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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인격의 은사(4) (행 6: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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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격의 은사(4) (행 6:8-15)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
          하여 사람들을 매수하여 말하게 하되 이 사람이 모독하는
          말을 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고 ...

은혜를 “카리스”(Karis)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결과를 나타내는 헬라어 접미사로 끝에 “마“를 붙여서 ”카리스마“(Karisma) 하면 은사라는 말이 됩니다. 은혜는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주시는 선물이라면 은사는 사역을 효과 있게 수행하기 위해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교회를 건강하게 이루고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서 성도들에게 각각의 은사를 주십니다. 그 은사에도 종류가 있습니다. 은사에는 능력의 은사가 있고 사역의 은사가 있고 인격의 은사도 있습니다. 인격의 은사는 다음과 같은 것들입니다.

지혜의 은사

본문을 보면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하니 능히 대답하지 못하였다”고 했습니다. 스데반은 유대인들로부터 전도하는 길에서 많은 핍박과 방해를 받았습니다. 그때마다 스데반은 지혜롭게 대답하였습니다. 그 대답에 아무도 대답을 하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그 지혜로운 대답은 성령이 함께 하신 지혜의 대답이었습니다. 성령이 함께 하시는 지혜를 누가 당할 수 있습니까. 전도자들에게는 이런 은혜가 따랐습니다. 베드로가 전도를 하면서 얼마나 대담하게 예수님의 일대기를 전합니까.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에서 부활까지 자신 있게 전합니다. 그러니까 반론은커녕 수만 명씩 회개하고 결신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베드로의 언변 때문이 아닙니다. 그날 베드로에게 성령이 함께 하셨고 지혜의 은사를 통해서 전달되었기 때문입니다.

지혜도 땅이 주는 지혜가 있고 성령이 주는 지혜가 있습니다. 땅이 주는 지혜는 꾀에 불과하고 술수에 가까운 지혜입니다. 얄팍한 재주에 불과한 지혜입니다. 그러기에 세상이 주는 지혜는 자기를 위해서, 자기 이익을 위해서만 사용되는 극히 제한된 지혜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하늘이 주는 지혜와 성령이 주는 지혜는 살리는 지혜이고 덕을 쌓는 지혜입니다. 솔로몬이 죽은 아이를 엎고 온 두 여인을 재판할 때 지혜롭게 판결했습니다. 그 판결은 너무나 절묘한 지혜에서 나온 판결이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과 이방인들이 솔로몬을 두려워했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지혜가 하늘로부터 온 지혜였고 성령이 주신 지혜였기 때문입니다.

탈무드에 보면 그런 재판이 또 나옵니다. 몸이 하나이고 머리가 둘인 기형아가 태어났습니다. 그것을 두고 사람들이 이 아이가 한사람이냐 두 사람이냐를 놓고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사람들이 그 문제를 가지고 랍비에게 찾아왔습니다. 그때 랍비가 대답합니다. “막대기로 그 아이의 머리를 때려 보라, 아이 둘 다 아파하면 한 사람이고 한 아이는 울고 또 한 아이는 웃고 있다면 두 사람이다“. 이것이 하늘이 주는 지혜입니다. 그 대답에 부연설명이 필요 없고 이유가 없습니다. 

고전14장20절에서는 “지혜에는 어린 아이가 되지 말라”고 했습니다. 고전 12장8절에서는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지혜의 말씀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엡1장17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너희는 뱀같이 지혜로우라"(마10장16절)고 하셨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힘으로 이기며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지혜로 이기고 시험을 극복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사회생활에서 지혜로워야 하고 그 지혜로 인정받고 살아가고 하나님께 영광되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지혜의 은사를 받아야 합니다. 스데반이 그 지혜의 힘으로 가는 곳 마다 승리하게 전도하였습니다. 그 지혜는 성령이 주시는 은혜이고 자본이고 힘입니다. 그래서 은사 중에 지혜의 은사가 있습니다. 이 지혜의 은사는 인격의 은사입니다.

지식의 은사

  고전12장8절을 보면 “어떤 이에게는 지혜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지식의 말씀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지식의 은사가 주어집니다. 성경을 깊이 연구하여 숨겨진 진리를 발견해서 세상에 밝혀내는 것은 분명 지식의 은사입니다. 신학자들을 보면 이 은사가 주어졌습니다. 성경을 깊이 연구하여 발견한 진리를 세상에 알려 줍니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깊이 있게 이해하고 알고 분별하고 깨닫게 됩니다. 이 일은 아무나 연구 없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지식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깊이 알게 하는 지식이 있습니다. 그 지식이 위로부터 주어진 지식입니다. 그런가 하면 하나님이 없음을 증명하려는 지식도 있습니다. 그 지식은 아래로부터 주어진 지식(야3장15절)입니다. 오늘은 지식을 만용스럽게 사용하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그 지식들이 너무 드라이 합니다. 너무 인간적입니다. 인간의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지식인들이 많습니다. 그 결과 그 글 속에는 영감이 없습니다. 혼이 없습니다. 그래서 읽은 후에는 허무만 남습니다. 읽을수록 정신이 더 메말라집니다. 책이라고 해서 다 양식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의 영혼을 좀먹는 책들도 많습니다. 세계적인 지식인들은 지식을 자랑하다가 스스로 무신론자의 길을 걷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식인들은 유신론자가 되면 유치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지성인이라고 자부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무신론자의 말을 하고 무신론자를 자처하는 글을 쓰기도 합니다. 그럼으로써 자신이 지성인이라고 것을 나타내려고 합니다. 그런 지식이 모두 아래로부터 주어진 지식의 한계입니다.

