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마 5:5)

  • 잡초 잡초
  • 1064
  • 0

첨부 1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마 5:5)

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

주님은 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이렇게 바꿀 수도 있습니다. “너희 온유한 자여 너희가 복이 있다”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며 온유의 길을 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말씀을 듣는 우리 마음은 어떻습니까? 정말 예수님의 말씀에 동의할 수 있습니까? 온유하다는 것은 현대사회에서는 적극적으로 자랑할만한 성격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온유하다는 것은 한자로 따뜻할 온(溫) 부드러울 유(柔)를 써서 ‘따뜻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말합니다. 현대인들은 이와 반대로 힘 있고 강한 것을 좋아합니다. 사람이 좀 민첩하고 약삭빨라야 손해 보지 않고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온유한 자는 바보 같습니다. 온유한 자는 착하기만 하기 때문에 험한 세상에서 당하고 살 수밖에 없습니다.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착하다는 말은 욕입니다. 사람들은 착한 사람에 대해서 겉으로는 칭찬을 할지모르지만 속으로는 혀를 끌끌 찹니다. 그렇게 살아서 어디 밥 먹고나 살겠나? 자기 자녀가 승부욕이 강하고 사기를 치더라도 높은 자리에 오르길 바라지 온유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을 것 같습니다.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온유하게 살면 바보취급당합니다. 약한 모습을 보이면 다른 사람들이 그 약점을 노리기 때문에 어떻게든 강한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세상에는 1등만 살아남기 때문에 어떻게든 최고의 자리에 올라야 합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사람이 좀 독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여기에 한 술 더 떠 온유한 자가 복이 있을 뿐만 아니라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이라 말씀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말씀에도 동의 할 수 있습니까? 땅을 차지하는 사람들은 힘 있고 계산이 빠르고 권력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요즘 새정부 장관 인사 청문회를 보면서 느끼는 바가 많습니다. 다들 하나같이 집을 몇 채씩 가지고 있고 곳곳에 땅을 가지고 있는 부자들입니다. 그래서 ‘강부자’ 내각이라는 말도 나옵니다. ‘강남 부자들’의 내각이라는 뜻입니다. 한 나라의 장관 후보에 오른 이런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서민들은 괴리감을 느낍니다. 그들의 부도덕성에 절로 한 숨만 나올 뿐입니다.

그러나 냉정히 따지면 이런 사람들은 우리가 부러워하던 존재들이 아니었습니까? 개발 정보를 미리 알고 투기를 행한 약삭빠른 사람들이고, 노른 자 땅위에 부동산을 소유해서 가만히 앉아서도 돈을 버는 지혜로운 사람들이고, 자녀 교육을 위해 해외로 보내고 군대에서 썩지 않도록 교묘하게 빼돌린 능력 있는 사람들 아닙니까? 이런 부자 아빠들 이런 능력 있는 아빠들을 우리는 부러워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들처럼 민첩하게 살지 못하는 자신을 보며 무능력한 사람이라고 탓하지나 않았습니까? 

세상은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 할 것이라고 결코 믿지 않습니다. 땅을 빼앗기지나 않으면 다행일 것입니다. 사람이 독하고 화도 낼 줄 알아야 땅을 지킬 수 있다고 세상은 말합니다. 이는 주님의 부름 받은 모임인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목소리가 큰 사람이 대접받고 자기 권리를 누립니다. 온유한 사람은 그 권리가 묵살당합니다. 교회에서 분란이 일어날 때도 어떤 폭력이나 권위나 사람을 동원해서라도 일단 힘으로 누르고 장악해야 이긴다는 사고가 보편적인 생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런 세상을 향하여 “아니다.” 하고 외칩니다. 진정 복 있는 사람은 온유한 사람들이다. 진정 땅을 기업으로 받게 될 사람들은 온유한 사람들이다. 우리는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가치관보다는 주님의 말씀이 옳다고 믿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제자입니다. 우리들의 싸움의 최전선은 가치관의 싸움입니다. 온유한 자는 바보 같다는 세상에 대해서 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고 외치는 사람들이 바로 교회의 성도들입니다. 현대 교회의 비극은 주님의 말씀을 버리고 세상처럼 교회가 힘 있는 자의 조직, 강함과 권력을 추구하는 자들의 모임이 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온유한 자는 누구인가?

