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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세 가지 질문(롬 11:3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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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가지 질문(롬 11:34~35)

아마 겨울이 가기 싫은 것 같습니다. 3월 초입에 눈이 오네요. 쉽게 물러가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여러분, 봄에 너무 빨리 겨울옷 벗어던졌다가는 대가를 지불하게 되고, 내의를 입고 계신 분들은 8월 달까지 입을 각오를 하고 몸을 잘 보호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모두를 환영합니다. 모두가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다같이 옆 사람을 축복합시다. ‘당신 옆자리에 앉게 되어서 행복합니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에게 모사가 되었느뇨,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로마서 전반부 교리 부분을 마무리 하며 하나님의 구원십리의 오묘함을 감격 속에 찬양하던 사도는 이렇게 세 가지의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겠는가, 누가 그의 모사가 되겠는가,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는가”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질문입니다. 질문은 질문인데 질문이 아닌 것입니다. 질문을 하면서도 답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 가지의 질문은 일종의 감탄입니다. 몰라서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감탄하기 위한 질문인 것입니다. 홍해를 기적가운데 건넌 모세의 노래 가운데 출애굽기 15장 11절을 보면 “여호와여 신중에 주와 같은 자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에 영광스러우며 찬송할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 누구니이까” 하고 질문합니다. 이 역시 질문이 질문 아닙니다. 홍해바다를 건넌 모세와 이스라엘, 그 역사에 현장을 눈으로 보면서 하나님을 노래하면서 쏟아 놓는 감탄의 질문입니다. 여호와여 이 땅의 신중에 오직 주와 같은 자 누구이겠습니까 입니다.

시편78편 1절에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도 질문은 질문인데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한 질문인 것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의 현장에 있어지는 감격의 질문입니다. 그렇게도 사도가 애타하던 이스라엘과 이방인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섭리의 오묘함을 깨달으면서 있어지는 질문입니다. 내가 무엇을 해서라도 조국 이스라엘의 구원을 이루고 싶었는데 실수가 없으신 그 하나님이 구원계획을 가지고 계시고 그 구원계획을 깨달으면서 바울은 감격하는 것입니다.

그 처음 질문이 무엇이었습니까?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입니다. “주의 마음”입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이라면 마땅히 주의 마음을 헤아려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질문의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면 주의 마음을 쉬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 중에 과연 누가 주의 마음을 완벽하게 헤아려 알 수 있다고 확신할 수 있겠습니까. 나는 주의 마음을 알아, 나는 주의 뜻을 알아,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사실 위험한 사람입니다.

우리 주변에 마치 무엇이라도 물으면 여기에 하나님의 뜻을 다 헤아려 알 수 있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은 서로에게 속는 것입니다. 남보다 은혜를 받았으니, 남보다 은사를 받았으니, 남보다 공부를 많이 했으니 무엇인가 알것 같지만 아니라는 것입니다. 종종 십자가가 그려져 있는 건물에 이런 글귀를 봅니다. ‘무엇이든 상담하여 드립니다, 예언해드립니다’. 바로 이렇게 무엇이든지 답할 수 있는 것처럼 감히 말한다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점쟁이가 어느 정도 맞추듯이 저들도 어느 정도 맞추는 것 같지만 사실은 사단에게 속고 있는 것이다 그 말입니다. 예수를 빙자하여 은사를 빙자하여 말하고 있지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주의 마음을 더 깊이 헤아려 알고 싶어 합니다. 특별히 이해할 수 없는 고난과 역경에 처한 성도들이 그러합니다. 이해할 수 없는 환경이 밀려올 때 욥처럼 하나님을 향하여 묻고 싶은 것입니다. 왜죠? 목사로서 참으로 안타까울 때가 많이 있습니다.