그런데 지식에는 생명을 살리는 영감이 들어있는 지식이 있습니다. 그 지식이 위로부터 주어진 지식입니다. 그래서 그 글속에 사람들에게 바른 길을 제시하는 힘이 들어있고 삶을 회복시키는 힘과 생명을 부여하는 지식의 능력이 들어 있습니다. 그 지식이 위로부터 성령이 주시는 지식이기 때문입니다. 내 지식이라고 함부로 사용하거나 자랑하면 안 됩니다. 지식에는 사람을 살리고 죽이는 힘과 능력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지식도 하늘이 주는 지식이 있고 땅이 주는 지식도 있습니다. 사람을 회복시키고 변화시키고 살려내는 힘을 가진 지식은 그 지식이 사용될 때 값을 발휘하게 되고 힘을 발휘하게 도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식에도 세상을 변화시키고 갱신시키는 생명력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이같이 변화시키고 회복시키는 생명력을 지닌 지식이 성령이 주시는 지식의 은사인 것입니다.

긍휼의 은사

롬12장8절을 보면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하라”고 했습니다. 긍휼 즉 Eleos는 동정심이 특출한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긍휼의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이 죄를 짓되 수없이 지어도 언제나 찾아오면 용서하십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무한대의 용서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했습니다. 그 마음이 긍휼의 마음입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 사랑하는 마음, 따뜻한 마음, 위로하는 마음, 중보 하는 마음이 모두 성령이 주시는 긍휼의 마음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긍휼의 은사를 받아야 합니다. 중보기도 하는 마음도 긍휼의 마음일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눈물로 기도하는 그 마음도 긍휼의 마음입니다. 어떤 문제나 고통을 지닌 사람에게 뜨거운 동정심을 느끼는 마음도 긍휼의 마음입니다. 그 마음이 또한 자비의 마음입니다. 긍휼은 곧 자비를 말합니다. 바울서신을 보면 바울은 유일하게 자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긍휼은 사람이 베푼 자비를 말합니다. 병든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환란 중에 있는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무력한 사람을 도우려는 마음, 노약자를 돌보려는 마음이 모두 성령이 주시는 자비의 마음이고 긍휼의 마음입니다.

그런 사람은 언제나 눈에 눈물이 있습니다. 언제나 마음과 가슴이 뜨겁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불쌍한 사람들 이야기만 해도 눈물이 흐릅니다. 그런 사람은 TV 연속극만 보아도 눈물이 흐릅니다. 그 마음에 긍휼의 마음이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TV를 보다가 눈물을 흘리는 사람 그 사람은 유치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은 그 마음에 이 긍휼의 마음이 충만합니다. 눈물을 많이 흘리십시오. 남 몰래 흘리지 말고 창피하고 유치하다고 생각하지 말고 펑펑 흘리십시오. 할 수 있으면 통곡이라도 하면서 흘려보십시오. 그 마음에 얼마나 긍휼의 마음이 풍성하면 눈물을 펑펑 흘리고 통곡하면서 보겠습니까. 그런 사람치고 악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 마음이 성령이 주시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불쌍한 사람들을 보면 그냥 있을 수가 없습니다. 좇아가서 돕고 함께 하고 나눕니다. 긍휼의 은사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런 마음을 갖게 합니다. 그 마음이 성령이 주시는 마음입니다. 이 은사가 없는 사람은 그런 사람들을 만나면 우선 귀찮아집니다. 그래서 피하게 됩니다.

TV를 볼 때 눈물은커녕 저건 감독이 시킨 거야 하고 피도 눈물도 없이 웃으면서 앉아 시청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문제입니다. 그 마음이 얼마나 삭막하고 메마르면 그런 모습이 나타나겠습니까. 그래서 은사가 중요한 것입니다. 나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인데 은사로 주어졌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권면의 은사

롬12장8절을 보면 “위로하는 자는 위로하는 일을 즐거움으로 하라”고 했습니다. 이 위로하는 일도 은사입니다. 어떤 분은 위로를 참 잘 하는 분이 있습니다. 사람들을 찾아가 위로하고 용기를 주는 분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위로자, 격려자, 조언자, 베푸는 능력은 모두 권면의 은사입니다.