온유한 자들은 누구입니까? 온유하다는 것은 결코 약하고 무르다는 뜻이 아닙니다. 온유하다는 것은 바보거나 실력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저는 온유를 이렇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온유는 거인이 어린아이를 안고 있는 모습과 같습니다. 힘이 있지만 힘을 절제하는 데서 나오는 품성이 온유입니다. 예수님은 온유하신 분이셨습니다. 마태복음 11장 29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에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온유는 그 힘을 사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온유는 달리 말하면 자기에게 정당한 권리가 있지만 그 권리를 행사하지 않는 것입니다. 충분히 분노할 수 있지만 분노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하늘 보좌에서 영광을 받으실 권리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것들을 내려놓고 인간이 되셨습니다. 이것이 온유입니다. 하나님이 온유해지셨기에 우리는 하나님 앞으로 나올 수 있습니다. 시내 산에서 십계명 율법을 들고 강한 바람과 지진과 우뢰의 모습으로 하나님께서 나타나셨을 때는 그 앞에 감히 눈을 들고 서 있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님이 가난한 자의 모습으로, 사랑의 모습으로 우리 가운데 오시자 누구든 두렴 없이 그 사랑 앞에 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의롭고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판단하고 심판하실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판단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상한 갈대와 꺼져가는 심지와 같은 우리들을 사랑함으로 그대로 받으셨습니다. 왜 이렇게 죄 지었니 왜 이렇게 무능하니 묻지 않으시고 그 품에 안아주셨습니다. 이것이 온유입니다. 강함이 아버지의 속성이라면 온유는 어머니의 속성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의 어머니처럼 우리를 감싸고 안아주십니다. 이 온유함의 사랑이 우리를 살아나게 했습니다. 나그네의 옷을 벗기는 것은 강한 바람이 아니라 따뜻한 태양입니다. 이 사랑이 우리 죄악의 옷 꺼풀들을 하나하나 벗게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은 놀라운 기적의 능력을 가지고 계셨고 그분의 행동은 항상 옳았습니다. 그런데도 그 권리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군마를 타지 않으셨고 겸손의 상징인 작은 나귀를 타셨습니다. 상대방의 폭력과 불의에 동일한 폭력으로 대항하지 않으시고 묵묵히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이것이 온유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비로소 눈에는 눈 이에는 이식의 폭력의 악순환으로 반복되는 세상 법칙이 결정타를 맞았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온유한 사람이 되라고 명령하십니다. 온유한 사람의 모습은 팔복의 말씀이 들어 있는 마태복음 5장의 산상수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5장 38절에서 44절의 말씀들입니다. 온유하다는 것은 자신에게 정당한 권리가 있지만 그것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누가 내 오른편 뺨을 때리면 우리는 그에 대한 보복으로 우리는 상대방의 오른 뺨을 때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 왼편 뺨마저도 돌려대라고 말씀합니다. 분노를 참는 것 이것이 온유입니다. 누가 우리를 송사하여 우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불의한 일을 행하려는 자가 있을 때 우리는 당하고만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도 맞고소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 겉옷까지도 내어놓으라고 요구하십니다. 손해를 참는 것 이것이 온유입니다. 어떤 사람이 우리를 억지로 짐을 지우고 오리를 끌고 가게 하는 억울한 일을 행하게 할 때 우리는 단연코 거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오히려 십리까지라도 짐을 지고 동행하라고 말씀합니다. 억울한 일을 참는 것 이것이 온유입니다.