성도들 중에 졸지에 사랑하는 가족을 하늘나라로 보내버린 성도의 질문입니다. ‘목사님 왜죠?’ 수차례 밀려오는 파도에 파도를 맞듯이 반복된 이해할 수 없는 곤경 속에 빠진 성도가 질문합니다. ‘왜죠? 어떻게 해야 하죠?’ 이런 탄식의 질문에 완전한 답을 줄 수 없다는 것이 목사의 한계요 안타까움입니다. 때로 이렇게 하면 돼, 이리 하면 돼, 정확하게 말하고 싶은데 그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성도들이 상담해 올 때 제가 그에게 안겨주고자 하는 또 하나의 노력이 무엇이냐 하면 해답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안겨주고 싶은 것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예레미야애가 3장 33절은 답합니다.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시니 본심이 아니시로다”입니다. 욥에게 허락하신 온갖 고초, 그것은 하나님의 본심이 아니었다는 것이요, 이스라엘에게 40년 광야를 방황케 하심, 그것은 하나님의 본심이 아니었다는 것이요, 요나에게 풍랑을 보내심, 역시 하나님의 본심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또 하나의 믿음을 요구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때 하나님만 믿기보다는 하나님을 믿으면서 또 하나 나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하나님의 마음을 다 헤아려 알 수는 없지만 나를 향한 그 하나님의 마음을 믿어버리니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주의 마음을 알고 사는 것이 아니라 나를 향한 주의 마음을 믿고 사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고 아브라함은 갈 바를 몰랐지만 말씀에 의지하여 갈대아 우르를 떠나는 것입니다. 사도들 또한 이것을 믿고 사나 죽으나의 사람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 이것을 믿고 노아는 120년 동안 모든 삶을 방주에 올인하는 것입니다. 나를 향한 주의 마음, 사랑입니다. 용서입니다. 긍휼히 여기심입니다. 책임져주심입니다. 무엇보다도 나를 향한 주님의 마음은 하나님의 섭리하심입니다. 개인적으로 심방을 하면서도 내안에 있는 여러 가지 전문적 지식을 가지고 심방을 받는 성도들에게 해답을 주기보다는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한가를 전하고 싶어 하는 것이 목사가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저는 심방을 하게 되면 그 예배를 드릴때 기도 후에 434장을 참 많이 합니다. 부목사님이 대표기도를 하거나 전도사님이 하거나 혹은 권사님이 하거나 기도의 말미에 ‘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늘 위로 받겠네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하리라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하시라’ 이렇게 노래하다가 시간이 좀 여유가 있으면 2절을 한 번 더 합니다. ‘나의 갈길 다가도록 예수인도하시니 어려운 일 당할 때도 족한 은혜 주시네 나는 심히 고단하고 영혼매우 갈하나 나의 앞에 반석에서 샘물 나게 하시네 나의 앞에 반석에서 샘물 나게 하시네’입니다.

또 하나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여기서 마음은 감정의 처소가 아니라 이해의 처소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마음을 누가 알았는가 할 때 이 “마음”은 하나님의 섭리하심이요, 하나님의 계획하심이요, 하나님의 뜻하시는 바입니다. 온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섭리하심, 한 나라를 향한 하나님의 섭리하심, 한 개인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우리 인간이 다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 인간의 어리석음은 처음에는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이해하지 못하다가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하나님의 섭리를 눈으로 보고 감탄하는 것입니다. 사도의 애절함이 무엇이었습니까. 이스라엘입니다. 이방인에게는  구원을 베푸시면서도 왜 이스라엘을 향하여서는 외면하시는가 였습니다. 이스라엘은 남다른 하나님의 선민이 아니었냐는 것입니다. 역사 속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아니었냐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 불리우기를 기뻐하지 않으셨는가 입니다.

그러던 바울의 마음과 눈이 열렸습니다. 하나님은 유대인을 향하여 눈을 감고 계신 것이 아니셨던 것입니다. 이방인도, 유대인도 하나님의 구원섭리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유합니다. 그리고 감격합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설명하던 구원의 논리를 접고 찬양과 경배를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입니다. 성경으로 들어가 보십시오. 많은 부분이 그러합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예수께서 왜 고난 받아야 하는가, 예수께서 왜 죽어야 하는가, 예수께서 왜 무덤에 갇혀야하는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바다를 잔잔케 하는 분이 아니던가, 그는 죽은 자를 살리는 분이 아니던가, 하늘의 열두 영 되는 천군천사를 불러 호령할 수 있는 분이 아니던가. 왜? 그 힘 있는 분이 때리면 맞고 끌고 가면 끌려가는가. 왜 죽어야 하는가. 그래 믿음이 아닌 눈으로 보면 그 십자가가 어리석어 보였습니다. 시간이 지난 뒤에 눈이 열린 사람들에게 그 십자가는 최고의 지혜였고 감격이었습니다.

모세를 보십시오. 모세라는 사람은 사역자로서 욕심을 낼만큼 모든 것이 완벽하게 다 갖추어진 사람입니다. 모세는 믿음도 있었습니다. 실력도 있었습니다. 사명도 있었습니다. 열심도 있었습니다. 건강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나이도 40이나 되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모세를 쓰시면 될 것 같습니다. 모세도 준비되었습니다. 애굽의 보좌 다 내던지고 내 백성, 포로 된 내 백성을 위하여 헌신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출발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모세를 미디안 광야로 보내 버립니다. 백성들의 아우성을 보면 하루라도 급한 것 같은데 하나님은 모세를 미디안 광야로 보내 버립니다. 모세의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어쩌면 양이나 치고 사는 의미 없는 시간들이었을 것입니다. 한 때 대단했던 사람, 한때 꿈꾸던 사람, 민족을 가슴에 품었던 그가 지금 양이나 치는 평범한 소시민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았습니다.

