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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말도 안되는 것을 어떻게 하라고? (눅 6:2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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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도 안되는 것을 어떻게 하라고? (눅 6:27~38)

일번 상식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누구나가 보편적으로 아는 지식이나 생각이 일반 상식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때로는 일반 상식으로 이해가 안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오늘 봉독한 성경 말씀이 대표적인 문장입니다.
1)원수를 사랑하라
2)너를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라
3)비판치 말라
4)용서하라
5)조건없이 주라 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말도 안되는 명령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말도 안되는 명령을 왜 하실까요? 왜 하나님은 말도 안되는 명령을 하셨을까요?
여기에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적어도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세상 사람과 달라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 천국이 있음을 믿습니까? 예수를 믿어 구원받은 백성임을 믿습니까?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고 믿는 백성이라면 분명 달라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무엇이 달라야 할까요? 오늘 현대사회에서 이 말씀처럼 산다면 어찌될까요?
그대로 실천하기도 어렵지만 만약에 그대로 산다면 ‘바보’라는 소리를 듣게 될 것입니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닙니다.
엄밀히 말하면 이 세상에서는 살아남기 어렵습니다. 이 명령대로 살면 ‘거지’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오늘 주신 말씀을 문자대로 적용하려면 도저히 살수 없는 세대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잘못되신 분입니까? 우리 주님은 현실에 맞지도 안는 말로 우리를 힘들게 하시는 분이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정말 말도 안되는 명령이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은 우리가 이 말씀대로 살게 되어야 참된 복을 누리며 살 수 있기에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말씀의 근본적인 뜻을 생각하고 이 말씀을 어떻게 우리 삶속에 지켜 나갈까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이 성숙한 성도의 자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행할 수 있을까요?

1. 사람을 대하는 시각을 바꾸어야 합니다.(27~28)

어느 교회에서 꼬마 둘이 교회마당에서 싸우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목사님이 그들을 불러서 야단을 쳤습니다. “야 이놈들아! 너희는 성경에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을 못 들었냐?” “서로 사랑하거라.” 타일렀답니다. 그러자 그 아이들이 목사님을 판히 쳐다보더니 “목사님! 얘는요, 원수가 아니고요 내 친구에요.” 하더랍니다.

성도 여러분! 원수가 뭡니까?
원수란 “원한이 맺힐 정도로 해를 끼쳐 아주 미워하는 사람”을 원수라 합니다. 그러데 왜 예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실까요?
그것은 우리 성도가 세상에서 살아갈 때에 필연 원수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원수는 생길 수는 있으나 그들을 원수로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은 원수가 원수로 보이지 않아야 가능합니다.
용서했다고 하면서도 그냥 원수로 남아 있다면 그것은 엄밀히 용서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는 원수가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에 세우신 교회 공동체는 사랑의 공동체요, 한 몸 공동체입니다. 그러기에 교회 안에서는 원수가 없습니다. 아니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왜 교회 안에서 원수가 생기는 것일까요? 교우를 바라보는 시각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성도는 남이 아닙니다. 교회 성도를 나와 상관이 없다는 시각은 잘못된 시각입니다. 저 성도와 나는 한 몸 공동체를 이루는 동지이며 내 몸이라고 믿어야합니다. 그리고 저 사람이 잘되고 저 사람이 복을 누리는 것이 내가 잘 되는 것임을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리석게도 그것에 시기 질투하고 경쟁관계를 만들어 냅니다. 그 원인이 탐심입니다. 그 탐심이 나로 하여금 사람을 보는 시각을 변질시킵니다.
그래서 동지를 원수로 여기게 합니다. 친구를 경쟁자로 여기게 합니다. 그러나 그런 성도는 미성숙한 성도입니다. 그런 성도는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습니다.