물론 이 말씀들은 실천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자기 권리를 조금도 양보하고 싶지 않은 우리 현대인들에게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런 극단적인 교훈들을 통해서 우리가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할지를 가르쳐주십니다. 세상의 법과 방식대로 살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세상 방식은 요약하면 눈에는 눈, 이에는 이식의 보복의 방식입니다. 이런 삶의 방식이 인간들을 분노와 폭력의 존재로 만들어버립니다. 자기 희생과 부인은 없고 끊임없이 자기를 강화하는 이기적인 존재로 만듭니다. 그래서는 우리 마음의 평화나 세상의 평화가 없습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고 나를 미워하는 자를 미워하라고 세상은 말하지만 주님은 이제 우리를 핍박하는 원수를 위해 기도하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온유입니다.

그런 점에서 교회가 쉽게 조직을 만들고 압력 단체로 행세하는 것은 주님의 뜻에 어긋난다할 것입니다. 지난 해 사학법 개정 문제에 대해서 교회가 압력 단체가 되어 정부에 대해서 위력 시위를 하였습니다. MBC 뉴스후 보도에 대해서 집단적으로 성명서를 발표하고 시청거부 운동을 벌이려 합니다. 정확히 세상의 논리를 좇아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의 힘에 논리로 대항하려 합니다. 힘의 논리로 어느 정도 효과는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로 말미암아 교회는 더 큰 것을 잃고 말았습니다. 온유하라는 주님의 말씀과 교회의 거룩성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교회는 더 이상 거룩한 집단이 아니라 또 하나의 이기적인 집단, 힘 있는 집단으로만 보일 뿐입니다. 이를 보며 세상의 사람들이나 교회 안의 성도들은 ‘힘은 좋은 것이다.’라는 교훈만 받을 뿐이고 말씀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듭니다.

주님은 우리를 향하여 세상이 싸우는 똑같은 방식으로 싸우라 말씀하지 않습니다. 자기 부정과 사랑으로, 십자가의 자기 희생과 낮아짐으로, 곧 온유함으로 세상을 이기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교회만의 문제가 아니라 성도 개개인이 생활 현장에서 닥치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온유함과 강함이 싸울 때 우리는 온유함의 길을 가야합니다. 한국 사회는 매우 시끄러운 사회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권리를 찾기 위한 싸움 때문입니다. 소리가 작으면 묻혀지고 외면당하기 때문에 자꾸 소리가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소리를 높이기 위해 남의 소리를 누르기까지 합니다.

이런 현상은 인터넷의 댓글들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일반 세상 사이트에서 큰소리가 나는 것은 당연하다 할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와 관련된 사이트들에서도 이런 분노의 소리가 나오고 있다는 것은 문제입니다. 그 글들이 온유하거나 예의가 없습니다. 상대방을 비방하거나 빈정대고 왜곡하는 글들로 가득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우리 안에는 여전히 온유보다는 분노가 가득하고, 자신의 얼굴이 드러나지 않는 공간에서 마구 그 분노를 토해내고 있는 모습이라 할 것입니다. 교회마저 이러니 누가 이 분노의 세상을 따뜻하고 평화롭게 만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온유의 힘

우리가 온유해지려는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사회의 안정을 위해서? 우리의 도덕적 품성을 높이기 위해서? 아니면 온유함으로 내 마음에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 아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온유해진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온유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온유해지려합니다. 내 안에 계신 성령께서는 온유의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도 그 분을 닮아 온유하려 합니다. 내가 신앙 연륜이 쌓이고 기도하고 예배하는 시간은 많아지는데 내 마음에는 온유대신 분노가 더 많아지고 있다면 우리는 잘못된 길에 서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자신을 바라보고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의 영인 분노의 영이 우리 안에 들어옵니다. 자신의 신념에 의지하는 자도 이 분노의 영을 피할 수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신념에 의지하다 분노에 사로잡힌 자들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온유한 사람이 되고 싶다면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참으로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자는 온유의 영이 우리 안에 들어오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온유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온유함의 절정인 저 골고다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온유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살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그 은혜를 생각하면 다른 사람에 대하여 분노와 폭력으로 대할 수 없습니다. 내가 그 앞에서 철저히 연약함을 경험했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이 무능하다고 판단하고 무시할 수 없습니다. 온유함의 은혜를 많이 맛본 사람만이 다른 사람에게 온유할 수 있습니다.