미디안 광야 40년은 의미 없는 시간들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에 철저하게 길들여지는 모세를 만드는 시간이 되었다고 말입니다. 광야 60만을 인도하면서 실력으로가 아니라, 단순한 열심으로가 아니라 구름기둥이 인도하고 불기둥이 인도하는 대로 오직 순종으로 사역을 감당하는 하나님의 사람 모세를 만드신 것입니다. 미디안 광야 40년의 의미는 또 하나 어디에 있습니까. 나중에 영도자가 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합니다. 그들의 숫자가 200만 정도 된다고 합니다. 성경에서는 60만입니다. 장정만 말입니다.

10가지의 재앙 속에 은혜를 입은 저들, 홍해를 건너고 마라의 쓴물을 넘어 광야생활을 하는 중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수없이 원망합니다.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원망할 때 모세는 원망하지 않습니다. 왜입니까. 물론 믿음의 차이일수도 있지만 광야가 이런 곳이다 하고 미리 경험해본사람은 모세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버려진 듯한  그 40년은 나중 사역자로서 영도자로서 사역을 감당해야 하는 40년을 하나님은 미리 계획하시고 광야를 경험시킨 것입니다. 그 험한 광야에서 이러할 때는 어떻게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는가, 이러한 환경에서는 어떻게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하는가를 하나님이 훈련시키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연습되어진 가운데 그는 영도자로서 사역을 감당하매 믿음도 믿음이지만 그런 환경에 처할 때마다 이미 연습되어졌기에 그때그때 하나님을 의지하는 영성이 그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지도자는 경험해 본 사람이 참 지도자가 됩니다.

목사 개인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목사가 되겠다고 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들을 보면서 학교를 다니고 학교를 다니고 학교를 다녀 공부만 하다가 목사가 되기보다는 직장도 좀 다녀보고 쫓겨나 보기도 하고 장사하다가 좀 망해보기도 하고 또 성공해 보기도 하고 이런 다양한 경험을 한 후에 목사가 되었으면 좋겠다 싶은 생각이 있어요. 왜요. 그 아픔을, 함께 공동체로 살아가야 할 그 성도들의 아픔을 미리 경험해 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사람들은 때론 책상 앞에서만 하는 공부가 공부인 것 같지만 삶으로 몸으로 하는 공부 하나님의 경험시키심이, 모세야 광야의 이런 환경에서는 네가 어떻게 하나님을 의지해야한다 훈련되는 것 아닙니까.

여러분은 혹시 집에서 밖으로 나오다가 눈발이 날리는 것을 보고 옷을 갈아입고 와 보신적은 없습니까. 왜요? 경험해 보았기에. 하나님께서는 미디안 광야의 40년, 사람들은 의미 없다고 말했지만 그 40년을 가장 가치 있는 시간으로 하나님은 재창조의 역사를 이루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 중에 혹시 지금 미디안 광야의 모세처럼 고난 중에 있습니까? 역경 중에 있습니까? 그 고난과 역경 중에 이해할 수 없다하여 하나님을 원망하며 짜증내며 누군가를 향하여 불평하며 그 세월을 보내노라면 여러분의 지금 고생은 쓰레기통에 들어가 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지금 그 어려운 중에 광야 중에 이러할 때는 하나님을 이렇게 바라보아야 한다, 이렇게 의지해야 한다, 잘 연습해놓으면 지금 여러분의 광야는 하나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재창조의 역사를 이루사 가장 지금 흘렸던 눈물이, 아파했던 아픔이 가장 소중한 아름다움으로 재창조의 역사를 이루게 될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주의 마음”, 하나님 섭리의 오묘함입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요셉은 자신을 죽이려하다가 노예로 팔았던 형님들을 22년 만에 만나 창세기 45장 5-8절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 이십니다”라고 말합니다. 형들이 팔았는데 형의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놀랍게도 요셉은 창세기 45장에서 눈에 보이는 이야기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형님들 앞에서 요셉은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당하게 말합니다. ‘나는 당신들에게 팔려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것입니다’. 팔려왔습니다. 그런데 팔려온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요셉은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섭리를 미리 알았는가? 아닙니다. 몰랐습니다.  지금까지는 형님들이 노예로 팔았습니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종살이를 10년 해야 했고 감옥살이를 3년 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믿었지만 보이는 것은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이랬던 요셉이 22년 만에 그동안 이해할 수 없었는데 눈에 보이지 않는 이야기 하나님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땅의 이야기가 아니라 하늘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들이 나를 판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보냈습니다. 이것은 그동안 요셉의 22년의 삶의 해답입니다. 22년 전에 꾸었던 꿈의 해답입니다. 그래서 지금의 눈물은 감격의 눈물입니다.

성도에게 있어 “주의 마음”은 아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 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나를 향한 주의 마음을 말입니다. 그리고 이 주의 마음은 감정의 처소가 아니라 이해의 처소여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 나를 향한 하나님의 섭리의 오묘함, 그렇다면 이것을 믿는 사람들의 신앙적 태도는 어떠합니까. 절대로 원망하지 않습니다. 사람에게 매인바 되어 상처받고 망가지지 않습니다. 인간적이지 않습니다.

