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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때를 따라 도우시는 은혜 (히 4: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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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를 따라 도우시는 은혜 (히 4:14-16)

욥기에 보면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났나니 불티가 위로 날음 같으니라”(5:7)는 구절이 나옵니다. 이 말씀과 같이, 우리가 한 세상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는 것은 이상한 것이 아니라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바다와도 같아서 바람이 자고 평온한 날들도 있지만 바람이 불고 큰 파도가 일어 위태로운 날들도 있습니다. 형통한  때도 만나고 역경의 때도 만납니다. 인생에 다가오는 문제는 그 원인이 외적인 것도 있고 내적인 것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번에 기름유출 사고로 인해 서해안의 수많은 양식장이 피해를 입은 것은 외적인 재난을 당한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우리는 자신의 연약함과 부주의와 같은 내적 원인에 의해서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잘못된 습관이 고난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 주위에는 술이나 마약, 도박에 대한 습관을 고치지 못해서 인생을 그르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육신의 연약함이나  장애로 인해 힘들게 사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더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지만 실제로는 반대로 행하는 자신을 바라보면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탄식할 때가 있습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는 도움의 손길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들을 도우려면 큰 능력과 함께 한없이 마음이 넓고 인자한 분이어야 합니다. 이 시간 저는 히브리서 4장 14절로 16절에 근거해서 연약한 우리를 때를 따라 도와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살펴봄으로 피차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첫 번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큰 대제사장이 되십니다.

구약시대에 선민 이스라엘과 이방인의 차이점이 한둘이 아니지만,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차이점을 들자면 전자에게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한 길이 열려 있었으나 후자에게는 그 길이 막혀 있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직접 하나님께 나아갈 수는 없었으며, 반드시 제사장의 중보가 필요했습니다.

특히, 대제사장은 매년 한 차례씩 대속죄일에 제물의 피를 그릇에 담아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 백성의 죄를 속하는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죄를 사하셨습니다. 이처럼 대제사장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중보자를 갖지 못했던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길이 봉쇄되어 있었습니다.

한편, 제사장은 이스라엘 자손이라고 해서 누구나 될 수 없었고, 자격 조건이 매우 엄격했습니다. 레위 지파 중에서 아론의 후손에게만 자격이 주어졌습니다. 그렇다고 아론의 후손이라고 무조건 제사장이 될 수 있었던 것이 아니고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결함이 없어야 했습니다.

그렇지만 구약시대의 제사 제도는 여러 가지 약점을 갖고 있었습니다. 우선, 대제사장 자신에게 약점이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대제사장 역시 여느 사람들과 똑같은 본성을 가진 사람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타락한 본성을 타고 날 뿐 아니라 한 평생 살아가면서 죄를 짓습니다. 이는 대제사장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대제사장은 지성소에 들어가서 백성을 위해 속죄 제사를 드리기에 앞서 자기 죄를 속하는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또한 대제사장도 사람인지라 영원히 살 수 없으므로 그가 죽으면 다른 사람이 그 자리를 계승했습니다. 이는 아론의 후손 대제사장의 한계를 말해 줍니다.

그뿐 아니라, 바친 속죄 제물도 완전하지 못 했습니다. 양이나 염소나 송아지와 같은 짐승의 피로는 본질상 사람의 죄를 속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율법에 근거해서 아론의 자손 대제사장이 짐승의 피로써 속죄 제사를 드리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시한부로 허용하셨으며, 제한적이나마 속죄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이로 인해 구약시대에는 매 년마다 반복해서 속죄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자손이 대제사장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었듯이, 신약시대에도 이 원칙은 변함이 없습니다. 바뀐 것이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과 제물의 역할을 모두 담당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시대의 대제사장들과 달리 온전한 대제사장이시므로 히브리서 4장 14절에 보니 “큰 대제사장”이라고 한 것입니다. 자,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약의 대제사장 보다 위대하신 이유가 무엇인지 살펴봅시다.

1.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아론의 후손 대제사장들이 온전치 못했던 이유 가운데 첫째는 그들이 본질상 죄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큰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담의 후손으로 오시지 않고 여자의 후손으로 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 성령으로 잉태되셔서 탄생하셨으므로 우리와 동일한 인성을 갖고 계시지만 죄가 없으십니다. 죄가 없으므로 자기를 위하여 속죄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으며, 죄인들의 진정한 중보자로서 자격을 갖고 계시는 것입니다.