온유는 율법이나 윤리가 아닙니다. 온유는 사랑입니다. 아기를 안고 있거나 어린 아이를 기르는 어머니는 온유합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아이의 눈높이에 자신을 낮추고, 자기의 힘을 함부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이것이 온유의 출발입니다.

또한 우리는 온유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온유의 길이 옳고 결국은 승리하는 길임을 분명히 확신해야 합니다. 온유는 보기에는 약하지만 힘이 있습니다. 강한 것은 겉보기에 강해보이지만 곧 부러지고 맙니다. 자연의 모습을 보면 그렇습니다. 살아 있는 것은 모두 온유합니다. 부드럽습니다. 나무도 살아 있는 것이 유연하고 물도 많습니다. 그러나 죽은 나무는 딱딱합니다. 사람 몸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리고 한창 성장기에 있을수록 부드럽지, 나이 들면 굳습니다, 죽은 시체는 나무토막처럼 딱딱합니다. 온유하다는 것은 살아 있는 모든 것의 특성이요, 굳고 강한 것은 죽은 것들의 특성입니다.

노자의 일화입니다. 노자는 그의 스승의 죽음이 가까워지자 스승을 찾아갔습니다. 노자를 본 스승이 자기 입을 벌리며 이렇게 묻습니다.
“내 혀는 그대로 있느냐?”
“네 그대로 있습니다.” 하고 노자가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나의 이빨은 어떠하느냐?” 스승이 물었습니다.
“없습니다.”
“너는 그 이유를 알겠느냐?”
노자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혀가 아직 붙어 있는 것은 그것이 부드럽기 때문이며, 치아가 빠지고 없는 것은 그것이 너무 단단하기 때문입니다.”
스승은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렇다. 이 세상의 모든 이치가 바로 이러하다.”

온유한 자가 사람을 얻습니다. 군대에서 소대장급이 가져야 될 가장 필요한 품성은 용기입니다. 그들은 용장이 되어야 합니다. 영관급이 가져야 할 것은 지혜입니다. 그들의 목표는 지장이 되는 것입니다. 전략을 잘 짜야 합니다. 그러나 장군이 가져야 될 것은 덕입니다. 덕장이 되어야 많은 사람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젊은 시절에 똑똑하다는 말을 들으면 좋은 칭찬입니다. 그러나 만약 나이 들어서도 똑똑하다는 말을 듣는다면 그것은 욕입니다. 나이 들어서는 덕이 있어야 합니다. ‘똑똑’한 사람이 아니라 ‘덕덕’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이 모입니다. 바로 온유한 사람이 받게 되는 축복입니다.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한다

주님은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세상에서 바보 같고 빼앗기기만 하는 사람이 어떻게 땅을 자치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온유한 사람과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온유한 자의 권리를 보호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온유하지만 하나님의 능하신 손에서 온유합니다. 우리가 이런 믿음이 없다면 우리는 결코 온유하기 힘들 것입니다.

구약의 모세가 바로 이런 온유한 사람의 대표입니다. 민수기 12장 3절에서 말씀합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는 이유는 민수기 12장에서 모세의 작은 흠을 가지고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했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구스 여인을 취했습니다. 이 일이 아내 십보라가 죽은 이후에 일어난 일인지 아니면 정말 모세가 잘못한 일인지 우리는 확인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이 기회를 이용해서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의 권위에 도전합니다. 이런 비방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온유하게 참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며 하나님은 모세가 온유하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가 온유함으로 참자 대신 하나님께서 모세를 위해서 일하시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미리암과 아론을 불러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아니하며 그는 또 여호와의 형상을 보겠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모세 비방하기를 두려워 아니하느냐”(민12:8) 모세는 여호와의 충성스러운 종으로 하나님을 대면하여 볼 정도로 하나님이 인정하시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에 대한 벌로 미리암이 문둥병에 걸리게 합니다. 그런데 온유한 사람 모세는 이 때도 자기를 험담한 미리암을 위해 고쳐주시길 부르짖어 기도합니다. 이 덕분에 미리암은 문둥병에서 용서를 받습니다. 하나님 앞에 온유한 자는 하나님께서 지켜주십니다. 온유한 자를 건드는 것은 곧 하나님을 건드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이처럼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서 겸손함과 온유함을 행합니다.