여러분 아십니까. 예수를 잘 믿는 사람들의 특징 중에 특징이 있다면 그 언어가 가볍지 않다는 것입니다. 말하지 않습니다. 요셉은 처음에 꿈 자랑을 하다가 전혀 원하지 않는 환경 속으로 말려들어가면서 이해할 수 없는 환경이 내 앞에 펼쳐져도 그때부터 요셉은 입을 다뭅니다. 종살이 10년하며 입을 다뭅니다. 억울하게 감옥에 들어가서 ‘너 왜 감옥에 들어왔어’ 물었을텐데도 입을 다뭅니다. 왜요. 미리 말하게 되면 보이는 이야기, 사람의 이야기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안에 하나님의 섭리를, 그 마음을 믿어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 안산 빛나 교회가 벌써 19년이 되어갑니다. 19년 전에 제가 2월 28일날 서울에서 안산으로 이사와 3월 1일 날 첫 번째 예배를 드렸는데 오늘이 바로 그날입니다. 지난 19년 달려오면서 때로는 험한 고개 길을 넘어왔습니다. 쉽지 않은 과정을 거쳤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안산 빛나 교회 없어지겠다는 위기의식을 느낄 때도 종종 있었습니다. 새 성전 건축을 하겠다고 많은 돈을 지불했는데 그 돈을 가지고 도망간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게도 교회를 사랑해주고 목사를 귀히 여겨주던 형제와 자매들이 하나님 앞에 가버렸습니다. 그 모진 어려움의 과정 속에서 하나님이 저에게 은혜를 주셨던 가장 큰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 모진 과정 속에 우리 가족이 9남매인데 누구에게도 제가 그 문제로 전화한번 하지 않았습니다. ‘형 나 어려워, 누나 나 힘들어’ 전화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노회에 목사님들이 백 여 분 가까이 되지만 누구에게 전화 해본 적 없습니다. 하나님만 보고 울었습니다. 왜요. ‘유 목사 어떻게 된거야? 땅은 어떻게 된거야? 웬 사고야?’ 물으면 그 하나님의 섭리, 그 아름답게 하실 하나님의 은혜를 믿을찐대 보이는 이야기만 하게 되잖아요. 누구 때문이야, 무엇 때문이야 이렇게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성도들이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 왜 어려운 일이 더 힘든 줄 아십니까. 지금의 환경을 누구에게 설명해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더 힘이 든 것입니다. 보이는 것만 보는 사람들은 물어요. 어떻게 된 것이냐고. 완전한 답을 알 수 없는 나는 어떻게 해서든 답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사람에게 매이게 됩니다. 아세요. 힘들 때는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설명을 잘해도 그것은 정답일수 없습니다. 지금은 보이는 것만 보니까요. 사도는 감격 속에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합니다. 지나고 보니 깨닫고 보니 눈을 열어보니 이해할 수 없었던 지난날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었고 하나님의 섭리였음을 확인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지난날의 아픔이 사랑이었다, 액면 그대로가 아닙니다. 재창조의 역사를 이루시는 하나님이 지난날의 아픔정도야 더 아름답게 만들어 위대한 작품으로 우리에게 내어 놓는 것입니다.