성숙한 성도는 사람을 대하는 시각이 바뀌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은 내게 복의 통로로 주신 하나님의 선물임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내게 복을 주실 때 사람을 통해 복을 주심을 잊지 마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기에 내 주변의 모든 사람은 네게 복을 전달해 줄 하나님의 통로임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시각이 잘못되어 그들을 원수로 잘못 판단합니다. 그래서 그 원수들이 내 것을 빼앗고 내 것을 도적질하고 나를 괴롭히며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으로 본다면 그것은 참으로 엄청난 비극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복을 주시려고 붙여 주셨는데 나는 그 사람을 원수로 여긴다면 누구 책임입니까? 
제거 어릴적 이웃집 아주머니는 남편에게도 웬수, 자식들에게도 웬수라고 부르며 온갖 욕을 다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원수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복의 통로로 주셨는데 원수로 여기면 안됩니다.
옆 사람에게 말합시다. 당신은 하나님이 내게 주신 복의 통로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이 제게 주신 복의 통로입니다. 아멘?

그러기에 원수가 있습니까? 시각을 바꾸어 동역자로 여기고 사랑하시기를 바랍니다. 혹 미워하는 사람이 있었습니까? 시각을 바꾸어 좋아하시고 선대하시기를 바랍니다.
27~28절을 다시 보세요.
27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28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하나님은 우리 성도가 세상 사람과 다른 시각을 갖고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그것은 쉽지 않습니다. 시각의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사람을 대하는 시각의 변화, 이것이 나를 복되게 합니다. 제가 성경에서 제일 좋아 하는 인물이 요셉입니다. 그래서 제 선교지 이름이 최요셉입니다.
요셉이 형들을 어떻게 대했습니까?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미워해 노예로 팔았습니다. 원래는 죽이려 했습니다.
왜요? 아버지가 요셉만 사랑한다는 시기질투 때문입니다. 그 시기질투 때문에 요셉은 어린나이에 애굽에 노예로 팔려 이루 말로 표현키 어려운 고생을 했습니다. 그가 어릴 적이 요셉의 엄마는 동생을 낳고는 산후 후유증으로 죽었습니다. 그러니 아버지가 그를 좀 유별나게 챙겼습니다. 아버지에게 한명의 부인 2명의 첩들이 있었으나 어린 요셉을 제대로 돌봐 주었겠습니까? 그러다 보니 아버지가 유별나게 사랑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형들은 그런 것을 이해 못하고 성년이 되어서도 요셉을 못살게 대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요셉에게는 얼마나 큰 원한이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정작 원수를 갚을 능력이 되었는데 복수를 하지 않습니다.
왜요? 그들을 대하는 시각이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를 들어 쓰시는 것입니다. 어쩌면 요셉은 노예로 팔리는 그 순간부터 형들에게 복수할 마음이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면 만약 복수를 품었다면 하나님이 그를 높이 세우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형들을 만나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창45:5을 보세요.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8절도 보세요.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땅의 치리자로 삼으셨나이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도 이 말씀을 명심해야 합니다.
사람의 시각에서 얼마든지 복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섭리를 본 것입니다. 그러니 원수를 미워할 수 없습니다.
아니 원수가 원수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니 복수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기독교인에게는 엄밀히 말하자면 원수가 없는 것입니다.


2. 재물에 대한 가치관을 바꾸어야 합니다.(29~30)

성도가 이 세상에서 믿음으로 살기에 가장 힘든 문제 중 하나가 사람관계요  그에 못지않게 더 중요한 문제는 물질문제입니다. 물질에 대한 가치관이 바뀌지 않으면 신앙생활이 너무 어렵습니다.
재물이 뭡니까? 왜 사람들이 재물을 하나님처럼 사랑하고 그 재물에 목숨을 걸고 있는 것일까요? 돈으로 표현할 수 있는 재물, 이것에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돈은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돈이 갖고 있는 능력, 힘, 이것이 엄청나기에 사람들은 이것을 갖고 있으면 모든 것을 소유할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대인은 말은 그렇게 하지 않지만 “돈은 전능하다”고 믿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을 잊고 삽니다. 돈은 엄청난 힘을 갖고 있지만 전능하지는 못합니다. 돈이 갖고 있는 힘은 재물을 소유하려는 인간의 탐심의 힘입니다. 그러기에 이 탐심과 욕심이 해결되면 재물을 바라보는 시각은 바뀌게 되고 결국 새로운 가치관을 갖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돈 자체가 악이 아닙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악의 뿌리라고 말을 하셨습니다. 돈 사랑, 그것이 지나치면 그것이 탐심과 탐욕으로 발전합니다.