2.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히 살아 계시는 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 사람이시면서 동시에 참 하나님이십니다. 육신의 혈통으로 볼 때,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자손으로 오셨습니다. 다윗은 레위지파가 아니고 유다 지파 사람입니다. 따라서 율법에 의하면 예수님은 대제사장이 되실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영원한 제사장“이 되셨습니다(시 110:4).

멜기세덱은 창세기 14장에 단 한번 나오는 인물로서 아브라함이 그돌라오멜 연합군을 격파하고 포로로 잡혀간 조카 롯과 소돔 거민들을 찾아서 돌아왔을 때, 아브라함을 환영하고 떡과 포도주를 나누어 주고 축복해 주었으며 아브라함은 그에게 노획물 가운데서 십분의 일을 드렸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멜기세덱을 살렘 왕이라고만 할 뿐 다른 설명이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7장에 보니, 멜기세덱에 대하여 ”2)그 이름을 번역한즉 첫째 의의 왕이요 또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3)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론의 뒤를 이어 대제사장이 되신 것이 아니라 멜기세덱의 뒤를 이어 대제사장이 되신 것은 우리를 위한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실제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3.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피로써 우리를 위한 속죄 제사를 드려 주셨습니다.

히브리서 9장 11절로 1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드려주신 속죄 제사에 대하여 이같이  말씀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하여 거룩케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이 말씀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은 양이나 염소나 송아지의 피로 드린 제사와 달리 속죄의 효력이 영원합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사람들은 큰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드려주신 영원한 속죄를 힘입어 하나님과 불화한 상태를 청산하고 화목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원수 사이였던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받는 친 백성이 된 것입니다.


두 번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똑같은 육체를 취하시고 사람으로 오셨는데,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히브리서 4장 15절에 보니,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체휼(体恤)한다는 말은 ‘동정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막연히 인생들을 동정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가 받는 모든 시험을 다 당하시고 인생의 쓴잔을 다 맛보심으로 우리의 사정을 깊이 이해하시고 동정하시는 분이십니다.

“동병상련”(同病相憐)이란 말이 있습니다. 같은 병을 앓는 사람끼리 서로를 가장 잘 이해하고 동정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또는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끼리 동정하고 돕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왕궁에서 호화롭게 사는 왕자는 서민의 애환을 모릅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의 독생자께서 낮고 천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은 깊은 뜻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태어나실 때부터 괄시와 천대를 받으셨습니다. 어머니 마리아는 해산할 때가 임박한 데도 몸을 풀 방 한 칸 구할 수 없어 마구간에서 예수님을 낳아 말구유에 뉘였습니다. 또한 헤롯왕이 아기 예수를 찾아 죽이려하므로 부모의 품에 안겨 먼 애굽으로 피신하셨습니다. 헤롯이 죽은 후에는 갈릴리의 시골 마을인 나사렛에서 사셨습니다. 어려서부터 목수인 양 아버지 요셉을 도우면서 목수 일을 하셨고, 요셉이 일찍 세상을 떠나자 어머니와 동생들을 부양하셨습니다.

광야에 가셔서 40일 금식하신 후 마귀의 시험을 이기시고 성령 충만하셔서 고향으로 돌아오셨으나 나사렛 동리 사람들은 예수님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고 목수의 아들이라고 배척하였습니다. 심지어는 예수님의 동생들조차 형인 예수님을 비난했습니다.

기적의 떡을 얻어먹었던 자들이 등을 돌리고 떠나갔는가 하면, 열 두 제자 중 하나였던 가룟 유다는 은 삼십에 스승을 배반했습니다. 아무 죄도 없으셨지만 채찍에 맞으시고, 가시관을 쓰셨으며, 온갖 비방과 욕을 받으시고, 거짓 증인들의 증언에 근거한 조작된 재판을 받고 강도들 사이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고통스러운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께서 고난 받으실 것에 대하여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이 오시기 750년 전에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우리 중에 아무리 고생을 많이 한 사람이라도 예수님의 고생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것입니다. 아무리 힘든 시험을 당한 사람이라도 예수님처럼 어려운 시험을 당해 본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독생자께서 무엇 때문에 이처럼 고난에 찬 인생을 사셨으며, 어렵고 무서운 시험을 당하셨을까요? 여기에는 깊고 은혜로운 뜻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인생들의 고충을 몸소 체험하심으로 우리를 더 깊이 이해하고 더 잘 도와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고 하신 말씀에 담긴 뜻입니다.