사도는 감격 속에 두 번째 질문을 합니다.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입니다. 여기 “모사”는 충고자, 상담자를 말합니다. 누가 주를 향하여 어드바이저(adviser)나 카운슬러(counselor)가 될 수 있겠냐는 것입니다. 때로 사람들이 달나라에 다녀오고 슈퍼컴퓨터를 만들고 바다를 막아보면서 사람들 스스로 대단한줄 압니다. 사실 사람들 대단하기를 합니다. 어느 정도요? 사람이 사람을 기계로 만들겠다고 달려들 정도니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무엇이라도 연구만 좀 하면, 무엇이라도 만들 수 있고 무엇이라도 할 수 있고 논리적으로 무엇이라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어리석음의 결과로 사람들은 진화론의 울타리에 갇혀버립니다. 진화론이 제법 논리적 인 것 같지만 이것이 진리가 아님은 진화론 학자들이 인정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변해가고 이렇게 변해가고 이렇게 될 수 있다, 이것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논리입니다. 안타깝게도 그 안에서는 하나님이 배제되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경고합니다. “어리석은 자들은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여러분 솔직히 한번 답해 봅시다. 사람이 그렇게 대단합니까. 아니 사람들 말고, 여러분 스스로 한번 보십시오. 정말 큰 소리 칠만큼 여러분 스스로 대단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 안에서 무엇을 두려워하는 사람인가 한번 보세요. 여러분 안에서 어느 정도면 잠을 못자고 염려하게 되는가 한번 보세요. 여러분 안에서 무엇을 좋아하는 사람인가 한번 보세요. 사실 그것이 수준 아닙니까. 이번에 새로 시작된 이명박 정부의 장관들 청문회가 있었습니다. 장관 후보님들 사실 그분들 개인적으로 보면 아주 훌륭한 사람들입니다. 남보다 많은 것을 이룬 사람들입니다. 옷 입고 다니는 것이나 말하는 것이나 아주 고상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네 서민들 시각으로 보면 무엇인가 기름과 물처럼 우리보다 한 단계 높은 것을 좋아하며 사는 사람들 같습니다. 그러나 껍질을 벗겨보니 실컷 해야 저들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았습니다. 땅을 사랑했다고 말합니다. 무엇을 변명하고 끙끙대는 사람들인지 알았습니다. 저들을 비방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어느덧 우리는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마비된 상태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스스로 청문회 한번 해 보십시오. 한번 물어보십시오. 유재명 너는 무엇을 좋아하는 사람인가? 너는 무엇 때문에 감정조절이 안되는 사람인가? 너는 무엇 때문에 진노하는 사람인가? 그 정도가 수준 아닙니까. 여러분 무엇을 전공하셨습니까. 사람이 대단한 것 같아도 많은 사람들이 자기 발등이 찍히는 부분은 놀랍게도 자기가 제일 자신 있던 전공분야에 의해서 발등이 찍힙니다. 내가 대단한 것 같아도 여러분, 그 안에서 망가집니다. 사람이 제법 무엇인가 할 것 같습니다.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사기꾼들은 그렇게 사기를 치고 살아가는데 나중에 보면 모두 쪽박 차는 것을 보면 이상합니다. 왜요? 더 쌘 사기꾼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노름장이들 하여튼 첨단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노름하며 남을 속이며 노름하면 잘 살 것 같은데 더 쎈 노름꾼 앞에서 거지가 되고 맙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제일 쎈 사기꾼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세상에서 제일 쎈 노름꾼이 누군지 아십니까? 우리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누가 이깁니까. 못 이기지요. 어떤 분이 솔직하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하고 연구를 많이 해 보아도 내가 얼마나 아는가가 아니라 내가 얼마나 모르는가를 확인할 뿐’이라고 말입니다. 사람은 독불장군 없습니다.

사실 사람은 성장해 가는 과정 중에 삶을 엮어가는 중에 상담자, 충고자가 없이는 온전한 삶을 엮어갈 수가 없습니다. 때로는 부모가 모사가 되어주기도 하고 때로는 선생님이 모사가 되어주기도 합니다. 때로는 친구가, 배우자가 말입니다. 때로 상담자를 필요로 하기도 하지만 나도 상담을 해 줄때가 있습니다. 친구들의 질문에 후배들의 질문에 무엇인가 답할 때는 무엇인가 이룬 사람처럼 대단한 사람처럼 말을 많이 하고 있지만 한참 하다보면 나도 모르는 것을 말하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상담자의 입장에서 무엇인가 말해주지만 속으로 나를 향해서 말합니다. ‘너는? 너나 잘해’. 여러분, 인간이 살아가는 동안 많은 상담자가 필요합니다. 변호사, 의사, 세무사, 그런데 저들 중에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저들 또한 또 다른 상담자를 원합니다. 이발하시는 분들이 자기의 머리를 이발하는 분은 없다고 말해요. 그러나 진정한 모사이신 하나님의 섭리하심에는 인간에게 물어 행하실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스스로 자존자요, 전능자이기 때문입니다. 이세상에 어떤 인간이 감히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상담력이 될 수 있고 의논이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사람들은 때로 자기 생각을 가지고 고집을 피워봅니다. 바울되기 전에 사울처럼, 요나가 그러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무엇인가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 나는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라고 강력하게 하나님 앞에 말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예수님을 통해 배우는 모범이 무엇입니까?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입니다. 사실 하나님이 한 사람을 섭리하시고 한 사람을 이끌어 가시매 하나님을 향하여 조언자, 코치(coach)는 필요없습니다. 아마 이렇게 말하고 싶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하심에 나는 터치 하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개입하시듯, 요나를 개입하시듯, 양치기 목동 다윗을 개입하시듯, 하나님이 여러분을 섭리하시고 개입하실 때 여러분은 어떠하시겠습니까. 때로 나는 안돼 이렇게 말하고 싶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가끔 내가 싫어하는 곳에 보냅니다. 내가 싫어하는 사람을 만나게 하십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 여러분은 어느 정도이고 싶습니까. 한 성도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도님은 제가 보니 대강 믿어서는 안될 사람입니다’. 아마 그는 집에 가서 고민했을 것입니다. 목사님이 무엇을 보셨나, 예언하신것인가. 제가 여러분에게 솔직히 얘기하는데 예언한것은 아닙니다. 당신이 받은 은혜에, 당신이 받은 사랑에 이 정도여서는 안된다고 하는 마음을 전하고 싶은 것입니다.

