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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창 39: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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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창 39:20~23) 

  한 빌딩에서 화물 엘리베이터를 관리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왼 팔꿈치 아래로는 팔이 없었습니다. 어느날 누군가 그에게 왼손이 없어서 불편하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태연하게 대답했습니다. "불편하지 않아요. 왼손이 없는 것에 마음을 쓰지 않기 때문이죠. 오직 바늘에 실을 꿸 때만 내가 왼쪽 손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라고 대답하더라는 것입니다.

  누구나 살면서 불편한 일을 만납니다. 불편한 정도가 아니라 욥처럼 자신이 모태에서 잉태된 것과 난 날을 저주하는 그런 힘든 일을 만나기도 합니다. 이런 일을 피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리고 되돌려 놓을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고난도 피할 수 있으면 피해가면 좋습니다. 질병도 그렇구요. 가난이나 실패도 피할 수만 있으면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런 것 때문에 인생이 고달플 필요는 없습니다. 피할 수 있다면 피해가야 합니다. 악한 마귀 사단도 맞딱드려 싸우지 않아도 악한 마귀와 아무련 관계도 없이 살아갈 수만 있다면 피해야 합니다. 가장 좋은 승리는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입니다. 싸우면 이긴자에게도 상처가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할수만 있으며 싸우지 않고 이길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나 없었던 일로 바꿔놓는 것이 불가능하고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우리는 기꺼이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즐겨야 합니다.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웃으며 이겨내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도저히 피할 수 없다고 하면 어차피 감당해야 할 것이고 살아내야 할 내 삶의 몫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즐겨야 하고 누려야 합니다. 피할 수 없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내가 반드시 걸어가야 할 과정인줄 알고 그것을 즐거이 수용해야 합니다. 아멘입니까?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 힘든 일을 만났을 때 "미치고 죽겠네"하지 말고 "이것 흥미 있겠는데, 재미 있겠네"해야 합니다. 이것이 반사작용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까지 어떻게 했습니까? 모든 새로운 일들에 대해서는 "미치고 죽겠네" 그렇게 반응을 했습니다. 그러다보니까 재미는 살아지고, 창의력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불평과 원망만 쌓이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 재미있겠는데" 하고 반응해보세요. 재미가 생깁니다. 창의력이 자극되고, 감사와 기쁨이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생각을 바꿉시다. 예수 믿는 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복음의 능력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승리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요셉은 피할 수 있었는데 일부러 구덩이에 빠진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피한다고 피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애굽의 대상에게 팔린 일이나 요셉이 애굽으로 간 일은 자신의 의도와는 무관했습니다. 그리고 보디발의 집, 감옥, 피할 수만 있으면 피했겠지만 요셉으로서는 피할 수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러했기에 요셉은 그것을 즐겼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구덩이를 즐겼더니 구덩이에서 건짐을 받았습니다.애굽으로 가는 것을 것을 즐겼더니 무대를 넓은 애굽으로 옮겨주셨습니다. 보다발의 종이 되었을 때 그는 그것을 즐겼기 때문에 주인에게 인정을 받았고  은혜를 입었으며, 오히려 자유인보다 더 막강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실재적으로 보디발의 집을 다스리는 자가 된 것입니다.
  즐기면 성공이 눈 앞에 보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거절했기에 들어가게 된 감옥생활을 소개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왕자처럼 살던 부잣집 도령인 요셉이 갑자기 노예로 종으로 전락했습니다. 그리고 겨우 애굽에서 사람노릇하며 살게 되었나 싶었는데 누명을 뒤집어 쓰고 감옥에 들어가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요셉은 지금 애매한 고난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셉셉은 마땅히 억울해야 합니다. 억울해서 잠을 이룰 수 없어야 합니다. 하지만 성경 어디에도 이러한 요셉의 모양은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런 억울한 일을 당하고 이런 문화적인 충격을 경험하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몸이 마비되어집니다. 우울증에 시달립니다. 정신병에 걸립니다. 쓰러져서 일어나지 못하는 사람들, 불면증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요셉은 감옥생활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되돌려 놓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감옥생활을 즐기기로 마음 먹은 것입니다. 그렇게 감옥생활을 즐겼기에 간수장에게 은혜를 입었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모든 죄수를 관리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즐기면 모든 일에 탁월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뛰어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미련한 사람은 머리좋은 사람을 못 당하고, 머리 좋은 사람은 열심히 하는 사람을 못당하고, 열심히 하는 사람 즐기는 사람을 못당합니다. 아멘입니까?