사람들은 어려운 사람을 동정하면서 우쭐하는 마음을 갖기 쉽습니다. 그래서 도움을 받으면서 마음에 상처를 입는 일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동정에는 불순한 동기가 조금도 섞여 있지 않습니다.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고 하신 대로, 예수님은 죄가 없고 순결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진심으로 우리를 이해하시고 불쌍히 여기시고 적절한 도움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기질상의 연약함을 아시므로 죄의 유혹에 넘어지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우리의 온갖 약점을 다 아시지만 우리를 무시하거나 위협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우리의 약점을 잘 아시기에 효과적으로 우리를 도와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시편 103편 14절에 보니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와 같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힙 입어 당면한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4장 16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하신 대로,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받기 위해 우리가 할 일이 무엇일까요?

1.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도리를 굳게 잡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4장 14절에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권면은 우리에게 복음의 진리에 굳게 설 것을 명하신 것입니다. 복음의 진리란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 받는 도리를 말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때로 신앙 때문에 어려움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신앙 때문에 사람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기도 하고, 경제적인 손해를 입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핍박이 있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고 매우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8)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9)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10)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터이라”(요 15:)

또한 사도 바울은 성도들에게 이르기를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행 14:22하)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으로 인해 핍박을 받을 때 당황하지 말고, 더욱 믿는 도리를 굳게 붙잡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 “28)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29)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요 10:) 하신 주님께서 모든 시련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시는 것입니다.

2.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야 합니다.

히브리서 4장 16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은혜의 보좌’란 ‘하나님의 보좌’를 의미합니다.

모세가 만든 성막의 안마당에는 번제단이 놓여 있었는데 여기서 번제를 비롯한 각종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번제단 뒤편에 장막이 있었는데, 첫 번째 장막을 성소라 하고, 두 번째 장막을 지성소라고 했습니다. 제사장들은 매일같이 성소에 들어가서 촛대에 불을 밝히고, 향단에서 향을 사루고, 떡상에 열 두 덩이의 떡을 올렸습니다. 그리고 성소와 휘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방이 하나 있었는데, 그곳에는 언약궤와 속죄소가 있었습니다. 그 곳은 지성소로서 하나님의 영광이 임재해 있는 지극히 거룩한 곳이었습니다.

지성소에는 오직 대제사장만이 백성의 죄를 속하기 위해 일 년에 한차례 대 속죄일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언약궤의 뚜껑에 해당하는 맨 윗 부분은 네 모퉁이에 뿔이 하나씩 달려 있고, 양편에 날개를 편 천사를 조각해서 세웠는데 두 천사의 시선이 중앙을 향하게 되어 있습니다. 언약궤의 이 부분을 속죄소 또는 ‘시은좌’(施恩座)라고 합니다.

속죄소란 그곳이 백성을 위한 속죄 제사를 드리는 곳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고, 시은좌란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속죄 제사를 받으시고 죄인들에게 사죄의 은혜를 베푸신 시은좌는 곧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보좌를 상징합니다.

신약시대에 와서 예수님께서는 송아지나 염소의 피가 아닌 자기 피로써 온전한 속죄 제사를 드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서 “다 이루었다” 하시고 운명하시자 성전의 지성소와 성소를 가로막았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갈라져 둘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인간들 사이에 가로 막혔던 죄의 장벽이 무너진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의 불화가 청산되고 하나님과 화목이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속죄를 완성해 주셨기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서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본문에 보니 믿는 우리에게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라’고 하였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일반 백성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감히 나아갈 수 없었으며, 제사장의 중보를 통해서만 제사를 드릴 수 있었지만,  신약의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직접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서 소원을 아뢸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인들이 아론의 자손 대제사장보다 더 위대한 특권을 부여 받았음을 의미합니다.

구약의 대제사장은 일년에 단 한번만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든지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얼마나 영광스럽고 위대한 특권입니까! 이는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신분이 그만큼 위대하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에 대하여 베드로전서 2장에 이르기를 “9)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10)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보통 제사장이 아니라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힘입어 언제라도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서 도우시는 은혜를 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기도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속받은 성도들에게 주어진 특권입니다. 성도들에게는 언제 어디서나, 무슨 일을 위해서건 기도할 특권이 있습니다. 그것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직접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서 간구할 수 있는 특권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특권을 묵혀 두지 말고 힘써 활용하시는 성도님들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기도는 만능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인생길을 가는 동안 때로 고난과 역경 가운데 처할 때가 있습니다. 시험을 당하여 힘들 때가 있습니다. 문제를 만나서 마음이 외롭고 고독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할 때 성도님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가서 간구하십시오.

마귀의 유혹에 넘어졌을 때나 세상 욕심에 따라서 살므로 범죄하였을 때에도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리할 때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님들의 모든 기도에 은혜로운 해결책을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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