오늘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차지할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창세기 이삭의 삶에서 정확히 실현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고, 야곱은 야망의 사람이며 열두 지파의 아버지였습니다. 반면에 이삭은 별 뚜렷한 신앙적 특징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삭을 대충 온유한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실제 이삭은 분노할 줄 모르고 묵묵히 순종만하는 온유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으로 자신을 번제물로 바치려고 데리고 갈 때 그는 묵묵히 나무를 등에 지고 올라갔던 사람입니다. 자기 아내 리브가도 자신이 힘으로 구한 배필이 아니라 아버지 아브라함이 그 종을 통해서 짝지어 준 배필이었습니다. 가정을 이루고서는 이번에는 그 인생을 아내 리브가의 손에 휘둘렸습니다. 노년에는 두 아들 야곱과 에서의 싸움으로 곤욕을 치렀습니다. 이삭의 인생은 이삭 자신이 주도적이 되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이 그의 인생을 좌우하는 참으로 무기력한 인생이었습니다.

창세기 26장은 이삭의 이러한 온유한 성품이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바로 우물을 빼앗기는 사건입니다. 이삭이 우물을 파는 곳마다 그 곳에 사는 목자들이 그 우물을 빼앗고 우물을 흙으로 막습니다. 그래서 이삭은 블레셋 → 에섹 → 싯나 → 르호봇에 이르기까지 네 번이나 우물을 팝니다. 어떻게 보면 정말 무력하고 바보 같은 인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온유한 사람 이삭을 축복하셨습니다. 창세기 26장 12-14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 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노복이 심히 많으므로 블레셋 사람이 그를 시기하여” 불레셋 사람이 시기할 정도로 거부가 되었습니다. 블레셋의 왕 아비멜렉은 “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니라”(창26:29)고 평가할 정도였습니다.

만약 우리의 온유가 내 자신만을 의지하는 온유라면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온유는 하나님 안에 있는 온유입니다. 이삭은 사람들보기에 온유하고 바보 같은 사람 같았지만 아닙니다. 그들이 못 본 것은 그 온유한 사람 이삭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의 손이었습니다. 이삭은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거부가 되고 땅을 기업으로 차지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삭처럼 복의 근원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이 땅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라고 주기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요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제자들이 이 땅을 다스리시길 원하십니다. 그러나 그 다스림은 온유함의 다스림입니다. 그러할 때만이 평화가 있습니다. 그러할 때만이 모든 사람이 행복할 수 있습니다. 세상은 강하고 거만한 자들이 자신의 폭력으로 세상을 다스리기에 평화가 없습니다. 착취와 이에 대한 폭력만이 반복되는 악순환이 있을 뿐입니다.

골고다 언덕에서 시작된 온유한 자, 예수님의 땅은 처음에는 자기 시신을 누이기에도 부족한 한 평도 되지 않는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몇 세기를 지나지 않아 온유하셨던 예수님은 전 로마를 차지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땅 끝을 향하여 그 영역이 확대되어 가고 있습니다. 마침내 주께서 재림하실 때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온유한 자이신 예수님의 땅이 될 것입니다. 그 땅은 주님을 신뢰함으로, 주님의 말씀을 좇아 온유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의 땅이 될 것입니다. 결국 시이저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승리했습니다. 십자가는 칼보다 강했습니다. 무력한 것이 강력한 것보다 더 세고, 도살된 양이 사자보다 강했습니다. 온유함은 결코 약하지 않습니다. 온유함으로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