직분 중에 권사라는 직분이 있는데 그 직분은 위로하고 권면하는 직분입니다. 성경에 보면 직분 중에 유독 권사라는 말만 없습니다. 굳이 근거를 찾는다면 롬12장8절 “위로하는 자”라는 용어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습니다. 권사는 권면하고 위로하는 직분입니다. 그래서 권사는 나이가 연륜이 있어야 하고 신앙의 연륜도 있고 덕망이 있는 분을 시키라고 했습니다. 권면하고 위로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는 권면하고 위로해 주어야 할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오늘 젊은 부부들이 부부 싸움을 하고 사네 안사네 하고 야단을 떠는 부부들이 있습니다. 참 철없는 부부들입니다. 성격이 안 맞아 못 살겠다고 말 합니다. 그것은 무지해서 그렇습니다. 누가 부부는 마음에 맞아서 산다고 말했습니까. 한배에서 태어난 형제도 쌍둥이도 내가 낳은 자식과도 마음이 맞지 않는데 남남끼리 만나 살아가는데 마음이 맞을 리가 있습니까. 부부는 마음이 맞아서 사는 관계가 아니고 맞추어 가며 살아가는 관계입니다. 오늘 부부들은 서로를 맞추려고 노력하거나 서로를 이해하려고 하는 노력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젊은 부부들 사이에 불행스러운 일들이 자꾸만 나타나는 것입니다. 서로를 깊이 알고 차이나는 성격을 맞추어가기 까지 시간이 필요하고 노력이 필요한데 그 노력이 부족한 것이 문제입니다.

옛날에는 부부사이에 할 일이 엄격하게 구분되었었습니다. 남편은 바깥사람이기 때문에 바깥일을 전담하였습니다. 아내는 안사람이라고 해서 집안의 일을 전담하였습니다. 업무가 엄격하게 구분되어 있었기 때문에 충돌이 비교적 적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이 업무가 혼동되고 구분이 없어져버렸습니다. 그것이 오늘 부부사이에 충돌이 더 심해진 원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누군가 이 갈등하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권면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것을 권사들이 하는 것입니다.

또 시부모와의 갈등이 많습니다. 이 관계는 운명적인 관계입니다. 고정된 문화를 가진 한 가정에 다른 문화 속에서 자란 새 사람이 들어오면 충돌은 불가피 합니다. 그 가정의 문화를 익히기 까지 피할 수 없는 갈등이 유발될 수밖에 없습니다. 거기다 시부모는 자기 문화에 순종하도록 성급하게 강요합니다. 오늘 새 세대 며느리들이 이를 순순히 따르며 순종할 리가 없습니다. 이 시부모와의 관계는 이렇게 운명적인 관계인데다 강요까지 주어지니까 충돌은 필연적으로 발생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네 안사네 하고 갈등이 극에 달해 마침내 이혼직전까지 몰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때 누군가 격려 자가 필요하고 권면이 필요한 것입니다. 

또 신앙의 갈등을 겪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신앙심이 얕아서 체험이 없어서 매사 흔들리는 분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런 사람 찾아가 신앙의 삶을 말하고 영적 체험의 삶을 설명하고 격려해 주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누군가 가까이 가서 설명하고 격려하고 영적인 권면이 이루어지게 되면 훨씬 문제들을 직시하게 되고 해결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그런 권면이 필요해서 세워진 직분이 권사라는 직분입니다. 생각해 보면 이 권면과 격려와 안내가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모릅니다.

어느 날 갑자기 회심한 사울이 얼마나 갈등하고 충격이 컸겠습니까. 그때 그는 어떻게 할 바를 몰랐을 것입니다. 자신이 지금까지 추구해 오던 것들과 너무 다른 길을 발견하고 나서 그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때 그에게 바나바가 찾아갔습니다. 가서 그를 격려하고 안내해주고 갈 길을 인도해 주었습니다. 사울이 그토록 반대하고 핍박하였던 사도들과의 만남에 사울은 상당히 주저하였을 것입니다. 사도들 역시 사울과의 만남이 반가웠을 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관계를 좁혀주고 해결해 준 사람이 바나바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바나바를 대표적인 안내와 권면의 은사를 가진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는 이런 은사 자들이 필요합니다. 교회에도 이런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가정에도, 직장에서도, 사회에서도 이런 은사를 가진 분들이 필요합니다. 이런 은사 자에게는 늘 사랑의 손길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를 통해서 위로를 받습니다. 늘 격려를 받게 됩니다. 신앙의 삶은 은사를 받아서 활용하는 삶입니다. 은사에는 이렇게 여러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그중 지혜의 은사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으로 반대자들이 능히 대답하지 못 하였다”고 했습니다. 지혜의 은사는 성령이 주시는 은사입니다. 스데반은 그 지혜로 당당하게 신앙을 간증하고 신앙의 길을 제시하고 부활의 예수를 전하며 복음을 확신 있게 전하였습니다. 그리니까 사람들이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듣고 누구도 능히 당하지 못했다고 하였습니다. 하늘이 주는 지혜를 누가 감당할 수 있습니까. 이것이 은사의 삶입니다. 성령께서 이런 은사를 주시는 이유는 그 은사를 통해서 사역을 감다하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은사의 삶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서 이렇게 자신 있게 살아가며 사역하도록 성령이 주시는 능력이고 은혜이고 은사입니다. (이정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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