어느 책을 보니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사탄이 열개의 병을 들고 한 청년을 찾아와서 여기 아홉 개의 병에는 꿀물이 들어 있고 한개의 병에는 독약이 들어있는데 꿀이 들어있는 병을 찾아 마시면 1년동안 마음껏 쓸수 있는 엄청난 액수의 돈을 주겠다고 제안했습니다.
처음 청년은 돈이 아무리 좋다해도 생명과 바꿀 수 없다고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계속 유혹하는 사탄의 간청에 청년은 `열 병중에 딱 한병인데...'하며 떨리는 손으로 병 하나를 골라 마셨습니다.

다행히 죽지 않고 살아난 청년은 돈을 받으며 다시는 자기를 찾아오지 말라고 사탄에게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사탄은 이번에는 아홉 개중 하나를 마시면 5년 동안 쓸 수 있는 돈을 주겠다고 제안했습니다. 이렇게 청년은 쉽게 번 돈으로 방탕했습니다. 급기야 알콜, 마약중독 등 허물어져 가는 생활 속에 계속 사탄을 불러대기 바쁘게 되었습니다. 두려움마저 사라졌습니다.

이제 남은 두 병을 앞에 두고 `돈 벼락이냐, 죽음이냐'하며 마지막 인생의 승부를 거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미 나이가 들어 노년에 이른 그는 마지막 병을 식은  땀을 흘리며 꿀꺽 삼켰습니다.
“아! 나는 이겼어. 끝까지 살아나고야 말았어! 이제 어서 돈을 내놔라.”
승리에 도취되어 어쩔줄 모르는 노인에게 사탄은 마지막 병을 스스로 마시면서
“후후, 처음부터 독약이 든 병은 없었지롱, 그러나 너는 이미 돈이라는 독약에 죽어가고 있었지롱! 너는 청춘을 돈이란 종이에 얽매어 살다가 영원한 것을 잃어 버렸단다. 이제까지 받은 돈의 댓가를 지금부터 내가 있는 곳으로 와서 고통과 함께 지불해야 할 것이다.” 하며 떠났답니다.

돈은 아주 좋은 종이 되기도 하지만 아주 나쁜 주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또 돈이 말하기 시작하면 진리는 침묵하게 됩니다. 사람이 돈을 시간보다 소중히 여기면 그 때문에 잃어버린 시간은 돈으로 살 수 없다는 것을 망각하고 삽니다. 결국 그 탐심과 탐욕이 사람을 타락시키고 사람에게 엄청난 고통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나누어 주고 베푸는 것을 왜 못할까요? 재물을 나누어 주고 베풀어 주는 것을 “힘을 잃는 행위”가 된다고 믿는 것입니다. 돈은 우리의 힘이 담긴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 힘을 얻게 하신 하나님의 의도를 알아야 합니다.
신명기 8:18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내 능력과 내 힘으로 이 재물을 얻었다고 착각한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재물을 얻을 능력을 주셨을까요? 
그것으로 힘을 삼고 소유하고 있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 힘을 다른 사람에게 베풀고 나누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욱 넘치도록 베풀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말을 믿지 못합니다.
왜냐면 재물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갖고 있는 이 모든 재물과 재산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믿습니까?
그런데 왜 그분이 그 재물을 맡겨 주셨을까를 생각지 않는 것일까요?
재물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그 하나님이 목적이 있으시기에 우리에게 맡겨 주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 목적에 맞지 않게 사용하면 그것이 복이 아닙니다.
그것은 무서운 책임을 져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에서 주님이 보여주는 것은 거지도 천국 갈수 있고 부자도 지옥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소유의 다소가 천국과 지옥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 한가지 아주 중요한 것은 왜 부자는 그토록 중한 고통을 겪는 것일까요? 그가 자기 집 앞에 누워 있던 거지에게 재물을 사용하지 않는 죄에 대한 심판이라는 것이 그 해석입니다.