  요셉은 억울해할 수도 있습니다. 깨끗이 살아보겠다고 한 것인데 세상이 몰라준 것입니다. 군대장관 보디발은 알아줄 줄 알았는데 하면서 사람을 원망하고 세상을 한없이 한탄할 수도 있었습니다. 자포자기할 수도 있었습니다. 미치고 죽겠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역경의 날에 즐거워 한 것입니다. 역경을 피할 수 없으면 적응하고 돌파하고 맞서 싸워이겨내야 하는 것입니다. 요셉은 그렇게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들에게도 요셉의 기질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요셉은 감옥에서도 창의적인 생각을 했고, 감사생활을 했으며, 감옥도 살만한 곳이라고 생각하면서 즐겼습니다. 언제 이런 경험해 볼 수 있겠나? 하면서 이왕 경험해야 할 것이라고 하면 즐기자 그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이것, 정말 흥미있겠구나, 정말 재미있겠어,"라고 생각을 콘추럴한 것입니다. 마인드 콘추럴은 이렇게 하고 사는 것입니다. 마음을 경영하시기를 바랍니다. 마음을 관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바람이 똑같이 부나 어떤 배는 동쪽으로 어떤 배는 서쪽으로 움직여 나아갑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바람이 배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돛과 키가 그 방향을 결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에게 부는 바람이 아무리 거셀지라도 그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바람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역술을 하는 사람들도 "사주는 관상만 못하고 관상은 심상만 못하다"라는 말을 합니다. 사람이 태어난 시공의 조건을 따지는 것이 사주이고 사람의 얼굴에 나타는 그 사람의 이미지가 관상입니다. 그리고 마음에 품고 있는 꿈과 비전이 심상입니다. 마음에 품고 있는 것이 그 인생의 운명에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입니다.

  이왕에 겪을 일이라면 즐겨야 합니다. 그러면 좋은 일이 있을 것입니다.  더 좋은 일이 생깁니다. 아멘입니까?
  선한 마음을 가지고 살다보면,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살다보면 좋은 결말이 있습니다. 좋은 마음은 반드시 좋은 결말이 있습니다.
  청교도들의 인사 말 중에는 "The Best is yet to come"(가장 좋은 것은 아직 오지 않았다)하는 인사말이 있습니다. 너 조금만 참아! 반드시 더 좋은 날이 오게 될 거야! 하는 것입니다. 선한 끝은 반드시 있습니다. 진실의 끝은 반드시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200% 절대긍정을 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생각의 전쟁에서 이기면 실재의 전쟁에서도 반드시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100% 긍정이 아니라 200% 절대긍정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고난을 즐기는 비결입니다. 인생을 행복하게 살아가는 비결인 것입니다.

  생각은 강력한 자석과도 같습니다. 좋은 생각에는 좋은 일과 좋은 사람이 끌려오는 것입니다. 긍정적인 생각은 긍정적인 일과 긍정적인 사람을 빨아드립니다.  그러나 부정적인 생각은 부정적인 사람, 부정적인 일을 불러오는 것입니다. 어두운 생각은 어두운 일을 몰고 오고 어두운 사람을 몰고 오는 것입니다.

  우리의 DNA속에는 일단 부정을 한 번 깔고보는 그런 심리가 들어있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민족성이기도 합니다. 하도 많이 속고 침략을 당하고 빼앗기고 그렇게 살다보니 그렇게 된 것입니다. 우리 민족은 5000년 역사가운데 침략해 본 적은 없고 침략만 900번이 넘도록 침략을 당했습니다. 그러니 믿을 사람 아무도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일단 한번 부정해보는 것입니다. 비난부터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건강한 생각이 아닌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최근 의학계에서 "웃음치료" 연구를 하다가 재미있는 발견을 했습니다. 웃음과 행복은 전염되더라. 불행도 전염됩니다. 내 주변에 불행한 사람이 있으면 그 불행이 내게 전염되어진다는 것입니다. 행복도 전염되어진다는 것입니다. 내 주변에 행복한 사람이 있으면 행복이 전염되어지더라는 것입니다. 신앙도 전념됩니다. 믿음도 전념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창의적인 생각, 긍정적인 생각, 좋은 생각, 밝은 표정의 사람을 찾아가서 그 옆에 살짝 앉아만 있어도 복된 일이 생기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부정적인 사람 곁에 그냥 가만히 앉아있기만 해도 좋지 못한 일과 좋지 못한 사람들이 달라 붙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각의 전쟁에서 승리하셔야 합니다.
  믿음있는 사람 옆에만 살아도 복이 되는 것입니다.

  미우라 아쓰시의 「하류사회」라는 책이 있습니다. 일본 하류사회에 부족한 것은 소유가 아니라 의욕 즉 열정의 부족이더라는 것입니다. 소득의 격차가 아니라 열정의 격차, 의식의 격차가 사회계층을 만들더라는 것입니다. 생각이 격차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신앙인들에게도 하류신앙인이 있고 상류신앙인이 있습니다. 부정적인 신앙은 하류신앙입니다. 긍정적인 신앙은 상류신앙인 것입니다.

  성도는 절대긍정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절대 긍정, 이런 즐길 수 있는 삶의 열정은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창세기를 통하여 요셉의 생애 가운데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바로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더라"는 이 말씀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할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까? "은혜를 받게 하셨더라"하셨고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이런 역사, 이런 결과가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은 어떤 삶이 주어진다고 해도 그 삶을 즐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심을 믿기에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신 선하신 뜻을 알기에 긍정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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