통 받는 우리를 머슴으로 섬기셨습니다. 결국에는 우리가 지은 죄의 대가를 지불하기 위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머슴으로 피 흘리셨습니다. 마치 섬기는 데는 말 내세울 필요 없어, 그냥 섬기면 돼! 하는 주님의 음성이 십자가로부터 들려나는 듯합니다.

여러분, 우리 조국이 세계일류국가가 된다면 감사한 일입니다. 하지만 대한민국이 온 세계를 실제로 가장 열심히 섬길 때 천국에서도 일류가 될 것입니다. 섬김이야말로 일류가 되려는 동기요 목적이어야 합니다. 우리 각자가 이 세상 기준에 따라서 일류인생으로 자리 잡게 되면 참 감사한 일입니다. 하지만 열심히 최선을 다했는데도 이류, 삼류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이웃을 가장 열심히 섬기는 머슴의 자세를 가진다면 천국에선 그 사람이 일류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최대 머슴으로 살다 돌아가심으로써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얻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부족하지만 우리 교회가 말만 외치지 않고 실제로 사회를 섬기고 봉사하려고 애쓰고 있으니 참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런 모습 때문에 받게 된 사회의 주목으로 인해 우쭐거려선 안 된다고 경계하고 있으니 또한 감사합니다. 그리고 말로 외친 내용을 실천하지 못한 것은 없는지 우리 자신을 살피고, 묵묵히 언행일치시켜간다면 더욱 감사한 일입니다. 우리는 서로 섬기고, 사회를 섬기고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머슴입니다. 머슴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묵상하고 본받아 수많은 영혼들을 섬기고 동행하면서 사순절 기간을 보내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이장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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