오늘 본문 29~31절을 보세요.
29 네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 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금하지 말라 30 무릇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지 말며 31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성도 여러분!
부자십니까? 소유하신 것이 남보다 많습니까? 그러면 감사하시고 그에 합당한 행함을 요구하시는 줄 깨닫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많이 맡은 자에게 더 많은 충성을 원하십니다.


3. 조건없이 베풀어야 합니다.

32~35절을 보세요.
32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느니라
33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를 선대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
34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빌리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의수히 받고자 하여 죄인에게 빌리느니라

한마디로 나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고 내게 선대하는 자를 선대하면 세상 사람들과 다른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을 베풀고 나눔에 있어서 세상 사람과 똑같다면 우리 성도는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한 차원 다른 가치관을 가져야 합니다. 다른 말로 성숙한 가치관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뭘까요?

36절입니다.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 같이 너희도 자비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힘입어야 합니다.
사람을 대할 때도, 그리고 재물을 사용할 때도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그것으로 사람을 향해 긍휼을 베풀어야 합니다. 그것으로 손을 펴고 나누어야 합니다. 여기에 조건이 필요 없습니다.

35절을 보세요.
35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로우시니라.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대하신 자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죄인을 조건없이 선대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구원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우리도 그리해야 한단 말입니다.
공짜를 좋아하시죠? 값없이 베푸신 은혜, 그것이 공짜입니다. 그처럼 우리도 받은 은혜를 공짜로 베풀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자꾸 조건을 제시합니다.
열심히 공부하면... 장학금 주겠다. 이자를 얼마 주면 빌려주겠다....
주님은 뭐라 하십니까?
31절을 보세요.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그리하면 하나님은 엄청난 상을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어떤 상입니까? 35절 중반을 보세요.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로우시니라.
1)“너희의 상이 클 것이다.” 라고 약속합니다. 그리고
2)“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저는 내일 우리 교회가 파송한 인도에 양 선교사에게 갑니다. 양선교사가 세운 샤론 목회 대학원이 3월 4일 1회 졸업생을 배출합니다. 졸업식 제가 초청을 받아 설교하게 됩니다. 저는 개척 초기에 하나님께 서원한 기도가 있습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복음을 전해 달라하면 어디든지 가겠나이다. 단 조건은 돈문제가 해결 되어야 하고 선약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양선교사가 꼭 와서 설교를 해달라기에 돈이 해결되면 간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돈이 해결이 안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대한항공에서 이메일이 왔는데 마일리지가 6만 마일이 넘었는데 올해부터는 안쓰면 없어진답니다. 그때 “이거다. 마일리지로 가자” 전화로 문의 해보니 인도 뭄바이가 5만 마일에 간답니다. 그래서 가게 되었습니다.
왜 거길 갑니까? 복음을 전하는 일이라면 아낌없이 주어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값없이 주셨듯이 우리도 값없이 주어야 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말도 안 되는 것을 어떻게 하라고 명령하실까요? 참 힘들고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힘들고 어렵기에 그것으로 우리의 믿음을 보시겠다는 것입니다.
쉽고 간단한 문제라면 누가 못하겠습니까? 말도 안되는 명령이고 도저히 행하기 어려운 명령이기에 오히려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람을 대하는 시각이 바뀌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재물에 대한가치관이 바뀌기를 축원합니다.
조건없이 자비를 베푸신 주님처럼 우리도 한차원 성숙한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저녁예배 때는 성도가 체험하는 돈의 신비에 대해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여러 가지 약속을 하십니다. 특히 돈에 신비를 약속 하십니다. 함께 은혜를 나누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힘들고 어렵기에 하나님이 보고 계시고 헤아리고 계심을 알아야 합니다.
말도 안 된다고 포기하지 마시고 실천하여 복을 누리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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