사람들은 목사님이 설교하면 제법 말씀을 듣기는 듣지만 그 말씀대로 살것 같아도 다 자기가 정한대로 삽니다. 사람들은 나는 일주일에 주일날 낮에만 나와도 되는 사람, 이렇게 정하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분들은 아주 평안합니다. 밤에 안 나와도. 낮에만 정했기 때문에 낮에 안 나오면 마음이 좀 불안해도  저녁에 안 나오는건 평안합니다. 이미 결정이 났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은 주일 밤에는 나가야 하는 사람, 어떤 분은 나는 수요일, 철야도 나가야 하는 사람, 그들 중에 목사를 제일 감동시키는 사람은 어떤 분이냐 하면 한 달에 한번 나오는 사람입니다. 이분들은 목사를 사정없이 감동시킵니다. 웬일이냐고. 지난주에 나왔는데 또 나왔다 하면 이제 기절하는 것입니다. 웬일이냐고. 또 나와도 되는거냐고.

그런데 여러분 아세요. 집안에서 한 여인을 감동시키는 것은 월급 타다 주는 남편이 아니라 누워서 똥 싸고 있는 어린아이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스스로 어느 정도 정리하고 삽니까. 멀리 나가 있는 딸에게 이제 성장해가는 딸이 걱정된 우리 아내가 이렇게 전화했습니다. ‘딸 너 이제 여자잖아 몸조심해, 아무나 만나지 말고, 아무데나 가지 말고’ 그 소리를 들은 딸 이렇게 한마디로 끝냈답니다. ‘엄마 내가 목사 딸 이예요’. 그는 스스로 함부로 살아서는 안된다고 결정한 것 입니다. 누가 그의 모사가 되겠느냐. 여러분 하나님만이 진정한 모사입니다. 여러분을 향한 진정한 상담자요 충고자는 주님밖에 없습니다. 이런 말 아십니까. 우리의 신앙이 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여야지 가지에 붙어 있는 가지여서는 안된다고 말입니다. 이 말은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에게 매인 신앙이어야지 사람에게 매여서는 안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구원에 있어서도 삶에 있어서도 천하 다른 이름을 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문제 앞에서 사람을 찾아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직 하나의 이름 그 이름 예수 밖에 없습니다. 그 이름 예수만이 모든 인생의 근본 문제에 있어 해결자 되십니다.

사람에게 매이지 마십시오. 사람은 해답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여러분 사이에 습관적으로 누구를 개입시켜 그 사람에게 위로받지 마십시오. 사람에게 물어 하나님의 뜻을 찾지 말고 모르거든 잠잠히 참아 기다리십시오. 여러분 안에 주님이 계십니다. 작은 일이 있을 때마다 누군가에게 심방을 요청하여 그렇게 함께 만나 위로함으로 마음을 풀지 말고, 그 이름 예수 그분을 볼 수 있는 복된 영성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축복합니다. 사람에게는 해답이 없습니다. 땅에는 해답이 없습니다.

여러분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인간적으로 삶의 환경을 바꾸어 보십시오. 남편을 다섯 번이나 바꾸어보십시오. 그건 안됩니다. 속으로 바꾸어 보십시오. 지금 있는 남편이 마음에 안들거든, 건강이 안좋으면 운동선수 남편이면 행복할까? 탈랜트 남편이면 행복할까? 탈랜트 남편이 행복하면 그들이 그렇게 이혼을 많이 하겠습니까. 정치가 남편이면 행복할까? 바꾸어 보십시오. 안됩니다. 사람을 찾으면 찾을수록, 사람에게 매이면 매일수록 결국은 상처밖에 남지 않습니다. 왜요? 그가 나빠서가 아닙니다. 그 정도로 사람은 다 약한 것입니다. 남편도 해답이 아니고 자식도 해답이 아닙니다. 그 누구도 해답이 될 수가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에게는 오직 그 이름 예수가 해답임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 이름 예수만이 내 생애 있어 진정한 모사입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십시오. 복음성가를 보면 요즘 나오는 복음성가보다 단순하지만 옛날 복음성가가 좋은 것 같습니다. 저 어릴 적에 이 노래 밖에 몰랐습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로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로다 할렐루야’ 율동도 그거밖에 없었습니다. 지금 아이들은 그 찬송 부르면 안부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찬송 좋아하는 것 보니까 저도 나이를 먹나봅니다. 여러분 아세요. 주의 이름만이 진정한 여러분의 모사가 됩니다. 사람은 아닙니다.

사도의 세 번째 질문은 무엇이었습니까?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입니다. 이 질문의 말씀은 욥기서 35장 7절, 41장 11절에 있는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욥기서 35장 7절에 “내가 의로운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겠는가, 그가 내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겠는가”입니다. 41장 11절에 “누가 먼저 내게 주고 나로 갚게 하겠느냐, 온천하에 있는 것이 다 내 것이니라”합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성도님들 중에는 내가 기도를 드릴만큼 드렸으니, 내가 헌금을 드릴만큼 드렸으니, 내가 봉사를 할 만큼 했으니, 교회를 다닐 만큼 다녔으니 여기에 이제 하나님이 갚아 주셔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때로 교회를 다니면서 헌금도 하고 봉사를 하면서 굉장히 많이 드려진 것처럼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대단하지요. 그런데 내가 이렇게 드렸으니 이제 하나님이 갚아 주셔야 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내가 선한 일을 해서 복을 받고 내가 십일조 잘해서 장사가 잘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누가 주께 먼저 드렸습니까.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그 갚아주심으로 살아가느냐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내가 이만큼 드렸으니 하나님이 이만큼 드린 공로에 따라 하나님이 갚아주시는 것으로 내가 사는가. 안타깝게도 참 신앙은 먼저 드린 것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이미 너무 많이 받았기에 감사함으로 드려지는 것 아닌가. 사실 드려질 수 있고 드려질 수 있음은 복이 아닌가. 근본적 은혜입니다. 처음부터 은혜입니다. 그 누구도 주께 먼저 드려서 그 보상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되돌아보면 사람이 하는 일은 다 죄일 뿐입니다. 돌이켜보면 뭔가 대단한일 많이 한 것 같아도 사실 아픔이 많습니다.

저는 이번에 장관 후보들 청문회 하는 것을 보면서 혹시 이명박 대통령이 저보고 장관하라고 하면 안하려고 합니다. 자신 없더라구요. 그래서 지금 통보 할려구 합니다. 나는 시키지 말아달라구요. 부끄럽지요. 그래서 참 신앙은 주 앞에 눈을 감으면 ‘다 죄 뿐입니다’ 고백하게 됩니다. 무엇을 한 것 같지만... 우리 집 막내 아이 있는데 이 아이는 음식을 먹고 가만히 있는 것이 도와주는 것입니다. 자기가 음식 먹은 것을 치우겠다고 들고 오다가 카펫에 라면 국물을 쏟지요, 그릇을 깨지요. 심방 갔다 들어가 보면 식탁을 닦는다고 닦았는데 내가 보니까 닦은 게 아니고 다 번지게 해놓았습니다. 했다는 것입니다. 무엇인가를. 내가 이만큼 하나님 앞에 드렸으니 하나님 주셔야 하는 것 아닌가.

참 성도의 마음은 무엇입니까. 내게 있어 드려진 것은 별로 없는데 하나님이 내게 넘치게 주셨네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무엇을 심었기에 보상의 차원에서 은혜를 은총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주권적으로 은총을 주시는 분입니다. 심는 대로 거둔다, 맞습니다. 심음의 원리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100을 심어서 100을 거두는 것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작은 씨앗을 심었는데 거두는 것은 아름드리로 거둡니다. 나는 별것 심은 것 없습니다. 그런데도 여러분 심은 것이 보입니까. 수고한 것이 보이십니까. 노력한 것이 보이십니까. 아닌 것입니다. 여기서 인식해야 할 것은 하나님은 거래대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먼저 드리고 나중 받는 것이 아닙니다. 절대로 하나님은 우리의 신앙에 이용당해서는 안됩니다. 내가 이만큼 했으니 하나님께서 이만큼 주셔야 한다는 마음에 매여 있으면 어리석은 것입니다. 만약에 내가 이렇게 했더니 하나님께서 이렇게 주셔 라는 마음에 매여 있으면 두 가지 경우가 있습니다. 좀 더 여유를 누리는 사람은 교만이 자리 잡게 됩니다. 내가 이만큼 누리고 잘 사는 것은 내가 심었으니까, 내가 노력했으니까, 열심히 살았으니까. 여기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을 판단하게 됩니다. 저러니까 복을 못받지, 저러니까 노숙자가 되지 하고 판단합니다.  원해서 되는 사람이 있습니까. 보상의 차원에서 신앙을 자꾸 생각하면 별 문제없이 사는 사람은, 남보다 부유하게 사는 사람은 내가 그동안 잘살았나봐, 환경 속에서 스스로 위로받습니다. 놀라운 것이 있습니다. 기복신앙이라고 말합니다.

심어서 받고 드려서 받고 축복받기 위해서 은혜받기 위해서 사는 사람들인데, 이런 설교를 가난한 사람들이 좋아하겠습니까, 잘사는 사람들이 좋아하겠습니까. 아세요. 잘사는 사람이 훨씬 좋아합니다. 왜죠? 지금 자기들이 여유를 가지고 사는 것 자체를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 살고 있다고 착각하고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세요? 라오디게아 교회가 나는 걱정 없다 나는 이만큼 잘 산다 말해도 하나님은 한마디로 끝냅니다. 너는 아니야. 하나님의 보는 눈은 다릅니다. 여러분, 보상의 차원에서 신앙을 정리하면 힘들게 산다 싶은 사람은 마음속에 원망이 자리 잡습니다. 한쪽 마음 구석에 나도 믿을 만큼 믿었는데, 나도 기도 할 만큼 했는데, 나도 기다릴만큼 기다렸는데, 이런 사고에 왜 젖어있습니까. 왜 나도 할 만큼 했다 이렇게 생각합니까. 왜냐하면 하나님의 절대 관계 속에서 거울에 나를 비추는 것이 아니라 나보다 좀 더 여유있게 사는 사람과 비교하면서 나를 판단합니다. 그러면서 그런 생각을 합니다. ‘내가 제대로 믿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저사람 보다는 나아야 되는것 아닌가’ 이런것 말입니다.

여러분 옆에 사람을 한번 보십시오. 여러분이 볼 때 그가 잘 살아야 합니까 내가 잘 살아야 합니까. 하나님 앞에서는 바로 못 산 것은 다 인정이 됩니다. 그런데 적어도 보면 여러분 옆에 사람과 보면 누가 더 열심히 산 것 같습니까. 나 나름대로 기도하고 믿지 않았느냐, 내가 너보다는 나아야 되는 것 아닌가, 근데  왜 너는, 그리고 왜 나는. 이 가운데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의 마음이 둥지를 틉니다. 하나님이 실수 한 것 아니냐는 것입니다. ‘내가 이만큼 믿어줬는데’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옛날에 쌀가마 갖다 주고 전도했더니 몇 번 나오다가 안나와서 심방 가서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직도 더 나가 주어야 하냐고’. 내가 이만큼 믿어주었는데 내가 이만큼 헌신해 드렸는데 하나님은 내게 무엇을 주셨는가, 이것은 참신앙이 아닙니다. 혹 그리스도인에게 선행이 있다 해도 그것은 당연한 것이지 공로가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먼저 사랑해 주셨습니다. 창조적으로 사랑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주께 먼저 드려서 보상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이 땅에 아무도 없습니다.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복음적 그리스도인입니다. 복음의 은혜를 입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복음적 그리스도인에게는 원칙이 있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우리는 기도를 할 때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많은 것을 구하고 맨 마지막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하고 고백합니다. 그 고백은 도장을 찍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기도의 말씀을 하나님 앞에 드리고 난 후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는 어떤 의미가 숨겨져 있냐하면 “예수님의 자격으로 기도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으로 기도했습니다”입니다. 자격을 가지고 기도하면 기도가 아닙니다. 바리새인이 나는 십일조 했어요, 나는 구제했어요, 자격을 내밀 때 하나님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예수의 마음으로 기도합니다는 무엇입니까? 지금까지 구한 것 중에 주님의 마음에 그릇되거나 문제가 있다면 다 제하여 주시고 주님 마음에 합당한 것만 응답해 주세요 이런 마음이 담겨져 있습니다. 예수의 모습으로 기도했다, 무엇이라도 포기할 수 있고 무엇이라도 기대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기도만 그러합니까? 아닙니다. 성도의 삶이 그러해야 합니다. 성도의 삶은 예수의 이름으로 사는 삶 인줄로 믿습니다. 무엇으로 입니까? 내가 사는 것은 예수의 자격으로 사는 것이지 내 자격으로 사는 것은 아닙니다. 혹시 남보다 여유를 누리고 남보다 은혜를 입고 살아가는 분, 내가 그동안 열심히 살았으니까, 깨끗하게 살았으니까 이렇게 말하겠습니까. 여러분 보다 열심히 깨끗하게 산 사람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어려운 사람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천에 하나 만에 하나 문제있는 당신에게 은혜 베풀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제가 17년 전에 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신학교 다니는 그때 당시에 우리 동기들이 280명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17년 정도가 지났습니다. 그 280명 정도가 사역하는 중에 안타깝게도 가장 은혜를 많이 입은 사람은 여기 있는 유재명입니다. 성도들 모이는 수도 모든 것들이 제가 은혜를 다 입었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그들보다 깨끗하게 살았고 열심히 살았느냐. 아닙니다. 사실은 다 죄뿐입니다. 그래서 저는 정리하는 것입니다. 내게 있는 모든 것은 빚이지 수고한 공로가 아니라고 말입니다. 예수의 자격입니다. 예수의 마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어도 불만이 없었습니다.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합니다. 여러분, 예수의 모습입니다. 섬기면 되지 않습니까. 낮아지면 되지 않습니까. 무엇이 문제입니까.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겠느뇨,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맞습니다. 하나님, 감히 내가 어찌 주의 마음을 알리이까. 지금 고난 중에 역경중에 있다해도 감히 이 역경, 고난 속에서 어떻게 당신을 원망할 수 있겠습니까. 다 죄뿐인 나에게 이정도만 해도 내게 너무 많은 은혜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실수했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만이 저와 여러분에게 진정한 모사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기다립니다. 사람 통하지 말고 네가 나를 직접 불러라 나에게 와라 내게 손을 내밀어라. 너는 여전히 은혜로 산다.  - 아멘 -
(유재명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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